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157화 (158/763)

〈 157화 〉 나비효과(5)

* * *

뒷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 이러할까. 나는 신문에 실린 소식들에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루미너스는 자기가 다 해결해주겠다고, 신탁을 내릴테니 걱정 말라고 하셨지만 이후에 들린 소식은 판이하게 달랐다.

현재는 우연일지는 몰라도, 미래에는 필연인 것들. 맨 처음 세이비어 교국에 내려온 루미너스의 신탁이다.

하지만 입이 문제인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런 건지 몰라도 굳이 안 해도 되는 신탁까지 내리셨다.

제논 일대기 속 사건사고들이 현실에까지 나타난 건 모두 우연이지만, 재앙을 막았다는 건 변함이 없는 사실이다.

또한 제논 일대기가 세계에 끼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으며 성인(?人)으로 대우해도 모자름이 없다.

루미너스 딴에는 나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는 것이나 그를 신봉하는 세이비어 교국에게는 살짝 다른 의미로 다가온 모양이다.

제논 일대기의 작가, 즉 나를 찾아 성자로 우대하는 것이야말로 루미너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머지않은 미래에 닥칠 악마 전쟁을 방지하고 세계수의 오염 또한 막았으니 루미너스를 포함한 신들의 입장에서는 큰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인지 이전까지만 해도 나를 '예언자' 혹은 '회귀자' 취급했다면 이제는 아예 '성자'로 취급하고 있다.

[정말로 예언자 혹은 미래인이 아닌 것인가? 제약으로 인해 루미너스 님조차 알려줄 수 없는 것일까?]

[제약이 실존한다면, 루미너스는 미래가 아닌 현재의 입장으로 신탁을 내렸을 것.]

[성자로 우대하는 것과 제논의 진정한 정체를 아는 건 별개다.]

그렇다고 나를 예언자 혹은 미래인으로 추측하는 건 변함이 없었다. 성자라는 타이틀이 너무 커서 묻혔을 뿐, 의심하는 사람들은 꾸준히 의심하는 중이다.

하물며 신탁은 이처럼 애매모호하게 내리는 경우가 태반이라 세이비어가 멋대로 해석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었다. 세이비어 내에서는 많은 신도들이 존재하며 그 신도들마다 생각이 다를테니.

무엇보다 신탁을 내리는 존재는 신이다. 신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삼천포로 빠지는 일이 적지 않은 편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내 상황은 어떠한가.

"성자님. 티라미수는 맛있어요?"

"아, 좀."

"그럼 예언자나 미래인이라고 불러줄까?"

"... ..."

뭐긴 뭐야. 여자친구한테 놀림받는 것밖에 없지.

내가 헛웃음만 흘리자 옆에서 디저트를 먹던 마리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포크를 이용해 반듯하게 자른 티라미수를 입에 넣었다.

픙미가 짙은 맛과 커피향이 입 안을 점령했다. 그래도 꿀꿀한 기분이 나아질리는 없었다.

루미너스가 외통수를 치고 다음 날, 현재 나는 마리와 단란하게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세실리와 리나는 바쁜 일이 있다며 제각기 숙소로 돌아갔다.

돌아가면서도 나를 향한 시선들이 떠올랐다. 세실리는 무언가 속셈이 있는 듯한 미소를, 리나는 묘한 표정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는 나와 단 둘 데이트를 한다는 사실이 좋았는지 방실방실 웃기에 여념이 없었지만.

"하아..."

"많이 심란해?"

"당연하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예언자니 미래인이니 떠들었는데 이제는 성자라고 부르잖아. 솔직히 울고 싶어."

"나한테 안겨서 울래? 내가 토닥여줄게."

마리가 두 팔을 활짝 펼치며 제안했다. 마음 속의 충동이 자기 멋대로 움직일 뻔했지만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녀에게 안기는 건 언제나 행복하지만 지금은 진지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어차피 곧 있으면 안기는 걸 넘어서는 행위까지 할텐데 의미가 없기도 하고.

