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화 〉 월척(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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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신체 부위는 어디일까. 두말 할 것 없이 '손'이라 대답할 것이다.
다리는 물론이고 허리가 아파도 손이 있다면 누워서라도 글을 쓸 수 있다. 설령 시력이 나빠져도 완전한 실명이 아닌 이상에야 글을 집필하는 건 무리가 없다.
그러나 손이 다치거나 불구가 된다면 그순간부터 집필은커녕 일상 생활에서도 큰 애로사항이 생기게 된다. 다른 손으로도 글을 쓸 수는 있으나 시간이 오래 걸리며 무엇보다 어색하다.
이로 인해 독자들은 작가가 손이 다쳤다고 밝히면 매우 안타까워하며 쾌유를 비는 것이 일반적이다. 손을 다쳤다는 건 작가에게도 큰 손실이어서 서로가 손해라 할 수 있다.
현재 제논 일대기의 작가, 제논(아이작)도 마찬가지다. 특히 제논은 특정 국가가 아니라 전세계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만큼 수많은 독자들이 그의 안전을 빌었다.
만약 그에게 이상이 생긴다면 제논 일대기의 출간이 뒤로 밀리는 걸 넘어 언제 나올지 전혀 알 수 없으니.
그리고 보통 책 한 권을 내기 위해 평균적으로 1~2달이 소요되는데 제논 일대기는 그보다 훨씬 적은 시간마다 신간이 나왔다. 무리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출간 주기가 상당히 빠른 편에 속했다.
무엇보다 원고에 핏자국이 묻어있다는 것을 출판사가 언급한 적이 있어서 그의 걱정을 우려하는 시선도 많아진 참이다. 지금 당장은 꾸준히 나왔기에 큰 문제가 없었지만...
[제논 일대기 작가, 제논. 괴한들에게 습격을 받아 오른손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으며 괴한 또한 물러났다. 그러나 제논 일대기는...]
[자의가 아닌 강제적 휴재, 그것도 오른손을 다쳐...]
제논이 괴한에게 습격을 받아 오른손을 다쳤다는 소식은 독자들에게 충격을 넘어 경악을 선사했다. 다른 부위도 아니고 하필이면 오른손이다.
심지어 다친 수준이 아니라 손가락이 하나하나가 기형적으로 꺾여버렸다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알려줬다.
출판사도 처음에는 대필이어서 믿지 않았지만 삐뚤한 친필 사인을 보고 진실이라 받아들였다고.
소설 작가의 가장 큰 재산이나 다름없는 손이 그 정도로 다쳤다는 건 최악의 경우 '무기한 휴재'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 의미다.
[제논 일대기 독자들의 분노. 출판사 앞으로 몰려와 해명 요구.]
[각 나라의 주요 인사들도 괴한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제논의 정체조차 모르는 마당에 괴한을 찾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
[세이비어 교국. 막대한 공물을 바쳐 루미너스 님에게 천벌을 부탁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기다려라.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분노로 점칠된 칼날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독자들은 격노했다. 제논이 사고도 아니고 괴한에게 습격을 당해 오른손을 다쳤다.
이 세상의 치안은 수도면 몰라도 외곽진 곳은 그리 좋지 못한 편이다. 도적떼가 수시로 출몰하여 약탈을 자행하는 지역도 있고, 설령 수도여도 밤에는 마냥 안전하지 않다.
가끔 가다가 누가 괴한에게 습격을 당하여 크게 다치거나 죽었다는 소식을 심심찮게 듣는 마당에 제논이라고 다를 건 없다. 특히 밤에 돌아다니는 불한당은 대부분 목적을 가지고 습격을 가한다.
그 대상이 우연찮게도 제논이 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지만, 하필이면 오른손을 크게 다쳤으니 독자들의 분노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현재 제논을 찾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오른손을 크게 다쳤으니 운이 좋으면 발견할 수 있을 것.]
[벨루아 공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오른손을 다친 사람을 발견했으나 제논은 아니었다. 평범한 기사.]
독자들이 분노한 사이 제논을 찾으려는 사람들 또한 증가했다. 오른손을 다친 사람은 이 세상에 많겠지만 비슷한 시기에 괴한한테 습격을 받았다면 그 범위는 현저히 좁혀진다.
사막에서 바늘 찾기가 아닌, 모래 사장에서 바늘 찾기로 범위가 줄어든 격이지만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
이런 상황 속에서 제논을 찾고 싶냐는 비난이 일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제논을 찾기가 어려우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제논은 오른손만 다친 것인가? 아니면 괴한들은 제논이 누구인지 알고 있던 것인가?]
[오른손은 자주 쓰기에 다칠 수도 있지만 그 괴한들이 제논의 정체를 알고 일을 저질렀을 확률이 적지 않다.]
[괴한의 목적은 정말로 제논의 오른손이었나? 아니면 그저 우연?]
분노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물론 괴한이 제논의 오른손을 노리고 해를 가한 거라면 그건 그것대로 더 큰 문제다.
