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화 〉 2학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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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2학년은 1학년과 마찬가지로 유급을 면하기 위해 다양한 수업들을 듣는다. 1학년과 다를 게 거의 없지만 그나마 있다면 교수들이 바뀐다는 것 정도일까.
그러나 이것도 바뀌는 교수가 있고 그대로인 교수도 있다. 3학년부터는 조교가 되어 교수를 보좌하거나 수업에 큰 도움을 준다. 이때부터는 진로를 정한 셈이라 사실상 조교가 아니라 반쯤 대학원생 취급이다.
설령 진로를 정하지 않아도 졸업장을 따기 위한 과정도 있으니 문제없다. 사실 진로를 미리 정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없어서 3학년 때부터 조교가 되는 일은 문학생 중 반밖에 되지 않는다.
아무튼 간에 나는 앞으로 엘레나 교수를 따라다니면서 이것저것 도와주거나 수업에 직접 참가할 예정이다. 전에 언급했듯이 역사는 무학생들도 듣는 교양 수업이다.
무학생은 문학생과 달리 그 숫자가 훨씬 많으며 반도 각각 나뉘어져 있다. 아델리아의 설명으로는 본인이 처음 입학한 시절에는 반이 3개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무려 5반이 넘는다. 심지어 그중 반 이상이 평민이었으며 귀족의 숫자는 의외로 적다.
이 말은 즉슨, 10년도 안 된 사이에 미네르바 제국의 인재 발굴 능력이 상향평준화되었으며 시스템이 잘 구축됐다는 의미다. 입학 과정은 상대 평가가 아니라 절대 평가라 점점 증가할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무학생을 가르쳐야 하는 인력도 충족해야 되니 현재 다양한 방면으로 실력자를 고용하고 있다. 참고로 그중에는 우리 아버지도 있었지만 영지 일이 너무 바쁜 탓에 정중히 거절했다.
"아마 올해는 많이 바쁠 거야. 입학자가 약 350명이거든. 그중에 150명이 문학생이고."
"예?"
아카데미 개학날과 동시에 찾아간 엘레나의 연구실.
자료를 정리하는 도중, 엘레나가 흘러가듯이 꺼낸 이야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작년에는 입학생이 200명, 문학생은 50명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문학생은 3배나 불어났다. 그야말로 폭발적인 증가세.
방금 말했듯이 입학 시험은 절대 평가여서 입학생이 늘어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나 많아도 너무 많아졌다.
"너무 확 뛴 거 아니에요?"
"나도 처음에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가만 보면 납득이 되는 현상이야."
"납득이 된다고요?"
"응."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가 듣기에 다소 황당한 가설을 꺼내기 시작했다.
"제논 일대기 1권이 나온지가 언제인지 아니?"
"아마... 1년 하고도 반년 전 쯤일 걸요?"
내가 16살 때 1권을 발매했었으니 아마 얼추 맞을 것이다. 본격적인 떡상을 이룬 건 5권부터였으나 그전에도 나름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제논 일대기가 왜요? 설마 그것 때문이라고는 말하는 건가요?"
"맞는데?"
"... ..."
뭘 묻냐는 듯이 반박하는 엘레나 교수를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어이가 날아갈 것 같은 기분에 할 말이 없어진다.
제논 일대기가 남녀노소, 그리고 계급을 막론하기 읽기 쉬운 책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교육에 좋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다.
장르소설을 읽는다고 국어 능력 또는 독해 능력이 좋아지는가? 그럴 바에야 문학책 하나를 더 읽거나 사전을 찾아보는 편이 낫다.
수많은 평론가들이 제논 일대기를 칭송하고 있으나, 몇몇 평론가들은 입문이 너무 쉽다는 것을 단점으로 뽑았다. 너무 직관적이라서 철학적인 생각을 하기에 어렵대나 뭐래나.
그사이 엘레나는 살짝 내려온 안경을 추켜 올리더니 내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괄목할 점은 귀족의 숫자는 작년과 비슷하나, 평민의 숫자가 대폭 증가했다는 점. 그리고 제논 일대기는 계급을 상관하지 않고 쉽게 읽히는 책이지. 감이 잡히지 않니?"
