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 다시 헬리움(3)
* * *
세간에 이런 말이 있다. 자애롭고 단아한 말투를 사용하는 루미너스가 어둠의 신에 어울리고, 그 반대로 장난스럽고 종달새처럼 떠드는 모라가 빛의 신에 어울린다고.
어둠과 안식의 신, 모라는 쌍둥이 오빠 루미너스보다 성격이 활기차며 텐션이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오죽하면 그 가르츠조차 떨떠름한 기색으로 모라를 좋은 신이라 애둘러 설명했지 않았던가.
다만 루미너스보다 신도의 수가 압도적으로 적은만큼 자기 신도들에 대한 애정이 깊다. 특히 루미너스와 달리 모라는 유독 '죽음'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서 신도들이 부디 죽지 않기를 원한다고.
겉으로는 빛보다 밝은 성격을 보이고 있지만, 사실 속내는 매우 여리다고 들었다. 루미너스는 외유내강, 모라는 외강내유라 보면 된다.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헬리움에 오자마자 바로 날 찾아왔어야지!!]
'어... 죄송합니다?'
나는 머릿속에 울리는 카랑카랑한 여자의 목소리에 잠깐 얼을 탈 수밖에 없었다. 부드럽고 낮은 톤의 루미너스와 달리 모라는 낭랑하고 높은 톤의 목소리였다.
애당초 서로 성별이 다르다보니 비교하기가 애매하지만, 분위기부터 목소리까지 루미너스와 반대라는 것정도는 알 수 있다.
[흥. 이번만은 봐줄게. 그래도 잊지 않고 찾아와줬으니까.]
'음...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를 찾으시는 이유가 뭔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루미너스와의 대화 이후로 모라는 자신을 찾아달라고 투정(?)을 부렸다. 이 탓에 모라를 국교를 삼는 헬리움이 매우 난처해진 상황이었고.
그러나 심심하다는 이유로 자그마치 신이나 되는 존재가 나를 부르진 않았을 것이다. 루미너스가 이미 전후사정을 모두 설명해줬으나 굳이 모라가 찾는 걸 보면 나에게 알려줄 사실이 하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가지며 모라의 대답을 기다리며 눈을 감았을 쯤이었다. 하지만 모라는 내 예상을 한참 웃도는 대답을 꺼냈다.
[섭섭해서.]
'네?'
[섭섭해서 불렀지. 내가 말 안 했으면 안 찾아왔을 거 아냐. 안 그래?]
'... ...'
고작 그런 이유로 세상을 발칵 뒤집으신 겁니까. 그것도 신탁까지 내리면서. 말문이 턱하고 막히는 대답에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툴툴거리는 말투를 보아 한치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은 진심이었으며 정말이지 '말괄량이'라는 키워드가 정말로 잘 어울리는 여신님이다. 그래도 솔직하게 말한 덕분에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나는 한숨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겨우겨우 모라에게 말했다.
'...그건 아닙니다. 원래 헬리움에 방문할 예정이어서 모라님에게도 기도할 생각이었어요.'
[아하. 그러고 보니 내가 아끼는 그 아이랑 첫날밤을 치를 예정이었지? 깜빡하고 있었네.]
'아끼는 아이라면 세실리 누나를 말하는 거예요?'
[응. 네가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마족을 구원해달라며 매일매일 기도했거든.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에서도 꾸준히 모라에게 기도를 한다고 얼핏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자기 전에 한 번 이렇게 한다고.
기도문의 내용도 정말이지 듣다보면 아련하기 그지 없었다.
아침에는 태양빛을 보게 해줘서 감사하다는 내용이었고, 밤에는 오늘도 악에 휘둘리지 않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이다.
[요즘 네 덕분에 마음에 응어리졌던 것들이 전부 해소되었어. 염원하던 마족의 구원도 이루어졌지, 그리고 그 은인과 이어지게 되었지. 걔가 매일매일 기도하는 걸 들으면 내 마음도 편해지더라고.]
'좀 부끄럽네요.'
