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화 〉 악연(3)
* * *
여느 때와 다름없던 날이었다. 주말이 오고 약속대로 아델리아와 함께 체력 단련을 시작했다.
니콜도 없어서 연무장에 갈 필요도 없고, 히리야가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굳이 고강도 운동을 할 필요도 없거니와 연무장이 아니더라도 운동을 할 곳은 많다.
그래서 몸 풀기 겸 체력 증강을 위해 아카데미 전체를 빙빙 돌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네 년이 왜 여기 있는거지?"
공교롭게도 우리처럼 기본적인 체력 증강을 위해 조깅을 하고 있던 히리야와 딱 마주쳤다. 의외로 평범한 운동복을 입고 있었으나 하늘색으로 통일되어 묘하게 어울린다.
호랑이를 피하기 위해 호랑이굴을 벗어났는데 때마침 사냥을 위해 밖으로 나온 호랑이와 마주친 상황. 운이 더럽게 없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다.
나는 불편과 혐오가 뒤섞인 히리야의 얼굴을 보다가 아델리아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가장 중요한 건 그녀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전에 내가 위로를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델리아의 하늘색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리고 있다. 조깅을 하면서 땀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았던 그녀인데 식은땀이 흐르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가슴 속 깊이 새겨진 트라우마는, 고치고 싶어도 고칠 수 없다.
"누나."
"아."
그래도 전보다는 나았는지 내가 팔을 두드리자 정신을 차린 모습이다. 전시회 당시에는 3명이었고 지금은 히리야 혼자였으니.
정신을 차린 아델리아는 인상을 구기고 있는 히리야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어서 웃는 건지 아니면 우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 안녕. 저, 전시회 때 이후로 오랜만이네...?"
"... ...'
히리야는 아델리아가 손을 흔들며 인사해줘도 묵묵부답이었다. 오히려 나에게 시선을 옮기더니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설명을 요구했다.
왠지 상황이 복잡해질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지만 그녀는 타국의 왕녀이고 나는 남작가 영식이다. 엄연히 계급 차이가 나니 설명을 할 수밖에 없다.
"크로스 경은 현재 마이샬 가문의 기사로 배치되었습니다. 현재는 제 호위기사가 되어 아카데미에 있는 것이죠."
"...호위기사?"
호위기사라는 대답에 히리야는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나와 아델리아를 서로 번갈아 보았다. 아델리아는 그녀와 시선을 마주칠 때마다 몸이 딱딱하게 굳혔다.
뒤이어 히리야는 턱을 긁적거리며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입꼬리를 살짝 말아올렸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몰라도 썩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건 직감할 수 있다.
"마침 잘 됐군. 연무장으로 따라와라."
"네?"
"연무장으로 따라오라고 말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인연과 회포를 풀어야 할 것 같으니까."
그리 말하면서 몸을 빙글 돌리는 히리야. 나는 연무장 쪽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보다가 아델리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델리아는 히리야가 언급한 '회포'의 의미를 알아챘는지 오른손으로 왼팔을 잡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다.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기라도 한 모양이다.
'설마 대련을 하자는 건가?'
그거 말고 연무장으로 오라고 한 이유가 없기는 하다. 문제는 아델리아는 히리야에게 대련이랍시고 심한 폭행을 당한 전과가 있다.
제 아무리 그때보다 강해졌다고 한들, 뿌리 깊게 박혀있는 무력감과 두려움이 문제다.
어릴 때부터 발목에 얇은 밧줄이 묶여있던 코끼리처럼, 과거의 끔찍한 기억이 그녀를 옮아매고 있다.
"안 오고 뭐 하는 거지?"
"아, 네. 따라가겠습니다. 누나?"
"... ..."
아델리아는 내 부름에도 못 박힌 것처럼 자리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물쭈물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당장이라도 도망칠 것 같이 주춤거렸다.
자신감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두려움에 가득찬 소동물만이 남아있다. 나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다가 슬쩍 손을 잡아줬다.