"전혀요."
"아직 멀었구나. 하긴, 귀족으로 태어났으니 그럴만도 하겠지."
딱딱한 내 대답에도 엘레나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왠지 비아냥거리는 것 같아 미간을 좁혔을 때, 그녀가 손가락 하나를 펴며 이야기를 이었다.
"제논 일대기가 발매되기 전까지 평민들은 책을 읽기 어려워했어. 그 이유는 알고 있지?"
"모르는 단어 투성이에다가 전체적인 흐름을 잡기가 어려웠으니까. 맞죠?"
"아주 정확해. 반면 제논 일대기는 머릿속으로도 상상을 할 수 있게끔 문장력과 가독성이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쉬운 편이지. 사크란과 이종족 간의 사랑처럼 안에 담겨있는 내용도 파고들면 은근히 심오한 편이고."
여기까지는 평범한 찬양처럼 들린다. 그래서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려던 찰나, 엘레나는 아주 중요한 포인트를 하나 집어줬다.
"덕분에 첫 걸음을 떼기에 안성맞춤이다, 이 뜻이란다."
"첫 걸음이요?"
"그래. 첫 걸음. 무엇이던지 간에 첫 걸음이 아주 중요해. 이건 너도 알고 있을 거야."
엘레나의 말마따나 어떤 일을 하던 간에 첫 걸음을 떼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첫 걸음을 떼는 게 가장 힘들다.
사람은 미지에 대한 호기심이 있으나 동시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법이니.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너라면 이제 막 견습 딱지를 뗀 기사에게 드래곤을 잡으라고 할 거니? 아니면 오크를 잡으라고 할 거니?"
"당연히 후자죠. 누구 죽일 일 있어요?"
"그거랑 비슷해. 제논 일대기가 나오기 전의 책들은 너~무 어려운 것들밖에 없었거든. 재미는커녕 흥미도 없고, 관심이 있어도 기초적인 독해력조차 없으니 읽기가 매우 힘들지. 동화책 같은 건 아이들이 글을 뗄 때나 읽으니 사실상 의미가 없고."
"음... 그러니까 제논 일대기는 '책'이라는 활자에 접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건가요?"
"아주 정확해."
엘레나는 내 대답에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제서야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깨달았다.
제논 일대기는 그냥 '책' 자체에 접근하기 쉬운 서적이다. 엘레나의 비유처럼 방금 막 견습 딱지를 뗀 기사에게 드래곤을 토벌하라고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릴 것이다.
본인도 모르는 재능을 각성했다면 모를까, 십중팔구 사망할 게 뻔하다. 신이 직접 내려준 재능이 아닌 이상 어지간한 재능은 노력이 뒷받침해줘야 된다.
제논 일대기도 이와 비슷하다. '성장'에 있어서 그 어떤 책보다 효율적이며 상위 단계에 올라가기에 적합하다.
'뭐, 나도 원래 책에 관심이 하나도 없었지.'
전생의 나도 비슷한 테크트리를 탄 적이 있어서 매우 공감된다. 만화책만 주구장창 읽던 나에게 친구가 판타지 소설 하나를 추천했고, 글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장르소설에는 한계가 있어서 다른 책을 접하고, 나중에는 역사에 관심이 깊어져 역사와 관련된 책까지 읽었다. 만약 친구가 그때 소설을 추천하지 않았다면 역사책 같은 건 읽지 않고 인터넷이나 뒤적거렸겠지.
환생한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읽는 습관을 들였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빈둥빈둥 시간만 할애했을 것이다.
현재 벌어진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제논 일대기가 전대미문의 인기를 끌어서 책을 향한 관심이 많아졌고, 자연스레 다른 책을 향한 관심도 높아졌다.
비록 제논 일대기가 출판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건 여전했으나 다른 책의 판매 실적이 또한 상승했다는 소식을 얼핏 들은 것 같다.
"참고로 헤일로 아카데미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야. 테르스 왕국에 있는 아카데미는 문학생이 무려 5배나 증가했거든."
"그거 대단하네요. 무학생이 증가한 건 별개죠?"
