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 미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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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원.
알븐하임의 역사를 함께 했다고 무방할 만큼 긴 역사를 자랑하는 정치 기구.
특정 문명이 수립된다면 반드시 문명을 이끌어 나갈 '지도자'가 필요하며, 그 지도자는 대부분 '왕'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 왕은 백성들이 보다 더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리고 주변의 위험으로부터 나라를 부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의무와 책임을 가진다.
하지만 알븐하임이 건국된 당시 '왕'은 없었다. 본디 왕이라는 건 백성들 위에 군림하며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존재. 일반 백성이 우러러 보아야 하는 계급이다.
그 당시 엘프들은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자존심 하나 때문에 누군가에게 지배받는 것을 극도로 거부했다. 자신들을 지배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신들 뿐이라며, 차라리 그들의 신탁을 받고 나라를 운영하겠다는 마인드로 버텼다.
이로 인해 맨 처음의 지도자들은 '성직자'였다. 성직자들은 양질의 공물을 바쳐 신에게 직접 신탁을 받았으며, 나라를 수월하게 운영했다. 알븐하임의 백성들도 삐걱거렸으나 문제없이 생활을 이어갔다.
'악마 전쟁'이라는, 신의 힘을 조금이나마 의심하게 되는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다행히 세계수의 씨앗을 선물받아 어찌어찌 격퇴하긴 했지만 엘프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러다가 다음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하면 신의 목소리를 듣기 전에 늦을 수도 있겠구나.
신이 아닌, 엘프들이 스스로 알븐하임을 운영해야 앞으로 발전할 수 있겠구나라고. 이를 통해 탄생한 정치 기구가 바로 '원로원'이다.
처음에는 신이 아닌 필멸자에게 지배받는 것을 꺼려하던 엘프였으나 시간이 차츰 흘러갈수록 그 생각은 희미해졌다.
또한 처음이 으레 그렇듯, 원로원도 깨끗한 마음씨와 뒤틀리지 않은 신념을 지닌 채 알븐하임을 지혜롭게 다스렸으며 그중에서는 다크 엘프도 소속돼 있다. 사실상 진정한 의미의 엘프는 이때가 마지막이라 할 수 있었다.
허나 권력은 그 힘이 강해지면 도덕성이 사라지고 부패해지는 법. 원로원도 점차 자기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 다른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다크 엘프. 이들은 소수 민족에다가 피부색, 그리고 모시는 신마저 다르니 탄압하기에 아주 좋은 대상이었다. 그 결과로 벌어진 사건이 바로 다크 엘프의 추방.
어찌 보면 다크 엘프의 추방에는 원로원이 깊게 관여했다고 볼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종교 간의 다툼이 광기로 변질되었으나 원로원이 그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격이다.
이후로 신의 제지를 통해 광기가 옅어지고, 최악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기록마저 유실시키는 짓을 저지른 원로원. 이미 썩을대로 썩어 버린 정치 기구였지만 폐지는커녕 존속을 유지했다.
다크 엘프 추방 사건 때만 해도 대사건이었지만, 원로원의 부패가 전면적으로 드러난 종족 전쟁이 터져버렸다. 전쟁의 승기를 쥐여 줄 수 있던 전사장까지 감옥으로 투옥시키고 기어코 나라의 패배로 이끈 원흉.
평소에는 쉬쉬하고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폭발하면서 원로원의 폐지를 요청하는 국민들이 증가하고, '왕위'가 탄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은 악착같이 존속을 유지했다.
원로원은, 그 존재만으로도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알븐하임의 역사를 함께 한 상징이다. 그 상징을 없앤다는 건 알븐하임으로서 큰 손실을 감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다른 종족에 비해 '변화'를 유독 싫어하는 엘프의 특징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셈이다.
"편히 앉게나. 아, 혹시 먹고 싶은 거라도 있나?"
"괜찮습니다."
위그드라실의 어느 한 저택의 응접실. 검소한 배경의 응접실에 두 남자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원로원의 수장, 피렌과 그의 심복 칼라스.
피렌은 마치 온화한 할아버지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반면, 칼라스는 긴장했는지 얼굴이 약간이나마 굳어있는 상태였다.
"세계수의 잎을 달인 차일세. 피로에 제격이지."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칼라스는 피렌이 마시라고 권유하자 눈치를 보다가 찻잔 안의 액체를 바라봤다. 희미한 초록빛을 머금었으며 은은한 향기가 후각을 자극했다.
세계수의 잎을 달인 차는 그 이름처럼 가격대가 무시무시하다. 세계수에 직접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 몇 없을 뿐더러 잎을 신선하게 보존하기 위해서는 마법 처리가 필수였으니.
대신 그만큼 효력도 훌륭하다. 피로에 탁월한데다가 청심환처럼 안정에 효과가 뛰어나다. 현재 긴장으로 가슴이 뛰고 있는 칼라스에게는 안성맞춤인 차.
