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화 〉 악연(2)
* * *
밖에서 한 5분 정도 기다렸을까. 뻘쭘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을 때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이 열린 쪽에는 아델리아가 조심스레 얼굴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방금 전 그 일로 인해 부끄러웠는지 뺨이 살짝 붉어진 상태다.
"그... 꼭 내 숙소에서 얘기해야 돼?"
"조금 중요한 거라..."
"...땀 흘려서 냄새도 나는데?"
"괜찮아."
내가 괜찮다고 답하자 아델리아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망설이더니 문을 천천히 열어줬다. 그리고 아델리아의 달라진 모습을 확인했다.
어떻게 해결했나 싶었는데 번데기마냥 이불을 몸에 둘둘 말고 있다. 옷을 입기에는 땀 때문에 찝찝하고 그렇다고 씻자니 오래 걸려서 이게 최선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걸 보며 다소 황당한 기분이 들었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갔다. 아델리아는 종종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언제나 활기찼던 그녀의 성격과 정반대로 부끄러움을 타고 있어서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상한 냄새 안 나? 일단 창문은 열어놨는데..."
안으로 들어오자 아델리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듣고 곧바로 냄새를 맡았다.
솔직히 냄새는 딱히 나지 않고 여성 특유의 향기로움만 진동하고 있다. 그녀의 성격상 향수 같은 건 잘 뿌리지 않을테니 땀 냄새라고 봐야겠지.
장미향. 그래. 장미향이다.
가끔씩 그녀가 나에게 장난을 칠 때도 장미향이 났는데 아무래도 그녀에게서 나는 체취인 듯했다.
"안 나는데? 나 왔다고 방금 막 향수 같은 거 뿌린 건 아니지?"
"...나 향수 안 쓰는 거 너도 알잖아."
"그래? 신기하네. 좋은 냄새만 나는데?"
"... ..."
내 칭찬에 아델리아의 귀가 급격히 붉어지며 몸을 감싸던 이불에 코를 박았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한데 섞여있는 반응이다.
잠깐 재미있는 해프닝이 발생했지만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그녀와 깊은 연관이 있다. 아델리아도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았는지 웅얼거리다가 이불에 박았던 얼굴을 들어올렸다.
얼굴은 여전히 감기에 걸린 것처럼 빨갛게 익은 상태다.
"그, 그래서 왜 온 거야? 무슨 일이길래 내 숙소에서 얘기하자는 건지 모르겠네."
"음..."
나는 곧바로 대답하기 전, 아델리아의 숙소부터 둘러봤다. 아카데미에 같이 왔을 때 잠시 본 적은 있지만 방 안으로 들어온 적은 없다.
아카데미 재학생이 머무는 방보다는 규모도 적고 시설도 그닥 좋은 편이라 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구실은 맞춰놓은 모습이다.
특히 다양한 운동 기구들이 여기저기 어지러져 있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저것들을 사용했겠지.
아버지의 말에 따르자면 아델리아는 재능도 재능이지만 지독하다고 할만큼 노력을 한다고 들었다. 아마 어렸을 적 불우한 가정 환경의 영향이지 않을까.
순간 히리야에 대해 말해야 될지 고민했지만 그녀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알려줘야 할 사안이다.
"...아델 누나."
"응."
"누나랑 좀 많이 연관된 이야기야. 특히 누나 가족이랑."
"... ..."
불행의 시발점인 가족에 대해 언급하자 몸을 크게 움찔거린 아델리아. 커다란 하늘색 눈동자에 두려움이 자리잡혔다.
"...뭐? 내 가족?"
"응."
"가, 갑자기 왜? 누, 누가 오기라도 했어?"
트라우마가 마음 속 깊숙히 박혔다는 걸 증명하듯, 아델리아의 목소리가 덜덜 떨린다. 전시회 당시에는 만나자마자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하고 딱딱하게 굳어버릴 정도이니 당연한 반응이다.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활력이 특징인 아델리아가 내 눈에는 작디 작은 소동물로 보였다. 가녀리게 떨리는 목소리와 동공. 그리고 다른 의미로 흐르는 식은땀까지.
