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 알븐하임에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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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와 마족의 관계는 은근히 복잡하지만, 엘프 쪽에서 마족을 일방적으로 싫어한다고 볼 수 있다. 마족은 자신들이 사람임을 인정받기 위해 셀 수도 없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엘프건 다른 종족이건 상관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엘프가 마족을 경계하고 경멸해도 정작 마족들은 신경쓰지도 않는다. 다만 종족전쟁 당시에는 마족이 인간의 뒤를 봐주고 있어서 접점이 아예 없는 건 또 아니었다.
만약 마족이 인간 연합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엘프가 자멸해도 인간도 수많은 피해를 입었을테니. 인간이 마법을 수월히 사용할 수 있던 이유도 마족의 참전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렇듯 엘프와 마족은 미묘하디 미묘한 관계다. 엘프는 악마의 후예인 마족을 경멸하고 있으나 정작 마족은 그러려니 하고 넘기고 있었으니.
만약 제논 일대기가 등장하지 않아 마족의 인식이 그대로고, 알븐하임이 개방 정책을 펼치지 않았다면 이 둘의 충돌은 거의 없는 수준이다. 서로의 존재를 인식해도 나서지 않는 이유가 공멸의 위험성도 있고 명분조차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가 흐르고 세상은 바뀌었다. 마족은 빛을 향해 나아갈 기회를 얻었고 엘프는 오만을 덜어내어 세상에 손을 뻗었다.
여태까지 부딪힌 적은 없지만, 사실상 상극이라 할 수 있는 두 존재의 갈등은 어찌 보면 언젠가 일어날 상황이다.
"누나. 무슨 일이에요?"
"후우. 응?"
나는 엘프 한 명과 실랑이를 벌이던 세실리에게 다가가 그녀를 불렀다. 잠깐 숨을 고르던 세실리는 나의 등장에 붉은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
그동안 그녀의 옆에 서 있던 가르츠가 예의바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 또한 말없이 그에게 고개를 숙임으로서 화답했으며 다시 세실리에게 집중했다.
세실리는 머리카락 색과 어울리는 칠흑색 드레스를 입어 공주로서의 기품을 뿜내는 중이었다. 드레스의 재질이나 수수한 외양을 본다면 외출용으로 보였으나 옷걸이가 옷걸이다보니 평범함마저 고급스러움으로 승화시켰다.
내가 옷차림을 살펴보는 사이 세실리는 내 옆에 있는 마리와 리나를 한 번씩 둘러보더니 피곤하다는 기색으로 말했다.
"별 일 아니야. 입국 절차 때문에 조금 머리가 아파서."
"입국 절차라..."
입국 절차라는 말에 고개를 돌려 그녀와 실랑이를 벌이던 엘프를 쳐다봤다. 엘프답게 미모가 출중하지만 단호하면서도 까칠해 보이는 인상을 지닌 남자였다.
단촐한 차림에다가 가슴팍에는 직급을 뜻하는 듯한 문양이 걸려있었는데, 아무래도 입국 절차를 위해 배치된 인력인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좀 더 확실한 증명을 보여주십시오. 문서가 있다고 한들, 그 문서가 진짜라는 걸 어떻게 증명하실 겁니까? 당신은 마족이니 그깟 마법 문서는 충분히 위조할 수 있을 겁니다."
"여왕님의 승인이 찍혀있는 이 인장은 안 보이시나요? 이건 마법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귀속 인장이에요. 아무리 저라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좀 더 확실한 증명을 부탁합니다. 여왕님의 인장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대충 무슨 상황인지 예상이 간다. 아무래도 세실리가 마족이기 때문에 입국 심사관이 되도 않는 트집을 잡아 입국을 거부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것만으로도 외교적으로 큰 실례지만, 헬리움의 상황을 고려하자면 외통수를 맞았다고 볼 수 있다. 알다시피 헬리움은 제논 일대기 등장 전까지는 주변 나라에게 모진 대우를 받아 반강제적으로 조용히 지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헬리움은 몇 달 전부터 본격적으로 주변 나라와 교류하기 시작했으며 지금껏 숨기고 있던 강점들을 한꺼번에 표출하여 본인들의 존재를 똑똑히 각인시키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이제 막 초입 단계라는 것. 헬리움은 수 백년 동안 다른 나라와 외교를 겪은 적이 거의 없었으며 인식조차 조금씩 나아지고 있을 뿐, 삐긋하게 되는 순간 어떻게 될지 장담하지 못 한다.
