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158화 (159/763)

〈 158화 〉 겨울 방학(1)

* * *

루미너스와 모라가 연달아 나의 뒷통수를 강하게 때렸지만 그들도 시간이 흐르는 건 막을 수 없는 법. 세상이 나를 예언자라 불러도, 세이비어 교국에서 나를 성자로 우대한다며 추기경을 급파해도 헤일로 아카데미의 일상은 변하지 않는다.

헤일로 아카데미는 약간 독특한 문화가 있는데, 바로 졸업을 행사가 아닌 개개인마다 따로 한다는 것. 그러니까 입학식과 달리 졸업식은 없으며 위쪽에서 스카우트하는 식이다.

또한 문학생 같은 경우는 무학생과 달리 아카데미에서 직접 졸업증을 제시하지만, 무학생은 약간 다르다.

헤일로 아카데미에 입학한 무학생은 대부분 입학 전부터 명성이 자자하던 유망주들이 많으며, 윗선에서 꾸준히 주시하며 적절한 때를 노린다.

대부분 4년차까지 끝내면 높은 티어의 기사단에 입단하거나 가문으로 돌아가기도 하지만, 니콜이나 아델리아처럼 졸업을 하지 않고 조교를 하는 사람도 있다.

조교는 무학생들과 대련하면서 여러가지를 가르쳐주는 고급 인력이기에 기사단에 입단하는 건 무리가 없다. 아카데미 바깥에서 진행되는 실습에서 교관들을 보좌하거나 직접 나서는 등. 여러 방면에서 대학원생과 유사한 타입이라 할 수 있다.

대학원생은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힘겹게 걸어야 하는 길인만큼, 조교도 마찬가지다. 조교직까지 모두 수료한 인력은 국가의 입장에서 놓쳐서는 안 될 인재로 대우받으며 그만큼 눈독을 들이는 편이다.

나의 친누나이자 아카데미에서 떠나는 니콜도 마찬가지. 네이비 기사단 입단 테스트를 위해 한 달 일찍 떠나는 그녀의 마지막 배웅을 위해 약속을 잡은 상태다.

참고로 니콜을 보낸다면 며칠 후부터 겨울 방학이 시작된다. 니콜은 입단 테스트를, 나는 세실리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갔다가 곧바로 헬리움으로 향할 계획이다.

"누나."

"응? 왜?"

"예복 입은 거 보니까 진짜 멋있는 거 같아."

"얘는."

주말이 아닌 평범한 수요일의 저녁. 나는 니콜과 마지막 만남을 위해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지인들도 친누나와의 마지막 만남이라 하니 불만없이 보내줬다.

니콜 또한 곧 있으면 아카데미에서 떠난다는 걸 알려주듯이, 여느 때처럼 일상복이 아니라 말끔하게 예복을 입고 있었다. 그것도 드레스가 아닌 남성용 예복을.

그녀의 머리카락 색과 어울리는 진한 남색 상하의였는데 재킷 안에는 흰색 셔츠밖에 없는데다 전체적으로 심심한 디자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니콜의 미모를 숨길 수 없었다.

더군다나 니콜은 여자치고는 키가 상당히 큰 편이라 하이힐이 아닌 구두를 신어도 충분했다. 헤어스타일도 생머리가 아닌 단정하게 포니테일로 묶었으며 약하게나마 화장도 하여 색다른 매력을 뿜내는 중이다.

'시원하다'라는 말이 딱 이럴 때 쓰이는 말일까. 단련 덕분에 몸매도 좋아 옷발을 정말 잘 받았다.

"이렇게 꾸밀 줄 알면서 왜 맨날 후줄근한 옷만 입었어?"

"귀찮으니까. 그리고 누구한테 잘 보일 생각도 없고."

"에이. 4명한테 고백받은... 아악!"

"얘가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장난을 치다가 니콜이 내 볼을 꼬집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니콜은 조교직까지 모두 수료한 강자다.

볼을 꼬집는 것조차 일반인에 불과한 나에게는 극심한 고통을 전달했다. 악력이 원체 강한 탓에 볼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

"아야야...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너는 장난이어도 나는 그때 일을 생각만해도 진절머리가 난단 말이야."

