〈 199화 〉 청산(1)
* * *
대련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상황은 얼마 지나지 않아 종료되었다. 바닥에 쓰러졌던 히리야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곧바로 떠났기 때문이다.
뭘 하지도 못 하고 당해버려 쪽팔린 건지, 아니면 무슨 이유가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발걸음이 조금 급해보였다. 떠나기 전 나를 노려보는 건 덤이고.
아무튼 간에 대련이 너무 쉽게 종료되자 지켜보는 사람들도 김이 새버려 각자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몇 명이 아델리아에게 대련 신청을 했으나 그녀는 전부 거절하고 나에게로 돌아왔다.
"오래만입니다, 황태자 님. 그간 건강하셨나요?"
"그래. 그사이에 실력이 늘어난 것 같군."
"과찬이십니다."
돌아온 후에는 가장 먼저 내 곁에 앉은 레오르트에게 인사했다. 레오르트도 반갑다는 기색으로 그녀의 인사를 받아줬다.
아델리아는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인 후 나와 정확히 눈을 마주쳤다. 처음에는 우물쭈물거리다가 베시시 웃으며 수줍게 말했다.
"어때? 봤어?"
"응. 정말 멋졌어."
사실 레오르트와 이야기하느라 아델리아가 어떻게 히리야를 꺾었는지 모른다. 무슨 큰 소리가 나더니 바닥에 히리야가 쓰러져있었으니.
그런 내 거짓말도 모르는지 아델리아는 전보다 밝아진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뒷짐을 지며 고개를 살짝 숙인 것이 풋풋한 소녀 같은 청순함마저 느껴졌다.
나는 대련도 끝났겠다, 더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좋은 하루 보내도록."
"감사합니다. 누나. 가자."
"응."
땀도 흘리지 않아 샤워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남은 시간에 못 했던 운동을 마저할 생각이다.
히리야가 또 무슨 짓을 할지는 모르겠다만 당분간 아델리아에게 해를 끼치진 않을 것이다. 설령 해를 끼쳐도 몇 배로 되돌려 줄 자신이 있다.
"누나. 만약에 히리야가 누나를 따로 찾아와서 뭐라고 한다면 나한테 곧바로 알려줘. 알겠지?"
"걱정 마. 히리야도 그정도로 막무가내이진 않을테니까."
히리야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아델리아가 딱 잘라 말했다. 그렇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본래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떻게 튈지 모르는 법이다.
하물며 굴욕적이라 할만한 정도로 패배했으니 속으로 이를 갈고 있을 확률이 높다.
나는 미래를 약간 걱정하고 있다가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라 아델리아를 힐긋거렸다. 그녀에게 민감한 주제일 수도 있지만 말은 해야 할 것 같다.
"그... 누나."
"응?"
"원래 누나랑 히리야 왕녀의 실력 차가 이정도로 났어?"
"...원래는 그랬지."
그 질문에 씁쓸하게 웃는 아델리아. 그녀는 옛날 일을 생각하는 건지 쓴웃음을 유지하다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그 애는 겉으로 침착한 척하지만 은근히 다혈질이거든. 조금만 도발해도 감정 조절이 잘 안 되는 약점을 갖고 있어. 그걸 배제하더라도 나랑 실력 차가 나는 거지만..."
"히리야 왕녀한테 계속 맞은 거 아니었어?"
"그때는 내가 맞으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거든. 내가 봐준다면 서로 친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다시 나를 언니라 부르며 졸졸 따라다닐 거라고. 전부 부질없는 희망이라는 건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지만... 쉽게 놓기는 힘들었지."
말하면 말할수록 아델리아의 하늘색 눈동자에 아련함이 깃들었다. 희망은 손에 잡힐 듯 말 듯한 것이기에 희망이라 불리는 것.
아델리아도 그 희망을 붙잡기 위해 애를 썼으나 전시회 당시 산산히 조각났다. 만약 그때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분명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무너졌겠지.
차라리 내가 그녀의 희망이 되는 게 훨씬 낫다. 나는 우울해져 있는 아델리아를 달래주기 위하여 그녀를 불렀다.
"아델 누나."
"응."
"그래서 누나는 나한테 뭘 부탁하고 싶어?"
"...응?"
그 물음에 아델리아가 하늘색 눈을 깜빡거리며 멍하니 나를 쳐다본다. 처음에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벌써 잊은 거야? 누나가 이긴다면 원하는 거 들어줄 거라고 내가 말했잖아."
"아... 그, 그건..."
"아무거나 상관없으니까 부담가지지 말고 말해. 아, 물론 그렇고 그런 짓은 안 돼. 그건 마리가 허락해줘야 되는 일이거든."
"우으..."
아델리아의 얼굴이 급속도로 붉어지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간접적으로 설명했지만 그게 무엇인지 아델리아도 잘 알 것이다.
