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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140화 (141/763)

〈 140화 〉 알븐하임에서(4)

* *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를 고르자면, 그 누가 뭐라 해도 알븐하임의 수도이자 엘프들의 자랑 '위그드라실'을 꼽을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최초의 문명, 신들의 도시, 세상의 기준 등등. 다양한 수식어가 붙어있는만큼 위그드라실은 엘프들에게 자랑이자 긍지다.

3000년 전, 악마들과의 전쟁 당시 신들이 직접 건내준 씨앗, '세계수'를 길러 지금까지 지켜왔으며 시간이 흘러 거대한 나무로 성장하여 상징이 되었다.

신들이 직접 하사한 씨앗에서 자라난 나무인만큼 다양한 능력이 있는데, 우선 악의 기운을 정화시키는 마나다. 악마 전쟁 당시 온 세상이 난리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알븐하임이 무사할 수 있던 이유가 바로 이 정화 능력에서 기인한다.

악마들은 그 마나에 접촉만 해도 뼈와 살이 타들어 갔으며 심지어 엘프들도 이 마나를 빌려서 사용할 수 있었기에 무사히 퇴치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치유 능력이다. 세계수의 마력이 일종의 신성력 같은 능력을 보인다면 세계수의 이슬은 어마어마한 치유력을 겸비하고 있다.

죽기 직전인 사람조차 살려낸다는 '엘릭서'의 중요 재료 중 하나이며 언제 어디서 떨어질지 관리자만 알고 있기에 막대한 값어치를 자랑한다.

마지막으로 세계수 그 자체에 있다. 세계수는 엘프들에게서 가장 신성시 여기는 신의 선물이며 신전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허나 일반적인 신전이 아니라 인간으로 치자면 교황 또는 추기경 급이 되어야 들어갈 수 있다.

심지어 여왕조차 함부로 들어갈 수 없으니 얼마나 신성시 여기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인간들에게도 '세이비어'라는 신성교국이 있지만, 그들조차 세계수에 발을 디디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이렇듯 세계수는 엘프의 상징이자 긍지 그 자체이며 악마들에게 있어서 천혜의 요새다. 더군다나 위기의 순간 힘을 빌릴 수도 있기에 엘프에게 있어서 최후의 방어선까지 겸하고 있다.

"저게 진짜 나무 한 그루라고?"

"그렇다네."

"원근감을 무시하는데?"

여러모로 말이 많았던 입국 심사를 거쳐 위그드라실에 도착한 우리.

나는 옆에서 입을 쩍 벌리며 감탄하고 있는 마리처럼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우리의 눈에는 절경이라는 표현조차 부족할 아름다움이 펼쳐지고 있다.

넓은 길 옆에 다양한 건물이 한데 어우러진 것도 예쁘긴 하나, 점점 좁아지는 길 끝에 세워진 거목(巨?)에 비해서는 한참 부족했다. 도시와 자연이 구분되어 있으면서도 조화를 이루어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은 모습이다.

아니. 그림조차 이 광경을 표현할 수 없다. 세계수는 한치의 어색함 없이 도시와 융화되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선보이고 있다.

사람이 세운 문명과 거대한 자연이 하나가 된 모습은, 나에게 있어서 신선함을 뛰어넘었다.

"너희들도 눈치챘겠지만 저기 있는 나무가 세계수야. 3000년 전, 엘프가 신에게서 받은 씨앗에서부터 성장했지. 엘프가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야."

내가 도시의 절경을 감상하는 동안 리나가 세계수의 역사에 대해서 설명해줬다. 역사에 빠삭한 나였기에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었으나 직접 보면서 설명을 들으니 새롭게 느껴졌다.

3000년 동안 한 자리를 굳건히 지킨 세계수의 위용에 놀랍기도 했고, 새삼 이 신의 존재에 대해 자각하게 되었다. 정말로 신이 아닌 이상 세계수 같은 씨앗을 주는 건 불가능했겠지.