이처럼 사건이 점점 오리무중으로 빠져들고, 독자들의 분노가 끓어오르다 못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알븐하임의 아르웬 여왕. 국민들이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이 시국에 아르웬 여왕이 알려줄 사실? 알븐하임의 국민을 포함한 주변 국가들은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어...]
[혼혈 사태 이후 두 번째 대국민 연설. 그녀가 앞으로 밝힐 사실이 무엇인가?]
뜬근없이 알븐하임의 여왕, 아르웬이 혼혈 사태 이후 또다른 대국민 연설을 준비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제논 일대기가 잠정 휴재인 지금 상황에서 다소 이해할 수 없는 행보였다.
그러나 아르웬은 현재 알븐하임의 국민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 국민들을 포함해 타국의 인사들은 의아함도 잠시 그녀가 무엇을 밝힐지 궁금해하며 자리를 옮겼다.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던 혼혈 사태를 뛰어난 연설 실력으로 잠재웠으며, 더 나아가 하나의 엘프로 규합시키기까지 했으니 주변 국가는 경계할만한 사안이다.
아무리 괴한의 습격으로 인해 제논의 오른손이 망가졌다고 한들 국정은 돌봐야 했으니. 그렇게 혼혈 사건처럼 수많은 인사들이 알븐하임으로 향하고, 아르웬 여왕이 무슨 말을 할지 지켜보기로 정했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로.
*****
아르웬의 연설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위그드라실의 대광장에서 이루어진다. 원로원을 포함한 명문가들은 아르웬을 좀 더 잘 볼 수 있도록 단상 앞쪽에 배치되었고, 타국의 VIP는 그 뒤에 배치된 의자에 앉는다.
나머지 국민이나 관광객들은 엘프 전사가 알려준대로 주위를 에워싸듯이 모였다. 평범한 연설도 아니고 아르웬이 직접 행하는 대국민 연설이라 많은 수의 인원들이 한데 모이게 되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대국민 연설까지 하려는 걸까요?"
"음... 그건 나도 모르겠군."
원로원의 수장, 피렌은 측근의 질문에 턱을 매만지며 의아함을 숨길 수 없었다. 이 시국에 대국민 연설을 한다는 건 영 어색하다.
연설을 미리 준비해 놓았다더라도 여러모로 상황이 그닥 좋지 못 했다. 혼혈 문제는 훌륭하게 수습되었으니 그것과 관련된 일은 아닐 터.
더군다나 시국이 시국인만큼 이 시기에 연설을 한다는 건 정치적으로 큰 효과를 보지 못 한다. 이것도 잠시일 뿐이지 어차피 곧 있으면 다시 제논에게 시선이 갈 게 불보듯 뻔한 일이니까.
'도대체 뭐지? 자기 애인이 다쳤으니 우울하다고 하소연하는 건 아닐테고... 그 놈이 여왕에게 말해줄 리도 없을텐데...'
피렌은 연설이 준비되는 동안 턱을 만지면서 골똘히 생각했다. 이미 그는 제논이 아르웬의 전 연인이라고 속으로 확정지은 참이다.
게다가 제논이 그녀에게 범인을 알려줬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맹약에 그렇게 적혀있었으니까. 출판사에 보낸 편지에도 괴한에게 습격받았다는 문장만 있을 뿐, 정체는 알려주지 않았다.
맹약의 헛점을 잘 이용했다고 볼 수 있으나 결정적인 증거는 되지 못 했다. 그러므로 아르웬의 연설은 순전히 우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보통 연설은 정치적으로 큰 이득을 보기 위해 행하는 일이 많으나 지금은 피렌도 잘 모르겠다. 눈치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또다른 사실을 밝힌 것인지.
'대체 뭐지? 이 불안감은...'
평소 아르웬을 견제하면서 그녀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선 아르웬은 특유의 화술뿐만 아니라 정치적 능력도 출중한 편이다.
본래 정치라는 건 확실한 '적'을 두어야 자기 편을 만들기 편하다. 그리고 아르웬은 원로원을 적으로 두고 있으며 그녀와 함께 할 명문가들도 차근차근 포섭하고 있다.
종족 전쟁 이후 원로원은 저물어가는 태양,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무시할 수 없다. 아르웬 혼자서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런 불안감으로 인해 혹시 그녀에게 숨겨둔 수가 있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며칠 전 칼라스가 갖고 온 맹약서는 결코 거짓이 아니다.
수백 년 간 정치에 몸을 담아온 특유의 촉이 발동되는 순간이었으나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피렌은 턱을 만지면서 고민하다가 문득 옆자리가 비어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번 일에 큰 공을 세운 칼라스를 위해 친히 옆자리를 비운 것인데 정작 그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칼라스는? 칼라스는 어디로 갔나?"
"가문에 일이 생겨서 불참한다고 했습니다."
"가문의 일이라... 그럼 어쩔 수 없지."
원로원이 중요하지만 가문에 일이 생겼다면 별 수 없다. 하지만 그럴수록 피렌의 불안감은 증폭되었다.
