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152화 (153/763)

〈 152화 〉 이왜진(3)

* * *

악마가 누구인가. 문헌상 악마는 3000년 전 다른 차원에서 건너온 침략자들로, 각종 악행을 저질러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친 자들이다.

악마 전쟁 당시 종족을 가리지 않고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으며, 이 세계를 보호하는 신들 덕분에 간신히 몰아낼 수 있었다. 허나 그사이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마족의 기원이 악마라는 건 너무나도 유명한 사실이고, 악마의 침략으로 인해 위기감을 느낀 신들은 엘프에게 세계수의 씨앗을 선물했다. 그 씨앗은 싹을 틔워 3000년이 지난 현재까지 굳건히 버티는 중이다.

이후로 악마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관심이 점점 옅어질 수밖에 없었다. 악마보다는 다른 종족에게 더 시선이 분산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으니.

망각의 동물인 인간은 100년도 지나지 않아 악마보다는 다른 종족에게 관심이 쏠렸고 장수종인 엘프에게도 3000년이라는 시간은 사건을 잊기에 충분했다.

하물며 300년 전 종족 전쟁이라는, 전종족의 운명을 뒤바꾼 사건이 터진 이후로 그 누구도 악마에 대해 진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다른 종족만 신경 쓸 뿐.

3000년이라는 시간은, 길어도 너무 길었다. 애당초 '문헌'에 기록될만한 역사였으니 학자를 제외하고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현재 심각성을 알아차린 국가의 수뇌부들은 악마 숭배자들의 색출에 나서... 각 교단에게 지원 요청 중.]

[루미너스 교단. 악마는 결코 연관되서는 안 되는 괴물. 반드시 색출해 내겠다.]

[한편 헬리움에서도 자취를 감춘 강경파 마족의 추적에 나서...]

제논 일대기 속에서 발생했던 사건들이 점점 현실화되기 전까지는.

세계수의 뿌리가 오염되었다는 건 우연이라 치부할 수 있어도 악마의 흔적을 발견한 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악마는, 문헌에서나 나오는 생명체지만 이 세상을 쑥대밭이 아니라 불바다로 만들었던 전적이 있었으니.

현재는 문명과 군사력이 3000년 전보다 월등하게 발달되었으나 악마들은 매우 강하다. 그 엘프조차 수세에 밀려서 신에게 세계수의 씨앗을 받을 정도이니 대충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힐 것이다.

무엇보다 악마의 가장 무서운 점은, 문헌에 따르자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물량과 종류. 도대체 얼마나 많은 양이었는지 검은색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는 언급이 있다.

이처럼 악마는 문명과 기술이 발달되어도 차원을 닫지 않는 이상 영원히 퇴치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3000년 전 발발한 악마 전쟁조차 악마를 모조리 쓰러뜨린 게 아니라 차원 간의 연결을 끊어 역소환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악마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소리는 차원 간의 연결을 시도한 사람들이 있다는 뜻.

"하아..."

세계가 악마로 인해 난리도 아닐 때, 나는 숙소 침대에 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현재 나는 오늘 발간된 신문을 읽는 중이었다.

보통 신문은 정기 구독한만큼 하루에 한 번 꼴로 나오지만, 시국이 시국이다보니 거의 3~4시간마다 한 부씩 나오는 실정이다.

오늘도 엘레나의 연구소를 갔다 오니 신문이 두툼하게 쌓여있었다. 그래서 하나 하나 읽으니 그 내용이 참 가관이다.

어디선가 악마의 흔적을 발견했다던가, 마족도 아닌데 검은 마나와 관련된 마법을 사용했다던가 등등.

여태까지 쉬이 지나쳤던 부분들을 세세하게 파고든 결과, 정말로 악마와 관련되었다는 것이 속속 증명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으슥한 동굴에 존재하던 의식 현장이라던가 아니면 유난히 난리를 피우던 몬스터에게 괴상한 문양이 있다던가 등.