나는 그로부터 한동안 세계수를 감상하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원근감을 무시하는 듯한 거목 아래에는 세계수와 비견될만큼 아름다운 거리가 펼쳐졌다.

세계수가 신의 선물이라면 위그드라실은 땅 위에 세워진 최초의 문명. 그 명성에 맞는 값을 하고 있다.

헤일로 아카데미가 위치한 수도가 중세 유럽풍에 가깝다면, 알븐하임의 거리는 고대 그리스적인 느낌을 물씬 풍겼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는 유럽의 문명에 큰 영향을 끼쳤으니 묘하게 들어맞는다.

여기에 가장 눈 여겨 볼 점은 거리의 시민들이다. 엘프의 나라이니 엘프가 많은 건 당연하겠지만,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전생으로 치자면 길거리에 흔히 볼 수 없던 백인 또는 흑인을 유럽으로 가서 보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엘프답게 남녀 가리지 않고 화려한 미색을 자랑하여 눈을 즐겁게 만들었다.

그러다 나는 시민을 구경하다 말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나와 마찬가지로 거리를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는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응?"

마리도 내가 빤히 쳐다보자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나와 마주했다. 의문이 가득한 눈동자가 깜빡거린다.

나는 참을 수 없는 귀여움에 진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콩깍지가 낀 게 아니라 마리도 엘프 못지 않게 예쁘고 또 사랑스러웠다.

"마리는 귀만 길면 엘프라 해도 믿을 것 같아."

"정말로?"

"물론이지."

"히힛."

내 진심이 담김 칭찬에 마리가 나를 껴안으로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우리의 애정 행각을 본 엘프들이 묘한 시선을 던졌으나 이내 갈 길을 가기 바빴다.

하지만 몇몇 엘프는 아니었다. 길을 걷다 말고 수근거리는 건 물론이고 의아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건 나와 마리가 아닌, 그 옆에 서 있는 세실리와 가르츠 때문이다. 이유는 예상했다시피 그들이 마족이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밝은 계통의 옷을 입은 엘프들과 달리 세실리와 가르츠는 온통 검은색 계열의 복장인지라 더욱 눈에 띄었다. 여기에 더해서 은연 중에 흘러나오는 고귀함과 기품까지.

심지어 몇몇 엘프는 불쾌하다는 표정까지 지었는데, 숨길 생각은 하나도 하지 않고 대놓고 드러냈다. 아마 저 엘프들은 높은 확률로 구세대일 터.

딱 보아도 높으신 분이라는 걸 보여줬기에 심사관처럼 섣불리 나서지 않는 거지, 평범한 마족이었다면 어떻게 될지 뻔할 뻔자다.

그리고 따가운 시선들을 무수히 받고 있는 세실리는...

"엣츄!"

성숙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은, 귀엽디 귀여운 재채기를 했다. 여기에 더해서 코를 훌쩍이기까지. 얼굴 또한 약간 붉어진 상태였다.

그녀는 위그드라실에 도착하고 나서 상태가 이상해지더니 점점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녀뿐만 아니라 호위기사, 가르츠조차 비슷한 상황이다.

그는 묵묵한 인상처럼 어찌어찌 참고 있는 듯하나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중이다. 재채기도 자주 하는 것이 유독 둘만 상태가 악화되었다.

나는 걱정되는 마음에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누나. 괜찮아요? 가르츠 씨도 그렇고 아까부터 계속 재채기를 하시던데..."

"그러게. 일단 감기는 절대 아닌데... 설마 세계수의 마나 때문인가? 크응."

세실리는 코를 훌쩍이며 도시 위에 세워진 듯한 세계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른 사람은 괜찮은 반면 마족인 둘만 이상이 생겼으니 그쪽으로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실제로 세계수는 악의 정화하는 마나를 실시간으로 내보내고 있으니 적지 않은 영향이 있을 터. 증상도 그렇고 알르레기와 유사했다.

어쩌면 세계수가 내보내는 신성한 기운이 악마와 상극인 탓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천만다행히도 알르레기와 같은 증상만 나타날 뿐이지, 그 이상의 심각한 건 없다.