과연 칼라스는 가문의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운 것일까. 그렇다면 이 불안함은 무엇일까.
피렌이 수백 년간 원로원에 몸을 담을 수 있던 이유가 바로 이 촉 덕분이었으나 원인을 모르면 함부로 나서지 않았다. 촉을 믿기에 세상은 감정적으로 돌아가지 않으니.
결국 연설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불안감을 해소시키지 못 하여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모두 정숙! 여왕 폐하가 나오십니다!]
연설이 시작되기 직전, 안내인이 음성 증폭 마법을 통해 아르웬의 등장을 먼저 알렸다. 저번과 달리 아르웬이 단상 위로 올라오기도 전에 안내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 광장을 가득 메웠던 웅성거림이 곧바로 잦아들고, 미묘한 분위기가 장내에 맴돌았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아르웬이 단상 위로 올라오기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또각 또각 또각
조용한 광장 내에 울리는 구두 소리. 사람들은 아르웬이 단상 위로 올라오고 있구나라고 직감했다.
피렌 또한 팔짱을 끼며 다소 거만한 자세로 그녀가 단상 위로 올라오는 것을 조용히 지켜봤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은 여전히 가슴에 품은 채로.
또각
마침내 알븐하임의 여왕, 아르웬이 거목 앞에 세워진 단상에 당당히 서서 군중들과 마주했다. 군중들은 단상 위에 선 아르웬의 자태를 면밀히 살펴봤다.
은하수가 흐르는 듯한 은회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소녀처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아담한 체구. 하지만 얇은 허리 밑으로 굴곡진 골반 라인으로 하여금 성숙한 매력을 뿜내고 있다.
혼혈 사태 당시 은회색 드레스가 아닌, 싱그러움을 풍기는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아르웬. 그녀는 군중들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맨 앞에 앉아있는 피렌과 시선을 마주쳤다.
피렌은 그녀와 눈을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인사도 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봤다. 빨려들어갈 듯한 은회색 눈동자에 무슨 생각이 담겨있는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모두들 와주었구나. 먼 길을 오느라 고생한 자들도 있고."
아르웬은 피렌과 시선을 교환하다가 말고 정면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음성 증폭 마법으로 은쟁반에 옥구슬 흘러가는 듯한 목소리가 광장 전체를 뒤덮었다.
"아마 많이 궁금할 것이다. 어째서 이런 중요한 시국에 내가 그대들을 불러 연설을 준비했는지를. 의아할 수도 있고, 어쩌면 황당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앞으로 내가 알려줄 것들은 그대들에게, 그리고 어쩌면 이 세상에게 아주 중요한 부분이 될 수도 있다."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가던 아르웬은 순간 뒤를 돌아보더니 이리 오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그 행위에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의문이 자리잡았다.
말을 하는 도중에 누군가를 부른다는 건 연설에 적절치 못한 행동이다. 하지만 아르웬은 첫 시작부터 이리 오라는 듯이 손짓했다.
모두가 의문을 가슴에 지니며 기다리고 있을 때, 누군가 단상 위로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직접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양 옆의 전사들에게 붙잡혀 끌려오는 채로.
저벅 저벅 저벅
"...카, 칼라스?!"
"마, 마엘과 레나도... 대체...?"
전사들에게 끌려와 단상 위로 올라온 사람들은 다름아닌 칼라스와 그의 부하들. 당연히 피렌과 그의 측근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절망과 체념이 두루 섞인 표정을 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직감할 수 있다. 그제서야 피렌도 내된 불안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그것도 심각할 정도로.
수백 년 간 정치를 한 노련한 정치인으로서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가 머리를 굴렸지만, 나오는 건 하나도 없었다. 칼라스가 배신했을 리는 없거니와 맹약서는 분명히 진실이다.
잡힐만한 건덕지가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된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사람들은 누구야?"
"글쎄? 보아하니 죄인인 것 같은데..."
"왜 굳이 죄인을 단상에 끌고 온 거지? 무슨 큰 잘못이라도 했나?"
"아마 그렇겠지."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군중들은 단지 죄인이겠거니 유추하고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아르웬은 칼라스 일당이 단상 위로 올라오자마자 술렁이는 광장 내부에 슬쩍 피렌을 바라봤다. 피렌은 파리해진 안색으로 본인의 심정을 단편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에 그녀는 속으로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목소리에 힘을 주며 외쳤다.
"현재 제논의 오른손이 신원불명의 괴한에게 망가졌다는 소식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모두 죄인들의 얼굴을 보아라! 죄인의 이름은 각각 칼라스, 마엘, 레나!"
아르웬이 소리치자 금방 사그라든 군중들의 웅성거림.
마지막으로 그녀는 호소력 짙은 본인의 목소리를 이용해 군중들에게 소리쳤다.
"원로원의 수장, 피렌 게리트 스톰워커의 지시를 받아 제논을 습격한 죄인들이니라!"
도화선이 전부 타들어가고, 폭탄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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