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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177화 (178/763)

〈 177화 〉 예기치 못한 상황(3)

* * *

대충 판은 마련되었겠다, 본격적으로 함정을 파기 전에 걸리는 점들이 있다. 제일 먼저 우리 집에서 머무는 아델리아.

그녀는 나의 호위 기사이지만 내가 제논이라는 걸 아예 짐작조차 못 하고 있다. 순수히 나에게 호감이 있어서 호위 기사가 되었을 뿐, 그녀가 이번 사태에 휘말리게 된다면 꽤 골치아플 것이다.

이 탓에 아버지도 차라리 아델리아에게도 밝히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아델리아가 입이 가벼운 것도 아니고 출신이 미심쩍지만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 단호하게 거부한 사람은 나도, 세실리도 아닌 어머니였다.

"안 돼요. 크로스 경에게 아이작이 제논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면 안 돼요."

"어째서?"

여태껏 가만히 앉아 대화만 듣고 있던 어머니였기에 아버지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 또한 의아한 건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릴리가 잠들어 있는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특유의 아름다운 미소로 입을 열었다.

"나중에 크로스 경이 중요한 선택을 할 날이 올 수도 있거든요. 그때를 위해서라도 아이작이 제논이라는 걸 밝히면 안 돼요."

"으음... 당신이 그렇다니 받아들이지. 이유는 나중에 따로 얘기해주면 좋겠어."

"당신도 아마 납득할 거예요."

결국 아델리아를 제외하고 함정을 팔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허나 그녀는 헤일로 아카데미 조교직까지 수행한만큼 실력이 출중하다.

엘프들이 무단으로 침입할 시간이 언제인지도 모를 뿐더러 감각 또한 예민할텐데 과연 눈치를 못 챌까.

아버지도 그 점을 우려했는지 다소 난감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특히 크로스 경은 과거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몰라도 유달리 감각이 뛰어나. 지금까지 훈련을 시켰을 때도 내가 어디를 공격할지 전부 직감적으로 알아차리더구나."

"전부 다 알아차린다고요?"

"그래. 자기 말로는 몸이 알아서 경고를 내린다고 말했단다. 그런 감각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어지간한 경험으로는 힘들텐데 어디서 배운 건지 모르겠군."

"... ..."

혹시 그것도 과거와 연루돼 있는 건가. 왕족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 하고 왕궁에서 생활했으니 온갖 핍박이란 핍박은 받았을 터.

심하면 암살 시도까지 받았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아델리아가 형제들에게 받았던 모욕을 고려하면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다.

"어쨌거나 크로스 경이 알아차리지 못 하게 작업을 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말처럼 쉽지 않구나."

"시아버님. 제가 수면 마법으로 재우면 되지 않을까요?"

"그게 되니?"

"불가능하지는 않죠."

"허허."

생각보다 일이 쉽게 처리되자 아버지는 허탈함을 담아 웃음을 흘리셨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마법은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좋아. 그럼 크로스 경에 대한 문제도 해결됐군. 고용인들에게는 단순히 도둑이 들었다는 것만 알려주면 되겠지."

"그런데 언제 올지가 관건이지 않나요? 시아버님께서는 언제쯤 그들이 올 거라 예상하고 있나요?"

"일단 내 친구가 일부러 동선을 꼬은 탓에 시간이 좀 걸릴 거란다. 넉넉하게 잡으면 사흘, 빠르면 오늘 밤이겠지."

오늘 밤에 오겠구나. 일주일 전, 모라가 직접 밤에 무슨 일이 생길 거라고 알려줬다. 그리고 오늘이 그 날이고.

밤이 오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으나 함정을 파기 위해서는 다소 촉박한 면이 있다. 서두르는 편이 좋다.

"알겠어요. 그럼 우선 함정부터 파도록 하죠. 잠깐 기다리고 계세요."

"어디로 가는 게냐?"

"제 방에서 가지고 올 게 있거든요."

대충 예상하고 있겠지만 시리스의 소환지다. 이미 모든 상황을 말했으니 시리스를 소개시켜줘도 놀라진 않을 것이리라.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세실리도 함께 일어나려 했지만 곧바로 제지했다. 어차피 방에 갔다 오는 건데 얼마 걸리지 않을테니 굳이 따라올 필요는 없다.