하지만 꽃가루 알르레기처럼 지속적으로 노출된다면 분명 더 많은 문제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세실리도 이를 인지했는지 약간 맹맹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거리를 둘러보는 건 포기해야겠어. 곧바로 여관으로 가자."

"그러는 게 좋겠어요. 어차피 저희도 여관으로 갈 생각이었으니까."

"그럼 어서 출발하자. 내가 먼저 앞장 설게. 세실리 너도 내가 알려준 여관에 예약했지?"

"응. 했... 에츄! 크응."

아까도 생각한 거지만 재채기가 정말 귀엽다. 코까지 훌쩍거려 평소 세실리의 이미지가 거리가 멀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푸큭!"

...가르츠는 독특하고. 복면으로 가렸지만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재채기를 하는 그였다.

어쨌거나 우리는 주변을 둘러볼 새도 없이 예약된 여관으로 움직였다. 여관으로 향하는 동안 세실리와 가르츠를 향한 수많은 시선이 쏟아졌으나 제 갈 길을 가기 바빴다.

입국 심사 때와 다르게 우리 주위에는 가르츠뿐만 아닌 제국의 호위기사가 다수 포진되어 있었으니. 아무리 엘프여도 위협을 가한다면 즉각적으로 처분한 권리가 있다.

머리가 돌아도 제대로 돌아버린 사람이 아니라면 함부로 시비를 걸지는 않는다는 뜻. 덕분에 방금 전과 달리 쾌적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푸취!"

세실리의 재치기는 덤이고. 어찌어찌 조치한 덕분에 얼굴의 붉은 기운은 가라앉은 듯했으나 코가 가려운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참을만해요?"

"이제는 익숙해진 것 같아. 마나로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고 있거든. 조금 귀찮긴 해도... 엣췽! 어쩔 수 없지."

"아까부터 생각한 거지만 재채기가 정말 귀엽네요."

"그거 칭찬이니?"

칭찬이라고 하기에는 약간 애매하다. 귀엽긴 귀엽지만 재채기가 귀여운 거니까.

세실리는 내가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있자 피식 웃더니 슬그머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팔짱을 끼더니 은근슬쩍 머리를 기대었다.

후각을 자극하는 그녀의 체향과 더불어 팔에 전달되는 말랑한 감촉에 정신이 아득해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억눌렀다. 우리만 있는 게 아니라 리나가 데려온 호위기사도 있는데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누나?"

"가만히 있어. 추워서 그러니까."

"아... 예."

그렇다는데 어쩔 수 있겠나.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에게 기대어 눈을 감는 세실리를 바라봤다.

이대로 지나가면 좋겠지만, 질투심 많은 우리의 여자친구가 이대로 가만히 있을리가 만무. 나는 세실리에서 시선을 떼고 다른 쪽을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마리가 뾰족한 눈초리로 나와 세실리를 번갈아보다가 딱 눈을 마주쳤다. 뒤이어 그녀는 한 쪽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더니 흥! 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무래도 여관에서 살살 달래줘야 할 것 같다. 지금은 세실리의 건강이 좋지 못 하니 그녀에게 조금 신경써주자.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여기가 예약한 여관이야. 어때? 멋지지?"

"오옹... 예쁘게 생겼다."

"엘프는 달라도 다르긴 하구나."

리나가 미리 예약해 놓았던 귀족 전용 여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리와 세실리의 감평처럼 여관의 외양은 화려하지 않고 단순함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을 표출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흰색 계통의 벽면이었으나 군데군데 관리를 한 덩쿨이 끼여있어 자연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다. 언뜻 보면 유적 같기도 하고 사람의 손을 탄 건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내부는 어떨까. 나는 리나가 안으로 먼저 들어가자 뒤따라 들어갔다. 나와 팔짱을 낀 세실리와 마리도 마찬가지였다.

"어서오세요. 별의 안식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안으로 입성하자마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귀를 비집고 들어왔다. 이에 고개를 돌리니 말끔한 복장의 엘프 여성이 우리를 맞이했다.

