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화 〉 14권(1)
* * *
제논 일대기 14권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먼저 엘프와 다크 엘프가 진정한 의미로 하나가 되는 능력, '합체'.
이건 단순한 상상 정도가 아니라 마법적으로도 호기심이 갈만한 능력이었기에 수많은 학자와 마법사의 주목을 끌었다. 게다가 현재 제논(아이작)을 반쯤 예언자라 확신하는 상황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단순히 의견이 오고 가는 것 정도밖에 안 되지만, 14권이 알븐하임으로 흘러가고 난 이후부터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14권에 나온 합체는 실제로도 가능한 마법. 하지만 묘사된 것처럼 비윤리적인데다 그 파장도 심각하며 엄격히 금지되었다.]
[3000년 전 악마 전쟁 당시 엘프들이 사용하던 마법. 그러나 세계수를 선물받고 난 이후에는 위험성이 크다는 이유로 기록이 모두 말살된 상태였다.]
[합체, 즉 합일은 오직 신의 선택을 받은 엘프만이 가능하며 그중에서도 고귀한 성품을 지닌 전사만이...]
제논 일대기 14권의 명장면을 담당한 합체가 실제로도 사용할 수 있는 마법, 그것도 금지된 마법이라는 걸 밝힌 것이다.
정식 명칭은 합일이며 묘사된 것처럼 에너지가 전부 소멸되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고 그 에너지를 충당하기 위해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정말로 순수한 형태의 에너지이기에 일반적인 마나와 검은 마나 구분하지 않고 흡수하며, 에너지체는 손짓 한 번만으로도 책처럼 폭풍을 일으킨다고.
다른 곳도 아닌 알븐하임에서 직접 그 사실을 알리자 사람들, 특히 엘프 쪽은 난리도 아니었다.
[합일을 시도하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며, 이론을 이용하는 자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왕의 명령이 떨어졌으나 학자를 포함한 마법사들은 책에 설명된 이론에 대한 흥미를 보이고 있어...]
[거대한 에너지가 소멸하지 않기 위해 주변의 에너지를 빨아들인다는 이론은 한때 위그드라실의 한 학자가 선보인 것. 그러나 원로원측의 격한 반발에 무산되어...]
합일은 여러모로 다양한 반응을 남겼다. 아르웬이 엄벌에 처할 거라 명령을 내렸으나 학자를 포함한 마법사들의 탐구심을 막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이 탓에 정말로 위험한 사태가 벌어지는 건 아닐지 걱정하고 있는 한편, 몇몇 사람들은 절대 불가능한 이론이라고 못 박았다.
그 이유는 에너지가 존재의 소멸을 막기 위해 주변의 에너지를 흡수한다는 건 일종의 '자의식'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일을 통해 탄생한 에너지체도 결국은 자아를 가진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생명체는 그 본능에 따라 위기가 닥치면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에너지체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 그러니까 그 현상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자아를 지닌 에너지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제아무리 마법이 무궁무진한 힘을 가졌더라도 '창조'는 신만이 행할 수 있는 능력. 마법사들도 그 점을 깨달아 시도하려는 마음조차 깔끔하게 접어버렸다.
이대로 합일에 관한 건 넘어가나 싶었지만, 진짜 문제는 사태가 진정되고 나서 흘러나왔다.
[제논은 합일이라는 금단의 지식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지식도 아는 것이 아닐까?]
[돌이켜 보면 그가 알고 있는 지식들은 하나같이 위험한 것 투성이다. 정말 미래를 아는 거라면 그의 지식은 곧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제논은 이 세상을 위기에서 구해준 사람임이 틀림없다. 허나 위험한 것 또한 변하지 않는 사실.]
이렇듯 금단의 마법마저 알고 있다는 오해가 생기면서 부정적인 평가 또한 수면 위로 부상했다.
사실 제논이 위험하다는 평가는 이전에도 존재했으나 책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큰 주목은 끌지 못 했다. 게다가 이것조차 문화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이지 작가 자체가 위험하다는 뜻은 아니았다
하지만 14권을 기점으로 경각심을 갖기 시작했다.
