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194화 (195/763)

〈 194화 〉 꿈(2)

* * *

나는 체리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줬다. 얼마나 많은 울분이 쌓여있었으면 수도꼭지가 고장난 것처럼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며 턱에 방울방울 맺힐 정도다.

그러면서도 인정받았다고 생각한 것인지 홀가분한 미소를 짓고 있다. 생기가 전혀 없던 이전보다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다 울었어요?"

"히끅... 네에..."

아직 덜 울었구만. 나는 눈물을 닦으면서 히끅거리는 체리를 보며 약하게 웃었다.

어떻게든 눈물을 닦고, 또 닦고 있었으나 도통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델리아처럼 손수건을 줘야하나 싶어 주머니를 뒤적거리고 있을 때, 체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정말로... 흐윽! 정말로 재미... 있었나요?"

"응. 정말 재미있었어요.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와 자기가 겪은 비극을 없애고, 더 나아가 더 나은 미래를 가꾼다.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하신 거예요?"

아까 언급했다시피 회귀물은 전생에서 흔하디 흔한 클리셰 중 하나다. 틈만 나면 나오는 클리셰이나 그만큼 수요도 많기에 작가들이 애용하는 설정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회귀물이라는 클리셰 자체가 없다. 누구라도 과거로 돌아가 과오를 바로잡고 싶겠지만, 그걸 소재로 소설을 쓴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다.

체리는 내 질문을 듣고 눈가를 몇 번 비비더니 두 손을 아래로 내렸다. 눈꼬리에 눈물이 맺혀있고 콧잔등이 딸기처럼 빨개진 상태다.

그래도 속에 담아두었던 억하심정을 모두 토해냈는지 썩어버렸던 눈동자에 약간의 생기가 돌아왔다. 벛꽃색의 눈동자가 더욱 선명해진 게 보였다.

"훌쩍... 제논 작가님 때문에..."

"제가요?"

"네... 히끅! 미래에서 돌아왔다는 말이 있어서..."

속이 놀랐는지 말을 할 때마다 중간중간 히끅거렸다. 나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계수 뿌리 오염 이후로 발생한 몇몇 진실들 때문에 세상은 나를 예언자 혹은 회귀자라 생각했다. 이후에는 루미너스 님의 말실수로 인해 성자로 추대받기 직전이고.

보통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온갖 추측과 가정을 내놓았지 체리처럼 소재로 이용하지는 않았다. 이것도 발상의 전환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군요. 대단하네요."

"히끅... 가, 감사합니다..."

"음..."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감사 인사를 전한 체리를 보다가 원고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솔직히 말해 이대로 그녀의 책을 발간한다면 대박이 날 것이다.

특히 남녀 구분없이 읽는 제논 일대기와 달리 체리의 책, 붉은 노을을 다시 한 번은 여성들이 주로 읽을 것이다. 제논 일대기와 달리 붉은 노을을 다시 한 번은 회귀물이었으니.

보통 회귀물은 그 특징상 회귀자에게 시선이 갈 수밖에 없으며 이야기의 흐름도 회귀자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당연히 여주인공에게 포커스가 맞춰질 수밖에 없다.

'그래도 수요층이 확실하니까 잘 팔리겠지. 회귀물은 처음이니까 흥미를 가질테고.'

예로부터 로맨스 소설은 제논 일대기 출시 이전에도 잘 팔리던 장르 중 하나다. 문맥이 더럽게 어렵긴 해도 스토리만 이해할 수 있다면 수요층은 확실하다.

아마 귀족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끌지 않을까. 남자들은 뭐... 잘 모르겠다. 이 세상의 남자는 시대상에 어울리는 고정 관념을 갖고 있으니까.

제논 일대기처럼 꿈과 희망(?)이 넘치는 모험물은 재미있게 읽어도 정치물에 가까운 로맨스물은 지루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물론 회귀물이라는 특징 때문에 약간의 흥미를 끌겠으나 그것 뿐. 대신 귀족 여성의 대화에 끼기 위해 읽은 척이라도 할 것이다. 유행은 귀족들 사이에 민감한 부분이니.

나는 망가졌다가 겨우겨우 복구한 듯한 원고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체리를 쳐다봤다.

분홍색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오긴 해도 여전히 어깨는 추욱 쳐져있고 의기소침한 상태다.