나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다가 방금 전 만났던 히리야에 대해 언급했다.
"히리야 왕녀라고... 알지? 이번에 무학과 조교로 전학왔다고 들었어. 방금 우연히 만나고 온 길이고."
"히, 히리야가? 어, 어째서..."
"소문으로는 미네르바 제국과의 관계를 위해서라고 들었어. 전시회가 열린 우리 영지가 제논의 출신지라고 알려졌으니 여러모로 압박이 되었겠지."
따지고 보면 내 잘못이긴 하다. 마이샬 영지를 문화 도시로 발전시키기 위해 내가 입을 좀 놀렸으니까.
그러니 아델리아가 어떻게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줘야된다. 만약 히리야 쪽에서 아델리아가 여기 있다는 걸 파악하는 순간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진다.
여기서 가장 좋은 방법은 아델리아를 저택으로 돌려보내는 것. 전시회에서 보았듯이 그녀는 가족을 만난 것 자체만으로도 모든 사고가 정지하고 극심한 불안 증세를 보인다.
더군다나 눈 앞에서 가족임을 부정당했으니 정신적 충격이 어마어마할 터. 결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게 내 판단이다.
"아델 누나."
"... ..."
"누나가 얼마나 가족을 무서워하는지 나도 알아. 그러니까 가급적이면 저택으로..."
"아, 아냐. 나, 나는 괜찮아."
내가 저택으로 돌려보내려 한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아델리아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이미 사정없이 떨리고 있다.
벌써부터 불안 증세가 도졌다는 걸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에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목소리도 떨리고 있는데 괜찮은 거 맞아?"
"으, 응. 괜찮... 아."
이제는 시선도 마주치지 못 하고 하늘색 눈동자가 거세게 진동한다. 심지어 입술이 파르르 떨기까지.
이런 모습을 보이는데도 저택으로 가지 않으려는 이유는 알고 있다. 분명 나 때문이겠지.
호위기사가 되어 아카데미에 함께 온 것도 나와 조금이라도 함께 있기 위해서다. 외사랑에 빠진 여자는 이토록 애잔하다.
"...누나."
"나, 난 괜찮다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후우..."
나는 같은 말만 반복하는 아델리아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델리아는 저택으로 돌아갈 생각을 아예 안 하는 것 같다.
설득도 말이 통하는 상대에게나 통하는 거지, 이처럼 고집을 부리면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남는 건 단 하나. 트라우마를 약간이라도 해소시켜서 정상적인 생활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뿐인데...
'그게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고...'
나는 심리학자가 아닌데다가 트라우마는 해소되기 극도로 어렵다. 애당초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게 트라우마다.
큰 폭발에 휘말린 사람이 폭죽 소리에도 기겁하듯이, 아델리아도 비슷하다. 그녀는 가족이라는 키워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만약 내가 모라를 믿는 성직자였다면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겠지만 힘들다. 난 신성력을 받을 줄만 알지 사용할 줄은 모르고 있었으니.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그 방법은 나와 아델리아의 관계가 지금보다 훨씬 진전되어야 할 뿐더러 주변인의 동의가 필요하다. 아주 원색적인 방법이라 입 밖으로 꺼내기에도 민망하다.
결국 남은 건 트라우마를 덮을만한 안정감을 주는 것. 아델리아에게 있어서 그 안정감이란 절친 니콜 또는 짝사랑 상대인 나다.
나는 어떻게 하면 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계단을 밟듯이 한 단계 한 단계 밟기로 정했다. 우선 히리야에 대해서다.
"...알겠어. 대신에 아델 누나."
"으, 응..."
"히리야 왕녀에 대해 알려줄 수 있어?"
"히, 히리야를?"
히리야에 대해 알려달라고 하자 아델리아의 하늘색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왜 그런 질문을 하냐는 속마음이 담겨있다.