내가 손을 잡자 그녀는 몸을 크게 흠칫거리더니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와 동시에 몸의 떨림도 곧바로 잦아들었다.
"괜찮아. 내가 저번에도 말했잖아. 난 누나 편이라고."
"... ..."
"실망하지 않을테니까 무서워하지 마. 이대로 도망만 칠 수는 없는 법이잖아?"
상냥한 미소를 띄며 건넨 말에 아델리아가 차츰 진정되는 것이 느껴진다. 몸의 떨림도 이제는 완전히 멈추었고 수축된 동공도 점점 돌아왔다.
이윽고 가쁘게 몰아쉬던 호흡까지 원래대로 되돌아왔으며 마지막에는 입꼬리까지 올라갔다. 그러면서 내가 잡아준 손에 힘을 주기까지.
그녀는 내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짓더니 조용히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고맙기는 무슨. 어서 가자."
"응."
아델리아도 진정되었겠다, 나는 그녀의 손을 다정하게 맞잡은 채 히리야의 뒤를 따라갔다. 아델리아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던 두 발을 떼어 앞으로 걸어갔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연인이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어디론가 가는 것처럼 보이겠지. 심지어 아델리아는 본인의 욕망을 은근슬쩍 표출하고 싶었는지 손을 꼬물꼬물거렸다.
원래는 단순히 손을 맞잡은 것밖에 되지 않았지만, 손가락 사이 사이에 깍지를 하나 둘 씩 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차마 선을 넘을 용기가 나지 않았는지 검지와 중지 손가락 사이에만 끼고 멈추었다.
"흠..."
앞장 서던 히리야는 그런 우리를 보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사악한 미소를 띄었다. 아델리아는 물론 나 또한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사이가 좋아보이는군. 호위기사와 주인이라 생각하지 못 할 정도로."
"아. 이건..."
"아냐. 굳이 설명은 안 해도 돼. 귀족들 사이에서 이런 풍류는 자주 있는 일이니까. 이해는 할 수 있어."
내가 설명하려던 찰나에 히리야는 이해한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대체 무슨 이해를 한 건지 모르겠다만 안 좋은 의미인 건 확실하다.
이어서 그녀는 아델리아에게 시선을 두더니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의외로 저 년에게 아주 잘 어울리기도 하고 말이야. 결국 애원만 하다가 버림받는 건 똑같겠지만."
"... ..."
꽈악!
역린을 건드린 것이나 다름없는 히리야의 폭언. 아델리아의 손에 힘이 강하게 들어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저건 사실상 패드립이다. 계급만 아니었더라면 얼굴에 주먹을 꽂아넣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심한 패드립.
더욱이 아델리아는 사생아였으니 저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을 푹 푹 찌르는 느낌일 것이다.
'와... 감탄만 나오네.'
어쩜 저런 개차반 같은 성격을 가질 수 있을까. 싹바가지 없는 건 진작에 알았다만 면전 앞에다 대고 저런 소리를 할 줄은 몰랐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내가 제논임을 밝히고 무릎을 꿇리고 싶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다. 뒷통수를 화려하게 치기 위해서는 업보를 차근차근 쌓아야된다.
무엇보다...
"...너."
아델리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분명 방금 전만 해도 두려움에 떨었으나 지금은 다른 의미로 떨고 있다.
분노. 그래. 분노다.
가족과 마주쳤을 때마다 불안 증세를 보이던 그녀가 이제는 명백한 분노를 드러내고 있다. 아델리아가 화를 내는 건 처음 보는지라 생소한 기분마저 든다.
그러거나 말거나 히리야는 그 미모가 퇴색될만큼 비열한 미소를 짓더니 비아냥거리기 바빴다.
"그 표정도 정말 오랜만이네. 뭐, 결국 울고 불고 빌겠지만."
"... ..."
"아이작이라고 했나? 저 여자와 가까이 지내지 않는 걸 추천하마. 실망하기 전에 말이지."