한 술 더 떠서 몇 백년 전에 시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른바 '소환진'까지 발견했단다. 의식이 이루어진 장소가 지하 깊숙히 건설되어 있던 탓에 찾기 힘들었다고.

비록 제논 일대기에 나왔던 것과 유사한 사건들은 터지지 않았지만, 현재 세계는 악마에 대한 경각심이 극에 달한 상황이다.

자칫하다간 악마의 후예인 마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색출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악마가 사용하는 검은 마나는 마족도 사용할 수 있기에 더욱 민감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 탓인지 모라 교단은 헬리움과 협업 중이라고 한다.

'진짜 미치겠다...'

나는 신문에 기재된 사건사고들을 꼼꼼히 읽으며 속으로 한탄했다. 본의 아니게 2연속 홈런을 때려버리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사람들은 나를 예언자 혹은 미래인이라 추측하는 중이고, 내가 아니라고 항의해도 전혀 믿지 않았다.

도리어 자기들 멋대로 내가 정체를 밝히지 않은 이유를 추정하고 있다. 특히 신이 제약을 걸었다는 의견이 가장 큰 지지를 받고 있다.

'제약은 개뿔. 전생을 전부 기억하는데.'

다른 세상이지만 나는 전생의 일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 학창 시절과 더불어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것. 그리고 여느 때처럼 컴퓨터를 쓰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까지.

환생자는 맞지만 미래에서 돌아온 자, 회귀자는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도통 믿질 않는다.

너무 답답한 나머지 편지를 여러번 발송했지만 그때마다 깔끔하게 씹혔다. 결국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가만히 있기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근데 악마 문제는... 좀 심각하네.'

세계수 뿌리의 오염도 중대한 사안이나 악마는 그보다 더 심하다고 볼 수 있다. 호기심이든 특정 목적이 있든 악마는 절대 불러서는 안 될 존재이니.

마족이 악마로 변하여 주변에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그런 존재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온 것이 3000년 전의 악마 전쟁이다.

이로 인해 각 교단들, 특히 신성교국 세이비어가 제일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미네르바 제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도 그간의 갈등은 잠시 접어두고 악마 색출 작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모험가를 비롯한 용병들도 마찬가지. 언뜻 들은 바로는 악마와 관련된 장소 혹은 물품 발견시 신고한다면 거액의 포상금을 지급하고 있다.

당연하지만 '검은 마나'의 흔적이 있는지 없는지 검사하고 나서다.

아무튼 간에 현재 전세계는 악마 색출이라는 광풍이 불고 있었다.

제논 일대기가 예언서를 취급받는 건 덤이고.

'이런데 세실리의 삽화를 넣었더라면...'

나는 신문에서 눈을 떼고 잠시 고민했다. 삽화는 본래 13권에 첨부하려 했으나 시간 문제로 릴리스와의 본격적인 전투에서 넣는 것으로 계획이 변경되었다.

비단 릴리스뿐만 아니라 다른 칠죄종도 마찬가지. 나름 중요한 악역들이니 일종의 편애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을 고려하자면 괜히 릴리스의 삽화를 넣었다가 세실리에게 피해가 가는 건 아닐지 걱정된다.

현재 제논 일대기가 예언서 취급을 받고 있는 이상 그녀 또한 사람들이 릴리스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삽화는 퇴치 장면 때 넣어야겠다.'

그래도 릴리스는 사랑하는 남자를 잊지 않기 위해 아득바득 살아간다는, 가슴 아픈 속사정이 있다. 이건 제논이 릴리스의 숨통을 끊기 직전에 알려진다.

물론 그때까지 이 현상이 지속될지는 모르겠다. 릴리스의 퇴치는 수인 파트 이후로 진행될 예정이니까.

지금은 몸조심하면서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우선이다. 평소처럼 행동하면 되겠지.

'시간도 시간이니 애들부터 만날까.'

아직 신문을 덜 읽었으나 슬슬 마지막 강의가 종료될 시간이다. 오늘은 수요일인만큼 데이트가 아닌 평범한 만남 및 식사 약속이 잡혀있다.

