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 나비효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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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전생의 예수, 부처, 알라와 같은 상징적 신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신이 존재하는 곳이다.
신도가 신에게 기도를 하거나 혹은 공물을 바친다면 신은 그들에게 신성력이라는 힘을 부여한다. 신성력을 받은 신도는 그 힘을 통해 갖가지 능력을 발휘하고.
또한 '신탁'을 통해 신도가 더 나은 길을 갈 수 있도록 장려해 준다. 하지만 그들조차 누군가의 미래를 함부로 알려줄 수 없어서 조언 수준으로 그치는 편이다.
게다가 제약 때문인지 몰라도 그 신탁조차 두루뭉실하게 남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신앙심이 출중한 신도가 머지 않은 미래에 사고로 사망하게 된다고 치자.
신은 그 신도에게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없다. 고작해야 무엇을 조심하라던지, 아니면 오늘은 집에서 쉬는 편이 좋겠다는 등. 자세한 설명은 해주지 않는다.
이렇다 보니 신도들은 신들이 내려준 신탁을 해석하느라 골머리를 앓는 경우가 허다하며, 기껏 해석해도 아닌 경우가 빈번하다.
물론 질 좋은 제물을 바치거나 엄청난 양의 신성력을 바친다면 좀 더 자세한 신탁을 내리준다. 이것만 본다면 신도 은근히 욕심이 많은 성격이지 않을까.
아무튼 간에 신이 내리는 신탁은 일종의 예언이라 봐도 무방하다. 대가 없는 결과는 없다고, 각 교단의 신도들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깊은 신앙심을 갖고 기도를 하거나 뛰어난 공물을 바치고 있다.
[어째서 신들은 세계수 뿌리의 오염과 악마의 소환을 알려주지 않은 것인가? 공물이 부족했던 것인가, 아니면 신도들의 자질이 부족했나?]
[신성교국 세이비어. 교황을 비롯한 추기경들이 신에게 공물을 바치고 기도를 올리고 있으나 신께서는 묵묵부답. 설마 신들이 필멸자들에게 실망한 걸까?]
[신들은 이미 제논이라는 예언자를 통해 미래를 알려준 것. 그러니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신탁을 내리지 않은 것.]
하지만 최근 들어 신들의 행보가 약간 이상했다.
세계수 뿌리의 오염과 악마 소환의 징조. 이 두 개만 해도 세계가 위험하다 못해 위태로울 뻔한 대사건이다.
그러나 신들은 지금까지 경고는커녕 이와 관련된 신탁조차 내리지 않았으며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신들은 나를 예언자니, 아니면 미래에서 온 회귀자니 하고 떠들어도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도 아닌 게 신성력은 꼬박꼬박 채워주고 있다.
이를 보아 신들은 현 사태를 지켜보자는 입장인 것일 터. 교황과 추기경들이 기도를 올려도 대답이 없는 걸 보면 반쯤 확실하다.
그렇다면 사건의 중심인 내가 직접 묻는다면 어떻게 될까. 다른 사람들처럼 상큼하게 씹을까, 아니면 나와 직접 대화해줄까.
전자라면 신들에게 이상이 있는 것이고, 후자라면 어째서 관망하는 중이냐고 물을 것이다.
그래도 역사를 보자면 신들 역시 인간적인 면모가 깃들어 있는 존재들이다. 문자 그대로의 '신'처럼 전지전능한 게 아니라 초월체라고 할 수 있다.
'근데 난 신성력이고 뭐고 기도조차 한 적이 없는데 괜찮으려나?'
시간이 흘러 다가온 주말. 나는 아카데미 바깥으로 나와 신전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엘레나 교수에게 이미 외출허가증을 받아 아카데미 밖으로 나오는 건 무리가 없었고, 니콜과 다른 사람에게도 미리 언질을 한 상황이다.
다들 내가 신전으로 간다고 하니 처음에는 놀라워했으나 이내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아무래도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내가 신전에 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신전에 방문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고...'
신이 실존하는 탓에 사람들 대부분이 신을 믿는 편이다. 그중에서 인간들은 빛과 희망의 신 루미너스를 추종하고 있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도 루미너스의 신자이며, 심지어 브리스와 니콜도 마찬가지. 단, 매일마다 기도를 올릴 정도로 독실하지는 않고 가끔 가다 기도를 하는 수준이다.
나 또한 '일단은' 루미너스를 믿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흥미에 가깝지, 기도조차 잘 올리지 않는다. 그냥 존재를 인식하는 것 정도?