"그만큼 누나가 인기 있었다는 뜻 아닐까?"

"인기는 무슨. 그 날 이후 별의 별 해괴한 소문들만 무성했는데."

상상만 해도 싫다는 듯이 머리를 부르르 떠는 걸 보아 확실히 좋은 기억이 아닌 건 확실하다.

그리고 니콜은 여자이니 질 나쁜 소문이 도는 건 시간 문제였을 터. 4명에게 동시에 고백을 받았다 했으니 다양한 의미로 파란만장했을 것이다.

"네이비 기사단 입단 테스트는 처음에 면접이라도 보는 거야?"

"당연하지. 만약 아버지가 기사단장직을 쭈욱 했다면 아버지가 면접관이셨을텐데."

"괜찮겠어?"

"이 누나는 보기와 달리 튼튼하니 우리 귀여운 동생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내가 진심을 담아 걱정하자 니콜은 내 머리를 토닥여주며 안심시켜줬다. 아무리 나이를 먹고 덩치가 커져도 나이차 많은 동생으로밖에 안 보는 모양이다.

나도 니콜이 얼마나 강한지 자세히 모르지만 저렇게 자신만만한 걸 보면 믿어도 되지 않을까. 다른 곳도 아니고 네이비 기사단에 입단하려는 걸 보면 적어도 또래 중에는 최상위권일 것이다.

'하긴 저래 보여도 바윗덩어리를 한 손으로 끄는데.'

옛날에 한 번 궁금해져서 니콜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체크한 적이 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집채만한 바윗덩어리를 가뿐하게 옮기는 괴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그곳에 함께 있던 다른 무학생에게 듣자하니 니콜은 유별나게 힘이 강한 스타일이라고. 심지어 교관 중에서도 완력 싸움으로 그녀에게 이긴 사람이 없다고 한다.

'이런 괴물이 세상에 널려있다라... 그거 참 무섭구나.'

과연 이 세상 사람들에게 2차 세계 대전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마나가 없는 세상은 이들에게 정말로 '판타지'일테니 생소할 수도 있다.

뭐, 지금 당장은 제논 일대기에 집중할 계획이다. 겸사겸사 수습도 하고.

"그런데 아이작 너는 신전부터 가야되지 않아?"

"어제 갔다 왔어."

"루미너스 님께서 뭐라고 하셨니?"

"음..."

나는 대답하기 전에 주변부터 두리번거렸다. 비록 인적이 드문 외곽진 곳이라지만 함부로 말하기가 조심스러웠다.

"말해도 괜찮아. 내가 방음막을 설치했거든."

"응? 그거 마법 아니야?"

"마법이 아니어도 방음막 정도는 만들 수 있어. 그냥 소음만 차단하면 그만이니까."

역시 마나는 무궁무진한 능력을 가진 기운이다. 마법이 아니어도 방음막을 설치할 수 있다니.

나는 전혀 티가 나지 않은 방음막을 두리번거렸다가 속에 있던 말을 꺼냈다.

"미안하시다고 하셨어. 그냥 내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 말한 건데 세이비어가 그렇게 나올 줄은 생각치도 못 하셨대."

"그래?"

정작 나는 못 믿겠다. 미래도 엿볼 수 있는 존재들인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나.

악마와 관련된 일도 무난히 없어졌겠다, 나에게 장난을 친 걸로 보인다. 일종의 친근감 표시라고 봐도 되겠지.

그래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막대한 신성력을 소비하고 일주일 전으로 회귀하고 싶지만 이런 사소한 일 때문에 시간을 되돌리긴 싫다.

무엇보다 회귀는 100% 성공하는 게 아니다. 시도한 사람에게도 큰 무리가 가는데다 신들도 순리를 조절해야 하는 일이라 부작용이 심하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리거나 진짜 성직자처럼 남을 돕는데 쓰라고. 아무래도 루미너스는 은근슬쩍 나를 성직자로 꽂아넣고 싶은 듯했다.

신들은, 신도들의 신앙에 따라 본인의 힘도 강해지니 내가 성직자가 된다면 그에게 큰 도움이 될테니까. 은근 욕심이 많으신 분이다.