기록에서조차 없던 금지된 마법을 알고 있다면, 다른 위험한 지식들도 있지 않을까? 라면서.
제논은 세계수 뿌리의 오염과 악마 소환의 징조를 알려준 영웅이지만, 그렇기에 그의 지식은 매우 위험하다. 이런 평가가 스멀스멀 두각을 드러냈다.
누군가 훌륭한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면 우러러 보는 자들이 있는 반면 시기하는 자들도 있기 마련이니. 사람, 특히 인간의 마음은 간사한 법이다.
예로부터 역사에 이름을 남겼던 위인들은 만인의 존경을 받았으나 그에 비례해 막대한 견제 또한 받았다.
14권을 기점으로, 여지껏 아이작을 음해하고 흉을 보는 세력이 점차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금지된 마법라는 명분도 있겠다, 그를 비난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물론 루미너스까지 신탁으로 인정한 마당에 대놓고 욕하는 간 큰 사람은 없었다. 신문에 기재돼 있던 비난문 또한 옹졸하게 익명으로 작성되었지, 이름을 걸지는 않았다.
[루미너스 님에게 인정받은 성자에게 해악을 가하는 자는 엄하게 다스릴 것.]
[신의 분노가 무섭지 않느냐.]
[그의 지식이 위험한 건 사실이나, 당장 일어나는 문제는 없다. 오히려 악마의 침공을 막아준 세계의 은인.]
무엇보다 루미너스의 신탁이라면 광신도처럼 따르는 세이비어에서 가만둘 리가 없었다. 마족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을 당시보다는 광신도적인 면모가 사라졌다고 한들 독실한 건 여전했으니.
세이비어뿐만 아니라 미네르바 제국과 테르스 왕국, 그리고 헬리움에서도 이와 비슷했다. 헬리움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고 미네르바 제국과 테르스 왕국은 서로 견제하는 입장이다.
아무튼 개인이 아니라 국가가 직접 발 벗고 나서니 비난을 쏟았던 자들 또한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다. 그래도 제논의 지식은 위험한 거라며 끝까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사실 그들의 의견은 얼핏 보면 맞는 말이어서 제논을 추적하는데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덕분에 제일 고생하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아. 진짜. 나도 모른다고 말을 했잖소! 난 그저 원고를 받고 그 원고를 인쇄소로 보내는 역할을 할 뿐이오!"
"그 원고를 주는 사람을 알려주면 된다고 했잖나. 어서 말하게. 무엇을 원하나? 돈? 아니면 명예?"
출판사 사장이었다. 그는 늘 그랬듯이 제논의 추적을 위해 찾아온 귀족들을 보며 답답하다는 듯이 호소했다.
지난 번 알븐하임의 귀족들이 찾아온 것까지는 그나마 참을만 했다. 제논을 배신하지 않으면 그만인데다 매튜를 시켜 사인을 필사시키면 그만이었으니까.
실제로 그 작전은 아주 훌륭하게 적중하여 더이상 알븐하임의 귀족들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 후로는 희희낙락하며 돈이 복사되는 광경을 지켜보며 인생을 즐겼다.
하지만 14권에 묘사되어 있던 금지된 마법으로 인해 그 귀족들이 다시 한 번 들이닥쳤다. 기록에서조차 유실된 마법마저 알고 있는 제논이 매우 위험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돈과 권력을 쥐어준다고 해도 제논, 아이작과의 의리를 중시했으나 이번만큼은 '명분'이 너무나 확실하다. 금지된 마법이 어째서 금지된 마법이라 부르는지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이로 인해 출판사 사장은 도통 말을 듣지 않는 알븐하임의 귀족들과 다시 한 번 맞닥뜨리게 되었다.
"만약 제논이 퍼뜨린 지식으로 인해 세상에 큰 혼란을 빚게 된다면, 그걸 방치한 자네에게도 책임이 있는 걸세. 그래도 괜찮을 거라 생각하는가? 이때까지 저축한 돈들이 모두 사라질 수도 있는데?"