[오늘 밤에는 더 부끄러운 짓까지 할텐데 뭘 이 정도로. 그나저나 오빠도 쓸데없이 오지랖만 넓지. 그 말만 안 했으면 내가 축복을 내려줄 아이가 하나 더 생기는 건데.]
'... ...'
참고로 피임약은 착실하게 챙겨왔다. 아무리 그래도 사고는 피해야 하지 않겠나.
내가 아무 말없이 속으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때, 쌍둥이 오빠를 신랄하게 까던 모라는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어쨌거나 고맙다는 말부터 할게.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내 신도의 대부분은 마족과 다크 엘프거든. 네 책 덕분에 나에게 전달되는 힘이 전보다 몇 배는 강해졌어.]
'그게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마족은 제논 일대기가 등장하기 전에는 악마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안식을 간절하게 원했어. 나는 그들의 마음을 달래느라 여러모로 힘들었지. 안식을 원한다는 건 즉, 마음에 부정적인 감정이 많다는 뜻이거든. 나는 그런 감정을 해소시키거나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안락사까지 시켜야 돼. 나는 어둠과 안식의 신이니까.]
'마음고생이 심하시겠네요.'
듣기만 해도 안쓰러워진다. 아무리 초월적인 존재여도 부정적인 감정을 받아들이거나 신도를 안락사시키는 건 괴로운 일이겠지.
내 진심이 담긴 말에 모라가 들뜬 목소리로 밝게 답했다.
[그치? 넌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구나. 역시 그 아이가 점찍은 이유가 있어. 배려심이 이리 깊은데 반하는 게 당연하지.]
'민망하네요. 솔직히 제가 제논 일대기 작가라는 게 제일 크겠죠.'
[그것도 맞는 말이야. 하지만 너를 향한 그 아이의 마음은 진심이지. 네가 망나니였다면 그 아이도 내심 경멸했을걸? 은혜 갚기라 생각하면서 네가 죽을 때까지 꿋꿋이 버텼겠지.]
여기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무엇보다 잘생겼잖아! 다른 걸 다 제치고 역시 잘생긴 게 최고지!]
'...세실리 누나는 마족의 공주인데 눈이 많이 높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지만 너는 개성이 뛰어나잖아? 세상에 몇 없는 빨간머리에 황금색 눈이라는 독특한 조합! 넌 네 얼굴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모르지?]
나는 모라의 말을 듣고 쓴웃음만 나온다. 안 그래도 이 놈의 빨간머리 때문에 어딜 가나 눈에 띄는데 칭찬받아도 기분은 썩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신에게도 칭찬받은 외모라는 부분에 위안을 삼아도 될 것 같다. 그녀의 말마따나 잘생긴 게 최고긴 하다.
[너 한 번 머리 길러 볼 생각 없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거 순전히 모라님의 취향 아닌가요?'
[헷. 너무 속보였나?]
내가 신이랑 대화하는 건지 아니면 철부지 소녀와 대화하는 건지 약간 혼란스럽다. 루미너스와 이야기할 때는 진지한 이야기가 오고 가서 마음이 편했는데 벌써부터 기가 쪽 빨리는 기분이다.
대신 수직적인 관계보다는 수평적인 관계에 가까워 그녀의 신도들도 편하게 대했을 것이다. 루미너스는 알게 모르게 신다운 카리스마가 깃들어 있었으니 대하기 어려웠다.
[아, 맞다. 너 이번에 14권 냈었지?]
'네. 헬리움으로 오기 전에 출판사로 보냈습니다.'
[보니까 꽤 재미있는 이야기를 썼더라고? 엘프와 다크 엘프가 하나의 순수한 마나덩어리로 변해 악마를 소탕한다는 이야기 말이야.]
'보고 계... 음?'
잠깐만. 저건 또 무슨 소리야.
'모라님?'
[응?]
'모라님께서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시죠?'
[그거야 보고 있으니까 알는 거지. 아니면 어떻게 알겠니?]
'아니. 모라님이 왜...'
