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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146화 (147/763)

〈 146화 〉 다시 집필(3)

* * *

여태까지 꾸준히 언급했겠지만 나는 추천 학생으로 임명받았기에 역사 강의만 들으면 유급도 되지 않고 곧바로 3학년 취급을 받게 된다.

나름대로 친분을 쌓았던 비루스 교수를 포함하여 다른 교수들에게 그 사실을 말했을 때 그들이 얼마나 섭섭해했는지 모른다. 특히 비루스 교수가 제일 아쉬워 했으며 복수 전공으로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까지 받았다.

그러나 나는 문학보다는 오로지 역사에만 집중하고 싶었기에 정중히 거절했다. 그때 비루스 교수의 표정은 정말이지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

물론 역사만 듣는 건 아니고 내가 원하는 강의도 가끔씩 듣는 편이다. 그래도 대부분 '역사'와 긴밀한 연관이 있는 강의라서 지식 습득용으로 듣는다.

더군다나 엘레나 교수의 연구실을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뿐더러 시리스를 통해 성지의 서적까지 받을 수 있다. 지식이 모자랄 일은 결코 없다는 의미다.

아무튼 역사학은 내가 유일하다시피 집중해서 듣는 과목이라 할 수 있다. 아마 질문도 내가 제일 많이 하고 또 발표도 열심히 하지 않을까.

어차피 아카데미에 다니는 동안 엘레나 교수와 얼굴을 맞댈 시간이 훨씬 많으니 포인트를 따는 게 좋을 것 같아 열심히 임하는 중이다.

"꾸욱. 꾸욱."

다만 역사와 맞지 않는 내 여자친구는 심심했던 모양이다. 내가 필기를 하는 동안 마리는 손가락으로 내 볼을 꾹­ 꾹­ 눌렀다.

마치 고양이가 꾹꾹이를 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필기를 하다가 그녀를 한 번 힐긋거리고는 조용히 물었다.

"뭐해?"

"그냥 잘생겨서."

그리 대답하며 내 볼을 꼬집는 마리. 예전 같았으면 이런 애정 행각에도 부끄러워했겠지만 이제는 무던하게 넘길 수 있다.

이처럼 마리는 엘레나 교수가 설명하는 동안 손가락으로 내 볼을 누르거나 깍지를 끼는 등. 어서 빨리 이 시간이 갔으면 좋겠다는 본인의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특히 손을 잡는 경우가 제일 많았는데 다른 학생들도 우리가 연인 사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처음에는 마리가 아깝다니, 약점을 잡혔느니 뭐니 하면서 떠들어댔지만 내가 급격히 성장하고나서는 그런 이야기가 쏙 들어갔다. 게다가 추천 학생으로 임명받았다는 소문이 퍼져서 다들 납득했다.

스윽­

내 손과 깍지를 끼던 마리의 손이 책상 아래 쪽으로 움직였다. 이윽고 내 허벅지 위에 손을 올리더니 살살 쓰다듬었다.

나는 그걸 느끼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마리가 자기 손을 허벅지 위에 올리며 쓰다듬는 행위는 일종의 신호다.

무슨 신호인지는 다들 알테니 굳이 설명하진 않겠지만, 시도때도 없이 신호를 보내는 경우가 많아 곤란할 때가 많다.

마리는 성욕은 줄어들 기미가 보인다 싶으면 장작을 넣기라도 하는 건지 줄어들지가 않는다. 피임약을 꼬박꼬박 챙겨먹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진작에 아이를 가지고도 남았을 것이리라.

텁­

나는 마리의 손이 중앙으로 향하기 전 손목을 붙잡았다. 내가 허락한다면 그대로 방치했겠지만 이건 안 된다는 답변이다.

그리고 마리는 실망과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녀에게 미안하지만 수업이 끝나고 따로 만날 사람이 있다.

"오늘은 조금 힘들 것 같아. 해야 할 일이 있거든."

"어제도 못 했는데?"

"이틀 전엔 했잖아. 설마 그것도 못 버텨?"

"웅. 마리는 못 버틸 것 같애."

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퉁명스레 답한 나의 여자친구. 천사 같은 미모를 지녔는지라 불만 가득한 표정마저 사랑스럽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나는 마리의 빵빵해진 볼을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그러자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면서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어서 잠깐 엘레나의 눈치를 본 후,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줬다. 비단처럼 부드러운 머리결로 하여금 손의 감각을 일깨웠다.

마리는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특유의 방실거리는 웃음을 띄더니 엉덩이를 살금살금 움직여 나와 바짝 밀착했다. 대놓고 애정 행각을 피우는 우리였으나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그 잭슨조차 신경 끄고 강의에 집중하고 있다.

"오늘은 여관에서 같이 자면 안 될까?"

"정말 그래야겠어?"

"네가 이렇게 만들었잖아. 그러니까 책임져."

"에휴... 알았어."

