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 알븐하임에서(1)
* * *
엘프의 나라이자 신들이 처음으로 선택한 국가, 알븐하임으로 입국하기 위한 날이 밝아왔다. 알븐하임은 여태까지 언급했던대로 깐깐한 입국 절차를 자랑하기에 아침 일찍부터 출발했다.
뒤이어 마리, 리나, 이 두 명과 함께 마차를 타고 제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황궁으로 이동했다. 세실리는 미네르바 제국이 아닌 헬리움에서 출발한다고 했으니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어째서 황궁으로 가냐고 묻는다면, 지역과 지역이 아닌, 나라와 나라 사이를 이동하기 위한 텔레포트 시설은 황궁에 있기 때문이다. 레킬리스 저택에 있는 텔레포트도 미네르바 제국에 있는 지역만 이동이 가능하다.
"여기서 바로 알븐하임으로 입국하는 거야?"
"그런 건 아니야. 알븐하임에 도착하지만 그곳에서 자세한 신원과 입국 목적을 밝혀야 되거든. 여기는 중간 지점이라 보면 돼."
잠시 후, 우리는 텔레포트 시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황궁 내부에 설치하면 안전상 위험이 따랐기에 외곽에 설치했으며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기 위함인지 경비는 물론이고 건물의 외양조차 삼엄했다.
헬리움으로 방문했을 때는 세실리가 개인 텔레포트를 사용하여 감상할 시간도 없었는데 막상 직접 마주하니 무언가 신기했다.
건물의 규모도 생각보다 그리 크지는 않았으며 겉보기에는 그냥 감옥처럼 보인다.
나는 처음 보는 텔레포트 기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옆에 서 있는 리나를 쳐다봤다. 현재 리나는 자신을 따라 온 호위 기사에게 지시를 내리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입국 절차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걸로 추정된다.
"아이작은 다른 나라로 가는 건 처음이지?"
리나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내 옆에 서 있던 마리가 물었다. 이에 고개를 돌리니 싱글벙글 웃고 있는 마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마리는 모르고 있구나.'
초고 도난 사건 때문에 잠깐 헬리움으로 방문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나와 세실리, 아르웬 사이의 비밀로 치부되었으며 마리는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조차 모른다.
그러니 그녀는 내가 다른 나라로 가는 걸 처음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오묘한 기분에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응. 게다가 알븐하임이라 약간 긴장되긴 해. 마리 너는 간 적 있어?"
"사실 알븐하임은 나도 처음이야. 테르스 왕국이나 벨루아 공국 같은 곳은 간 적이 있지만 이종족은 이번이 처음이야."
"그럼 아예 모르는 거야?"
"입국 절차가 더럽게 까다롭다는 것 정도? 그리고 아빠 말로는 종족차별이 좀 있다고 들었어."
"종족차별이라..."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전생에는 인종차별이 있지만 이곳은 종족이 다르다 보니 종족차별이라 일컫는 듯했다.
그리고 신디에게 듣기로 구세대가 유독 차별성 언행을 자주 벌인다고 들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잘못 교육받은 신세대조차 가끔식 그런다고.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교만'에 가장 잘 어울리는 종족이지 않을까 싶다. 빛과 그림자가 인간보다는 아니지만 비견될 정도다.
"그럼 세실리는? 세실리는 마족이잖아. 우리보다 훨씬 심할 것 같은데."
"나도 그게 걱정이야. 입국 허가까지는 받았다는데 그 후로는 잘 모르겠어. 마족이 알븐하임에 발을 들인 경우는 여태까지 없다고 했거든."
마리가 걱정을 듬뿍 담은 목소리로 우려를 표했다. 실제로 마족은 어느 나라이던 간에 '정식적인' 입국이 거의 불가능했다. 대부분 밀입국을 했으며 헬리움이 반강제적으로 폐쇄 정책을 벌인 이유다.
제논 일대기가 등장하고 난 이후에는 상황이 몇 배는 나아졌다지만 알븐하임과는 여전히 삐걱거렸다. 표면적으로는 입국을 허용해도 내부는 아무도 모르고 있으니까.
이 탓에 세실리가 알븐하임에서 차별적인 언사를 받지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그렇게 된다면 외교적으로 심각한 결례로 발전할 것이다. 입국 허가를 승인받는다는 건 공식적으로 방문할 거라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미 알븐하임 뿐만 아니라 미네르바 제국에서도 널리 소식이 퍼진지 오래다. 리나를 포함한 나와 마리가 알븐하임에 방문하여 아르웬의 대국민 연설을 지켜볼 거라는 걸.