"별개지. 뭐, 몇 년 뒤에는 늘어날지도 모르겠네. 자기도 제논처럼 영웅이 되겠다며 입학할 수도 있잖아?"
엘레나는 농담식으로 말했지만 실제로 그럴 것 같아 미소가 나왔다. 예로부터 영웅담은 아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으니.
물론 현실은 끔찍하기 그지 없지만, 그 각오가 끝까지 이어진다면 또다른 영웅이 탄생할 수도 있다.
"그런고로, 앞으로 많이 바빠질 예정이야. 원래 문학생은 한 반에 몰아서 넣었는데 이제는 3반으로 나눠야 되거든. 1학년뿐만 아니라 2학년 문학생, 그리고 무학생까지."
"...저에게 쉬는 시간은 있는 거죠?"
제논 일대기를 집필해야 하는 시간은 주지 않겠나. 그러기 위해서 추천 학생이 된 건데.
엘레나는 내 질문 속에 불안감을 느꼈는지 한 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대답했다.
"당연히 있지. 조수라면 모를까, 난 조교를 그리 험하게 굴리지 않아. 쉬는 시간은 충분히 줄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러면 다행이네요. 그런데 신디는? 신디는 어디로 갔어요?"
"신디는 잠깐 성지로 갔어. 아마 일주일 내에 돌아올 거야."
신디는 박사 학위를 따고 난 이후부터 매우 바빠진 모양이다. 얼굴을 보는 날보다 자리를 비운 날이 더 많아질 정도.
그 특유의 흐물거리는 얼굴을 못 본다는 게 조금 아쉽긴 해도 각자 인생이 있는 법이니 섭섭하지는 않았다. 앞으로 나도 바빠질텐데 다른 사람을 신경 쓸 겨를이 없기도 하고.
"문학생이 3배로 증가했는데 시스템도 바뀌나요?"
"조만간 바뀌겠지. 앞으로 조교는 추천 학생으로만 임명할지도 몰라. 그리고 지금쯤 위쪽은 머리가 좀 많이 아플 거야. 자기들도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을테니까."
"제논 일대기가 많은 걸 바꾸네요."
"인간 쪽 문학의 전성기를 이끄는데 단초를 마련하고 있지. 루미너스 님께서 괜히 칭찬한 게 아니야."
엘레나는 그리 말하며 시간을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고로 입학식은 어제 실시했으며 오늘부터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될 예정이다.
본래 역사는 이 시간에 진행되지 않으나, 반이 3개로 분할된 탓에 수업도 3배로 늘어난 참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2학년들의 수업도 진행해야 하니 그녀의 말마따나 앞으로 많이 바빠질 것이다.
"그럼 이제 슬슬 수업 준비하러 가자. 준비물은?"
"다 챙겼습니다."
"좋아. 긴장하지 말고 그냥 내 옆에서 수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지켜보기만 해도 돼. 물론 가끔 가다가 너에게 넘길 수도 있으니 멍 때리지는 말고."
"새겨듣겠습니다."
이후로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면서 수업이 진행될 강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학생이 3배로 늘어나 집필에 차질이 생기겠지만, 내가 시간을 쪼갠다면 큰 문제는 없다.
중간중간 마리와 세실리의 데이트도 고려하는 건 잊지 않았다. 어차피 오후 5시에 모든 수업이 끝나니 이건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내가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계획을 수정하는 동안, 불현듯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사실 아카데미에 오기 전부터 든 생각이다.
엘레나 교수에게는 어째서 조교가 없는 걸까. 이에 궁금해져서 앞장 서고 있던 그녀에게 물었다.
"엘레나 교수님."
"응?"
"교수님은 어째서 조교를 들이지 않은 건가요?"
"아. 그거? 별 거 아니야. 나는 추천 학생이 아닌 이상 조교를 안 받아."
"왜요?"
내가 의아해 하는 동안 그녀는 안경을 추겨올리더니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그래야 성장시키는 맛이 있거든."
"... ..."
"참고로 역사관에 있는 역사 교수들 전부 내 조교였어."
눈 앞에 헬 게이트가 열린 건 착각일 것이다.
'응. 착각이겠지.'
착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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