무려 신이라는 존재가 내 책을 보고 있다는 소식. 그 소식은 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러고 보니 루미너스님도 가끔 지나가듯이 내 책의 내용을 언급하지 않았던가. 그때는 주제가 그쪽으로 쏠려있지 않아 눈치채지 못 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루미너스도 내 책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내가 뒤죽박죽 얽히고 섥힌 머릿속에 한참을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모라는 무슨 문제 있냐는 듯이 나에게 물었다.
[무슨 문제 있어? 다른 차원에서 온 아이가 책을 쓴다는데 당연히 읽어야지. 네가 특정 사상과 관련된 서적이라도 쓴다면 우리 입장에서는 큰일 나니까.]
'그럼 1권부터 전부...?'
[응. 전부 읽었는데?]
쥐구멍에 기어들어가고 싶다. 나는 가지런히 모았던 두 손을 펴고는 얼굴에 덮었다. 그럼에도 얼굴이 점점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내 책이 세상을 쥐락펴락하고 있으니 어느정도 예상을 했어야 됐는데 너무 안일했다.
[왜 그리 부끄러워하니? 자부심을 가져야지. 내 책을 자그마치 신들도 읽는다! 이렇게 자랑스러워하란 말이야.]
'...됐어요. 그냥 말하지 마세요.'
[의외로 이상한 쪽에 부끄러워하는구나? 귀여워라. 그래서 다음 권은 언제 나와?]
'... ...'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입술을 파르르 떨기만 하자 모라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니와 세실리의 장난기를 골고루 섞는다면 저런 느낌일까.
나는 한동안 열기가 오른 얼굴을 가라앉히는데 집중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피하는 건 옳지 않다. 애당초 피하지도 못 하겠지만.
일단 화끈거림이 어느정도 진정되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분위기를 풀기 위해 헛기침을 하는 건 덤이다.
'큼. 큼. 좋게 읽어주셨다니 고맙습니다. 그래도 제가 사는 세상에서는 지극히 평범하디 평범한 글이에요.'
[겸손해서 좋네. 이왕 이렇게 된 거 네가 사는 세상에 있던 노래도 적어주지 않을래? 한 번 듣고 싶어.]
'듣고 싶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네가 책에 노래를 적는다면 당연히 그 노래를 사람들이 작곡할테니까. 너희들 세상은 좋은 노래도 많잖아.]
'음...'
확실히 좋은 노래가 많긴 하다. 문명과 문화가 발달하고 자연스레 음악 또한 수없이 발전했으니까.
특히 대한민국은 유독 사랑과 관련된 노래가 많으니 적절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노래를 언제 넣어야 하는지가 문제다.
'고려해볼게요. 저도 그 생각을 아예 안 한 건 아니었거든요.'
[기대하고 있을게.]
'기대까지는...'
이제는 모라까지 나에게 부담감을 얹기 시작했다. 제논 일대기를 보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기대까지 한단다.
모라는 내가 다소 떨떠름하게 중얼거리자 특유의 장난기 어린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 내용만큼은 진지했다.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돼.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 없을 뿐더러 지금 너에게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으니까. 당장 악마 침공을 2000년 후로 미룬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그게 정말로 우연이라도요?'
[응. 오빠가 말해주지 않았나? 예를 들어 위험에 처한 행인이 우연히 모험가에게 목숨을 구원받았다고 치자. 그 모험가 입장에서는 단지 지나가는 길이었다고 해도 과연 그 행인이 감사함을 안 느낄까? 스케일이 커졌을 뿐이지 그것과 같은 이치야.]
루미너스가 했던 말과 똑같은 이야기. 모라는 내가 이해한 듯하자 특유의 활기찬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네가 원한다면 나도 은총을 내려줄 수 있어. 비록 오빠처럼 권능이 강하진 않지만 네가 원한다면 어둠 속에 몸을 숨길 수 있는 능력을 줄 수 있지. 다크 엘프처럼 말이야.]
'그것 말고는 없나요?'