가문에 대해 언급했을 때의 반응과 원고지에 선명히 찍힌 신발 자국을 보면 무슨 상황인지 대강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체리 학생."

"...체리."

"응?"

"체리라고... 불러주세요..."

내 칭찬에 용기를 얻었는지 특유의 음울한 목소리로 부탁한다. 나는 그걸 듣고 순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서로 말을 놓는 편이 편하다. 이미 그녀는 나를 제논이라 확신한 것 같은데다 개인적인 공간에서는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다.

"알았어. 체리."

"네..."

"혹시 이걸 책으로 내고 싶은 거야?"

직설적인 내 질문에 체리가 몸을 흠칫거렸다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런데 가문에서는 거부했고. 맞지?"

"...네."

체리는 내가 가문을 언급하자 또다시 몸을 파들파들 떨기 시작했다. 트라우마가 얼마나 심하면 저정도까지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가급적이면 언급을 피하고 싶으나 이 원고는 그녀의 가문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설령 몰래 책으로 발간한다고 한들 눈치챌 수도 있다.

"혹시 이 원고를 제대로 읽은 사람이 몇이나 돼?"

"...없어요."

"뭐?"

체리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작가님밖에... 없어요..."

"나밖에 없다고? 굳이 부모가 아니더라도 친한 사람에게는 보여줄 수 있잖아."

"... ..."

내가 의아하게 묻자 체리는 교복 치마를 두 손으로 꽉 붙잡은 뿐, 아무런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걸 보고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로즈베리 가문에서 분명 강압적으로 나섰다는 것을.

최악의 경우, 체리의 소설을 본 사람을 말도 안 되는 구실로 잡아다 끌었을 수도 있다. 누누이 언급하지만 이곳은 계급이 명확하게 구분돼 있는 세상이다.

내 주변인들이 전부 인격자라 그렇지, 귀족에게 있어서 인권 같은 건 유명무실한 수준이다.

"...어요."

"응?"

"다른 사람들이 제 글을 읽으면... 전부 내쫓았어요... 그리고 못 쓰도록 방해까지 해서..."

뭐 저런 가문이 다 있냐. 나는 체리가 힘겹게 꺼낸 대답을 듣고 당황보다는 황당함이 앞섰다.

저런 막돼먹은 가문이니 애가 이렇게 망가지지. 자살하지 않은 게 용한 수준이다.

사람은 확고한 꿈을 가지게 되면 마음 속에 밝은 신념과 희망을 품게 되기 마련이다. 중간중간 시련이 있어도 작디 작은 불꽃이 남아있다면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로즈베리 가문은 그런 불꽃조차 싸그리 즈려밟았다. 원고지에 찍혀있는 발자국처럼 말이다.

'내가 진짜 운 좋게 태어난 거구나.'

만약 내가 로즈베리 가문 출신이었다면 제논 일대기는 탄생하지 못 했을 수도 있다. 마이샬 가문으로 태어나게 해준 신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함을 표한다.

나는 또다시 빛을 잃어가기 시작한 체리의 눈빛을 보고 뭐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다 보면 그녀는 머지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게 뻔하다. 아마 무작정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긴 것도 절박함에서 나온 것이지 않을까.

나까지 부정했다면 더이상 그녀를 보지 못 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당장 지금도 위태위태한데 나와 만난 건 사실상 행운이라 봐야한다.

"...체리."

"네..."

"이 원고 아무도 못 본 거 맞지?"

확인차에 질문하니 체리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저 말은 즉슨, 체리의 부모라는 작자는 그녀의 소설을 읽어보지도 않고 짓밟다 못해 갈기갈기 찢어버렸다는 의미다.

자식의 꿈을 응원해주지 못 할망정 박살내는 사람은 부모의 자격이 없다. 적어도 부모라 불러서는 안 되는 존재인 건 확실하다.

나는 원고를 조심스레 테이블 위로 내려놓은 뒤, 상체를 앞으로 슬며시 숙이며 체리에게 물었다.

"내가 어떻게 도와줬으면 좋겠어?"

"... ..."

"네가 원한다면 원고지를 몰래 출판사로 넘겨줄 수도 있어. 대신 이렇게 망가진 게 아니라 다시 써야겠지. 혹시 아카데미에서도 감시하는 인원을 붙였니?"

도리­ 도리­

체리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천만다행히도 아카데미까지 인원을 붙이진 않은 모양이다.

