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191화 (192/763)

〈 191화 〉 2학년(4)

* * *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나는 분홍 머리 여학생, 체리의 소개를 듣고 정신이 잠시나마 아득해졌다.

팬레터에서 보여주었던 분위기와, 지금 그녀가 풍기고 있는 분위기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오죽하면 다른 사람이 대필을 해준 건가 싶을 정도로 서로 맞지가 않았다.

팬레터의 체리는 활발하고, 생기가 넘치며 소녀다운 감성이 듬뿍 묻어나왔는데 눈 앞의 체리는 완전히 반대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목소리에 힘이 없고, 우울한 기색이 주변까지 잠식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꺼림칙해진다. 여기에 더해서 밝은 벛꽃색 눈동자가 까맣게 죽은 것까지.

도대체 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혹시 편지를 주고 받을 때 무슨 큰 일이라도 겪은 것일까. 아무리 절망에 빠진 사람이어도 저 체리라는 여학생처럼 되지는 않는다.

심지어 폐인조차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있는 반면 체리는 강의까지 나왔다. 아까도 말했지만 정말 살아움직이는 인형 같다.

"로즈베리? 정말 로즈베리 백작가야?"

"머리를 보면 확실한 거 같은데?"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해. 어디 아픈가?"

체리가 풀네임까지 밝히자 강의실 내부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로즈베리 백작가는 미네르바 제국에서도 세력이 강한 편에 속한다. 미네르바 제국에서 발간된 철학 서적의 반 이상이 로즈베리 가문에서 나왔다.

학생들이 수근거리는 것도 그녀의 뒷배경 때문이겠지만,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보니 껄그러워하는 모습이다. 얼굴이 인형처럼 예뻐도 눈빛이 죽어있다면 그 누구라도 이상하게 바라보겠지.

"좋아요. 체리 학생. 혹시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줄 수 있나요?"

"... ..."

강의실이 수근거림으로 채워지는 동안 엘레나가 체리에게 다시 한 번 질문했다. 그러자 학생들의 수근거림도 동시에 멈추었으며 수많은 시선들이 체리에게 향했다.

나 또한 뒷짐을 지며 체리의 대답을 기다렸으나 그녀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나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에 엘레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미간을 살짝 좁히며 재차 말했다.

"체리 학생?"

"...네."

"모른다면 모른다고 대답해줬으면 좋겠어요."

"...모르겠어요."

체리는 엘레나의 말에 곧장 모른다고 대답했다. 여전히 생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다.

엘레나도 그런 체리에게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는지 한 쪽 눈을 치켜뜨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에게 앉으라고 지시했다.

그녀의 지시에 체리도 자리에 앉았으나 나를 향한 시선은 그대로다. 무시하고 싶지만 시선만큼은 워낙 강렬한 탓에 신경 끄기가 어려웠다.

"혹시 다른 학생 있나요? 정답이 아니어도 원인과 결과를 명확하게 설명한다면 가산점을 주도록 하겠어요."

"저요!"

"좋아요. 학생 이름이?"

엘레나는 이후로도 강의를 이어나갔다. 나는 그녀의 옆에 서서 가만히 지켜봤다.

가끔씩 몇몇 학생이 기습적으로 나에게 질문을 했으나 수월히 대답할 수 있었다. 대부분이 엘레나 교수에게 들었던 강의라서 나름 쉬운 편이다.

"본디 역사라는 건, 과거에 발생한 사건 사고를 기록하는 것뿐만이 아니에요. 사람마다 역사가 있는 법이죠. 그 사람이 과거에 무슨 일을 했는지 자세히 관찰한다면, 미래에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예상할 수 있답니다."

"그럼 교수님. 하나만 질문해도 될까요?"

"네. 무슨 질문이죠?"

"방금 전에 제논 일대기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교수님은 제논의 행보를 어떻게 예상하고 있나요? 아, 물론 책 속의 제논이 아니라 작가를 말하는 겁니다."