어쩌다 이렇게 야한 여자가 되었을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마지못해 수락했다.

내가 허락하자 마리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짓더니 노트에다가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적기 시작했다. 이에 슬쩍 그 내용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은 9시이며 위치는 아카데미 광장 분수대 앞. 이정도면 레오나와 만나도 문제가 없을 듯했다.

"정식으로 부부가 되면 이럴 필요도 없는데... 결혼식까지만 참아야지. 빨리 남편이라 부르고 싶다. 후후후."

"... ..."

이상한 망상이라도 하는 것인지 변태같이 웃는 마리. 아무래도 나와 결혼식을 올린 후를 상상하는 모양이다.

도대체 얼마나 나를 잡아먹고 싶길래 저런 표정을 숨김없이 드러낼 수 있는 것일까. 앞자리에 앉아있던 리나가 그녀의 표정을 보고 기겁할 정도였으니 설명이 필요없다.

인맥을 쌓을 때를 제외하면 내숭과 거리가 먼 마리였기에 망정이지, 세실리가 이랬다면 괴리감마저 들었을 것이다.

"결혼식이라..."

앞자리에 앉아있던 세실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유려한 손놀림으로 필기를 하다가 우뚝 멈추더니 옆에 앉은 리나를 쳐다봤다.

이어서 특유의 빙긋 웃는 미소를 지으며 우리 보고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결혼식보다는 아이가 중요하지 않을까?"

"으, 응?"

"리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어..."

리나는 대답을 쉽사리 꺼내지 못 했다. 마리의 눈치를 보기 바빴기 때문이다.

마리도 세실리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눈매를 가늘게 떴다. 그동안 세실리는 엘레나를 한 번 힐긋거렸다.

때마침 엘레나는 다른 학생의 질문에 대답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세실리."

"나 불렀어?"

"그래서 했어?"

"... ..."

마리는 흥분하지 않고 가불기부터 날렸다. 아무리 세실리가 마리의 속을 박박 긁어도 저 말 한 마디면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저 말이 나오자마자 세실리의 올라갔던 입꼬리가 살짝 내려갔다. 이에 마리는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으며 연타를 때렸다.

"하지도 않았으면서 아이니 뭐니 그런 말은 삼가해줘. 알겠지?"

"...기회는 언제나 있어."

"응. 내가 첫번째지롱."

"칫. 두고 봐."

결국 세실리도 하는 수 없이 물러갔다. 그러면서도 나를 힐끔거렸는데, 붉은색 눈동자에는 포기할 수 없다는 열망이 가득했다.

사랑에 빠진 여자가 다 이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마리가 기꺼이 양보했지만 세실리는 그보다 더 높은 위치(?)를 원하고 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치정 싸움인가.'

아내를 둘 이상 둔 귀족들 사이에서도 정실 싸움, 그러니까 치정 싸움은 흔하다고 들었다. 정작 내가 직접 경험하게 되니 생소할 뿐.

나는 마리와 세실리 사이에서 묘한 기류가 느껴지자 제 3자인 리나를 쳐다봤다. 황녀인 리나도 이런 치정 싸움은 어색한지 눈치만 보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나와 딱 눈이 마주쳤는데, 그녀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바로 얼굴을 앞으로 돌렸다. 뒷모습만 보여서 자세히 살펴볼 수 없었으나 왠지 모르게 귀가 빨개진 상태였다.

여기에 더해서 두 손을 허벅지 사이에 끼우며 꼼지락거리기까지. 최근 리나가 나에게 보여주는 행동을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모두들 수고 많으셨어요."

잠시 후 엘레나가 강의를 모두 끝마쳤다. 중간에 떠들긴 했어도 중요한 건 다 들었다.

나는 강의가 종료되어도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앞자리에 앉아있는 사람, 레오나를 기다리기 위해서.

레오나는 다른 사람이 일어나도 조용히 자리에 앉아 노트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럼 난 가볼게. 약속 시간은 꼭 지켜야된다?"

"알았어."

"저... 마리? 아이작이랑 무슨 약속 잡았어?"

마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약속을 언급하자 리나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이에 마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시원하게 대답했다.

"9시에 만나자는 약속했어. 저녁 식사는 아니야."

"그럼... 알겠어. 어디서 만나?"

"광장 분수대 앞에서 만나는데? 그건 왜?"

"아냐. 아무것도..."

리나는 그리 말하며 나를 힐끔 바라봤다가 강의실 바깥으로 나갔다. 얼굴이 묘하게 붉어져 있는 게 보였지만 그리 신경 쓸 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세실리는 나가기 직전, 내 귀에 얼굴을 가까이 대더니 귓속말로 속삭였다.

'욕심 부려도 괜찮지? 내 뿔까지 만졌잖아.'

'... ...'

'사랑해.'

