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화 〉 미끼(1)
* * *
엘프들이 피렌에게 어떤 거짓말을 해야할지는 대략 이렇다. 제논의 본명과 거주지, 외모, 마지막으로 더이상 글을 쓰지 못 하도록 조치를 취했다는 것까지.
맹약에 어긋나지 않는데다가 피렌이 직접 이들에게 추적을 맡길 정도면 어느정도 신용한다는 의미이니 이런 거짓말에 잘 속아넘어갈 확률이 크다.
물론 피렌도 바보가 아닐 테니 증거를 원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럴 때를 대비하여 준비한 게 있으니, 바로 '가짜 맹약서'다.
맹약은 서로 간의 합의가 이루어져야 효력을 발휘하고 있으나, 일종의 '계약서'인만큼 사기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중 가장 큰 사기 수법은 아까 말했듯이 가짜 맹약서.
합의도 하지 않았는데 언듯 괜찮아 보이는 조항을 보여주고 맹약을 맺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예로부터 많았다. 맹약이 맺어졌는지 확인하는 방법이 다양하여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잘 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방법은 신뢰를 어느 정도 쌓인 상대에게나 통하는 수법이다. 칼라스가 피렌이 자신들을 지목한 이유도 신뢰까지는 아니어도 신용은 한다고 말했으니 잘 먹혀들어갈 것이다.
단, 가짜 맹약서인 것이 들통나지 않도록 꼼꼼하게 조작하는 건 필수다. 세실리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 말라고 했으니 큰 문제는 없다.
모든 미끼가 준비되었겠다, 남은 건 입질이 오기까지 기다리는 것 뿐. 이런 저런 준비를 하다 보니 어느새인가 밖에 해가 뜨기 직전이었다.
나는 극심한 압박감으로 인해 초췌해진 칼라스와 그 일당을 바라보면서 확인을 구했다.
"내 말 알아들었지? 너희들 귀가 새까맣게 변질되기 싫으면 내가 말하는 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알겠습니다."
이제는 자존심마저 깔끔하게 접었는지 칼라스조차 존댓말을 사용했다. 포박된 상태로 몇 시간 동안 압박을 받았으니 마음이 피폐해질 만도 하다.
게다가 이들은 엘프. 이런 상황 자체를 겪은 적도 없을 것이다.
"아이작. 여기 맹약 다 적었어."
"흠..."
잠시 후, 나는 세실리에게서 가짜 맹약서를 받고 조항을 확인했다. 오만한 엘프가 된 입장에서 적어달라고 부탁했는데 과연 어떻게 적었을지 궁금하다.
[앞으로 제논 일대기는 원로원의 허락 하에 집필할 것.]
오케이. 1항만 봐도 충분하다. 엘프의 좋지 못한 점을 전부 배제하고 좋은 점만 적으라는 조항도 있었으나 첫번째만으로도 끝났다.
정말로 종족우월주의에 가득 찬 피렌의 마음에 쏙 들어 할만한 조항이란 조항은 다 들어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 조항대로 제논 일대기를 집필했다면 프로파간다로 대체되겠지.
그만큼 엘프 하나만을 바라보고 쓴 조항이었으며 복잡하지 않고 간결했다.
"여기에 사인을 하고... 너도 사인해."
칼라스는 가짜 맹약서에 서약을 하고 품 속에 고이 집어넣었다. 가짜 맹약서까지 모두 준비되었겠다, 나는 다시 한 번 경고했다.
"명심해. 너희들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귀가 아니라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으니까. 알겠어?"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피렌 그 늙은 엘프한테 돌아가. 내가 알려준 건 잘 이용하고."
내가 손을 휘적휘적 내저으며 말하자 엘프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모습을 감추었다. 마나의 파동이 느껴지는 걸 보니 텔레포트를 사용한 것 같다.
기회가 되자마자 도망치는 모습이 조금 웃겼지만, 아직 작업은 남아있다. 나는 엘프 추적대가 사라지자마자 세실리에게 말했다.
"누나. 시리스 씨에게는 말했어?"
"아마 지금쯤 쫒아갔을 거야."
"텔레포트를 사용해도 문제는 없는 거야?"
"응. 텔레포트의 원리만 이해하면 추적하는 건 어렵지 않아. 오히려 텔레포트가 발각당할 위험이 커. 무슨 원리인지 알려줄까?"
"아니, 괜찮아."
마법은 그냥 신기한 힘으로 치부하는 편이 이롭다. 나는 전생의 기억 덕분에 지식이 많을 뿐이지 똑똑한 건 아니니까.
"아들아. 정말로 성공할 거라고 보느냐?"
상황이 어느정도 종료된 걸 느끼셨는지 아버지가 팔짱을 끼시며 나에게 질문했다. 그의 얼굴에는 의문이 자리잡혀 있다.