"음..."

한 학생의 질문에 엘레나는 턱에 주먹을 갖다 대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였다. 괜히 내 이야기가 나와 뜨끔거렸지만 조용히 있었다.

솔직히 나도 그녀의 대답이 궁금해진다. 엘레나와 대화할 때는 제논 일대기가 아닌 역사에 중점을 두었으니까.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를 통해 미래를 예측한다는 말처럼, 특정인의 행보를 예측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다.

물론 그건 그 대상의 과거가 명확할 때의 이야기지, 불확실하다면 예측은 거의 불가능하다.

"솔직히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제논에 대한 가설은 수도 없이 많지만, 아직 명확하게 나온 건 거의 없으니까요. 단순히 그 인물의 업적만 보고 행보를 예측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에요."

"그렇다면 기록이 유실된 역사적 인물은 어떻게 해석해야 옳은 건가요? 가끔 가다가 앞뒤가 맞지 않는 행보가 나오기도 하잖아요."

"학생 이름이 어떻게 되죠?"

"마이클 데스토라입니다."

미들네임이 없는 걸 보면 평민으로 추측되지만, 반듯한 갈색 머리에 청명한 푸른 눈동자를 가져 깔끔한 인상을 주고 있다. 미남은 아니지만 훈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엘레나는 그런 마이클의 질문이 마음에 들었는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기야 저런 질문은 탐구심이 깊은 사람들이 하는 질문이니 교수 입장으로서 마음에 들만하다.

"정말 훌륭한 질문이네요. 마이클 학생에게 가산점을 주도록 하겠어요."

"네? 아, 감사합니다."

"마이클 학생의 질문처럼 기록이 사라진 역사가 있는 법이죠. 왜냐? 역사는 신이 아닌 사람에 의해 기록되거든요. 역사는 언제나 객관적이어야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의 주관에 따라 작성되고 있죠. 특히 기록이 사라진 경우는..."

마이클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설명해주기 시작한 엘레나. 나도 그녀의 옆에 서서 설명을 조용히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신경 쓰이는 게 있었으니, 바로 체리다. 설마 아직까지 지켜보고 있나 싶어 시선을 옮기니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더라.

대체 내가 무슨 관심을 끌었길래 저렇게 보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빨간머리가 그토록 신기한 건가.

'나중에 따라오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 나는 이쪽을 바라보는 그녀를 차마 무시할 수 없어서 시선을 마주했다.

체리는 나와 시선을 마주해도 전혀 피하지 않았다. 괜히 머쓱해져서 고개를 꾸벅 숙이니 그제서야 반응을 보였다.

깜­ 빡­

느릿느릿 눈을 깜빡이는 것으로. 입술 또한 미묘하게 달라져 호기심이 담긴 듯한 표정이었다.

그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가 엘레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단 당장은 강의에 집중할 생각이다.

체리에 대한 건 차차 고려하겠으나 절대 미루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토록 나에게 열정적으로 팬레터를 발송했던 팬인데 어찌 무시할 수 있을까.

불안함 때문에 관심이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다. 당분간 지켜보겠으나 불길한 조짐이 보인다면 곧바로 나설 것이다.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모두 수고하셨어요. 아이작."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시간이 흘러 강의가 종료되었다. 나와 엘레나는 학생들에게 힘찬 박수 소리를 들으면서 강의실 밖으로 향했다.

이미 다른 반의 강의가 끝났는지 복도는 학생들로 붐비는 중이었다. 작년과 달라도 다른 상황에 기분이 오묘해진다.

"확실히 작년이랑 다르네. 작년에는 밖에 나오면 텅 비어있었는데."

"그러게요."

"그런데 얘. 혹시 그 분홍 머리 애랑 아는 사이니?"

엘레나의 물음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저런 질문이 나올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어서 당황조차 하지 않았다.