그러니 세실리가 여기서 조금이라도 잘못 대처하는 순간 심한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입국 심사관이 과연 거기까지 생각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난감한 상황인 건 변하지 않았다.
'평범한 귀족도 아니고 공주인데 이래도 되는 건가?'
어쩌면 헬리움, 더 나아가 마족이 얼마나 강력한지 몰라서 저러는 걸 수도 있다. 종족 전쟁 당시에도 마족은 인간 연합을 뒤에서 지원했지 엘프와 직접적으로 무력 충돌을 벌이지 않았으니까.
인간을 향한 엘프 특유의 오만함은 종족 전쟁을 통해 희석되었으나 마족을 향한 시선은 여전한 모양이다.
나는 신경전을 벌이는 심사관과 세실리를 번갈아보다가 세실리를 향해 부탁했다.
"누나. 그 공문이라는 거 보여줄 수 있어?"
"그건 왜?"
"궁금해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아르웬이 승인을 이상하게 했을 수도 있다. 만약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세실리는 내 부탁에 아무런 의심없이 공문을 나에게 전달했다. 공문은 두루마리처럼 돌돌 말려있었으며 종이의 재질 또한 평범한 것과 판이하게 달랐다.
이윽고 돌돌 말려진 종이를 펼치니 유려한 필기체로 쓰여진 공문이 적혀있었다. 맨 밑에는 아르웬이라는 걸 증명하는 인장이 찍혀져 있다.
[나, 알븐하임의 여왕 아르웬 엘리디아가 고한다.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 드라트 아이실리아 빈, 그리고 호위 기사 가르츠 발락의 입국을 승인하노라.]
짤막한 내용이지만 특수한 펜으로 작성했는지 글귀가 별처럼 반짝거렸다. 보아하니 마법과 깊게 관련된 모양이다.
인장 위에 쓰여져 있는 날짜도 그렇고 마법으로 작성된 듯한 문맥도 그렇고 아르웬의 승인서가 분명하다. 이거 하나만으로도 세실리가 입국을 거부당할 일은 전혀 없다.
이에 도통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심사관에게 물었다.
"아르... 아니, 여왕님이 직접 내린 공문서라는데 왜 못 믿으시는 거죠?"
"믿지 못 하는 게 아니라 이것 말고도 좀 더 확실한 게 필요합니다."
"이거 하나만으로도 불충분해요?"
"네. 마족의 입국은 알븐하임 역사상 처음이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뭐 이런 앞뒤로 꽉 막힌 사람을 보았나. 중동 사람들이 미국으로 입국할 때 겪는 기분을 약간이나마 알 것 같다.
다른 종족도 마찬가지겠지만 악마로 변할 위험이 있는 마족은 언제든지 경계 대상이다. 하지만 엘프의 경우는 조금 심하다.
하물며 엘프는 스스로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자부하며, 마족은 악마의 후예이니 싫어할 수밖에 없다. 마치 백인이 흑인을 인종차별하는 것과 비슷하달까.
아무튼 간에 이런 차별은 옳지 않다. 나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심사관에게 질문했다.
"이거 진짜로 여왕님이 승인한 공문이라면 어쩌시려고요? 책임질 자신 있는 거에요?"
"이미 상부에 확인을 부탁한 참입니다. 기다리시기만 하면 입국은 문제가 없습니다. 여왕님께서 직접 확인해주실테니까요."
"얼마나 걸려요?"
"그건 모릅니다. 마족의 입국은 처음이니 오래 걸릴 수도 있죠. 최소한 이틀은 소요될 겁니다."
와... 감탄이 나오는구나. 상부에서 지침이 내려오지 않았다며 입국을 거부하고 있다니. 융통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엘프가 특유의 자부심 때문에 고집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러니까 종족전쟁에서도 아이케르를 감옥에 처박아 둔 거지.
세실리도 답답한 건 매한가지였는지 가당치도 않다는 표정으로 심사관에게 따졌다.
"당신, 이 사태에 책임질 수 있어요? 이건 외교적으로도 심각한 결례에요. 이 사실이 여왕님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될지 예상도 못 하는 건가요?"
"상관없습니다. 전 400번의 봄을 지켜보았고, 1%의 확률이 결코 적지 않은 수치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 미세한 틈까지 막는 게 제 의무입니다."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는데 딱 그 꼴이네. 엘프의 전형적인 스트레오 타입을 여실히 보여주는 심사관이다.