이건 좀 심장이 아픈데. 세실리처럼 고혹적인 목소리를 가진 여자가 귓가에다 대고 사랑을 속삭이니 가슴이 급격하게 요동친다.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세실리를 쳐다봤다. 그녀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빙긋 웃어주고는 강의실 바깥으로 떠났다.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건 마리보다 세실리가 더 잘 하는 것 같다. 이러다가 세실리도 훗날 마리처럼 성욕의 화신으로 변하는 건 아닐까.

'그건 좀... 무섭네.'

그때까지 빡세게 운동을 해야겠지. 나는 강의실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점점 없어지자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났다.

앞자리에 앉아있는 레오나는 사람들이 거의 다 떠나가도 필기를 하는 중이었다. 겉으로만 본다면 학업에 정진하는 모범생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나는 혹여 방해가 될까봐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집중이 깨지는 것만큼 기분 더러운 일도 없었으니 필기를 끝낼 때까지 잠자코 기다릴 생각이었다.

"...?"

하지만 레오나가 수인이라는 걸 간과하고 있었다. 인간보다 감각이 훨씬 뛰어난 종족. 누군가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 정도야 가뿐하게 감지하겠지.

이에 그녀는 내가 근처로 다가오자 필기를 하다 말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이윽고 내 얼굴을 보자마자 눈을 깜빡거리더니 의문을 표했다.

"...무슨 일이시죠?"

"크흠."

지금은 연기하고 있다지만 난 그녀의 본모습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살짝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서 자문을 구할 수 있을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결국 남은 건 정면돌파밖에 없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다가 레오나의 눈치를 보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혹시 남는 시간 있어?"

"남는 시간이라면... 저녁 말입니까?"

"저녁도 되고, 아니면 간단하게 커피 한 잔 마셔도 되고. 그냥 1시간 정도면 돼."

"음..."

무미건조하지만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는 레오나. 마리와 연인이 되면서 이때까지 접점이 거의 없었으니 저런 시선을 보낼만도 하다.

그러나 수인에 대해서 좀 더 알기 위해서는 그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책으로도 수인의 역사를 비롯한 다양한 생활상을 충분히 알 수 있었으나 장본인에게 듣는 문화만큼 더 확실한 것도 없다.

레오나는 한동안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고, 나는 속으로 긴장하며 그녀의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목적."

"응?"

"목적이 뭐죠?"

목적이 뭐냐는 레오나의 질문. 나는 그 질문을 듣고 속으로 안심했다.

사실 목적이라 하기에도 민망하다. 사실상 인터뷰나 다름없었으니.

레오나는 아직 내가 역사학 추천 학생으로 임명받았다는 사실을 모른다. 일단 이것부터 말하는 게 좋을 듯했다.

"너에게 묻고 싶은 질문들이 있거든.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엘레나 교수님에게 추천 학생으로 임명받았어. 다음 학기부터는 3학년 취급받는 셈이지."

"... ..."

"그런데 내가 지금... 논문 비슷한 걸 작성하고 있거든? 여기에 네 도움이 필요해서 부탁하는거야."

이정도로 말하면 대충 알아들을 것이다. 나는 다른 종족이 아닌 '수인'에 관한 글을 작성하는 중이라고.

레오나도 내가 무슨 의도로 말했는지 알아차려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리고 한동안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특유의 고저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대신..."

"대신?"

잠깐 말을 흐린 그녀는 뒤이어 협박성이 짙은 말을 꺼냈다. 푸른색 눈동자에 날카로운 예기가 발산되는 것이 시야에 잡혔다.

"사실과 동떨어진 글을 작성한다면..."

"에이. 그정도는 아니야. 난 그들이 생각보다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

나는 손사래를 치며 레오나의 불안을 잠재워줬다. 마냥 입 발린 말은 아닌 것이, 서적에서 나온 수인들은 호전적이고 야만적일지언정 의외로 멋진 구석이 많다.

역사적으로도 인간과 더불어 자기 희생을 많이 한 종족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종족전쟁 당시 대학살을 감행하지 않았더라면 주도권을 양분했을 정도로 강하기도 하고.

레오나는 내 이야기를 듣고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조용히 물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응. 몇 백년 후에는 인간과 대적할 가능성이 높기도 하고."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건 차차 설명할게.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내 질문에 레오나는 전보다 호기심이 짙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

한편 비슷한 시간.

"...마리."

"응?"

"9시에 만난다는 거... 내가 생각하는 거 맞지?"

"응. 맞는데."

"알았어... 아카데미 광장 분수대 앞이라..."

리나는 또다시 음흉한 계획을 머릿속으로 구상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본 세실리가 하도 어이가 없었는지 헛웃음을 흘렸다.

"...리나?"

"으, 응? 왜?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아냐."

세실리는 저러다가 들키는 건 아닐지 걱정되었다. 취향은 이해해줘야 된다지만 도의적으로 잘못된 행위였으니.

'진짜 도와줘야 되나...'

진심으로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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