"아뇨. 처음 보는 사이입니다. 저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흠... 그래? 눈빛이 죽어있는데다가 우울증에 걸린 것마냥 불안해 보이던데... 로즈베리 가문에 대해 아는 거 있어?"

"엘레나 교수님은 모르세요?"

"난 엘프잖아. 역사면 몰라도 인간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크게 관심은 없거든. 게다가 너도 귀족이니 알만하지 않을까 싶은데?"

"저도 잘 몰라요. 듣자하니 철학을 중심으로 두는 가문이라는데 그것 외에는 잘 모르겠네요."

아무래도 그녀도 체리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다.

내 대답에 엘레나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입을 다문 채 앞을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그 애도 이유가 있어서 너에게 관심을 가지는 거겠지. 아니면 빨간머리나 금색 눈동자가 신기한 걸 수도 있고. 아까 네 머리에 쏠리는 시선들 느꼈지?"

"그것보다는 교수님을 향한 시선이 더 많은 것 같던데요? 교수님은 엘프잖아요."

"그런가? 아무튼 강의는 어땠니? 쉬웠지?"

"나름 할만한 것 같아요."

"앞으로 그렇게만 하면 돼. 2학년 수업은 내일 있으니 오늘은 연구실에서 서적만 읽다 가."

"알겠습니..."

콰악­

"윽!"

대답하려는 찰나에 무언가 내 머리카락을 강하게 붙잡아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모라 때문에 강제적으로 기른 머리카락이라 가끔씩 어딘가에 걸리는 경우가 간혹 있다.

지금도 그런 이유인가 싶었지만 뭔가 다르다. 누군가 하나로 묶은 내 머리카락을 손으로 붙잡은 느낌이라 하나.

복도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아 장난을 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두피가 벗겨지는 듯한 고통에 인상을 찡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장난이라면 따끔하게 혼낼 생각이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자마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어?"

"... ..."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분홍색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 더해서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동태처럼 썩어버린 분홍색 눈동자와 인형처럼 예쁘장한 얼굴, 마지막으로 겨울용 교복(동복)으로도 감추지 못한 풍만한 가슴까지.

체리 블라썸 로즈베리, 그녀였다. 그녀는 하나로 묶은 내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쥔 채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깊디 깊은 심해 밑바닥 같은 눈동자가 사뭇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뭐 해... 체리 학생?"

엘레나도 내가 멈칫거리자 의아해 한 것도 잠시, 내 머리카락을 붙잡은 체리를 보자마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는 동안에도 체리는 내 머리를 붙잡은 손을 놓지 않으며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이에 얼떨떨해진 것도 잠시, 나는 의문을 억누른 채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무슨 일이신가요? 체리 학생."

"...빨간색."

눈을 느릿느릿하게 깜빡거리며 입을 연 체리.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인형이 말하는 것처럼 활기가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그나저나 빨간색이라니. 대체 무슨 의미를 담아 빨간색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엘레나는 물론이고 나 또한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동안 체리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시선을 내려 머리카락 쪽으로 옮겼다. 뒤이어 유심히 쳐다보더니 눈을 한 번 깜빡거리고 빈 손으로 교복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주섬­ 주섬­

"빨간색."

다시 한 번 중얼거린 그녀가 꺼낸 건 손가락만한 작은 유리병. 코르크 마개로 닫혀있어 보관하기에 아주 용이해 보였다.

허나 그 안에 보관돼 있는 건 나로 하여금 소름이 끼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왜냐하면...

"어..."

유리병 안에 저장돼 있는 건 가느다란 머리카락 한 올. 그것도 선명한 빨간색을 띄고 있는 머리카락이었으니까.

저게 왜 유리병 안에 있는 건지 알 수 없어 머리가 돌아가지 않고 있을 때, 체리가 특유의 음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편지에서 나온 거."

"... ..."

"이것도 빨간색."

이어서 그녀는 내 머리카락과 유리병 안에 보관된 머리카락 한 올을 서로 번갈아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논 작가님?"

* *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