[불면증이 있다면 해소해주거나 정신을 맑게 유지 시키는 것 정도? 또한 온갖 번뇌와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수도 있어. 솔직히 말하면 인간보다는 마족에게 큰 효과가 있겠지.]
하긴 인간들 대부분이 루미너스를 믿는 이유가 그의 권능이 모라보다 더 뛰어나기 때문이다. 루미너스는 빛과 희망의 신으로 다양한 메리트가 존재했으니.
반면 모라는 불치병 또는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사람에게 안식을 선사해주거나 어둠에 몸을 숨기는 등. 루미너스에 비해서 다소 부족한 면모가 없지 않아 있다.
허나 모라는 전투 경험이 있는 군인, 그러니까 PTSD 환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신이다. 루미너스조차 PTSD를 말끔하게 치료할 수 없는데 모라는 가능하게 해주며, 악몽으로 고생하는 이들을 숙면에 취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아버지가 루미너스의 독실한 신자셔서 일찍 은퇴하신 거지, 만약 모라의 신전에 한 번이라도 방문했다면 지금도 꾸준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계셨을 것이다.
'제가 전투에 나갈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명심하고 있겠습니다. 정체를 밝히고 나면 여러모로 갖가지 사건사고에 휘말릴 것 같은 예감이 들거든요.'
[잘 생각했어. 아참. 일단 지금 신성력을 줄게. 꽤 쓸모 있을 거야.]
'네? 괜찮은...'
내가 거부하려는 찰나, 모라는 전과 달리 진지하디 진지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안 돼. 오늘 그 아이랑 첫날밤을 가질 거잖니? 그 아이에게 신성력도 전달할 겸 사고도 미연에 방지해야지.]
'사고요? 약은 챙겨왔는데요.'
[그 사고가 아니라 진짜 사고. 악주기에 들어선 마족은 사마귀와 비슷한 존재가 되거든. 암컷 사마귀가 교미를 할 때 수컷 사마귀를 잡아먹잖아? 그거랑 비슷해. 그 애도 너의 기력을 쪽! 빨아먹을테니 내가 준 신성력이 있다면 문제없을 거야.]
'... ...'
큰일날 뻔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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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라와의 대화 이후 곧바로 헬리움의 왕궁으로 향하기 위해 신전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가르츠가 이미 연락을 취했는지 세실리가 미리 신전 밖에 도착해 있었다.
이미 바깥은 해가 완전히 저물어 암흑이 짙게 깔려있었지만, 신전에서 촛불을 밝힌 덕분에 인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반가움을 담아 세실리에게 다가간 순간이었다.
"왔구나. 아이작."
"... ..."
세실리가 나와 마주치자마자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다. 나는 인사할 여력도 없이 그녀의 옷차림을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깨가 완전히 드러나는 오프숄더 드레스인 건 둘째치고 풍만한 가슴을 아슬아슬하게 가릴 정도로 노출이 심하다. 드레스의 가슴 부분이 경계선(?)에 정확히 걸쳐 있어 그녀의 가슴이 사실상 모두 드러난 수준.
더군다나 드레스의 색상 또한 검은색이라 하얀 피부와 더욱 대조되었으며 몇 달 전 신입생 행사 당시에도 볼 수 없었던 점이 선명하게 찍혀있다. 아무래도 그때 그 붉은 드레스는 절묘하게 점을 가렸던 모양이다.
이에 어떻게든 노력했지만 시선이 계속 그쪽으로 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원래 세실리 자체만으로도 파괴력이 강했는데 이런 노출이 심한 드레스까지 합쳐지니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실리는 나에게로 천천히 걸어와 다정하게 팔짱을 끼었다. 탄력성이 강한 맨살의 느낌이 팔을 타고 전해졌다.
"이제 갈까? 부모님도 기대하고 계셔."
"...응."
나는 세실리의 요망한 웃음을 보고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서큐버스가 작정해도 제대로 작정했구나.
'...다행이다.'
아까 말했지만, 모라의 신성력은 평정심을 유지하는데 탁월한 효능을 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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