하물며 400년을 넘게 살았다 했으니 종족 전쟁을 겪은 세대일 터. 마족을 향한 시선이 하등 좋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이건 엄연히 잘못된 조치다. 나는 진심이냐는 투로 심사관에게 조용히 물었다.
"저기요. 그 미세한 틈을 막는다고 하셨는데, 원래 미세한 틈까지 막으면 융통성이 없어지는 겁니다. 계속 그러다가 언젠가 내부의 힘을 못 이겨서 펑! 터질텐데."
"당신이 신경 쓸 사안이 아닙니다. 다른 심사관에게 가서 입국 절차를 밟으십시오."
"신경 써야 될 것 같아서 이리 말하는 거예요. 당신의 그릇된 판단 하나 때문에 알븐하임 전체에 큰 피해를 안길텐데 정말 괜찮아요?"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저는 단지..."
"확실이고 나발이고 승인서까지 내렸는데 무시한다? 여왕님을 개무시하는 거지 아니면 뭐겠습니까? 당신이 여왕님보다 더 윗사람이에요? 월권행위라고요, 월권행위."
내가 문서를 보여주며 조목조목 따지자 심사관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진다. 분위기 또한 무겁게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으나 나는 굴하지 않았다.
내 여자가 이런 차별을 겪는데 그 어떤 남자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참을 수 있다면 그게 더 못난 사람이다.
"만약 세실리 누... 아니, 공주님이 이대로 돌아가서 정식으로 항의한다면? 보나마나 알븐하임과 더불어 엘프라는 종족에 먹칠하는 계기가 되겠죠. 헬리움이 비록 외교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더라고 한들, 이건 나라 망신이에요. 그리고 당신은 나라 망신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엘프가 되겠죠. 엘프는 긍지와 명예를 목숨만큼 소중히 여긴다는데 그걸 다 깎아내린 입국 심사관."
"... ..."
"틈을 막고 싶다고 하셨죠? 그 신념은 좋아요. 만일에 대비해서 나쁜 건 없으니까. 하지만 세실리 공주가 당신에게 보여준 공문은 그 만일마저 차단시키는, 일종의 확신이에요. 그런데도 입국을 거부한다? 그냥 마족을 싫어하는 거지, 다른 이유는 없어 보여요."
돌직구를 강하게 날린 게 효과가 있었던건지 심사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원래 마음 속의 진심을 다른 사람이 꺼내게 되면 그 사람은 화내기 마련이다.
이대로 입국을 거부당할 수도 있겠지만 상관없다. 시리스나 아르웬에게 부탁하여 몰래 밀입국하면 되니까. 원래 밀입국은 걸리면 큰일나는 거지 무사히 나라에만 도착하면 걸릴 일이 거의 없다.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제가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입국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정황상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 하긴 당신은 인간이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죠. 인간은 예로부터 탐욕과 어리석음의 종족. 그러니까 완전무결한 우리와 달리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겁니다."
꼭지가 돌아버렸는지 결국 차별성 발언까지 꺼내는 심사관. 전생에서도 인종차별은 겪어본 적이 없는데 여기서는 종족차별을 겪게 되었다.
그래도 딱히 아무렇지도 않다. 전생의 영향이 뿌리깊게 박혀있기 때문인지 종족차별보다는 인종차별에 민감하니까. 그냥 엘프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당신. 그 말 취소하는 게 좋을 거예요."
심사관이 나에게 차별성 발언을 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세실리가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가르츠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으며 마리와 리나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저 엘프를 심사관으로 뽑았는지 모르겠다만, 이미 그는 선을 넘어버렸다. 나는 약올린 것도 아니고 팩트만 조목조목 짚었을 뿐인데 자기가 알아서 무덤을 파버린 꼴이다.
아무래도 입국을 위해서는 한동안 기다려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심사관과 정면을 마주했다.
키가 커서 그런지 그와 나의 눈높이는 거의 비등했다.
"음... 뭐, 그럴 수도 있겠죠. 인간은 탐욕이나 이기심, 그리고 어리석음으로 인해 수많은 잘못을 저지릅니다."
"알면서 왜..."
"그렇기에 발전 가능성이 그 어떤 종족보다 뛰어나죠. 인간은 잘못을 저지를지언정 인지하고, 고치기라도 하거든요. 사람은 잘못을 인지하고 고치는 순간 더 발전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완전무결이라..."
나는 피식 웃으며 눈 앞의 엘프와 같은 오만한 종족에게 따끔하게 한 마디 해줬다.
"그거 참 발전 가능성이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꿈도 희망도 없는 종족이군요. 누가 말한 것처럼 말이죠."