대충 아델리아와 히리야의 관계에 대해 알아야 내가 어떻게든 해줄 수 있다. 싹바가지 없어 보이는 히리야의 모습을 본다면 아델리아를 일방적으로 싫어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방금 전 보였던 아델리아의 불안 증세. 그것만 보아도 히리야가 얼마나 모질게 굴었는지 대충 눈치챌 수 있다.
"응.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거든. 만약 안 좋은 사람이면 상종도 안 하려고. 조교라 했으니 연무장에 안 가면 되잖아."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야."
아이고. 벌써부터 호구성 짙은 말이 나오는구나. 나는 아델리아의 소심한 답변에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아델리아는 성격상 괴롭힘을 당해도 헤헤 웃어넘길 대상이다. 더 나아가 가족이었으니 억지로 웃어넘겼겠지.
그만큼 자신의 가족에게 잘해줬을 가능성이 높다. 히리야의 동생, 라라도 아델리아를 보자마자 맑게 웃으며 다가가려 했지 않은가.
물론 히리야가 곧바로 제지했지만.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아델리아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나쁘고 착하고는 뒷전으로 미룰게. 그 왕녀가 누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가 중요하니까."
단호한 말에 무언가 느끼기라도 했는지 아델리아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이불로 몸을 꽁꽁 감추고 있으니 뭔가 귀엽게 느껴졌다.
뒤이어 한동안 내 얼굴을 보던 그녀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조심스레 과거를 꺼냈다.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귀에 똑똑히 박혔다.
"...원래는 내 말을 잘 따르던 애였어. 내가 검술 훈련할 때도 옆에서 같이 훈련하고, 언젠가 나처럼 되겠다고 방방 뛰던 애였거든."
어라. 의외로 과거는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그 생각을 하자마자 곧바로 진면목이 드러났다.
"그런데 14살부터였나? 나를 시기하고 질투하더라고. 사생아 주제에 왜 그런 실력을 갖고 있냐고 소리까지 지르고..."
"... ..."
"깜짝 놀라서 달래줘도 밀치기만 하고 욕하더라. 결국 자연히 멀어졌지. 나중에는 걔 실력이 좋아져서 내가 계속 졌지만."
아델리아의 한탄을 듣고 확신할 수 있었다. 히리야 왕녀는 그냥 싹수부터 노란 여자였다고.
게다가 말만 저렇게 순화해서 했을 뿐이지, 실상은 더 끔찍했을 것이다. 저렇게나 심한 트라우마는 어지간해서는 생기지 않는다.
나는 금방 우울해진 아델리아를 짠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 그녀는 히리야와 대련을 했고, 계속 졌다는 말까지 했다.
정통 왕족인 히리야는 아델리아와 달리 더 큰 관심과 지원을 받았을 터. 특히 무술 같은 경우는 스승의 도움 없이는 독학으로 배울 수 없다. 실력 차이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그 실력 차이를 이용해 아델리아를 대련이라는 명목으로 폭행을 가했다면? 이걸 빌미로 사람으로서는 해서는 안 된 말까지 한 게 아닐까?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닐 뿐더러 오히려 이런 세상에서는 흔하디 흔한 상황이다.
"아델 누나."
"응?"
"잠깐 이불 좀 벗어봐."
"뭐, 뭐?"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잠깐이면 돼."
아델리아는 갑작스러운 내 부탁에 얼굴을 급격히 붉혔다. 그러나 진지한 내 표정을 보더니 머뭇거리다가 행동에 나섰다.
스르륵
탈피를 하는 것처럼 이불을 내리자 아델리아의 건강미 넘치는 몸매가 온전히 드러났다. 잔근육이 단단히 자리잡혀 있으며 그동안의 노력을 대변해주는 듯한 육체.
나는 그 몸매에 시선을 빼앗긴 것도 잠시, 곧바로 그녀의 몸을 천천히 훑어봤다. 아까 전에는 경황이 없어서 자세히 살펴볼 수 없었으니 지금은 확고한 목표가 있다.