"아니. 사양할게. 나중에 하자."

"쳇."

내가 거절하자 아쉬워하는 마리. 입술을 댓발 내밀며 툴툴거리는 모습이 정말 귀엽다.

"대신 내가 안아줄게."

"헤헤."

풀어지는 반응도 귀엽고.

마리는 내가 안아준다고 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이윽고 그녀는 나에게 안아달라는 듯이 두 팔을 펼쳤고, 나 또한 팔을 펼치며 그녀의 작은 몸을 안아줬다.

그녀와 사귄지 벌써 반년이 넘어가는데 우리의 애정은 식기는커녕 더욱 진하게 농익는 중이었다. 지금처럼 따뜻한 체온을 나눌 때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줬다.

"아이작. 아이작."

"왜 불러, 마리?"

"그냥 좋아서."

나는 사랑하는 애인과 체온을 나누며 흐뭇함을 느낀 것도 잠시, 현재 발생 중인 상황에 대해 생각했다.

예언자나 미래인 같은 경우는 다소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만, '성자'로 추앙받는 건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교황'과 '추기경'에 속하는 사람들은 대개 '성인'으로 간주되지만, 성자 같은 경우는 약간 다르다. 제논 일대기 속의 릴리처럼 '성녀' 혹은 '성자'라는 직급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이비어도 제논 일대기에 감명받기라도 한 것인지 새로운 직급을 탄생시키는 중이다. 추기경과 맞먹는 권위를 가졌으면서도 일종의 얼굴마담이라 할 수 있는 위치를.

'그런 나를 찾기 위해서 추기경까지 순례길을 걷는다라...'

신문에 기재된 소식으로는 '케이트'라는 추기경이 나를 찾기 위해 전세계 방방곡곡 순례를 한다고 들었다. 기약 없는 모험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추기경이나 되는 성직자에게 이정도 순례길은 겪은 적이 많다고.

하지만 케이트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는 잘 모르고 있다. 그에 나는 시선을 아래로 스윽 내렸다.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애교를 부리고 있는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뺨에 홍조가 일어나고 눈까지 감은 걸 보아 나라는 존재 자체를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이대로 쭈욱 시간이 이어진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는 법.

그녀의 어깨를 스윽 밀어내자 마리는 눈을 뜨며 어리둥절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푸른색 눈이 깜빡거리는 것이 정말로 사랑스러웠다.

이에 마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리.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뭔데?"

"그전에 좀 떨어져서 얘기하면 안 될까?"

"싫어."

단호하게 대답하는 걸 보면 떨어질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도리어 나에게 꼭 안기는 것이 어린애처럼 느껴졌다.

결국 하는 수없이 서로가 서로를 안은 채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종업원을 따로 부르기 전까지는 아무도 오지 않을테니 우리의 애정 행각이 들킬 염려도 없다.

"너도 알다시피 나를 찾기 위해 추기경이 순례길에 올랐잖아. 케이트라고 했던가?"

"케이트 루이즈 안젤리카 추기경을 말하는 거지?"

"미들네임이 있는 걸 보면 귀족이야?"

"아니. '루이즈'는 루미너스 님에게 직접 받은 세례명이야. 그리고 케이트는 세이비어 교국 내에서도 유명한 젊은 추기경이지. 태생부터 가지고 있던 신성력이 막강해서 1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추기경의 자리에 올랐어. 현재는 대심문관을 겸하는 중이고."

"대심문관?"

"이단심문관의 최종 계급이야."

이단심문관이라... 부디 개념이 똑바로 박혀있었으면 좋겠다. 선입견일지 모르겠지만 이단심문관은 대부분 과격한 성격을 띄기 마련이니까.

더군다나 이 세상의 세이비어의 이단심문관은 먼 옛날, 악마 전쟁 이후 마족을 학살했던 전적이 있다. 당연하지만 마족은 악마의 후예라는 이유 때문이다.