"그럼 모라 님은? 모라 님도 널 만나 싶어하시잖아."

"그건 곧 있으면 헬리움을 방문할 예정이라 문제는 없어. 헬리움은 모라를 국교로 삼잖아."

"아, 그렇지 참. 깜빡하고 있었네. 저택에 먼저 돌아가고 헬리움으로 갈 거지?"

"응. 저택에는 세실리 누나랑 같이 갈 생각이야."

헬리움으로 가기 위해서는 지난번처럼 세실리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때마침 마리도 나와 세실리가 단 둘이, 그것도 방학 내내 있는 것을 허락했으니 눈치 볼 필요도 없다.

'세실리가 엄청 좋아했었지.'

평소에 자기가 정실이라며 티격태격거리긴 해도 세실리도 알고 있다. 언제나 마리가 1순위라는 것을.

그래서 세실리는 마리가 통 크게 허락하자 감격하며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엄청난 크기의 가슴에 얼굴이 짓눌린 마리가 숨 막혀하며 세실리를 밀어낸 해프닝도 있었고.

아무튼 간에 이번 방학은 세실리와 오붓하게 지낼 예정이다. 함께 저택을 가는 이유도 부모님에게 정식으로 소개시켜주기 위함이다.

비록 대외적으로 알리진 않을테지만, 적어도 부모님에게 사실을 알려줘야 예의일 것 같다. 이건 세실리의 부모님에게도 따로 말을 해야겠지.

그렇게 된다면 세실리의 부모님도 내가 제논이라는 걸 알게 되겠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대부분의 마족은 나에게 호의적이니 오히려 감사하다고 인사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다.

"그런데 누나는 저택으로 안 가?"

"응. 이미 부모님께 말씀드려놨어. 입단 테스트를 치르고 나서 돌아갈 생각이야."

"날씨도 추운데 괜찮은 거 맞지?"

무더위가 물러나고 이제 슬슬 겨울이 다가오는 중이다. 교복을 무슨 재질로 만들었는지 몰라도 보온 효과는 뛰어났지만 그럼에도 가끔씩 불어오는 칼바람이 매서웠다.

이런 날씨에 잠도 안 자고 한 달 동안 훈련을 받는다니, 테스트 도중에 사망자가 나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괜찮다니까. 혹한기 훈련을 한 두 번 해본 것도 아니고. 데이브 오빠도 힘들긴 했지만 어려운 건 아니래. 그냥 체력과 정신력 싸움이라던데?"

"음... 알겠어. 그럼 아델 누나는?"

"응?"

"아델 누나는 어디로 발령 나는지 알아?"

아델리아의 거취에 대해 묻자 니콜이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시선을 슬쩍 피하더니 애매한 대답을 꺼냈다.

"그을... 쎄? 일단 아델은 며칠 후에 발령 나긴 할 거야. 어쩌면 조만간 다시 만날 지도...?"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아, 됐어. 그냥 저택에 있다 보면 알게 될 거야."

"저택으로?"

점점 더 알쏭달쏭해지는 기분이다. 아델리아가 발령 난 곳에 대해 물었는데 어째서 우리 저택이 언급되는 것인가.

니콜은 내가 도통 감을 잡지 못하자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내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얼굴을 보니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다는 표정이었다.

뒤이어 한동안 입술을 달싹거리던 니콜은 쓰게 웃으며 무겁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다소 착잡하다는 목소리다.

"아이작."

"응."

"그... 아니다. 나도 뭐라 할 처지는 아니니까."

니콜은 어깨 위에 올린 손으로 내 어깨를 조물조물거리더니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아참. 다음 신작은 언제 나와? 테스트가 끝나면 2권 정도 나오겠지?"

"다음 권은 아마 일주일 후쯤에 보낼 거야. 헬리움으로 가기 전 마무리 작업을 하고 가야지."

"뭐? 조금만 더 빨리 보내지. 보고 갈 수도 있었을텐데."

"조금만 참아. 좀 늦게 본다고 죽는 건 아니잖아."

나는 그렇게 니콜과 마지막 만남을 가졌고.

"잘 가. 다치지 말고."

"걱정 말래도. 당당하게 제복을 입고 돌아올테니까 기대하고 있어."