수요일은 나의 개인적인 시간을 위해 직접 지정한 것인데, 마리도 각자의 시간이 필요하다 느꼈는지 흔쾌히 허락해줬다.

그때는 내가 뭘 하던 간에 신경쓰지 않았으며 세실리와 데이트를 해도 조금만 질투할 뿐 개의치 않아 했다.

물론 다음 날에는 얄짤없이 여관으로 직행하지만. 사실 마리와 데이트를 하게 된다면 종착지는 언제나 여관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정독하던 신문을 잠시 접어두고 강의실로 발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타이밍을 잘 잡았는지 공교롭게도 강의실 밖으로 학생들이 줄줄이 나오고 있었다.

그중에는 당연하게도 익숙한 얼굴들이 존재했다. 나는 반가움을 느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때마침 리나도 내가 오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는지 특유의 부드러운 웃음으로 맞이했다.

"적절하게 왔네?"

"응. 오늘 수업은 어땠어?"

"말도 마. 철학은 아무리 들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더라."

이건 내 여자친구인 마리의 대답. 그녀는 항상 그렇듯 나와 팔짱을 끼며 투덜거렸다.

나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마리의 행동에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시선을 옮겼다. 세실리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 빙긋 웃었다.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미소에 나 또한 미소로 화답해줬다.

"일단 카페부터 갈 거지?"

"응. 그러자. 식사하기에는 이른 시간이니까."

"어디로 갈 거야?"

"늘 가던 곳으로."

이후로 우리 4명은 자주 방문하던 카페로 함께 이동했다. 옛날이었다면 우리 조합을 보고 다양한 시선을 쏟아졌겠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탓에 그 어떤 시선도 느껴지지 않았다.

카페로 향하는 도중에도 만담을 나눴으며 그건 카페에 도착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방음이 철저하게 이루어진 방이다 보니 다른 사람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다.

그 말은 즉슨,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을 꺼내기 안성맞춤이라는 소리다.

"아이작. 너도 신문 보고 있지."

"당연히 보고 있지. 3~4시간 마다 한 부가 나오더라."

"무슨 생각이 들어? 요즘 너를 예언자니, 미래인이라니 뭐라 하고 있잖아."

내 옆에 앉아있던 마리가 호기심 반, 흥미 반을 담아 물었다. 그에 쓴웃음만 짓고 있을 때 맞은편의 세실리가 거들어줬다.

"나도 궁금해. 책에 쓴 이야기들이 속속 들어맞고 있잖아. 진짜 예언자나 미래인인 건 아니지? 아니면 환생자라던가?"

나는 그 질문에 코웃음치며 곧장 반박했다. 환생자는 맞지만 다른 세상에서 왔으니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절~대 아니야. 만약 내가 둘 중 하나였다면 주식이나 투자를 했지, 소설을 쓰진 않았어. 애당초 그만큼 그릇도 크지 않고. 그냥 전부 우연이라니까?"

"우연이라는 것치고는 상황이 절묘하게 딱딱 들어맞던데?"

리나가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끼어들었다. 눈빛만 본다면 장난이 가득했지만 말투가 다소 의미심장했다.

장난 반, 진심 반 섞여있다고 해야 할까. 물론 나로서는 억울한 일이다.

"진짜 우연이라니까? 그리고 악마의 흔적이 곳곳에 나오는 건 충분히 현실성이 높은 이야기잖아. 무려 3000년이라고 3000년. 전문가들도 지금까지 무시하고 있던 거지, 경고 자체는 제논 일대기가 나오기 전부터 존재했다고 언급했어. 다른데에 신경이 팔린 나머지 알고도 모른 척한 거지."

"흠... 그건 그래. 보고서를 보면 귀찮아서 넘어갔던 일도 있다고 들었어. 사실 악마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을 뿐, 위협 자체는 있었지. 세실리. 현재 헬리움의 상황은 어때?"

"헬리움도 다른 곳과 다를 바가 없어. 대신 300년 전 인간 연합과 적대적이었던 강경파 마족의 흔적을 찾고 있지. 아마 조만간 조사 결과가 나올 거야."