참고로 리나와 마리는 각각 황녀와 공작 영애로 소개된 반면, 나는 마리의 약혼자로 소개되어 있었다. 마리가 그걸 듣고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웃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만약 그러면 알븐하임의 평가만 나빠질테니까. 게다가 우리는 근처의 여관에서 묵을 예정이잖아?"
"계속 여관에만 있을 거야? 돌아다닐 생각은 없어?"
"네가 원한다면 상관없어. 그런데 과연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네. 너랑 나랑은 같은 방을 쓸테니까."
"... ..."
같은 방을 쓴다는 말을 하자마자 마리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진다. 그러면서도 내 손을 꼭 붙잡는 것이 본인의 욕망을 단편적으로 대변해줬다.
나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그녀의 속마음에 피식 웃어주며 손에 힘을 주었다. 마리가 특유의 방실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기뻐한다.
비록 농담식으로 한 이야기지만, 악명이 자자한 알븐하임의 입국 절차와 더불어 피곤한 몸을 달래려면 하루 정도는 여관에서 쉴 것 같다. 혹시 몰라 책과 노트를 지참한 상황이다.
"이제 가자. 안쪽에서 이미 정리를 끝냈대. 우리는 마법진 위에 서 있기만 하면 될 거야."
"이동하면 그곳에서 입국 절차를 시작하는 거지?"
"응. 악명만큼 빡빡하진 않을테니까 긴장하지 않아도 돼.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우리는 귀족이잖아. 신원은 이미 다 보장되어 있어."
"알았어. 그런데 리나 너는 알븐하임에 간 적 있어?"
"딱 한 번 오라버니와 가 본 적이 있어. 그때 여왕도 만났지."
"정말?"
알븐하임의 방문은 그렇다 치고 아르웬과 구면이라는 소식은 처음 듣는 정보였다. 리나는 어떻게 해서 아르웬과 만났던 걸까.
리나는 그런 의문이 담겨있는 내 표정을 보고 미소를 짓더니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딱 한 번 알븐하임의 아카데미를 견학할 기회가 있었거든. 세계수라는 거대한 나무 안에 아카데미가 있었지. 정말 신기했어. 여왕은 그때 한 번 만났고."
"헤일로와 비교했을 때는 어때?"
"그곳이 훨씬 좋아. 아무래도 엘프가 직접 건설한 아카데미다 보니 어쩔 수 없겠지. 우린 간단한 마법 하나조차 예산이 많이 들어."
인간은 언제쯤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날이 올까. 엘프나 마족처럼 숨 쉬듯이 사용하는 게 아니라 노력만 기울이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그게 아니라면 과학의 힘을 빌리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솔직히 에어컨이나 냉장고가 버젓이 존재하는 걸 보면 기계도 충분히 제작할 능력이 되는 것 같은데.
나는 속으로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텔레포트 시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설 앞에서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비원들을 지나쳐 건물 내부로 들어서니 공기가 무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오..."
그리고 내부를 둘러보자마자 여러 의미가 담긴 탄성을 내뱉었다. 바닥에 복잡한 술식이 들어있을 것 같은 마법진이 있었으며 그 주위에는 로브를 착용하고 있는 마법사들이 둘러싸고 있다.
텔레포트라기 보다는 악마를 소환하는 것 같다. 더군다나 마법사들이 무어라 중얼거렸는데 미묘하게 메아리가 울려서 분위기가 음습했다.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황녀님. 마법진 위에 서 계시면 됩니다."
준비 과정을 잠자코 지켜보는 와중에 늙수레한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텔레포트 시설을 관리하는 책임자인 듯했다.
이에 리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법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발걸음을 옮기면서 나와 마리도 함께 움직였다. 여전히 손을 붙잡고 있는 채로.
이윽고 알븐하임으로 향할 사람들이 모두 마법진 위로 올라가자마자 아까 전 책임자가 입을 열었다.
"10초 후 텔레포트를 가동합니다. 10... 9... 8... 7... 6... 1."
잠깐만. 갑자기 왜 6초에서 1초로 건너뛰는 거지.
내가 당황하건 말건 책임자는 특유의 늙수레한 음성으로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알븐하임으로 출발합니다."
파앗!
그 말과 동시에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이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빛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혹시 몰라 마리와 붙잡은 손에 힘을 강하게 주니 그녀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조용히 힘을 주는 것이 느껴졌다.