루미너스뿐만 아니라 모라, 하르트 이 두 명도 마찬가지다. 신은 신학을 배울 때를 제외하면 딱히 연관될 일이 없다 생각하고 있어서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내 책이 이상한 방향으로 주목을 끈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신전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조금 황당하긴 해도 매듭을 지으려면 해야 하는 일이다.
'신전이... 분명 이 근처일텐데.'
나는 마리가 그려준 약도를 이용해 신전을 찾아다니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 혼자 수도를 돌아다니는 건 이번이 처음이나 약간 어색했다.
수도에 있는 마리네 저택, 그러니까 레킬리스 가문의 저택을 방문했을 때는 마차를 이용하여 수도를 둘러볼 여건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수도, 그것도 미네르바 제국의 수도여서 그런지 거리는 화려하면서도 상당히 번잡했다. 길 양 옆에 좌르륵 나열된 건물들 하며 길 위에 돌아다니는 사람들까지.
알븐하임이 고대 그리스 같은 이미지를 띄었다면, 미네르바 제국의 수도는 중세 유럽의 풍경과 비슷했다.
'빈민가도 거의 없다고 했었지? 덕분에 치안도 훌륭하고.'
미네르바 제국이 부강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빈민층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빈민층이 많아지면 범죄율도 자연스레 증가하기 마련인데 미네르바 제국은 빈민층의 비율이 매우 낮다.
다만 미네르바 제국이 스스로 행한 게 아니라 바로 옆나라이자 라이벌, 테르스 왕국 때문이다. 테르스 왕국은 문화가 매우 발전돼 있었으나 빈민층의 비율이 극심할 정도로 많았다.
문화는 발전됐는데 빈곤한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진다. 이런 아이러니한 현상이 극대화된 나머지 제이로스 혁명까지 발발하게 되고, 그걸 본 미네르바 제국이 서둘러 정책을 펼쳤다.
'이것만 보면 통치는 잘 하는 것 같단 말이야.'
나는 그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신전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가끔 가다 모르겠다 싶으면 지나가는 행인에게 물어보면서 찾아다녔다.
그렇게 수도를 돌아다닌지 얼마나 지났을까.
"오..."
그토록 찾아 헤매던 루미너스 교단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신전의 위용에 입을 헤 벌리며 감탄했다.
'신전'답게 커다란 기둥들이 지붕을 받치는 구조물이었으며, 흔히 모두들 알 것 같은 고대 그리스 형식이었다.
아무래도 문명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알븐하임이 고대 그리스와 비슷한 문화를 갖고 있어서 신전 또한 이리 지은 모양이다.
중세 유럽풍의 거리에 고대 그리스 신전 같은 장엄한 건축물이 있으니 묘한 느낌이 들었지만, 오히려 더욱 잘 녹아들었다.
본래 유럽의 문화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짙게 영향을 받았으니 어울리는 건 당연한 일. 나는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신전을 둘러보다가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규모가 규모이다 보니 거리에서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해 있지만, 오가는 사람들은 매우 많았다.
"안녕하세요! 루미너스의 신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계단을 오르고 입구에 다다르니 한 여신도가 살갑게 맞이했다. 끝이 웨이브진 밝은 금발에 햇살 같은 미소가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보통 수녀복하면 흰색과 검은색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은데 앞의 여신도의 옷은 그 반대였다. 흰색이 차지하는 비율이 훨씬 많았다.
나는 그녀의 활기찬 인사에 살짝 움찔거린 것도 잠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역시 귀족분이셨군요. 제 이름은 안나 샬케. 루미너스 님을 모시는 신도입니다."
가슴에 손을 올리며 화사하게 인사한 안나라는 수녀. 뒤이어 그녀는 햇살 같은 미소를 짓더니 나에게 말했다.
"신전 방문은 처음이시죠?"
"네. 어떻게 아셨어요?"
"이때까지 빨간머리 신도 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거든요."
"... ..."
이놈의 빨간머리는 참으로 유니크하구나.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긍정의 의미를 보이자 안나는 미소를 유지한 채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루미너스 님이 알려주시는 빛의 길은 언제, 어디서든 열려있으니 편하신 대로 오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기도만 할 건데..."
"공용 예배실을 원하시나요, 아니면 개인 예배실을 원하시나요? 공용 예배실은 무료이지만 개인 예배실은 따로 가격을 지불해야합니다."
"개인 예배실이 얼마에요? 비싸나요?"
"5실버만 지불하시면 됩니다."
의외로 가격이 상당히 싸구나. 그러고 보니 신전 같은 경우는 나라에서 직접 지원해준다고 들었다.