어쩌면 희망을 재기불능 상태로 꺾어버렸으니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던 간에 쓰레기라는 건 변함이 없다.

"그럼 다시 써서 나한테 보여줄래? 사실 글 자체는 좋지만 전개가 너무 빠른 느낌이 들어.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해주고, 더 나아가 주인공이 과거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좀 더 상세히 알려줬으면 해. 전체적인 사건도 좋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발생했던 일이 중요할 것 같아."

"... ..."

내가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자 체리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우울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도 없이 사라지고 호기심과 활력이 대신 자리잡았다.

누군가 자신의 소설을 가지고 조언을 하는 것조차 그녀에게는 신선한 경험일 터. 나 또한 그녀와 비슷한 마음이어서 약간이지만 들떠 있었다.

마치 동업자 혹은 제자가 생긴 듯한 기분이랄까. 원래 취미가 같으면 이런 저런 공감 요소도 생기니 자연스레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게 있어. 주인공이 겪었던 미래와 앞으로의 미래가 완전히 똑같지는 않을 거야. 주인공이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저지른 일들이 오히려 앞당길 수 있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거든. 그게 아니라면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맞이하거나."

"아... 뭔지 알 것 같아요."

"그렇지?"

대화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체리의 눈동자에 희망의 빛이 싹트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했던 눈빛은 분홍빛으로 반짝거리고 음침했던 분위기도 약간이나마 옅어진다. '인형'이 아니라 '사람'으로 되돌아오는 모습.

이렇게 아리따운 빛을 띄는 사람을 그토록 무참하게 즈려밟다니 로즈베리 가문이 얼마나 흉흉한 곳인지 알 것 같다.

"체리."

"...네."

"아까도 말했지만 도움이 필요하다면 나한테 말해. 내가 얼마나 큰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손이 닿는대로 도와줄 수 있어."

"... ..."

체리는 그 말을 듣고 나서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파르르 떨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누가 보아도 확실한 미소다.

하지만 이내 눈에 점점 물기가 차오르더니 다시 한 번 눈물을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는데 눈에는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상황.

울고 웃는 모습은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는 거라 가만히 지켜봤다.

"고마... 워요..."

"그래. 앞으로 힘든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하렴. 울지는 말고. 예쁜 얼굴 다 망가지니까."

"히끅..."

내 말을 듣고 다급하게 눈물을 닦는 체리였으나 그럼에도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직까지 속에 묵혀두었던 울분이 남아있던 모양이다.

나는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동안 시계를 확인했다. 원고를 읽는데 시간을 상당수 허비하여 벌써 5시가 다 되어간다.

이제 슬슬 지인들을 만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렇다고 체리를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으니 잠자코 자리에 앉아있었다.

"속에 쌓인 게 많나 보네."

"...죄송해요. 못 본 꼴을 보여서."

"아냐. 아냐. 괜찮아. 가끔은 속 시원하게 우는 것도 나쁘지 않지. 체리는 곧바로 숙소로 돌아갈 거지?"

"제, 제논 작가님은요?"

내 질문에 답하지 않고 역으로 질문한 체리. 그전에 호칭부터 바꿔야 할 것 같다.

"앞으로 제논 작가님이라 부르지 말고 아이작 조교님이라고 불러. 그리고 나도 약속이 잡힌 상황이라 다른데로 가야 돼."

"약속이요?"

"응. 약속. 지인들이랑 만나야 되거든. 여자친구도 있고."

"여자... 친구..."

뭐야. 이번에는 또 뭐야.

내가 여자친구를 만나야 된다고 말하자마자 체리의 눈동자가 검게 물들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생기가 돌아왔는데 스위치가 꺼진 것마냥 다시 어두워진다.

그걸 보고 살짝 당황했을 때, 체리가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에요?"

"응?"

"신문에서처럼... 미래를 약속한..."

"어... 응. 약혼까지 한 사이지."

"역시 그렇구나..."

특유의 음침한 분위기가 다시 되돌아왔다. 나는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은 내가 할테니까 체리도 숙소로 돌아가. 수업도 빼먹고 왔으니 다음주부터 많이 바쁠 거야."

"...네."

"그럼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연구실로 찾아와. 어지간해서는 연구실에 있을테니까 알겠지?"

"저도..."

"응?"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체리는 말을 하다가 말고 우물쭈물거렸다.

이윽고 고개를 아래로 푹 숙이더니 개미가 지나가는 듯한 크기로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체리?"