대신 세실리에게 한 가지 부탁을 건넸다.

"아, 누나. 혹시 가르츠 씨도 이번 일에 동참시켜줄 수 있어? 인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잖아."

"발락 경은 현재 근신 처분을 받았어. 이유는... 너도 알지?"

"... ..."

불쌍한 가르츠.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친필 사인을 돌려받았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엄청 침울해졌겠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가 소환지를 가지러 가기 위해 방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아버지를 만난 탓에 방으로 가는 건 처음이다.

"어라?"

"응?"

그러던 중 모퉁이를 돌자마자 아델리아와 딱 마주치게 되었다. 방금 막 씻고 나왔는지 물기가 남아있는 연갈색 머리를 살살 털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에 하늘색 눈을 깜빡거렸다가 이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는 반응이다.

"뭐야? 헬리움에 간 거 아니었어?"

"방금 막 돌아왔지. 계속 헬리움에만 있기는 좀 그렇잖아. 중간중간 얼굴도 보고 그래야지. 그런데 방금 씻었어?"

"훈련이 끝났으니 씻어야지. 그런데..."

아델리아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옆으로 쑤욱 내밀었다. 아무래도 그 짧은 시간에 길어진 머리카락을 본 모양이다.

"너 머리가... 좀 길어진 것 같은데?"

"사정이 있어. 당분간 이렇게 다녀야 할 것 같아. 잘라도 다시 길어지더라."

"그래? 의외로 잘 어울리네."

턱을 매만지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아델리아. 시간이 엄청 급한 것도 아니니 잠자코 기다려줬다.

그런데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그녀의 얼굴이 점차 묘하게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가졌을 쯤, 아델리아가 뜬금없이 헛기침을 하며 조용히 물었다.

"크흠. 그... 귀염둥이 너는 긴 머리를 좋아해?"

"응? 갑자기?"

"아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마리 그 애도 그렇고 마족 공주도 그렇고 하나 같이 머리카락이 길잖아."

나는 아델리아의 말을 듣고 마리와 세실리의 머리 스타일을 상기했다. 두 사람 모두 약간의 차이가 있어도 머리카락은 상당히 긴 편이다. 특히 세실리는 엉덩이까지 내려올 정도로 머리카락이 길다.

게다가 지금은 나까지 머리가 길어졌으니 아델리아가 그런 착각을 할 만도 하다. 다만 그들은 원판이 너무 예뻐서 무슨 스타일을 하든 잘 어울린다.

솔직히 까고 말해 단발이든 장발이든 언급된 두 사람만큼 예쁘면 그만이다.

"딱히? 난 그냥 마음에 들면 마음에 든다고 하는데?"

"그, 그렇구나. 나는 어때? 괜찮지?"

"누나는 지금이 가장 나아."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다. 끝이 웨이브 진 갈색 단발 머리에 오똑한 콧대가 인상적인 미모. 마지막으로 허스키한 목소리까지.

활기찬 아델리아의 면모를 고스란히 드러내주기에 지금이 가장 예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머리카락을 길러봤자 아델리아의 매력을 반감시킬 뿐이다.

"...고마워. 막상 들으니 부끄럽네."

아델리아는 진심이 담긴 칭찬을 듣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베베 꼬았다. 평소의 모습과 달리 부끄러워하는 걸 보니 색다른 매력을 풍겼다.

그걸 보고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티가 나도 너무 심하게 난다. 눈치를 밥 말아먹은 사람이어도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것이다.

하지만 정작 아델리아 본인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진짜로 그런 건지.

"그... 헬리움으로 다시 돌아갈 거야?"

"응. 길게 잡으면 일주일 정도 머무를 거야."

"그랬으면 좋겠네. 우리 귀염둥이가 없으니까 심심하단 말이야."

"어차피 방학이 끝나고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내내 붙어 다닐 텐데 무슨. 아무튼 난 이만 가볼게. 누나도 수고해줘."

"응. 열심히 노력할게."

아델리아는 슬쩍 자리를 비켜주면서 손을 흔들어줬다. 나도 손을 흔들어주며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걷지 않아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여전히 손을 흔들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얼굴에는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한가득 피운 채.

정말이지 볼 때마다 아련함이 느껴진다. 예로부터 짝사랑은 가슴 아픈 법이라고 했던가.

