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 14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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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권이 발매되면서 속속 드러나는 반응들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쯤 되면 세상이 날 싫어하는 게 아닐까라고.
루미너스와 모라는 입장이 다르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세계수 뿌리의 오염, 악마 소환, 리퍼, 마력 기관 등등. 안 그래도 머리 아픈 것들 투성이인데 이제는 금지된 마법이니 뭐니 하면서 떠들고 있다.
나는 그저 상상하는대로 소설을 썼을 뿐인데 그 상상이 현실로 등장하니 황당을 넘어 해탈할 것 같다.
이쯤 되면 포기해도 되지 않을까. 아이작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고 아니고 뭐하자는 건지.
무엇보다 더 골치 아픈 점은 이제 내가 아니라고 부정해도 변명으로만 들을 뿐 아무도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우연이라 치부하기에도 연달아 터진 사건사고들이 너무나 많다.
그나마 다른 반응이 있다면 내가 가진 지식이 위험하다며 배제하려는 세력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가 거센 비난을 받고 다시 내려갔다는 것 정도일까. 사실 나를 음해하고 시기하는 세력은 이전에도 있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대신 그 범위가 약간 넓어졌을 뿐. 원래 소설 작가들이 나를 비난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지금은 귀족들까지 퍼졌다.
금지된 마법을 알고 있다면, 다른 위험한 지식도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라고.
알븐하임 이전에는 제논이 인간 귀족들에게 모함을 받고, 습격까지 받아 여러모로 찔리는 구석이 많은 상황들이 있었다.
이 탓에 몇몇 유명 인사들이 과격한 언사를 내뱉기는 했지만 역풍을 제대로 얻어맞아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경계마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덕분에 다양한 의미로 쫄리는 상황이 되어버려 부담감이 내 어깨를 짓눌렀다. 원래는 취미로 잡았던 소설이었으나 앞으로 어떤 것들이 현실로 나타날지 몰라 선듯 손이 가지 않았다.
기껏 구상해놓았던 수인 파트를 전면 수정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고민된다. 그러나 스토리상 수인 파트에 돌입해야 되니 그것조차 힘들다.
그냥 마음을 비우며 꾸준히 집필을 이어나갈지, 아니면 당분간 휴재를 할지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이렇게 된 거 꾸준히 하는 게 어떠니? 앞으로 네가 뭘 쓰던 간에 분명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할텐데.]
'조언을 해주지 못할 망정 부담감만 쌓아주시네요.'
[지금 나도 그렇고 오빠도 딱히 도와줄 수가 없는 걸? 이미 닥쳐온 미래는 대비할 수만 있지 막을 수 없는 법이란다.]
결국 세실리와의 밤일을 위해 신성력도 받을 겸 조언이라도 받기 위해 모라를 찾아갔지만 이렇다 할 소득은 없었다.
모라가 나에게 해준 말에 따르자면 악마 소환 징조부터 이러한 사태는 예정된 일이라고.
합체에 대해 적어도 괜찮냐고 물었을 때 모른다고 답했던 이유도 그 일환이었다. 미래가 이미 고정된 마당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몰랐으니까.
[너희들 지구에서는 이런 말이 있지 않았니? 일단 똥을 싸라. 그럼 유명해질 것이다. 맞지?]
'일단 유명해져라. 그러면 똥을 싸도 사람들이 박수쳐줄 것이다에요. 무턱대고 똥을 싸면 어떻게 합니까? 미친 사람 취급할텐데.'
[앗. 그러네. 그래도 알아들었으면 됐지!]
'하아...'
나는 마음 속으로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어쨌거나 모라의 말대로 앞으로 사람들은 내가 뭘 적든 간에 이게 진실인지 거짓인지 파악하려 들 확률이 매우 높다.
소설을 소설로 보지 않고 정말로 예언서로 취급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루미너스나 모라가 신탁을 내려주기에도 애매한 게, 그들이 나서는 순간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선입견이라는 단어가 있듯이, 한 번 고정된 인식은 바꾸기가 어렵다. 멀리 가지 않아도 10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마족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생각해 보아라.
세계수 뿌리의 오염만 해도 의심 단계였는데 합체까지 금지된 마법으로 밝혀진 이상 제논 일대기는 말만 소설이지 사실상 예언서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을 것이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나는 물론이고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어. 가장 좋은 방법은 세상에 없을만한 이야기를 넣는 거지.]
'그 결과가 지금이잖아요.'
[음... 그것도 그러네.]
뒤이어 모라는 한동안 고민하다가 세상 속 편한 말투로 나에게 권유했다.
[그냥 신경 끄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네. 네가 다른 세상에서 온 건 맞지만 예언자나 미래에서 온 회귀자는 아니잖아? 책을 쓰다 보면 언젠가 사람들도 알아주겠지.]
'그전에 발생할 영향이 문제에요. 모라 님의 말씀대로 오해는 풀리겠지만 책 때문에 나올 현상들이...'
[그건 우리 선에서 해결해줄 수 있어. 아니면 우리한테 물어봐. 이거 쓰면 어떤 반응이 나오는지.]