"... ..."
"정말로 완전무결이 되고 싶다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인지하고 고쳐나갈 생각부터 하세요. 교만에 빠져 스스로가 옳다고만 생각하는 순간 남는 건 자멸이니까. 종족전쟁까지 겪었으니 무슨 말인지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다면 그때는 정말 인정해줘야 된다. 똥고집 하나는 강하다고.
엘프는 자존심이 강한만큼 자존심을 건드리게 되면 마지못해 허락하는 사례가 많다고 신디에게 들었다. 이대로 거부하면 자존심이 상할테니 심사관으로서는 거부할 수 없을 것이리라.
"...할 말은 그게 다입니까?"
"네."
"그럼 이제 썩 꺼지십시오. 당신들은 모두 입국 불가이니."
그런데 여기서 똥고집이 자존심을 이긴 엘프가 있구나. 다른 건 몰라도 눈 앞의 꼰대는 정말 답이 없어보였다.
결국 하는 수없이 물러가려는 찰나, 다른 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혹시나 해서 왔더니 정말 이러고 있네."
"응?"
엘프 특유의 우아하고 고상한 말투가 아닌, 경박함이 깃들어 있는 말투다. 이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니 웬 엘프 남자 한 명이 이리로 다가오는 중이었는데, 싱글벙글 웃는 얼굴과 더불어 사뿐사뿐한 걸음걸이가 다소 독특했다.
머리카락 색은 풀을 연상시키는 밝은 연두색이었으며 엘프답게 수려한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긍정 에너지를 뿜어내는 사람으로 보였지만...
"케, 케이르 님...!"
심사관의 반응을 보니 뭔가 심상치 않았다. 케이르라고 불린 엘프가 등장하자마자 심사관이 두려움에 떠는 표정을 지었으니까.
그동안 우리에게로 다가온 엘프 남자, 케이르는 나를 지나쳐 심사관에게 접근하더니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깨를 붙잡자 심사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뒤이어 케이르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심사관에게 말을 걸었다. 걸음걸이처럼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인상적이다.
"내가 누누이 당부했잖아. 곧 있으면 헬리움의 공주님이 방문하실 거라고. 그러니까 그 분과 호위기사는 그냥 입국 통과시키라고 말이야."
"하, 하지만 마족은..."
"악마의 후예?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 지금 그까짓 게 중요해? 우리 여왕님의 연설을 보러 온 귀빈이잖아. 귀빈. 응?"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하지 말고 이유를 말해. 공주님은 승인서를 가졌고, 내가 보내라고 당부까지 했어. 그런데 왜 입국 거부를 한 거니? 한 번만 말해봐."
나긋나긋했지만 그렇기에 더욱 공포스러움이 느껴졌다. 옆에서 보고 있는 나조차도 그런 느낌인데 심사관은 오죽할까.
당장이라도 뭐가 터질 듯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을 때, 안색이 파리하게 변했던 심사관이 침을 꿀꺽 삼키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해볼래?"
"만일에 대비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끝까지 자기 소신을 지키는 심사관.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고집이 상상을 초월한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쩔 수 없다라..."
그리고 그 대답을 들은 케이르는 한숨을 쉬더니 심사관의 어깨를 두드렸다. 뒤이어 빙긋 웃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그럼 나도 어쩔 수 없겠네."
그 말을 한 케이르는 심사관의 가슴팍에 달려있던 문양을 조심스레 떼더니.
뻐억!
그의 복부를 발로 강하게 차버렸다.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할만큼 어마어마한 각력에 심사관은 저 멀리 나가떨어져 벽에 처박혔다.
벽에 처박힐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강하게 찬 것일까. 장담하건데 내가 저 킥에 당한다면 그대로 즉사 내지 중상이겠지.
몸이 기본적으로 튼튼한 엘프여도 며칠동안은 요양해야 할 것이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질 때 쯤, 케이르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심사관의 뱃지를 자신의 가슴팍에 달더니 나를 바라봤다.
이윽고 세상 친절한 미소를 띄며 나에게 물었다.
"입국 심사관이 부재인 관계로 제가 대신 절차를 밟아드리겠습니다. 저희 어디까지 얘기했죠?"
"...아직 아무 얘기도 안 했는데요."
"하하하. 그런 건 넘어가시고, 신원을 입증할 증표 혹은 승인서를 보여줬으면 합니다. 거기 있는 공주님도 같이."
역시 엘프라도 괴짜는 있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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