엘프들이 저택으로 침입하기 전에 대략적인 계획을 알려드렸긴 했지만,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모습. 정치에 직접 발을 담지 않았으나 멀리서 지켜본 적이 있는만큼 현재 상황이 걱정되는 모양이다.
나 또한 아버지처럼 100% 확률로 성공할 거라고 보지는 않는다. 세상은 본래 자기 마음대로 되는 법이 없으며 사람은 궁지에 몰리게 되면 예상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기 마련이니.
하지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사실상 이 싸움은 이쪽이 매우 유리하다. 중간에 변수가 발생해도 차단시켜줄 수 있는 조력자도 있으니 흐름 자체는 꺾이지 않을 것이다.
"뭐, 아버지가 걱정하시는대로 무조건 성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흐름이 어긋나진 않겠죠. 남은 건 여왕이 얼마나 잘 선동하냐에 따라 갈릴 거예요."
"선동이라... 듣자하니 연설은 기똥차게 잘 했다고 들었는데 선동은 모르겠구나."
아버지는 아르웬의 연설을 직접 들은 적이 없으셨기에 턱을 긁적거리며 애매해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본래 연설과 선동은 종이 한 장 차이다. 특히 커다란 진실 속에 약간의 거짓을 섞는다면 사람들은 속을 수밖에 없다.
하물며 이곳은 인터넷은커녕 정보조차 제대로 퍼지지 않는 세상. 전생의 누군가 이런 유명한 어록을 남긴 적이 있다.
선동은 문장 한 줄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고.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고 할 때면 사람들은 이미 선동당해 있다고 말이다.
나치의 유명한 연설가, 괴벨스가 말했다는 풍문이 있지만 그 증거가 없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할만큼 괴벨스의 선동 능력이 뛰어났다는 증거다.
그리고 내가 본 아르웬은 괴벨스까지는 아니어도 호소력이 짙은 연설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단지 연설문을 줬을 뿐이고 그 연설을 성공적으로 마친 건 아르웬이었으니 그녀의 능력이라 보아도 모자람이 없다.
"분명 잘할 거예요. 여왕을 향한 여론이 얼마나 좋은지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순혈과 혼혈을 하나로 뭉치게 한 것도 아르웬이라고요."
"그건 네 연설문 덕분이잖냐. 하지만 지금은 네가 도와줄 수도 없을텐데..."
"그래서 남은 건 여왕의 손에 달려있다는 거죠. 아마 지금도 준비를 하고 있을 거예요."
아르웬 입장으로서는 눈엣가시를 넘어 암덩어리나 다름없던 원로원을 일망타진할 절호의 기회다. 시리스를 통해 계획을 알려줬으니 그녀도 그에 따른 준비를 하고 있을 터.
나는 그저 여유롭게 기다리며 상황을 지켜보면 그만이다. 도중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때 조치를 취하면 되고.
"흠... 내가 알븐하임의 정치에 대해 잘 몰라서 묻는 거다만 원로원의 세력과 여왕의 세력이 서로 비등한지 궁금하구나."
"서로 비슷한 걸로 알아요. 원로원이 지닌 그 상징성 때문에 함부로 나서지 못 했을 뿐, 불만을 가진 명문가들도 많았거든요. 애당초 원로원을 견제하기 위해 왕위가 생긴 거고요."
제 아무리 아르웬의 처세술과 정치 능력이 뛰어나도 홀로 견제를 받는 건 정신적으로 매우 고단한 일이다. 여태까지 알븐하임 왕좌의 주인이 수도 없이 바뀐 걸 보면 견제가 얼마나 심한지 대충 알 것이다.
그러나 아르웬이 꿋꿋하게 버티는 걸 보고 명문가들도 어? 할만한데? 라는 심정으로 그녀의 뒤를 봐주고 있다. 더군다나 연설을 통해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상 명문가의 지지는 더욱 굳건해졌다.
"그렇다면 상관없겠지만 알븐하임에 피바람이 부는 건 막을 수 없겠구나. 네 손이 다쳤다는 것만 해도 중대 사항인데 그 범인이 원로원이라는 게 밝혀진다면..."
"아르웬도 분명 인지하고 있겠죠. 하지만 허락한 걸 보면 그녀도 감안하고 계획을 수립한 걸로 보여요."
원로원은 알븐하임의 발전을 저해하는 집단인 건 분명하지만 그 상징성만큼은 깎아내릴 수 없다. 그 상징을 아르웬이 부수게 되면 국민들의 충격도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그에 따른 후폭풍은 그녀가 전부 감내할 수밖에 없다. 부디 그녀가 슬기롭게 받아넘길 수 있기를 내심 바라고 있다. 알븐하임이 약화되는 틈을 타 주변 국가들이 압박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럼 이제 뭐 할 거야?"
"우선은..."
나는 세실리의 질문에 미소를 지었다가 피곤한 목소리로 답했다.
"잠부터 잘래."
편지는 나중에 써야지.