강경파 마족은 300년 전 종족 전쟁 당시에도 인간 연합을 적대하던 세력이다. 이름처럼 인간을 증오하고 더 나아가 범죄까지 저지르고 있다.

보통 마족은 절망과 슬픔을 이기지 못해 반강제적으로 악마가 되지만, 강경파 마족 같은 경우는 복수를 위해 악마가 되는 일이 잦다.

이로 인해 종족 전쟁 당시 인간 연합에게 큰 골칫덩어리였으나 다행히 온건파 마족, 즉 헬리움의 도움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

또한 강경파 마족은 종족 전쟁으로 인해 거의 씨가 말랐지만 소수의 인원이 도망쳐 세계 곳곳에 숨어있다. 지금도 인간이 담당하기에는 출혈이 막심할 수도 있기에 헬리움이 맡고 있다.

"세상이 참 뒤숭숭하네. 세계수의 오염은 그렇다 쳐도 악마라니... 정말로 먼 미래에 2차 악마 전쟁이 발발했을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야. 무려 3000년이니까. 사실 그 사이에 2차 대공습이 펼쳐졌어도 이상하지 않았어. 무려 500년 전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악마 유적지도 발견됐거든. 우리는 자각하지 못 했지만 여러모로 위험한 상황들은 많았지. 다행히 전부 미수로 그쳤지만 날이 갈수록 의식소에 설치된 마법진은 점점 발전되고 있었어."

"미수에 그쳐서 망정이지 아니면..."

"재앙이 들이닥쳤을지도 모르지. 차원과 차원 간의 연결은 엘프나 마족조차 힘든 일이어서 망정이지, 쉬웠다면 진작에 침공당했을 거야."

마리와 리나의 대화 내용처럼 현재 세상은 악마를 향한 관심이 급속도로 몰리는 중이다. 전설로만 치부되던 것들이 속속 현실에 등장하니 관심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다.

때문에 악마와 관련된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지는 중이다. 그러나 악마와 관련된 서적은 시간이 지나 거의 유실되어 고전 형식으로 남아있는 바람에 많은 난관을 겪고 있다.

그나마 멀쩡한 것은 성지에 있지 않을까. 하지만 성지는 현재 과포화 상태라고 들은 적이 있다.

"아참. 그나저나 아이작."

"응?"

"삽화는 언제쯤 넣을 생각이야? 난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는데."

리나와 마리가 대화하는 도중에 세실리가 나에게 물었다. 릴리스의 삽화, 그러니까 세실리의 그림을 언제 넣을거냐는 질문이다.

원래는 13권에 넣기로 정했지만 시간이 시간인 탓에 나중으로 미루었다. 조만간 방학 때 헬리움으로 방문할 예정이니 그때 가서 그림을 그리면 될 듯했다.

"삽화? 무슨 삽화?"

옆의 마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마리에게 말을 안 해줬구나.

이에 내가 입을 열려는 찰나, 세실리는 특유의 빙긋 웃는 미소를 지으며 맑게 대답했다. 마치 자랑하는 것처럼.

"응. 13권에 등장한 릴리스 있잖아? 그 칠죄종 모델이 나인 거 알고 있지?"

"당연히 알고 있지."

"아이작이 삽화로 칠죄종을 첨부할 건데 나를 참고한다고 말했어. 원래는 13권에 넣으려 했지만 시간상 힘들었거든."

"...아하. 그렇구나."

마리는 세실리의 이야기를 듣고나서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더니 고개를 스윽­ 돌려 나를 쳐다봤다. 차마 그녀의 눈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고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고 있었지만...

"아이작?"

"... ..."

"저게 사실이야?"

서늘하기 짝이 없는 마리의 질문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조용히 눈을 뜨니 세실리가 입에 손을 대며 얕게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이지, 악마가 아닌 악동 같은 모습에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옆에 마리가 노려보고 있어서 간신히 억눌렀다.

마리는 살짝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나와 세실리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진한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 생각이라도 난 모양이다.