'지난 번 합체에 대해 물었을 때는 모르겠다고 하셨잖아요.'
[좀 더 자세히 물어봤어야지. 괜찮을까요? 가 아니라 어떤 반응들이 나올까? 라고. 모호하게 물으면 우리는 모른다고 답할 수밖에 없어. 네가 확실하게 원하는 대답은 그에 맞는 질문을 해야 돼.]
뭔가 코딩 같은데. 문과였지만 프로그램에 대한 건 대충 알고 있다.
'약간 불친절한 것 같기도 하고...'
[얘는. 오빠도 말했지만 미래를 아는 건 시간을 구입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너를 애정해서 그렇지 다른 신도들은 접신조차 안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이렇게 허물없이 이야기하는 것도 다른 신도들은 힘든 일이지. 네가 특별한 거란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했네요.'
하마터면 신을 상대로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이들은 신이다. 전지전능까지는 아니어도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
그들과 가까워졌다고 해서 같은 존재가 되는 건 절대 아니다. 역사적으로도 신의 총애를 받다가 오만해져서 천벌을 받은 예시가 수두룩하다.
나 또한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으니 선만큼은 착실하게 지켜야 할 것 같다.
[괜찮아. 너는 잘생겼으니까 내가 넓은 마음으로 봐줄게. 대신 한 번 머리 길게 길러보는 건 어떠니?]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관리하기 귀찮아요.'
[에이. 한 번만 길러봐. 머리가 긴 남자가 적은 것도 아닌데.]
모라의 투정처럼 이 세상에는 머리가 긴 남자가 생각보다 많다. 하지만 패션 때문이 아니라 대부분 '귀찮아서' 관리하지 않을 뿐이다.
미용실 같이 전문적으로 이발해주는 곳도 없는데다 헤어 스타일 자체가 정형화돼 있지 않다. 다만 군인은 전시에 머리카락이 어디에 걸리거나 적에게 잡아당겨질 수도 있으니 단정하게 자르는 편이다.
나 또한 처음에 한 번쯤 길러볼까 생각한 적이 있지만 그냥 말끔하게 포기했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은 감는 것조차 버거운 일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후우. 알았어. 네 선택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아쉽네.]
'기회가 된다면 한 번 고려해보도록 할게요.'
[그래? 알았어. 그 아이한테 한 번 부탁해 봐야겠다. 히히.]
'... ...'
어쩜 이리 치사한 방법을 쓴단 말인가. 나는 모라의 시시덕거리는 웃음을 듣고 기가 쪽 빨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신도들이 모라를 피곤해 하는 건지 알 것 같다. 저렇게 철이 없어서야 필멸자 입장에서는 눈치가 보이겠지.
그나마 다행인 건 속이 좁지 않고 넓은 아량을 가졌다는 걸까. 신도들도 모라를 상대하기 곤란해할 뿐이지 두려워하지 않는다.
'...모라 님?'
[응? 불렀니?]
'그럼 앞으로 제가 15권을 쓴다면 어떤 반응이 나오는지...'
나는 15권의 출간 반응에 대해 물어보려다가 말고 입을 다물었다. 반응을 미리 확인하여 철저하게 대비하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만, 그렇게 된다면 집필에 크고 작은 영향이 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미리 구상해 놓았던 스토리가 엉망진창으로 꼬일 염려도 있다. 미래를 안다는 건 좋은 메리트를 가지는 것이나 반대로 말하자면 발전을 겪을 수 없다는 뜻.
그리고 책을 발간할 때마다 신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옳지 않다. 나 스스로 헤쳐나갈 생각을 해야지, 누구에게 의존한다면 제자리 걸음이었으니.
이에 입을 달싹거리다 말고 15권의 반응에 대해 묻는 건 포기했다. 어차피 비슷한 반응이 나올 게 뻔한데다가 모라의 말대로 오해가 풀릴 때까지 꾸준히 책을 내는 것밖에 답이 없었다.
그 사이에 어떤 사건사고가 일어날지는 모르겠다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아닙니다. 모라 님의 말씀대로 오해가 풀릴 때까지 꾸준히 책을 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네요.'
[잘 생각했어. 우리는 경고할 수 있어도 강제할 수단이 없거든. 네가 알고 있는 '천벌' 또한 신전에서만 가능한 일이야. 천인공노할 악인이 버젓이 존재하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지.]
'그럼 신도들이 단합해서 기도하고 그 악인에게 천벌을 내리는 것도 불가능해요?'
[그 전에 우리가 한 마디 하면 사람들이 알아서 그 악인을 조져버리지 않을까?]
'오... 일리 있네요.'
신의 입에서 조져버린다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인상 깊게 다가왔다. 실제로 루미너스가 한 마디하자 세이비어에서 추기경까지 순례길에 올려 나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으니까.
나는 무슨 질문을 할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번에 나온 반응들이 떠올랐다. 지난 번과 달리 내 지식이 위험하다면서 당장 찾아야 된다는 평가들.
비록 신문에서만 기재되고 나를 지키는 사람들이 많지만 세상에는 만약이라는 것들이 있다. 더군다나 출판사에 알븐하임의 귀족들까지 찾아왔다고 들었다.