나는 그녀의 얼굴이 홍시처럼 빨개지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키득거렸다. 그 아델리아가 부끄러움을 타는 건 언제 봐도 신선하다.
상처를 숨기기 위해 웃음이 많고 털털한 성격을 가졌으나 내면은 순하디 순한 여자다. 양분을 먹고 자란 꽃이 만개하는 것처럼,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여자.
다시 말하지만, 아델리아는 결코 사랑받지 못할 인물이 아니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그 누구보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을 것이리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내가 누나한테 말한 거잖아?"
"그, 그럼..."
내가 재차 말하자 아델리아가 우물쭈물거리며 무언가 말하려는 기색을 보였다.
뒤이어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가 고개를 숙이더니 조용히 부탁을 꺼냈다.
"...고, 머리... 어줘..."
"응? 뭐라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다가 웅얼거리는 탓에 잘 들리지 않는다. 나는 얼굴을 가까이 대며 재차 물었다.
아델리아는 내가 귀를 가까이 대자 움찔하더니 이내 내가 들릴 수 있게끔 말했다.
"안아주고... 머리 쓰다듬어줘..."
"... ..."
"이정도면... 괜찮지?"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리며 소심하게 부탁하는 아델리아. 정면으로 마주치게 된 하늘색 눈동자가 물기에 젖어 초롱초롱해졌다.
아델리아는 운동을 하는 사람인만큼 니콜처럼 키가 큰 편이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급격히 성장한 바람에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는 구도다.
나는 아델리아와 기대어린 표정과 마주하며 순간 멍해졌다. 어쩜 이리 사랑스러울 수가 있을까. 평소 그녀의 행동과 비교하면 동일인물인지 의심스러웠다.
반전 매력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이게 진정한 아델리아의 본모습일지도 모른다.
스윽
"아..."
내가 아무 말 없이 두 팔로 가녀린 그녀의 몸을 껴안아주자 아델리아가 약하게 탄성을 질렀다. 어차피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 누가 볼 염려도 없다.
이어서 그녀의 갈색빛 머리카락을 소중한 공예품을 다루듯이 살살 보듬어줬다.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줄 때마다 그녀의 몸이 움찔움찔 떨린다.
"어때? 이정도면 괜찮아?"
"하으..."
일부러 목소리를 낮게 깔아 속삭여주니 그녀가 달뜬 숨소리를 내뱉었다. 여태까지 느낀 거지만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다.
그렇게 한동안 아델리아를 안고 머리를 쓰다듬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작."
"응. 말해."
"고마워. 정말로."
꽈악
안기기만 하던 아델리아가 용기를 얻었는지 나를 껴안았다. 전과 달리 점점 선을 넘으려는 듯한 행동.
그래도 완전히 선을 넘는 행위는 아니었는지라 가만히 있어줬다. 아델리아는 내가 허락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감싸안은 두 팔에 힘을 강하게 주었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어. 그래도 꼭 해야 할 것 같아."
특유의 허스키하면서도 매력적인 목소리가 내 귀를 파고든다.
"난 지금 너무 행복해. 이런 행복은 살면서 느껴본 적이 없어."
불우한 과거로부터의 청산.
"반드시 내가 널 지켜줄게."
단호한 결의. 그리고...
"사랑해. 아이작."
진심어린 고백. 그러나 당장 받아주기는 힘든 마음.
대신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듯, 그녀의 머리를 상냥하게 다듬어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됐어."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떨어졌다면.
"누나가 그런 거면 된 거야."
앞으로 밝은 미래를 그려나가면 된다.
*****
"젠장! 젠장! 젠장! 내가 그따위 반푼이에게...!!"
한편 비슷한 시간, 여학생 전용 숙소.
아델리아에게 굴욕적인 패배 이후, 히리야는 숙소에서 거센 분노를 표출하는 중이었다.
물건을 마구잡이로 집어던지기라도 했는지 깨끗했던 숙소 내부는 지저분해져 있었으며, 분을 이기지 못 해 벽에 주먹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시설을 파손시킨다면 최악의 경우, 퇴실 조치까지 내려질 수도 있었으나 그녀의 신분은 왕녀. 이정도 파손은 융퉁성 있게 넘어갈 수 있다.
"후우... 후우..."
내제된 화를 모두 표출했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는 히리야. 단정했던 머리카락이 거칠게 헝클어져 있었으며 냉철했던 미모 또한 분노로 얼룩졌다.
그럼에도 미모가 미모인지라 분노한 얼굴조차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주변에 박살난 물건들이 어지러져 있는 게 흠이었지만.
한동안 호흡을 정돈하며 뜨거운 가슴을 달래던 그녀는 침대에 털썩 앉았다.
"대체... 언제 그런 실력을..."