"...뭐. 상관없어. 어차피 나랑 상황이 비슷하네."

"응? 너도?"

"너처럼 그림을 넣거나 그런 건 아니야. 대신... 우리가 이때까지 행했던 진~한 관계를 넣..."

"푸읍!"

마리가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리나가 커피를 마시다 말고 분출했다. 당연하게도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콜록! 콜록! 켁!"

사레라도 걸렸는지 연신 기침을 토하는 리나. 그녀는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커피가 덕지덕지 묻은 입 주변을 닦아냈다.

가서 등이라도 두드려 줘야 되나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리나가 기침을 토하면서 정말이냐는 듯이 물었다.

"콜록! 그게, 사실... 콜록! 이야?"

"나랑 아이작의 밤일을 책에 넣는다는 거?"

"콜록! 콜록! 응... 그런 거 넣어도... 돼?"

"왜 안 돼? 안 될 건 없지. 그치?"

마리가 내 팔을 붙잡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부러 그런 것인지 가슴 사이에 팔을 끼워 옷 너머로 말랑말랑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에 쓴웃음만 짓고 있을 때, 세실리가 등을 두드려줘서 진정이 되었는지 리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몇 권에... 나와?"

"응?"

"몇 권에 나오냐고. 나중에 나오는 거지?"

왜 저런 걸 묻는 것일까. 나는 사레 때문인지 얼굴이 붉어져 있던 리나를 쳐다보다가 대답해줬다.

"아직은 정해진 바가 없어. 후반부에 쓸 예정이긴 하지만..."

"안 돼."

"응?"

"절대 안 돼."

왜인지 몰라도 격하게 반대하는 리나다. 평소 내가 무슨 이야기를 쓰든 간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던 리나였으나 이번만큼은 단호했다.

불쾌함보다는 의문이 먼저 드는 순간이다. 마리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안 된다는 거야? 혹시 미성년자들이 볼 수도 있어서 그래?"

"그건 아니지만..."

"아니지만?"

의외로 성격이 보수적인 건가 싶었다. 리나는 마리의 연이은 물음에 한 번 기침을 토했다가 우리를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는 얼굴이 급속도로 붉어지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개미가 지나가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순하게."

"응?"

"순하게... 순하게 적어. 그럼 괜찮을 거야."

"... ..."

"잘못 적었다가... 이상한 상식을 주면 어쩌려고... 네 책의 영향력을 생각해야지..."

그것 때문이었나. 전생에서도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지 못 하고 포르노만 본 탓에 실전에서 큰 문제를 낳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이곳은 성교육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중세 시대. 귀족들은 부모님 혹은 가정 교사들이 착실하게 알려주는 편이나 평민들은 아니다.

현재 나와 마리는 점점 매워지고 있다. 첫날밤에도 열정적으로 몸을 섞었는데 익숙해진 지금은 말할 것도 없다.

"음... 하긴 그렇겠네. 그래도 걱정하지 마. 너무 노골적이진 않을테니까."

"...알았어."

"혹시 검열이라던가 그런 건 없지?"

"그건 출판사 재량이야. 국가가 직접 나서서 문화를 검열하는 건 어지간해서는 안 해. 아마 출판사에서 첫 페이지에 경고문을 붙이겠지."

그렇다면 다행이고. 역시 알븐하임의 원로원이 문제구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리는 문득 이상한 점이 떠올랐는지 리나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리나. 너는 우리가 어떤 식으로 하는지 알고 말하는 거야?"

"으, 응?"

"네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가 과격하게 한다는 걸 알고 말하는 것 같아서. 혹시..."

"저, 절대 아냐! 내가 변태도 아니고 너희들이 하는 걸 왜 보겠어?!"

리나는 마리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묻자 두 손을 휘적거리며 강하게 부정했다. 하지만 격렬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소리가 있기에 의심은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저리 부정하니 한 번은 믿어야겠지. 게다가 방음이 확실한 곳에서만 밤일을 했으니 다른 사람이 볼 일은 없다.

"...리나."

"으, 응?"

"...아냐."