건물의 색채처럼 그녀가 입은 드레스 또한 흰색이었으며, 구불구불한 금발과 상큼한 미소로 하여금 마음이 절로 푸근해졌다. 보아하니 이곳의 종업원 혹은 여관 주인인 걸로 보인다.

리나는 엘프 여자의 환대에 고개만 끄덕거리고는 본론부터 말했다.

"리나 우르미 크리스틴의 이름으로 예약했어요."

"아! 미네르바 제국에서 온 귀빈들이군요. 알겠습니다. 1인실과 2인실을 각각 예약하셨죠?"

1인실은 모두들 알겠지만 리나 혼자만 사용하고, 2인실은 나와 마리의 방이다. 일단 나와 마리는 약혼을 한 사이였으니까.

마리는 나와 한 방에서 자고 일어난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나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참고로 세실리는 여관에 들어오자마자 팔짱을 풀었다.

"네. 호위기사들은 어디서 머무르죠?"

"이미 따로 마련해 놓았습니다. 귀빈들은 3층으로, 호위기사분들은 2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엘프 여성의 시선이 옮겨져 세실리에 고정되었다. 그와 동시에 알 수 없는 기류가 여관 내에 가라앉았다.

설마 그녀도 입국 심사관처럼 차별적인 발언을 내뱉을까. 나는 물론이고 모든 이의 시선이 엘프 여성과 세실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엘프 여성의 무겁게 닫혀있던 입이 열렸다.

"헬리움의 공주님 맞으시죠? 세실리 드라트 아이실리아 빈 님."

"...네. 맞아요."

"별의 안식처, 그리고 위그드라실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공주님도 3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의외로 우려했던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전 심사관이 병신 같아서 그렇지, 모든 엘프가 마족에게 차별적인 시선을 보내는 건 아닐테니 어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물며 저 엘프 입장에서도 세실리는 귀빈 중의 귀빈이니 내치게 된다면 존속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다. 속내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감사합니... 엣츄!"

"참. 공주님과 호위기사분께서 머무는 방은 정화 마법을 해제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족이시니 세계수의 마나에 민감하실테니까요."

여기에 더하여 배려를 하기까지. 케이르처럼 열려있는 사고방식을 지닌 모양이다.

이후로 우리는 짐을 풀기 위해 각자의 방으로 이동했고, 나와 마리는 2인실에 머물게 되었다. 말이 2인실이지 4인실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큰 방이었다.

"우와~ 진짜 푹신푹신하다! 아이작도 누워 봐."

"나는 조금 있다가."

침실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운 마리와 달리 나는 짐부터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사실 짐이라고 해봤자 책 몇 권밖에 없었기에 금방이었다.

이어서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간은 정확히 5시 20분. 조금 있으면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었다.

내일 당장 연설이니 오늘 바깥에 돌아다니는 건 무리고, 계속 여관에 있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나저나 귀족 전용 숙소답게 시계조차 참 고급스럽네.'

내가 시계를 바라보며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덥썩­

침대에 누워있던 마리가 어느새 내 뒤를 점령했다. 뒤를 점령한 것까지는 괜찮지만 다음에 이어진 행동이 문제였다.

흔히 말하는 못된 손이라고, 내 가슴에 올려진 마리의 손이 뱀처럼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움찔거리며 당황했지만 이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도착한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이에 마리의 손을 붙잡으며 단호하게 다그쳤다.

"안 돼. 적어도 저녁부터 먹고..."

"난 다른 쪽으로 배고픈데?"

"... ..."

이 발정난 흰색 여우 같으니라고.

*****

"휴우. 이제 좀 살 것 같네."

아이작과 마리가 머무는 2인실 바로 옆에 있는 1인실.

아름다운 금발의 미녀, 리나는 답답한 드레스를 벗어던지며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평상복이라고 해봤자 활동하기 더 편한 드레스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차이는 심한 편이었다.