내가 그리 물어도 체리의 대답은 똑같았다.

"...아무것도."

*****

아이작이 약속을 위해 먼저 자리를 비웠다. 하지만 체리는 그가 떠나도 개인실에 우두커니 남아있었다.

중간에 이상함을 알아차린 종업원이 노크를 하면서 들어왔지만, 분위기가 너무 심각하다보니 다시 되돌아갔다. 종업원은 단지 체리가 아이작에게 고백했다가 차였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약간 달랐다.

'인정해줬어...'

그녀는 속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본인의 원고를 읽은 뒤 다음 권이 언제 나오냐고 물었고, 더 나아가 정말 재미있다는 최고의 칭찬까지 해줬다.

그 칭찬을 들었을 때는 속에 묵혀있던 응어리가 모두 해소되다 못해 하늘로 날아가는 듯한 기쁨이 들었다.

가문에서는 짓밟히는 걸 넘어 갈기갈기 찢겨졌던 꿈과 희망이, 현재 최고의 작가로 칭송받는 제논(아이작)에게는 재미있다고 인정받았다.

이 기분을 무어라 형용할 수 있을까. 만약 그를 만나지 못 하거나 인정받지 못 했다면 숙소에서 목을 매달았을텐데.

태어나면서 이렇게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절망의 구덩텅이로 한 번 떨어졌다가 아이작이 끌어올려준 덕분에 더욱 실감된다.

'그래도 부모님은...'

절대 인정해주지 않겠지. 이딴 쓰레기를 쓸 바에야 철학책이나 한 권 더 읽으라고 하는 분들이니까.

제논 일대기로 인해 본인들의 철학 서적이 관심을 받지 못 하자 시기하는 사람들. '질투'가 사람을 얼마나 추악하게 만드는지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다르다. 인정하는 걸 넘어 이런저런 조언까지 해주며 본인의 앞길을 제시해줬다. 인형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 소중히 대해줬으며 자라나는 꿈나무에 달콤한 물을 뿌려줬다.

맛이라고는 쓴맛밖에 나지 않은 음식을 먹다가 달콤한 사탕을 하나 먹은 것처럼, 가슴에 맴도는 이 달달한 기분은 체리에게 활기를 부여해줬다.

허나 부족하다. 달달함이 입 안에 맴돌아도 사탕은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니 부족할 수밖에 없다.

'더... 더...'

관심받고 싶다. 인정받고 싶다. 칭찬받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사탕처럼 달콤했으며 새로운 자극과 쾌감을 선사해줬다. 살면서 이런 기분은 전혀 느끼지 못 했다.

체리는 아이작이 떠난 자리를 말없이 응시했다. 지인들, 그리고 약혼녀와 만나야 한다며 떠나간 그의 자리.

저 자리에 그를 묶어둘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렇게 된다면 좀 더 오래 대화하고 좀 더 오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텐데.

스윽­

그녀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맞은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이어 아이작이 앉았던 자리를 손으로 천천히 쓸었다.

방금 전에 나간 탓에 따스한 온기가 남아있다. 체리는 손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을 만끽하다가 얼굴로 갖다 대었다.

"스읍... 하아..."

눈을 감고 냄새를 맡자마자 가슴 속에 무언가가 채워지는 느낌이다. 머리카락 한 올조차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그녀에게는 이런 행위는 마약을 흡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가문에게 거칠게 탄압받아 불안정하던 정신 상태가 시너지를 이루어 신체에도 변화가 발생했다.

거친 흥분 때문에 가슴은 터질 듯이 두근거리고 아랫배는 감전이 된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그 자극으로 인해 무언가 축축하게 젖어드는 느낌까지.

체리는 감았던 눈을 뜨며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아이작의 향기가 아직 저 가죽에 남아있다.

꿀꺽­

이에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분홍빛으로 빛나는 두 눈에는 가열찬 불꽃이 일렁였다.

때마침 개인실로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설령 누군가 들어와도 노크를 할테니 들킬 염려도 없을 것이리라.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안녕히 가세요~"

"... ..."

체리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개인실 밖으로 나왔다.

얼굴이 미묘하게 붉어져 있고 교복 또한 흐트러져 있는 상태였지만, 종업원은 전혀 눈치채지 못 했다.

다만, 정리를 하기 위해 개인실로 들어섰을 때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이게 무슨 냄새지?"

개인실은 벛꽃향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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