니콜은 늘 그렇듯 상냥한 미소를 띄며 아카데미에서 떠났다.

"아이작."

"응?"

"아델은 상처가 많은 애니까 너무 모질게 굴지 마."

당시의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말만 남기고.

*****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반년 전과 달리 이번에는 살이 에는 듯한 추위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미네르바 제국은 전생의 대한민국처럼 사계절이 존재하지만 이건 수도와 그 주변의 이야기지, 땅덩어리가 워낙 넓은 탓에 1년 내내 춥거나 1년 내내 더운 곳도 있다.

그리고 1년 내내 추운 곳은 몬스터이나 부랑자의 약탈이 빈번하게 행해지고, 1년 내내 더운 곳은 몬스터를 비롯한 동물, 곤충 등의 크기가 무시무시하게 커서 터를 잡기 어렵다.

다행히 마이샬 영지는 수도 근처에 있어서 사계절이 명확하다. 잠재력이 높다는 말이 허투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또 많이 바뀐 것 같네."

"그러게."

겨울 방학이 시작되고 약 3시간이 흐른 시간. 나는 세실리와 함께 마이샬 영지에 도착했다. 당연하지만 마차가 아니라 세실리의 텔레포트를 이용해 바로 온 것이다.

물론 마리를 레킬리스 저택까지 데려다 주는 건 잊지 않았다. 비록 세실리에게 전권(?)을 임시적으로 위임했다지만 기본적인 매너는 필수다.

다만 살짝 걱정이 되는 것이, 한 달이라는 시간동안 마리가 본인의 성욕을 참을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지난 번 방학 때는 일주일이었으나 지금은 무려 한 달이었으니.

'뭐, 저택으로 찾아올 수도 있으니 상관없으려나.'

나와 마리는 서약만 하지 않았지 약혼이 정해진 사이다. 그녀가 언제든지 우리 저택에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다는 소리.

더군다나 한 달 내내 헬리움에만 있는 건 아닐테니 마리 입장에서는 조금만 참으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지난 번 카페에서 사랑을 제대로 확인시켜준 덕분인지 빈도도 줄어들었고.

지금은, 마리가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세실리에 집중할 때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옆으로 고개를 돌려 세실리를 쳐다봤다.

세실리는 반년동안 많이 바뀐 마이샬 영지를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현재 마이샬 영지는 미네르바 제국에서 아예 작정했는지 문화의 거리로 발전시키는 중이다.

그리고 문화의 거리는 관광업이나 마찬가지. 영지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편의를 보는 시설들이 차근차근 설립되고 있었다.

"헬리움이랑 정식적으로 교류한다면 우리가 인력을 지원해줄 수 있을텐데."

"미네르바 제국이랑 헬리움은 최근에 교류를 맺지 않았어?"

"그건 나라지, 영지가 아니야. 미네르바 제국에서 직접 허가를 내려야 영지에 지원을 할 수 있을 거야. 지금 우리 아빠가 직접 서신을 보냈다지만 허가가 떨어지려면 시간이 걸리겠지."

원래 나라 일이 제일 복잡한 법이다. 겉으로는 쉬워보여도 정책을 잘못 펼쳤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한순간이었으니.

그래도 이 세상은 전생처럼 나라가 100개가 넘지 않을 뿐더러 시스템이 촘촘하지가 않다. 내부에서 허가만 한다면 헬리움의 인력이 마이샬 영지로 오는 건 시간 문제다.

"누나가 보기에 우리 영지의 잠재력은 어떤 거 같아? 솔직하게 말해도 돼."

"솔직하게 말하자면... 잠재력이 높긴 높지. 대신 하수도라던가, 인프라 같은 게 거의 없어서 제대로 된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오래 걸릴 거야. 헬리움의 도움이 없다면 최소 5년은 걸릴 걸?"

"그럼 헬리움의 도움이 있다면?"

"한 달이면 충분해. 우리 마족은 불모지나 다름없는 영토에서부터 헬리움을 건국했으니까. 게다가 건국한 이후부터 위생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사건사고를 겪은 탓에 이런 부분은 드워프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어."