뒤이어 그녀는 푹신한 침대에 앉아 방 내부를 둘러봤다. 문화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알븐하임의 여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검소한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화려한, 그리고 곳곳에 화단이 배치되어 있다. 게다가 마음을 정화시키는 듯한 공기까지.

여관 주인의 말에 따르자면 세계수의 마나를 통해 혼탁한 기운을 정화시킨다고 했으니 마음이 편해지는 건 당연하다. 마족인 세실리와 가르츠에게는 상극이겠지만 해제한다고 했으니 문제는 없다.

'아이작이랑 마리는 저기에 있겠지?'

리나는 고개를 옮겨 벽을 바라봤다. 저기 벽 너머에 아이작과 마리가 함께 잠을 청할 것이다.

어쩌면 오늘 밤에는...

"... ..."

리나는 엄한 상상이 떠오르자 얼굴이 급속도로 화끈거리는 것도 잠시, 침을 꿀꺽 삼켰다. 방음이 된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추측일 뿐, 확실하지 않다.

물론 귀족 전용 여관인만큼 방비는 다 해놓았겠지. 하지만 이럴 때를 대비하여 가지고 온 물건이 하나 있다.

이에 그녀는 꽁꽁 숨겨놓았던 물건을 하나 꺼냈다. 짧은 원통형에 빨대처럼 앞뒤로 구멍이 뚫린 통이었다.

겉보기에는 별 볼 일 없는 물건처럼 보이겠지만, 놀랍게도 마법 능력이 깃들어있는 아이템이다.

'이걸 벽에 갖다 대고 귀를 기울이면 도청이 되고, 눈으로 보면 투시가 된다고 했지?'

레오르트에게 사정사정해서 빌린 물건이니 그 효과는 확실할 것이다. 문제는 방비가 철저하게 깔려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 여관에서도 통할지가 의문이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 낫다. 리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커플이 머무는 벽 쪽으로 고개를 옮겼다.

이런 건 범죄인 걸 알고 있지만... 성적으로 호기심이 왕성해진 리나의 욕망을 막기에는 무리였다. 아이작을 볼 때마다 자꾸만 그 생각이 떠오르니 미칠 것 같았다.

그러니 호기심도 적절히 해소할 겸, 진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겸 겸사겸사 이 물건을 가지고 온 것이다.

'그, 그냥 테스트하는 거야. 테스트라고.'

리나는 자각하고 있지 못 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토마토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새빨개진 상태였다. 심장은 터질듯이 두근거렸으며 호흡조차 가빠졌다.

이후로 한동안 아이템과 벽을 번갈아보던 리나는 다시 한 번 침을 꿀꺽 삼키며 아이템을 눈에다 갖다 대었다. 첫번째로 투시 능력을 체크할 생각이다.

어차피 아이작과 마리도 짐을 푸느라 정신이 없을테니 벽 너머에는 아무것도...

"...?!"

내가 뭘 본 거지? 리나는 서둘러 아이템을 눈에서 떼어냈다.

비록 반투명한 형식이었으나, 분명히 보였다. 익숙한 사람들이 침대 위에 있는 것을.

그리고 그 침대 위에서...

두근! 두근! 두근!

침이 바싹바싹 마르고 가슴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이 요동친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다리로 벽 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이윽고 벽에 다다르자 조심스레 귀를 갖다 대었다. 당연하지만 방음이 철저하여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이템을 사용한다면? 리나는 아이템을 벽에 갖다 댄 뒤 거기에다가 자신의 귀를 갖다 대었다.

"...!!"

들린다. 아까보다 더욱 선명하게.

그녀는 더욱 집중하여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원하는 소리들이 속속히 귀에 전달되어 뇌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래. 이 소리는 분명히...

"...하아."

리나는 참아왔던 숨을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귀를 더욱 밀착시켰으며 비어있는 손을 아래로 움직였다.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응? 리나는 어디 갔어?"

"잠깐 피곤해서 쉰데. 저녁은 방에서 먹는다는데?"

"그래?"

리나는 그 날 일행에게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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