신성교국 세이비어와 교류를 맺기에도 편하고, 성직자를 육성하거나 흉년 및 다양한 사태에 대비할 수 있기에 신전을 지원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전생의 어디처럼 횡령을 하거나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것도 걱정이 없다. 신전에서 그런 짓을 할 간 큰 놈이 있다면 진작에 사기꾼으로 대성했겠지.
만약 정말로 그런 짓을 한다면 신께서 친히 '천벌'을 내리시니 신전만큼 깨끗한 곳은 없다.
"신전은 처음이라고 하셨죠? 그럼 루미너스 님에 대해서도 잘 모르시나요?"
"신학을 공부한 적이 있어서 신화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루미너스 님과 모라 님은 쌍둥이 남매고, 하르트 님은 그들의 어머니이시죠."
'아버지'는 누구인지 모른다. 신학이 아닌 신화 서적에서조차 언급이 없어서 사람들은 그냥 원래부터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쩌면 기록이 완전히 소실되어 존재마저 없어진 경우이지 않을까. 예를 들자면 쌍둥이 남매의 아버지는 이 세상의 '주신'이었으나 큰 죄를 저질러 기록조차 없어졌다던가.
"잘 알고 계시네요. 그럼 루미너스 님이 무엇을 선호하시는지도 알고 계시나요?"
"네. 루미너스 님을 상징하는 건 빛과 희망. 특히 강직한 마음으로 올곧은 길을 가는 신도들을 사랑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안나와 대화하면서 신전 내부를 꼼꼼히 둘러봤다. 밖에서 봤을 때도 장엄함이 느껴지는 신전이었는데 내부도 비슷했다.
천장은 목을 끝까지 꺾어 올려야만 쳐다볼 수 있었으며, 왠지 아찔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내부의 풍경 또한 성스러움을 풍겨 엄숙해진다.
이곳에서 기도를 한다면 정말로 루미너스께서 오시는 걸까. 나는 왠지 모를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키며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안나 씨?"
"네. 성도님. 말씀하세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전 신전에 방문하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기도도 처음일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는지 대충 알려주실 수 있나요?"
막상 용기를 내어 물었지만 부끄러움이 몰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건 알고 가야 실수를 하지 않는다.
안나는 내 질문을 듣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특유의 햇살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루미너스 님은 관대하시니까요. 성도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기도를 드린다면, 루미너스 님께서는 그에 따라 신성력을 주실 겁니다. 내용은 중요하지 않고, '진심'이 중요하거든요."
"진심이라... 알겠습니다."
"좋아요. 대신 무례한 말은 삼가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루미너스 님은 관대하시지만 그와 동시에 엄격하시거든요."
그러니까 선을 넘지 말라는 뜻이다. 나는 신에게 개길 정도로 미치진 않았다.
"여기가 개인 예배실입니다. 기도가 끝나면 저에게 말씀하시고 나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덜컥
개인 예배실 문이 닫히자 나는 방 구조를 샅샅이 둘러봤다. 개인 예배실이라 그런지 방의 규모는 협소했으나 그렇다고 대충 제작하지는 않았다.
앞에는 루미너스로 추정되는 작은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으며 친절하게도 바닥에는 방석까지 깔려있었다. 말 그대로 한 사람이 예배하기 위해 마련된 방이었다.
"음..."
혼자 있으니까 뻘쭘해진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두리번거리다가 조각상을 바라봤다.
조각상은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티가 난다. 신화책에서 봤던 루미너스는 화사한 미소가 인상적인 미남이었으며 그 미소는 조각상에도 잘 표현돼 있다.
과연 루미너스는 내 기도에 응답해줄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처럼 묵묵부답으로 일관할까. 나는 조각상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방석 위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전생에서 무교였던 내가 기도를 올리게 되다니, 세상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루미너스 님? 들리시나요?'
눈을 감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알맞는 기도 방법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일단 마음이 내키는대로 해볼 생각이다.
'제 말이 들리신다면 부디 대답을...'
내가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이었다.
[드디어 찾아왔구나! 다른 차원에서 온 아이야!]
'...에?'
귀에서 들리는 게 아닌, 머릿속에서 울리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 나는 화들짝 놀란 나머지 눈을 번쩍 뜨며 조각상을 올려다봤다.
분명 사방이 막혀있는 개인 예배실인데도 불구하고 조각상의 두 눈이 황금빛으로 반짝거리는 중이었다. 아니, 마치 연기처럼 넘실거린다고 해야하나. 쉬이 넘어갈 징조는 절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방금 전 그 목소리가...