세실리가 가련하다는 표정으로 보는 건 덤이었다.

******

티타임을 비롯한 모든 식사가 종료되고, 각자 숙소로 돌아갔을 때였다. 아이작은 마리와 데이트를 즐기려 했으나 마리는 왜인지 몰라도 곧바로 숙소로 돌아갔다.

아이작도 처음에는 의아해했으나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고 말하자 군말없이 돌아갔다. 당연하지만 헤어지기 전에 사랑을 담은 키스를 하는 건 잊지 않았다.

이후로 마리는 숙소로 돌아와 간편한 옷차림으로 환복한 뒤, 침대에 몸을 던졌다. 푸른빛이 낀 그녀의 새하얀 머리카락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녀는 한동안 어두컴컴한 천장을 올려보다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생각했다.

'...거짓말을 했어.'

세실리가 아이작에게 물었다. 정말로 예언자, 미래인 혹은 환생자냐고.

아이작은 코웃음치면서 절대 아니라고 부정했으나 곁에 있던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아이작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사람의 진의를 본능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마리였기에 아이작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다소 애매했다.

거짓말인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진실이라는, 마리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진실 속에 거짓이 섞여있고, 거짓 속에 진실이 섞여있다는 느낌일까.

더군다나 예언자, 회귀자, 환생자 이 세 가지 중 무엇에 부합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현재 이 세상에 나타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우연이라는 건 '진실'이었다.

'대체 뭘까?'

마리는 아이작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제 나이대에 어울리지 않은 점잖은 행동과 더불어 배려심이 깊은 마음씨.

겨우 17살밖에 안 될 사람이 보여줄 행동거지는 절대 아니다. 무엇보다 제논 일대기를 집필한 사람이지 않은가. 모든 사람들이 현자 혹은 저명한 학자로 추정하고 있는 작가.

하나 하나 곱씹으니 수상한 구석이 한 두 개가 아니다.

아이작은 신뢰할 수 있고 몸까지 섞은 약혼자지만, 여러모로 숨기고 있는 것들이 많다.

'언젠가 말해주겠지?'

그러나 마리는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본래 사람에게 비밀은 있는 법이며 아이작은 뒤가 구린 성격도 아니다.

무엇보다 아이작도 자신을 믿고 있다. 고백할 당시 제논 일대기 작가임을 스스로 밝힌 것도 그이지 않은가.

마리는 아이작의 부드러운 미소가 떠오르자 방실방실 웃으며 몸을 뒤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데이트를 하고 여관으로 직행하는 건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리나가... 그런 변태일 줄은 몰랐네.'

리나가 자신들을 관음하고 있다는 걸 잽싸게 눈치챘으니까. 평소 리나는 속내를 잘 숨기는 편이어서 진의를 알아차리기 어려웠지만 오늘 빈틈이 생겼다.

그리고 그 빈틈을 통해 리나의 진정한 속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잘 생각해보면 의심스러운 부분들이 상당히 많았다.

만약 사이가 최악으로 나빴던 전이었으면 윽박질렀겠지만...

'귀여워라.'

마리는 그런 리나가 정말 귀여웠다. 계속 놀려주고 싶을 정도로.

어떻게 하면 리나의 가면을 벗길 수 있을까 고민하던 것들이 전부 쓸모없다고 느껴졌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왜 몰랐을까.

'아직은 아니야. 좀 더 무르익었다가...'

마리는 훗날 있을 이벤트를 기다리면서 음흉한 계획을 차차 수립해 나갔다. 리나에게 아이작을 줄 건 절대 아니지만, 적어도 '벌'은 받아야 되지 않겠나.

이에 쌤통이라는 듯이 큭큭 웃으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을 때 쯤.

[헬리움 측. 사실 우리에게도 악마 사냥꾼과 유사한 결사단체가 있다. 이름은 리퍼이며 제논 일대기 속의 사냥꾼들처럼...]

"... ..."

아이작은 새로 나온 신문을 읽으며 또 다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3연벙이 아닌 3연진을 당한 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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