심지어 짝사랑 상대에게 애인이 두 명이나 있다는 걸 알고도 유지하는 걸 보면 내가 다 미안해졌다. 하지만 선뜻 받아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녀를 온전히 받아주기 위해서는 복잡한 과정을 지나야 된다. 과연 아델리아는 그 과정의 끝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먼 미래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어쩌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할 수도 있지만 그녀가 선택해야 된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

방에서 소환지를 가지고 온 나는 지체없이 찢어버렸다. 가족들은 내가 소환지를 반으로 찢고 가만히 기다리자 흥미가 담긴 표정으로 지켜봤다.

이윽고 약 30초 가량이 흘렀을까. 반으로 찢어졌던 소환지가 푸른 불꽃에 휩싸이더니 이윽고 잿더미가 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 후에는 바닥에 마법진이 생기며 푸른빛을 발하더니 서서히 누군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르셨습니까?"

이제는 익숙한 여인의 목소리. 세상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걸로 유명한 다크 엘프, 시리스가 우리의 앞에서 등장했다. 복장은 여전히 노출이 심한 갑옷이었다.

아버지는 다크 엘프가 등장하자 허, 하며 바람 빠지는 반응을 보였고, 세실리와 어머니는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시리스가 착용한 갑옷을 보고 머리를 긁적거렸다. 둘이 있을 때는 몰라도 지금은 가족과 함께 있으니 내가 다 민망했다.

"소개할게요. 조금 전에 설명했다시피 저와 여왕 사이를 연결해주는 다크 엘프, 시리스에요. 다크 엘프 내에서도 실력이 훌륭한 편이죠."

"... ..."

시리스는 내가 대신 소개하는 동안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하기야 여태까지 비밀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가족 앞에서 소환된 꼴이니까.

하지만 그런 그녀의 표정이 바뀌는 것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내가 모든 전후사정에 대해 설명해주자 그녀도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우선 인사부터 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시리스 루나틱. 아마 들으셨겠지만 현재 아이작님에게 죄를 저질러 심부름꾼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호크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하오. 아이작의 아버지되는 사람이지."

"안나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해요. 잘 부탁드려요."

시리스가 정중하게 소개하자 아버지는 떨떠름하게, 어머니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시며 각자 소개를 마쳤다. 그래도 어색한 기류는 가시지 않았다.

이에 내가 서둘러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입을 열려는 찰나, 아버지가 궁금하다는 음성으로 시리스에게 질문했다.

"아까도 그렇고 심부름꾼이라 했는데 혹시 계약이 언제까지 맺어져 있소?"

"아아작 님이 모라 님의 곁으로 갈 때까지입니다. 최소 50년은 넘겠죠."

"... ..."

시리스의 대답을 듣자마자 부모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나 같이 너 설마? 라는 의심이 짙게 깔려있었다.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그들이 무슨 의심을 하는 건지 곧장 알아차렸다. 시리스처럼 아름다운 미녀가 심부름꾼 역할을 한다고 자처했으니 이상한 상상이라도 하신 모양이다.

그에 오해를 풀기 위하여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다급히 말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노예가 아니라 심부름꾼이에요."

"흠... 알겠다. 그나저나 다크 엘프라니, 막상 보는 건 처음이라 신기하구나."

"아버지도 다크 엘프는 처음이세요?"

"난 국경 지대에서 활동했으니까. 다크 엘프와의 접점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지. 엘프 정찰대면 몰라도."

아버지는 호기심이 짙게 깔린 눈빛으로 시리스를 물끄러미 쳐다보셨다. 다만 시리스의 복장이 복장인지라 엄한 곳으로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허벅지 위에 손을 얹음으로서 방지했다. 여차하면 허벅지를 꼬집을 기세여서 아버지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무튼 시리스 씨."

"네. 아이작 님."

"제가 시리스 씨를 부른 이유는 아까 들었겠지만 조만간 원로원의 측근이 우리 저택으로 올 거예요. 시리스 씨와 아르웬이 도와줬으면 합니다. 아르웬 입장에서는 원로원을 없앨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죠."

"한 번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시리스는 그 말만 남긴 채 곧장 텔레포트를 사용했다. 이후로 약 30분이 흐르고, 우리끼리 계획을 차근차근 설립하는 동안 그녀가 다시 돌아왔다.