아주 그냥 한 대 얻어맞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건가. 히리야는 그 말만 남긴 채 몸을 빙글 돌려 발걸음을 다시 움직였다.
나는 자기 할 말만 남긴 채 갈 길을 가는 모습에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아델리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분노에 찬 얼굴이었으나 무언가 불안한지 내 눈치를 보고 있다. 맞잡은 손에 힘까지 풀어지며 고민하고 있다는 흔적이 곳곳에 드러났다.
아마 방금 전 히리야의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자각한 듯했다. 본인은 이도 저도 아닌, 피가 반밖에 섞여있지 않은 사생아라고.
게다가 가족에게까지 멸시를 받고 있어서 주변인에게도 피해를 끼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확률이 크다.
'진짜 사람이 참...'
착해도 너무 착하다. 가정 환경이 끔찍함을 넘어 개판 중의 개판인데 이런 인물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그녀의 천성을 대변해준다.
만약 평범하게 귀족의 딸로 태어났다면 말괄량이에 천진난만한 아가씨로 성장했겠지. 그녀의 유일한 불행은 가족을 잘못 만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이 있다면 행운도 있어야 하는 법. 나는 히리야가 멀어지자 그녀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건넸다.
"누나. 내가 하나 제안해도 될까?"
"무슨... 제안?"
"만약 누나가 히리야 왕... 아니, 저 여자를 이긴다면..."
히리야 왕녀가 아닌 저 여자라고 지칭하자 아델리아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놀라워했다. 그러나 이다음에 이어진 말은 그녀를 화들짝 놀래키기 충분했다.
"누나가 원하는 거 내가 다 해줄게."
"뭐, 뭐? 워, 원하는 거라니?"
"말 그대로야."
나는 방긋 웃은 뒤, 그녀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누나 마음 모를 줄 알아?"
"...!!"
그 말과 동시에 아델리아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붙잡은 손에 힘이 더욱 강해진다.
나는 그녀의 귀에서 서서히 얼굴을 떼어 그녀와 마주했다.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어쩔 줄 몰라하는 하고 있는 아델리아가 눈에 들어왔다.
내 앞에서는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그녀가 이리 허둥지둥거리는 걸 보니 뭐랄까... 정말 귀여웠다. 짝사랑을 하고 있는 여자가 다 그렇겠지만, 아델리아는 특히 색다르다.
"숨기려면 제대로 숨기던가. 너무 티나잖아."
"하, 하지만 너는... 마리 공녀님이랑 세실리 공주님이..."
"나도 알아. 당장은 누나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어. 대신..."
나는 잠깐 말을 아끼다가 손으로 그녀의 뺨을 부드러이 쓸어줬다. 내 손이 뺨에 닿자 아델리아가 다시 한 번 몸을 움찔거렸다.
내 말대로 그녀를 완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 정체를 밝혀야 할 뿐더러 결정적으로 마리의 허락이 필요하다.
세실리를 받아들인 마당에 가능성은 매우 높지만, 세실리는 헬리움의 공주다. 여러모로 수많은 메리트가 뒤따라줬기에 마리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델리아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일신의 무력이 강하다지만 사생아라는 큰 결점이 존재하고 있다.
그 결점을 없애기 위해 테르스 왕족이 될지 아니면 내 호위기사로 남게 될지는 그녀의 선택에 따라 갈릴 것이다.
"나중에 누나의 선택을 보고 나도 선택할 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참아줘. 알겠지?"
"... ..."
"반드시 이겨야 돼. 누나가 원하는 걸 받고 싶다면."
사람은 확고한 목표 의식이 있어야 열정과 집념이 생긴다. 그건 아델리아도 마찬가지.
아델리아는 내가 뺨을 쓸어주며 상냥한 목소리로 응원하자 부드럽게 웃으며 힘차게 답했다.
"무조건 이길게!"
"그래. 그래."
그녀는 나에게 무슨 부탁을 하게 될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