[눈을 감... 집... 야...]
얼떨떨한 심정으로 조각상만 하염없이 쳐다보는 도중에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린다. 노이즈가 낀 것처럼 잘 들리지 않았으나 눈을 감으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이에 조용히 눈을 감으며 집중한 결과, 방금 전처럼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에는 당황한 나머지 몰랐지만 루미너스는 사근사근하고 상냥한, 흔히 칭해지는 꿀성대를 지닌 신이었다.
[그래. 이제 잘 들리겠구나. 나와 보다 더 원활하게 대화하려면 눈을 감고 집중해야 된단다. 상념을 모두 없애야 하거든.]
'저... 혹시...'
[네 생각이 맞단다. 나는 빛과 희망의 신, 루미너스란다. 너와 정말로 만나고 싶었단다.]
교황을 비롯한 추기경들이 그토록 대화하기를 원하던 빛의 신, 루미너스가 내 말에 응답했다. 나에게는 워낙 생소한 경험이라 정말로 루미너스인지 의심이 될 찰나...
[흠. 정말 믿지 못 하는 거니? 정 원한다면 머리 위에 물벼락을 내려줄 수도 있다만.]
'아뇨. 죄송합니다.'
곧바로 사과했다. 벼락이 아니라 물벼락인 걸 보면 딴에는 장난을 친 모양이다.
뒤이어 나는 떨떠름한 기분을 서둘러 떨쳐내고 평소 궁금했던 점을 하나 하나 묻기로 결정했다. 일단 나의 환생이 아니라 현재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루미너스 님. 루미너스 님께서도 현재 이 세상이 어떤 상황인지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
[물론이지. 너에게는 정말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단다.]
'...네? 저한테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하마터면 눈을 뜰 뻔했지만 겨우겨우 눈을 감는 것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어서 루미너스는 나로 하여금 말문이 턱 막히게 만드는 말씀을 꺼내셨다.
[세계수의 무력화, 그리고 2차 악마 침공은 우리조차 신탁을 내리기 힘들었던 거대한 미래였단다. 징조만이라도 알려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된다면 미래가 완전히 바뀌게 되니 난감한 상황이었지. 거대한 미래를 바꾸는 건, 그만큼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니.]
'아니. 그게 실제로 일어날 뻔한 미래였단 말이에요?'
[그렇단다. 정확히 147년 뒤에 악마의 2차 침공이 있을 예정이었지. 세계수도 그때 오염이 심각해져서 사실상 무력화되었을 테고. 현재 진행되고 있던 악마 소환 의식은 일종의 작업이란다. 우리조차 인지하지 못하도록 작은 구멍들을 뚫고, 2차 침공 때는 그 구멍들을 억지로 벌려 차원 간의 이동이 가능하도록 크게 만드는 거지. 구멍이 많을수록 억지로 벌려서 찢는 건 쉬울테니까.]
'... ...'
이게 왜 진짜임?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다행히 네가 쓴 책 덕분에 그 미래가 완전히 바뀌었단다. 악마 침공은 무려 2000년이나 미루어졌고, 설령 침공당해도 세계수가 굳건한데다 그때는 문명 또한 발전돼 있을테니 수월하게 막을 수 있을 거란다.]
'...저한테 불이익은 없죠?'
[너에게 왜 불이익이 있겠니? 따지고 보면 너 또한 피해자이거늘.]
'제가요?'
그에 의문을 가졌을 때 쯤이었다. 루미너스는 특유의 깨끗한 목소리로 차근차근 설명해줬다.
[방금 전에설명했지만 악마 소환은 차원에 작은 구멍을 뚫어야 가능한 일. 그러나 어느 한 악마 숭배자가 실수로 좌표를 잘못 설정하는 바람에 네가 살고 있는 세상과 연결되었단다. 비록 마나는 없지만 이 세계보다 문명이 훨씬 더 진보된 행성, 지구지.]
'...설마.'
[그래. 본래 악마는 태생부터가 강력한 존재이니 차원 간의 이동은 문제가 없지만, 지구는 마나가 없는 장소.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네가 차원과 차원 간의 이동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란다. 그 강력한 힘을 이기지 못해 신체에 무리가 온 것이고, 결국 심장의 작동이 멈춘 것이지. 영혼만큼은 이곳으로 넘어왔지만 '순리'가 망가진 지구에서 신들이 노발대발하는 건 어쩔 수 없었지. 결국 우리 또한 순리를 거스르고 네 기억을 보존시켜준 거란다.]
'... ...'
그냥 악마가 개새끼들이었구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