"여왕님께서는 흔쾌히 수락하셨습니다. 다만 직접적으로 돕진 못 한다고 하셨습니다."

"괜찮아요. 아르웬은 마무리만 잘 지어주면 그만이니까."

"제가 도울 일은 없습니까?"

"시리스 씨는... 그래. 그 엘프들이 어디에 있는지 실시간으로 알려주세요. 아버지, 엘프가 추적한다고 했으니 대략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계시죠?"

"내가 대충 지도를 그려주마. 아마 이쯤에 있을 게다."

계획 수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마법에 조예가 깊은 인력이 둘이나 있고, 엘프를 진압할 무력도 충분하다. 통신 또한 마이샬 영지와 알븐하임 사이의 거리로 인해 절대로 불가능하다.

물론 발생할 수 있는 변수를 고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특히 어머니는 홀몸도 아니어서 만일에 대비하여 누군가 반드시 보호해야 된다.

엘프가 인질을 잡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세상에는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 스트레스를 과도하게 받아 릴리에게 무슨 일이 발생한다면 그때는 진짜 큰일 난다.

"그럼 안나 씨는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제압은 호크 씨와 세실리 공주님이면 충분할테니까."

"고마워요. 초면인데도 불편을 끼쳐드리네요."

다행히 시리스가 어머니를 보호하게 되어 변수까지 모조리 차단했다. 기습을 가하게 되면 제아무리 엘프여도 세실리와 아버지 선에서 정리될 것이다.

뒤이어 우리는 혹여 빠진 부분이라도 있는지 꼼꼼히 검수하고, 또 검수했다. 시간이 얼마 없는만큼 세심함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을 때 쯤,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간은 정확히 6시. 이제 슬슬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다.

"이제 슬슬 마무리 지을까요? 우선 저녁부터 먹고 다시 한 번 체크하죠."

"그러자구나. 시리스 씨는요?"

"저는 먹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지금은 동태를 파악하는 게 우선입니다."

시리스는 저녁을 해결하지 않고 역추적을 위해 저택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가 임의로 그려준 지도를 따라가면 될테니 조만간 소식을 전달해 줄 것이다.

이후로 저녁까지 모두 해결하고 계획을 다시 정리한 후에는 각자 침실로 돌아갔다. 초고를 일부러 책상 위에 놓는 건 까먹지 않았다.

이대로 시리스의 소식을 가만히 기다리면 되겠지만...

"안 돼."

"왜? 엘프가 정말로 오늘 밤에 올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

"그건 모르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 그러니까 다시 입어."

"칫."

세실리는 단호한 내 지적에 반쯤 벗었던 이브닝 드레스 끈을 다시 올렸다. 삐졌는지 입술이 삐죽 올라가 있다.

전에 모라가 말하길, 부끄러운 상황에 직면하기 싫으면 오늘 밤 정사는 가급적 지양하라고 알려줬다. 밤이 되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부끄러운 것도 부끄러운 거지만 세실리의 속살을 타인에게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싫다.

"그런데 아이작."

"응?"

"손을 망가뜨린다는 소식을 퍼뜨린다고 했으니 당분간 연재는 쉬는 거야?"

이브닝 드레스를 고쳐입은 세실리가 의문을 담은 표정으로 물었다. 사실 그게 고민이긴 하다.

손을 다쳤으면 당연히 연재를 쉬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손이 근질근질하여 나도 모르게 원고를 쓰지 않을까 싶다.

또한 신전에서 말끔히 고쳤다고 거짓말까지 하면 연재 자체는 문제 없을 것이다.

그 사이에 발생할 일이 걸리긴 하지만 내 알 바는 아니다.

"아마 한 달 정도는 쉬겠지. 그 사이에 손을 다치게 한 사람을 이 잡듯이 찾지 않을까 싶네."

"이제는 블러핑까지 하고 우리 아이작도 많이 컸네."

세실리는 대견하다는 듯이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줬다. 어린애 취급당하는 건 썩 내키지 않았지만 기분이 좋았기에 어련히 넘어갔다.

'깐프 새끼들.어디 한 번 좆돼 봐라.'

오늘 밤이 정말로 기대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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