지금은 정신 차리고 본업에 충실하여 이교도만 처치하고 다니지만 악마와 연관된 자들을 처리하고 다니는 건 변함이 없다. 신문에서도 보면 악마 숭배자들은 대부분 이단심문관에게 처리당했다.

"추기경을 겸하면서 대심문관 자리에 오른 걸 보면 엄청 강한가 봐?"

"맞아. 현재 악마 숭배자들에게 있어서 공포의 대상이지. 신성력과 의지가 얼마나 강하면 무기에 푸른 불꽃까지 일어난다고 들었어. 그래서 칭호도 '창염(??)'이고."

"오..."

창염이라, 우리 아버지에게 붙은 칭호가 붉은 사자인데 기분이 묘하다. 이처럼 칭호가 붙은 사람들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유명한 경우가 많다.

물론, 아버지는 본인의 공적을 대외적으로 알리기 싫어서 아는 사람만 알고 있지만 칭호가 붙었다는 건 일종의 명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순례길에 오른 걸 보면 세이비어도 작정하고 나섰다는 의미지. 때마침 곳곳에 악마와 관련된 것들이 수면 위로 올랐겠다, 겸사겸사 악마 숭배자들도 퇴치하고 있지 않을까?"

"그 사람도 내가 정체를 밝히기 전까지는 모르잖아."

"글쎄... 소문에 따르자면 케이트는 신성력에 매우 민감하다고 들었어. 이때문에 그녀가 직접 고른 인재들은 교국 내에서도 큰 힘을 발휘하고 있지. 안목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네."

"... ..."

이건 좀 위험한데. 다행히 루미너스에게 직접 신성력을 받은 적이 없지만 앞으로 루미너스와 대화할 일이 많다.

당장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 때문이라도 신전을 재방문 해야 된다. 이런 상황 속에 루미너스가 나에게 막대한 양의 신성력을 선물한다면?

우연히 케이트와 마주치는 순간 의심을 살 게 뻔하다. 나를 제논으로 의심하지 않더라도 교국에 방문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할 수도 있고.

"뭐, 그래도 걱정하지 마. 설령 케이트 추기경이 너를 발견했더라도 함부로 대하지는 못 할테니까. 그 사람은 성자보다 악마 퇴치에 힘을 쏟고 있을 걸?"

"무슨 이유에서?"

"그 사람이 최근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좋은 악마는 죽은 악마라고. 대충 감이 잡히지?"

"성격이 꽤 화끈한 사람인 모양이네."

왠지 어느 게임에서 유명했던 캐릭터가 떠오른다. 전기톱을 훌륭한 대화 수단이라고 칭하지 않나, 덩치 큰 악마들을 문자 그대로 찢어 죽이면서 존나 큰 내장이라 하지 않나.

그러나 원한과 증오가 한계치를 뚫지 않는 이상 그런 성격을 갖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된다.

"응. 그래도 이단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여느 성직자처럼 한없이 친절하니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과격한 행동거지와 다르게 수려한 미모를 가진 걸로도 유명하고."

"혹시 만난 적이 있어?"

"옛날에 딱 한 번. 교국에 방문한 적이 있었거든. 그런 사람이 이교도의 내장을 찢어버린다니... 솔직히 직접 보지 않는 이상 못 믿을 거 같아."

"음..."

그러고 보니 제논 일대기의 조연, 릴리는 성녀인데도 불구하고 정작 교국에 대한 스토리는 초반부를 제외하면 거의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곧 있을 대전쟁을 위해서라면 교국 또한 동참할테니 거기서 풀어나가면 되지 않을까. 진과의 로맨스를 진행하다 보면 교국에서도 어쩔 수없이 태클을 걸 게 뻔하다.

게다가 진은 칠죄종이자 '식탐'을 담당하는 악마의 친아들. 교국 입장에서는 릴리와 이어지는 걸 무조건 반대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이건 수인 파트 이후에 나올 문제니까.'