*****
아이작의 축객령 이후로 도망치듯이 저택 밖으로 빠져나온 칼라스 일당.
그들은 남아있는 마나를 최대한 쥐어짜내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다. 텔레포트는 거리가 멀면 멀수록 사용되는 마나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나 상황이 상황인만큼 어쩔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이샬 영지와 한참 떨어진 지역으로 다급히 이동했다. 이동한 지역은 도시도 마을도 아닌 숲이었으나 엘프인 이들에게는 안식처나 다름없었다.
"이, 이제 어떻게 하죠?"
갈색 머리의 엘프 여성, 레나가 불안과 초조함에 떠는 목소리로 말문을 틀었다. 두 눈은 덜덜 떨렸으며 두 손은 귀를 만지고 있었다.
마엘도 그녀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차이점이라면 절망에 가깝다는 표정을 지은 것 정도랄까. 이미 포기한 듯한 모습이다.
"하아..."
칼라스는 레나의 질문을 듣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가 품 속을 뒤적거렸다. 마족 공주, 세실리가 적은 가짜 맹약서가 손에 쥐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이 맹약서를 갈갈이 찢어버리다 못해 불태우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귀가 새까맣게 썩어버리게 되면 엘프의 자긍심이고 뭐고 전부 사라질테니까.
당장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칼라스는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일단 알븐하임으로 돌아간다. 부디 피렌 님이 눈치채시길 바래야겠지."
"하지만 맹약이..."
"맹약이라고 해서 완전무결은 아니야. 필시 돌파구가 있을 거다."
맹약은 진실에만 효력이 발생하지, 거짓이라면 효력이 발휘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걸 역이용하는 것이다.
칼라스는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다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체념한 표정을 지우고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레나와 마엘의 표정 또한 약간이나마 밝아졌다.
"그래. 피렌 님에게 보고를 할 때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표시하면 되겠어. 맹약은 거짓에 효력이 발휘되지 않으니까."
"그, 그러면 되겠네요! 그런데 어떻게 거짓말을..."
"사람은 거짓말을 하게 되면 신체 반응이 나타나지. 대표적으로 시선 처리를 왼쪽으로 한다던가 손을 꼼지락거린다던가 등. 아주 많아. 피렌 님도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거야."
피렌은 정치 경력이 타 엘프보다 훨씬 많은만큼 눈치 또한 빠르다. 게다가 의심은 어찌나 많은지 한 번 건덕지가 잡히면 그 의심이 풀릴 때까지 놓아주지도 않는 성격이다.
설령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피렌이 한 번 의심을 하게 되는 순간 계속해서 파고, 또 파고들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것을 이용하면 된다.
검은 마나로 인해 귀가 썩어가는 것?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시간을 버는 일이다. 어떻게든 피렌이 조치하도록 시간을 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조심해. 알븐하임 내에 있을 배신자가 누구인지 모르니까. 피렌 님의 풀 네임마저 알고 있는 걸 보면 필시 명문가 중 한 곳일 확률이 크다."
"어째서 고작 인간 따위가 명문가와... 심지어 어린 놈인데..."
"인연이 있었겠지. 아니면 정말로 미래에서 온 사람이거나. 분명 신들도 그 놈에게 제약을 걸어 함부로 나서지 못 하는 거겠지. 그러니 우리는..."
쉬익 퍽!
칼라스가 말을 하는 도중에 무언가 바람을 세차게 가르더니 어디에 꽂히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그에 화들짝 놀란 칼라스 일행이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옮겼다.
하늘 높이 뻗어있는 나물 줄기에 단검 하나가 꽂혀있었으며, 단검의 손잡이 부분에 쪽지 하나가 묶여있었다.
칼라스는 벙찐 얼굴로 머리 바로 위에 꽂혀버린 단검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뒤이어 단검을 가볍게 빼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쪽지를 풀었다.
꿀꺽
갑작스러운 기습에 누군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칼라스는 설마설마하는 심정으로 쪽지를 펼쳤다.
그리고 그 쪽지에는...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명백한 경고문이 담겨있었다.
"... ..."
칼라스는 온 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꼈다. 다급히 감지 마법을 펼쳐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감지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텔레포트를 사용했는데? 무슨 수를 쓴 거지?'
설마 이것도 그 마족 공주의 능력인 건가. 마족은 도통 알려진 바가 없었으니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마족은 다크 엘프처럼 모라를 모시는 대표 종족. 어둠에 몸을 숨기는 건 일도 아닐 테니 이런 일이 불가능하지 않다.
그야말로 눈과 귀가 사방에 깔려있는 셈. 알븐하임으로 가는 길마저도 감시를 받아야 한다니 칼라스로서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놈은 대체...'
제논, 그러니까 아이작의 능력은 대체 어디까지일까. 칼라스는 허탈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의 심정과 대비되게 하늘은 쾌청하기 짝이 없다.
'끝났군.'
칼라스는 허망함에 실소를 흘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