고급스러운 비단으로 짠 듯한 복장의 한 엘프 남성이 조곤조곤하지만 협박성이 짙은 말투로 사장에게 물었다. 엘프답게 사장보다 키가 커서 그를 내려다 보는 형태였다.
그러나 사장은 한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지금까지 상대한 귀족들이 몇 명인데 고작 엘프의 귀족이라 해서 달라질 건 하나도 없다.
"돈이야, 다시 벌면 그만이오. 하지만 그렇다 해서 한 사람과의 의리를 저버릴 수는 없소."
"흥. 의리는 무슨.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어서 그런 거겠지."
콧방귀를 뀌며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말한 엘프 귀족. 실제로도 맞는 말이라 사장은 입을 꾹 다물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작의 주거지를 알려줄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다. 알려주게 되는 순간 아이작과의 인연은 완전히 끝나게 되니까.
지금은 어떻게든 귀족들을 쫒아내는 것이 우선이다. 사장은 콧잔등을 꾹 꾹 누르다가 조용히 축객령을 내렸다.
"...이런다고 해결될 리가 있겠소?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머리가 아파지는군. 나중에 다시 찾아오시오."
"명심해라, 인간. 제논이 지닌 지식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우리뿐만 아니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다."
사장의 축객령에 협박 아닌 협박을 하며 떠나가는 엘프 귀족들. 이윽고 발걸음이 점점 멀어지자 사장은 힘없이 의자에 털썩 앉았다.
위험한 지식이고 나발이고 본인들이 직접 찾던가 어째서 자신을 달달 볶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아이작을 찾기 어렵다는 뜻이겠지.
유일한 단서이자 연결고리가 사장 자신이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왔을 확률이 매우 높다.
지난번에는 단순히 사인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라면, 지금은 아예 작정하고 아이작을 '추적'하는 중이었다.
알븐하임의 귀족 말고도 다른 귀족 또한 아이작을 찾기 위해 벼르고 있었으나 자그마치 엘프이다 보니 그 무게감이 전혀 달랐다.
'보아하니 한 실력 하는 것 같은데... 마법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엘프라면 위험해.'
미네르바 제국처럼 세금을 직접 조사하는 권한은 없지만, 하나 하나 뒤를 밟듯이 추적하는 건 엘프들이 훨씬 뛰어나다. 제아무리 호크가 거미줄처럼 베베 꼬아 원고를 전송한다고 해도 들키는 건 시간 문제일 터.
지금까지 들키지 않았던 이유도 매번 다른 심부름꾼을 고용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엘프들이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13권의 발매 전까지는.
호크의 전달 방식은 인간에게 효과적일지는 몰라도 엘프에게도 통용될지는 모른다. 마법이라는 힘을 숨 쉬듯이 사용할 수 있는 종족 중 하나가 바로 엘프였으니.
'안 되겠어. 이렇게 된 이상 경고라도 보내야 된다.'
그래야만 문제가 발생해도 자신에게 책임은 없을테니까. 사장은 아이작에게 보낼 편지를 쓰기 직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 엘프 놈들이 여기서 머무는 동안 수작을 부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리 급해도 조심할 건 조심해야 되지 않겠나.
이에 사장은 편지를 출판사가 아닌 자택에서 쓰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여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최근 교체한 가죽 의자라 그런지 안락함마저 느껴졌다.
'난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제논 그 인간은 뭘 하고 있을까.'
뭘 하고 있기는.
"아이작."
"응?"
"정말로 예언자나 미래인 같은 게 아니지? 이것도 우연이야?"
"우연이라니까."
"흐음. 알겠어. 일단 빨리 벗어."
"갑자기?"
사랑하는 애인과 행복한 생활을 즐기기에 바빴다.
"나 괴롭히기 싫어?"
"전혀."
그 날 하루도 기나긴 밤이 이어진 건 덤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