이대로 가다간 사단이 날 수도 있으니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대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모라 님. 그럼 제가 앞으로 조심해야 할 것만 알려주실 수 있나요? 저는 물론이고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닥칠 위험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음... 글쎄. 위험보다는 조만간 재미있는 일이 터질 것 같네. 그것도 너희 저택에서.]
'그게 무슨 소리에요?'
우리 저택에서 무슨 일이 터지는 것일까. 나는 순간 몸을 흠칫거렸다가 다급함을 담아 재차 질문했다.
다른 곳이면 몰라도 저택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만큼은 막고 싶다. 당장 어머니가 릴리를 가지셨는데 스트레스를 받으셨다가 유산이라도 되면 큰일 나니까. 다시 말하지만 어머니는 생각보다 나이가 많으시다.
그런 내 마음과 달리 모라는 무언가 흥미롭다는 목소리로 키득거리더니 나에게 알 수 없는 말을 남기셨다.
[하이에나들이 사자의 아가리인 줄도 모르고 기어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란다.]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확히 일주일 후에 저택으로 돌아가게 되면 알게 될 거야. 네가 걱정하는 일들은 전혀 일어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보장할게.]
'그러시다면야 안심이지만...'
저택에 무슨 사건이 발생하는 것만 해도 나에게는 크나큰 걱정거리다. 당장 전시회 때 레인이 직접 저택에 침입하여 혼란을 빚은 적이 있다.
아무래도 철저히 준비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괜스레 나 때문에 주변인이 피해를 입은 것만큼은 막고 싶었으니.
'세실리 누나도 같이 있는 게 좋겠죠?'
[그러면 더 확실하게 조져버릴 수 있겠지. 아, 대신 그 날은 잠만 자는 걸 추천할게. 괜히 민망한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것 말고는 더 없어요?'
[그 후의 처리는 네가 관여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처리될 거야. 너는 그냥 책만 쓰면 그만이고.]
'저는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겁니까?'
[가만히 있기 보다는 편지만 조금 써주면 될 걸? 꽤 재미있을 거야.]
도대체 우리 저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길래 재미있다는 말까지 나오는 건지. 나는 알쏭달쏭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그 날이 오지 않는 이상 눈치채기가 어려웠다.
모라가 직접적으로 말해주기에도 힘든 것이, 만약 그렇게 되면 미래가 완전히 틀어질 수도 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자세한 건 묻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럼 모라 님만 믿고 일주일 후 저택으로 돌아가도록 할게요.'
[그러렴. 가기 전에 신성력은 받고 갈 거지?]
'네.'
모라는 떠나기 전, 늘 그랬듯이 나에게 신성력을 전달해 주셨다. 모라의 신성력이 내 안으로 흡수되자 마음이 좀 더 차분해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루미너스와 달리 모라의 신성력은 처음에 이렇다 할 느낌은 없다. 루미너스의 신성력이 강해졌다는 걸 직접적으로 체감시켜준다면 모라는 마음을 안정화시키기에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래도 세실리와의 첫날밤을 통해 모라의 신성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을 수 있었다. 만약 신성력이 아니었으면 세실리보다 내가 먼저 지쳐서 나가떨어졌겠지.
'그런데 오늘은 좀 더 많은 것 같은데... 착각인가?'
[착각이야. 신성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잖니?]
'그건 그렇죠.'
처음에는 아무런 의심 없이 넘겼지만 문제는 다음 날 아침에 발생했다.
세실리도 악주기가 아니어서 몇 번 하고 금방 잠들었기에 나 또한 편히 쉬는 것이 가능했다.
"어? 아이작. 네 머리카락... 왜 이렇게 길어졌어?"
"...아, 진짜."
그리고 눈을 감았다 뜨니 내 머리카락은 어깨를 넘어 날개죽지까지 길게 길어져 있었다. 누가 보아도 모라가 장난질을 한 것이 분명했다.
안 그래도 머리카락이 빨간색이라 눈에 띄는데 머리카락까지 길어지니 강렬함마저 선사했다. 결국 짜증을 담아 다시 세실리에게 부탁해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정리했지만...
"벌써 자랐네? 한 시간도 안 지났는데."
"뭐?"
무슨 짓을 했는지 자를 때마다 무슨 해초마냥 쑥 쑥 금방 자라났다. 잘라도 잘라도 계속 자라나니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내가 예쁘게 관리해줄게. 이렇게 묶어줄까?"
"...마음대로 해."
"머리 묶어주는 건 내가 처음이지? 마리도 못한 걸 내가 먼저 하다니 기분이 좋네. 이쯤 되면 내가 정실이지 않을까?"
"... ..."
그렇게 헬리움에서의 평화로운 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
"...그래서 그 놈이 편지를 몰래 부쳤다고?"
"네. 출판사가 아니라 집에서 쓴데다가 우편에 넣지 않는 걸 보면 분명 제논에게 적은 편지일 겁니다."
"좋아. 잘했어. 그 놈의 뒤만 추적하면 되겠군."
화려한 미모를 지닌 한 엘프가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같잖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결국 인간에 지나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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