이윽고 차를 한 모금 마시자 시원한 맛이 입 안 가득히 퍼졌다. 초록빛을 띄는 것과 다르게 아무런 맛도 나지 않고 단지 시원함만이 퍼질 뿐이었다.
"그래서, 제논은 찾았나?"
피렌은 자지구레한 말들은 집어치우고 본론부터 들어갔다. 칼라스에게 제논을 찾으라 명령을 내렸던 그였으니 기대가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그에 칼라스는 순간 멈칫거렸으나 이내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피렌이 의심이라도 했다간 귀가 새까맣게 썩어들어가는 것을 방치할 수밖에 없다.
제 아무리 원로원에 소속되었다라도, 귀를 스스로 잘라내야 할 만큼 소중하지는 않다.
"물론입니다. 역시 인간들은 별 것 없더군요. 특히 출판사 사장은 아무런 능력도 없는 인간이라 추적하기 쉬웠습니다."
"호오. 그거 대단하군. 제논은 다른 종족의 힘을 빌려 정체를 숨겼을 줄 알았는데. 예를 들면 마족이라던지."
피렌은 제 딴에는 흘러가듯이 이야기했지만 칼라스는 찔릴 수밖에 없었다.
마족은 제논의 저택에 있다. 심지어 단순한 마족 정도가 아니라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다.
심지어 제논의 아버지는 붉은 사자라고 명성이 자자했던 기사. 출판사 사장이 방심했던 것이지 주변인은 일반인의 범주를 한참 넘어섰다.
"아마 자신이 있었겠죠. 그게 아니고서야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자만에 어울리는 대가로군. 그래서 이름이 무엇이고 어디에 사는지 알려줄 수 있겠나? 나중에 얼굴을 좀 봤으면 하는데."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칼라스는 피렌이 질문을 하고 차를 마시는 동안 머리를 굴렸다.
마이샬 영지의 저택에서 잡혔을 당시, 아이작은 피렌에게 올릴 보고를 친절하게 하나하나 읊어줬다. 가명과 더불어 사는 지역, 마지막으로 상세한 외모까지.
칼라스는 피렌이 눈치채지 못 하도록 입에 침을 묻히고는 차분히 알려줬다.
"이름은 제논 클라우드. 테르스 왕국의 하스크 지방에서 살고 있던 인간 노인이었습니다. 외모는... 그냥 누가 보아도 현자처럼 생겼다는 말밖에 못 하겠군요. 수염을 단정하게 기르고, 백발에 푸른 눈을 지녔습니다."
"그정도만 해도 충분해. 그나저나 '회유'를 잘 했는지 궁금하군."
피렌은 능글맞게 '회유'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그가 언급한 회유는 원로원 편에 서서 제논 일대기의 파급력이 이용하는 것.
당장 제논 일대기로 인해 원로원의 힘이 약화된 상황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경각심을 가진 것뿐이지만, 세계수 뿌리의 오염이 현실화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제논 일대기에는 모두 알다시피 '의회'라는 엘븐하임의 정치 기구가 있다. 원로원을 모티브로 삼았다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문제는 그 의회가 저지른 일들이 하나 같이 심각했으며 현실의 원로원 또한 실제로 행했던 부분들이라는 것이다. 가장 큰 예시로 다크 엘프의 추방 사건.
제논이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다크 엘프의 추방 사건은 원로원이 직접 행하지 않아도 관여를 했기에 찔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를 회유시킬 작정이었지만, 회유가 안 된다면 '수단'을 써서 억지로 협력 관계를 맺는다는 게 계획이다. 정체가 발각된 이상 사실상 이쪽이 우위였으니.
이에 칼라스는 언듯 비열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뭐, 대의원님도 예상했다시피 회유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소중한 문화를 검열하는 놈들과 한 패가 되기는 싫다며 문전박대하더군요. 예술가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예술가들의 특징이긴 하지. 그래서?"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 하도록 약간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평생 글을 못 쓰게 만들겠다고 하니 금방 울고 불며 빌더군요."
"허허허허허!"
피렌은 그 대답에 만족했는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묵혀 있던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그러나 사람은 기분이 좋게 변하면 판단력이 극도로 흐려지는 법이다. 이건 원로원의 수장으로 활동하던 피렌에게도 통용되는 이야기다.
만약 조금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했으면 칼라스의 '실수'를 크게 다그쳤을 것이다. 현재 제논의 명성이 얼마나 드높은지, 그리고 그에 따른 파급력이 얼마나 강한 건지.
단지 제논을 위험 요소로만 보고 있던 피렌의 가장 큰 실수라 할 수 있다.
"아주 좋아. 그 조치라는 게 어떤 건지 궁금한데 말해 줄 수 있나?"
"뭐... 당분간 글을 쓰지 못 하도록 손가락을 꺾어버렸습니다. 하스크 지방은 도시와 동떨어진 곳이니 신전에서 치료를 받지 못 하겠죠. 대신 포션을 주긴 했습니다."