그녀는 조금 전, 자신이 겪었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이 검을 내려쳤을 때 아델리아가 방어한 것까지는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다음에 물 흐르듯이 이어진 동작은 히리야에게 큰 충격을 주기에도 충분하고도 남았다.
다음 공격을 예상하고 다리를 걷어차인 것까지는 어떻게든 막을 수 있었으나 그 틈을 노려 명치를 가격할 줄이야.
그녀도 그 당시 아델리아의 도발(?)에 휘둘려 감정 통제가 되지 않았다는 건 안다. 옛날부터 다혈질적인 성격을 감추기 위해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쉽지 않다.
게다가 옛날에 두들겨 팼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가뿐하게 압살했던 아델리아가 이리 성장했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 했다.
실상은 아델리아가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일부러 져준 것이지만, 히리야가 전혀 알 턱이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 성장한 거지?'
히리야는 이를 갈며 아델리아의 성장 계기를 예측했다.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아카데미에서 우연찮게 재능을 개화했다는 것.
그게 아니고서야 실력 차이가 이리 벌어질리가 없다. 허나 그런 걸 다 제쳐두고 가장 거슬리는 게 한 가지 있다.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고?'
바닥에 쓰러진 자신에게 검을 겨누고 아델리아가 당당하게 말했다. 자신은 옛날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그러는 너는 행복하냐고.
'물건'이 되지 않기 위해 기사가 되었고, 그에 걸맞는 실력까지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행복하냐는 물음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기사가 된 이유도 아델리아를 꺾기 위해서였으니. 처음에는 언니 언니하며 따랐으나 사생아 주제에 월등한 재능을 지닌 아델리아가 어느 순간 미워졌다.
그래서 아델리아를 꺾고 진짜 왕족과 반쪽짜리의 차이를 절감시켜주려 노력했다. 덕분에 왕가의 지원을 받은 어린 시절에는 그녀를 가뿐하게 누르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뭘 하기도 전에 가볍게 제압당했다. 실력 차이가 아득하게 벌어졌다는 의미.
그것보다 자신을 향해 행복하냐는 물음이 그녀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자신의 모든 인생을 부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러고보니...'
히리야는 분노가 머리를 잠식하기 전, 아델리아의 연모 대상인 아이작을 떠올렸다.
기다란 붉은 머리에 황금색 눈이라는 개성적인 조합. 미모 또한 출중하여 여자 여럿을 홀리고 다닐 법한 관상이다.
실제로 무학과에 돌아다니는 소문에 따르자면 이미 레킬리스 공작가 영애와 교제 중이라고. 그런데도 아델리아까지 홀렸으니 그의 매력이 얼마나 큰지 얼추 짐작할 수 있다.
'그 빨간 머리를 볼 때마다 아델리아의 눈빛이 달라졌지.'
그 말은 즉슨, 행복의 근원은 아이작에게 있다는 뜻. 히리야는 그 생각들이 떠오르자 입꼬리를 올렸다.
행복의 근원이 사라지게 만든다면, 아델리아는 또다시 무너지지 않을까? 사랑을 잃어버린 여자가 얼마나 큰 절망에 빠지는지 히리야도 잘 알고 있다.
물론 아이작을 제거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렇게 된다면 외교적으로 극심한 손실을 입을 뿐더러 레킬리스 공작가의 사위이니 자칫하다간 전쟁까지 발발할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 아이작을 어떻게든 테르스 왕가로 들여보내는 것. 다시 말해 정략 결혼이다.
소설은 아리따운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으나 현실은 언제나 추악한 법. 아이작이 레킬리스 영애와 교제하고 있다한들 테르스 왕국에서 정식으로 결혼을 추진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테르스 왕가의 사위와 레킬리스 공작가의 사위. 둘 중 어느 쪽에 저울질을 할지는 미리 결정돼 있다.
미네르바 제국과 테르스 왕국이 서로 으르릉거리는 사이라 해도 결혼까지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마이샬 가문은 남작가니까 데릴사위로 들여보내면 문제 없겠지. 얼굴도 잘생겼고.'
하나 하나 짚어보니 생각보다 나쁜 선택지는 아니다. 히리야 본인도 기사직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고, 아이작 또한 매력적으로 생겼으니 얼굴 하나만 보고 살아도 충분하다.
결정적으로 아델리아에게서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을 수 있다. 결혼이 결정된다면 얼마나 절망할지 기대가 된다.
'우선은... 그 애가 누구인지부터 파악해야겠지. 재미있겠네.'
히리야가 속으로 음흉한 계획들을 세우고 있을 쯤.
"에취!"
아이작은 알 수 없는 오한에 집필을 하다 말고 크게 재채기를 토했다.
"크응. 아씨."
침 때문에 잉크가 번져버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