세실리가 가슴을 쭈욱 내밀며 자랑스러워한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흉부 쪽에 시선이 쏠렸지만 애써 눈길을 돌렸다.

그녀의 말마따나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했다면 여러모로 많은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위생 문제부터 시작하여 건물의 배치, 그리고 농경 지대 등등.

여기서 괄목할 점은 위생이다. 이 세상은 몬스터의 존재로 인해 역병이 수시로 번지지만, 그만큼 위생에도 집중하고 있다. 본래라면 시대상 없어야 할 하수시설처리장까지 있으니 말 다했지.

엘프 같은 경우는 오물을 마법으로 처리할 수 있으나 인간은 그러기 힘들어 드워프에게 부탁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적어도 기록에는 그렇게 적혀있다.

"대부분의 인간 국가의 하수도 문제는 우리 마족이 해결해줬지. 500년 전, 종족 전쟁에서 위생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깨닫고 하수처리장을 건설했거든."

"뭐? 기록에는 드워프가 건설했다고..."

"거짓말이야. 드워프도 도와준 건 맞지만 기술을 전달한 건 우리 마족이거든. 애당초 마법이 어떻게 된 경위로 인간에게 흘러갔다고 생각해? 당시 엘프는 인간 연합과 전쟁 중이었는데 그들이 알려줬을까?"

"... ..."

"왕궁으로 오면 숨겨져 있는 역사를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거야. 특히 종족 전쟁에 관련된 거라면. 진실은 항상 어둠 속에 가려져 있기 마련이거든."

세실리는 내 볼을 손가락으로 콕 찌르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나 또한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이야기를 듣고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솔직히 앞뒤가 안 맞긴 했다. 종족 전쟁 중에 엘프에게서 마법을 터득했다? 엘프 입장에서는 그 엘프를 배신자로 낙인찍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마족이 인간에게 마법을 전수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마족은 전선에 직접 나서는 일만 없었지, 엘프가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 하도록 방지하는 역할을 하였으니.

그때부터 인간의 마법 실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기록이 있었는데 마족이 도와줬다면 앞뒤가 딱딱 들어맞는다.

"혹시 이것도 책에 넣을 거니?"

"좋은 소재 감사합니다."

"풋. 너는 이런 것도 책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거야?"

"아마도?"

물론 나에게는 그저 한낱 소재거리밖에 안 되지만. 세실리도 기쁜 것인지 방긋 웃어줬다.

이후로 우리 둘은 저택으로 향하면서 영지가 어떻게 변했는지 둘러봤다. 중간중간 나를 알아본 영주민들이 반갑게 인사하거나, 세실리를 보며 멍을 때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왠지 우쭐거리고 싶어졌다. 이 여자가 바로 내 여자다라는 생각 때문일지도.

이렇게 오순도순 데이트를 즐기며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안녕하세요, 남작 부인. 반년만이네요."

"어머. 세실리 공주님? 어쩐 일로 우리 저택에..."

저택으로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어머니부터 재회했다. 어머니는 세실리의 깜짝 방문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워하셨다.

이에 세실리는 아름다운 미소를 띄면서 입을 열었다.

"사실, 어머님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사실이 있거든요. 아이작과 관련된 일이에요."

"아이작이랑... 대충 뭔지 알 것 같네요."

세실리의 말에 어머니는 특유의 다정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뒤이어 고개를 아래로 내리더니 자기 배를 살살 어루만지셨다.

"보렴. 릴리. 네 오빠가 이렇게 인기가 많단다."

"딸 성함이 릴리인가요? 혹시..."

"네. 제논 일대기 속 성녀의 이름이에요. 정말 예쁜 이름이지 않나요?"

이쯤 되면 알겠지만.

"예쁜 이름이네요. 딸인 건 확실하죠?"

"며칠 전 순례를 하던 성직자에게 물어봤어요. 딸이래요."

어머니의 배는 남산처럼 부풀어오른 상태였다. 전시회가 끝나고 나와 마리가 첫날밤을 치르고 난 후, 부모님에게도 불이 번진 결과다.

그러므로 현재 내 나이 17살.

'...정정하시네.'

계획에도 없던 여동생(릴리)이 생겨버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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