"만족스럽군. 그리고?"
"피렌 님께서 만족하실 만한 물건을 제가 또 가지고 왔습니다."
칼라스가 품 안을 뒤지자 피렌의 눈은 호기심과 기대로 가득 채워졌다. 이미 제논을 물 먹였다는 부분에서 만족스러웠지만 이 충성스러운 심복은 더 좋은 소식을 갖고 온 모양이다.
뒤이어 칼라스가 종이를 한 장을 건네주자 피렌이 흥분한 표정으로 가져왔다. 마나가 담겨있는 걸 보면 평범한 종이가 아니다.
"이건..."
"맹약서입니다."
"맹약서?"
"예. 한번 읽어보십시오."
칼라스가 권유하자 피렌은 기대감을 품고 맹약서에 적혀있는 조항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첫 조항부터 입가에 미소가 절로 나왔으나 읽으면 읽을수록 만족감이 부풀어 올랐다.
설마하니 맹약까지 맺을 줄은 생각치도 못 했다. 그것도 이리 만족스러울 정도로.
원래는 제논의 정체 및 거주지만 찾는 일로 끝낼 작정이었으나 칼라스는 한 술 더 떴다. 피렌이 복잡하게 생각할 건덕지를 모두 해소한 격이다.
"정말로... 훌륭하군. 여기까지 해낼 줄은 생각치도 못 했는데. 내가 자네를 과소평가한 모양이야. 사과하겠네."
"아닙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여지껏 제논이 어떤 인간인지도 몰랐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자네의 능력이 출중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네. 덕분에 우리 원로원이 힘을 쓸 수 있겠군."
겉보기에는 훈훈한 화목의 현장이었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검열과 탄압, 그리고 권모술수의 더러움이 만연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 더러운 현장을 모두 지켜보는 이가 한 명 있었으니...
'...토할 것 같네.'
저택의 방범 마법을 전부 뚫고 침입한 다크 엘프, 시리스다.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을 눈으로 지켜보며 전부 녹화하고 있었다.
만약 평범한 도적이나 마법사였다면 방범 마법에 감지되었겠지만 그녀는 다크 엘프. 신중하게 움직인다면 잠입하는 건 어렵지 않다.
더군다나 만약을 대비하여 모라에게 신성력을 받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제 아무리 다크 엘프의 잠입 능력이 뛰어나다한들 한계는 명확하다.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지, 피렌의 저택은 그 주인의 성격에 걸맞게 보안이 의외로 취약한 편이다. 그 누가 이 저택을 침입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자네는 정말 훌륭한 일을 한 거라네. 앞으로도 열심히 해주게나."
"감사합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원로원에 입단하려는 젊은이가 없는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런 어중이떠중이 보다는 자네 같은 인재가 필요하니까."
시리스를 그 이야기를 듣고 하마터면 피식거릴 뻔했다. 신세대 엘프가 원로원을 멀리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썩어도 단단히 썩었다는 걸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권력은 부패하게 되기 마련인데 원로원은 오죽할까. 더군다나 장수하는 엘프의 특성상 '썩은물' 현상이 더욱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원로원의 힘은 약화되겠지만, 그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 그 사이에 어떤 사건사고가 터질지 전혀 모른다.
'이제 그 시간을 앞당기게 되겠지.'
시리스는 피렌과 칼라스의 대화 내용을 듣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어차피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했으니 남은 건 아르웬에게 전달하는 것 뿐.
'우리도 얼마 후면 알븐하임에 들어갈 수 있는 걸까?'
다크 엘프 추방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800년 전에 발발한 사건이다. 아직도 그 사건을 기억하는 다크 엘프가 있지만 여전히 알븐하임을 그리워하고 있다.
몇몇 신세대 다크 엘프들은 그런 그들을 이해하지 못 하고 있으며 시리스도 비슷한 심정이다. 그러나 새로 출간된 제논 일대기를 읽고 마음이 약간 바뀌었다.
언제까지고 숲 속에서 생활할 수 없는데다가 스스로 귀를 잘랐더라도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자부심은 여전하다. 제논 일대기는 엘프 뿐만 아니라 다크 엘프의 마음마저 서서히 움직였다.
'여왕님이 잘 해내시겠지.'
시리스는 미묘한 감정을 가슴에 안은 채 아르웬이 지내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그로부터 며칠 후, 미네르바 제국의 출판사.
"이, 이게 진짜인가?"
"...예. 그렇습니다. 삐뚤하긴 해도 친필 사인까지 있는 걸 보면..."
"아..."
출판사 사장은 아이작이 보낸 편지를 보고 절망했다. 편지 내용은...
[독자 여러분. 죄송합니다. 괴한의 습격으로 오른손이 심각하게 다쳤습니다. 당분간 연재는 불가능할 것으로...]
미리 설치해 놓았던 도화선에 불을 붙이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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