식탐이 진에게 직접 '내가 네 아버지다'라는 희대의 명대사도 날려줘야 하고, 아직 풀어나가야 할 떡밥이 넘쳐난다. 당장 신경 쓸 문제는 아니라는 뜻이다.

"알겠어. 어차피 곧 있으면 방학이니 조금은 느긋해도 되겠지."

"방학이라... 아이작."

"응?"

마리의 부름에 그녀의 얼굴과 똑바로 마주했다.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방학 때 세실리를 따라 헬리움으로 간다고 했지?"

"응. 그렇지."

"그럼... 그때 할 거야?"

"... ..."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마리의 표정을 살펴봤다. 불안한 듯, 그녀의 푸른색 눈동자에는 짙은 염려가 담겨있었다.

이미 세실리를 받아들였어도 역시 사람 마음이라는 건 쉽지 않다. 일부다처제가 통용되는 세상이라지만 마리로서는 내가 떠나갈까봐 불안할 것이다.

이에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부드러이 웃고는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마리는 뺨을 만지는 내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과 한참을 마주하다가 상냥한 목소리로 안심시켜줬다.

"해야지. 세실리도 이제 내 여자니까."

"그렇구나..."

"그래도 너를 향한 마음은 변치 않을거야. 이건 장담해."

"...세실리는 나보다 예쁘고 몸매도 좋은데?"

"내가 그것 때문에 너랑 사귄 거라 생각하는 거야? 이거 실망인데?"

"...헤헷."

안심이 되었는지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비비적거리는 마리. 나는 좀 더 애교를 부려도 된다는 것처럼 그녀를 감싸안았다.

뒤이어 마리는 고개만 쏙 들어올려 나와 얼굴을 똑바로 마주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할 말 있냐는 듯이 반응했다.

"아이작."

"응. 마리."

"나도 헬리움으로 가도 될까? 가서 세실리를 도와..."

"어허."

어디서 은근슬쩍 자기 욕심을 드러내는 거야. 마리도 장난이었던건지 내가 엄하게 대하자 빙긋 웃었다.

그러나 욕심 자체는 진심이었는지 내 등을 껴안았던 팔을 슬금슬금 아래로 옮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팔에서부터 시작하여 옆구리로 이어지더니 골반까지 다다랐다.

마지막으로 그 종착점은... 따로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나는 못 말린다는 미소를 지으며 마리를 질책했다.

"마리. 너 정말 변태야?"

"네가 이렇게 만들었잖아. 책임져."

"참나..."

이미 하트가 된 눈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여관까지 갈 자제력은 없는 듯했다.

나는 혹시 몰라 문이 제대로 닫혀있는지 확인했다. 종업원을 부르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오지 않을테고 비싼값을 지불하여 방음 또한 철저하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여관이 아닌 곳에서 거사를 치르기 직전, 여전히 나에게 안겨있던 마리가 질문했다.

"아이작.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

"응? 뭐가?"

"너 정말 환생자나 그런 건 아니지?"

가슴이 절로 뜨끔해지는 질문이다. 그러고 보니 마리는 사람의 진의를 본능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독심술 비슷한 능력이 있던 곳으로 안다.

이럴 때는 어떻게 대답해야 잘 회피할 수 있을까. 나는 잠깐 망설였다가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라고 한다면?"

"음..."

그에 한동안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마리는.

"솔직히 상관없지?"

방긋 웃으며 해맑게 답했다.

"난 그냥 아이작이 좋은걸?"

"... ..."

이러니 여자 때문에 남자가 미친다는 거구나.

그리하여 색다른 경험을 카페에서 겪었고.

[헬리움 측. 모라님께서도 신탁으로 제논에게 감사를 표하셨다!]

[마족을 구원한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으며 이밖에도 진정한 안식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

이번에는 말괄량이 여신님께서 나의 뒷통수를 강하게 때리셨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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