가장 먼저 팔과 복부부터다. 기사답게 야외에서 훈련한 적이 많아 피부는 하얗지 않고 평범하게 탄 수준이다.
그러나 곳곳에 유독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멍이 심하게 들었다가 가라앉은 부분. 팔뿐만 아니라 복부, 그리고 허벅지에도 있다.
이건 멍이 흉터다. 특히 타박상 같은 경우는 제대로 된 치료만 받는다면 깨끗하게 나을텐데 흉터로 남은 걸 보면...
'...이건 그냥 폭행이잖아.'
둘 중 하나다. 히리야가 대련이랍시고 아델리아를 폭행 수준으로 두들겨 팼거나 아니면 아예 치료를 안 했거나. 어쩌면 둘 다 일 수도 있다.
사람의 몸에 이정도 상처를 남겼으니 트라우마가 심해질 수밖에 없지. 전생에서도 학교폭력 피해자가 얼마나 큰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지 보면 알 것이다.
또한 아델리아는 사생아라는 이유로 옛날부터 폭언까지 들었을 터. 심성이 착한 아델리아라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진작에 자살하거나 가족을 죽이고도 남았다.
나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군데군데 작게나마 존재하는 흉터를 보다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델리아도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눈치챈 것일까. 아무렇지 않다는 걸 애써 표현하기 위해 잇몸이 활짝 드러나는 미소를 지었다.
"예, 옛날에 난 상처인데 뭘.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아."
"...정말로?"
"응. 정말로."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억지로 웃는 아델리아를 보자니 내가 더 가슴이 아프다. 나는 흉터를 감추기 위해 은근슬쩍 이불로 몸을 가리는 그녀를 보다가 손을 천천히 뻗었다.
그리고 이불을 붙잡은 그녀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아델리아는 내가 손을 잡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누나. 혹시 전시회 때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어, 어? 무, 무슨 말?"
"누나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가장 예쁘다는 거. 억지로 웃지 않아도 돼."
내 말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 아델리아. 나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어루만졌다.
그동안의 고초와 고난을 상징하는 것처럼, 아델리아의 손은 딱딱한 굳은살로 뒤덮혀 있다.
"누나의 부탁대로 저택으로 보내진 않을게. 대신 정말 안 되겠다 싶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말해. 알겠지?"
"... ..."
"그리고 이것만 알았으면 좋겠어. 난 언제나 누나 편이야. 힘든 게 있으면 말만 해. 내가 어떻게든 해줄게."
나를 좋아하는 여자에게 뭘 못 해줄까. 비록 마음은 받아주지 못할 수도 있으나 이정도는 해야 내 마음이 편하다.
자기만족이라 욕할 수도 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내가 하고 싶다는데.
무엇보다 테르스 왕족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사생아라며 욕하고 깔보고, 폭행을 가하던 아델리아가 사실 제논의 호위기사라는 것을.
이것만으로도 그들에게 엿먹이기는 충분하다. 그리고 아델리아는 그때 선택을 하게 되겠지.
나는 그녀가 가족들 아니, 테르스 왕가로 돌아간다는 선택지를 막을 것이다. 정확히는 마음이 이쪽으로 기울이게 만들거다.
"일단 주말에 운동할 생각인데 누나도 같이 할래? 나 좀 도와줬으면 해서."
가족들에게는 절대 들어볼 수 없던, 상냥하디 상냥한 내 부탁에 아델리아가 맑은 하늘처럼 깨끗한 눈동자를 깜빡거렸다.
뒤이어 내가 언급했던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짓더니 힘차게 대답했다.
"그래. 대신 힘들어도 안 봐줄거다?"
"어련하겠어."
이걸로 아델리아가 조금이라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났으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 주말이 다가왔고.
"너는..."
"... ..."
"네 년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생각보다 악연이 빨리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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