덕분에 마음이 안심되려는 찰나, 마법진에서 뿜어져나오던 빛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이에 슬슬 눈을 떠도 될 것 같아 조용히 눈을 열었다.
밝은 빛이 한순간에 터져나와서 그럴까. 내 시야에 검은색 아지랑이가 일렁이며 시야를 방해했다. 그래도 아예 앞을 못 볼 정도는 아니어서 구분은 가능했다.
방금 전 마법진을 둘러싸던 마법사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고, 눈 앞에는 웬 남자 한 명이 당당하게 서 있었다.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니 수려한 미모와 더불어 인간보다 훨씬 긴 귀를 가진 남자다.
남자는 다름아닌 엘프였다. 그는 내가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우아한 미소를 짓더니 상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알븐하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러분. 입국 절차는 저쪽에 가서 진행하시면 됩니다."
"어...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빨간 머리 남성분."
얼떨결에 인사하자 엘프 남자가 부드럽게 인사하며 받아줬다. 괜히 멍청한 짓을 한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동안 리나는 엘프를 향해 예법에 맞게 인사하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미네르바 제국의 1황녀, 리나 우르미 크리스틴이라고 합니다. 저희가 온다는 소식은 들으셨나요?"
"물론입니다. 자세한 입국 절차는 저 길을 지나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얘들아, 가자."
"응."
리나의 뒤를 따라 가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아까 보았던 텔레포트 시설과 다르게 이곳은 빽빽한 나무로 가득 채워져 있다.
후각을 자극하는 숲 특유의 향기가 코를 찔러들어왔으며 주변은 온통 초록색이다. 게다가 이곳을 지키는 엘프도 한 명밖에 없어보였다.
나는 책임자로 추정되는 엘프 남자를 지나치면서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냥 이대로 쉽게 보내는 건가?'
알븐하임의 입국 절차는 더럽게 까다로운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왔는데 이리 쉽게 보내주다니 약간 허무해졌다.
아니면 이 길을 쭈욱 지나치면 일종의 검문소 같은 게 나온는 것일까. 나는 의문이 스멀스멀 올라와 리나에게 질문했다. 옆에 호위 기사가 있다지만 그들은 딱히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 반말을 사용했다.
"이제 알븐하임으로 쭉 들어가는 거야?"
"그건 아니야. 이 앞을 조금만 걸어가면 입국 절차를 위한 기관이 세워져 있을 거야. 본격적인 입국 절차는 그곳에서 하면 돼."
"아까 그 사람은?"
"텔레포트 시설을 관리하는 마법사야. 인간과 달리 엘프는 마법사 한 명만 있으면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 있거든."
"혼자서도 관리가 돼?"
"여러 명을 이송시켜야 되니 그쪽 방면에서 전문가겠지. 그리고 안 보이는 곳에서 경계하고 있을 거야. 숲은 엘프에게 있어서 보금자리나 다름없으니까."
역시 안 보이는 곳에서 경계 근무를 서고 있던 모양이다. 나는 새로운 사실을 속속 알게 되자 신기해졌다.
리나는 그런 내 표정을 보고 피식 웃더니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알려줬다. 정확히는 입국 절차를 어떻게 해야 무난히 통과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다.
"텔레포트 시설을 이용하면 보통 VIP급으로 간주되어 입국 절차도 많이 유순해져. 그러니 이상한 대답만 하지 않으면 충분히 통과할 수 있어."
"예를 들면?"
"무슨 목적으로 방문했는지에 대해 물었을 때 단순히 여행이라 답하면 안 돼. 어디를 여행할 거고, 어느 여관에서 묵을 예정이며, 또 언제 출국할지 상세히 말해야 되거든. 우리는 VIP라 이정도지, 일반인이라면 훨씬 오래 걸려. 너도 알다시피 엘프는 다른 종족에 한해서 유달리 깐깐하거든."
"엘프는 왜 그리 깐깐하게 구는 거야?"
내가 아니라 마리의 질문이다. 그녀는 푸른색 눈에 의문을 가득 품고 있었다.
하지만 리나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지 바통을 나에게 넘겼다.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아이작이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아이작 너는 알고 있어?"
"어디까지나 유추하는 거지만... 종족 전쟁 때문이겠지."
"종족 전쟁?"
"응."
마리가 자세한 설명을 부탁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옆에 있는 리나도 마찬가지였다. 쟤도 진짜 모르고 있었구나.
나는 두 여인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생각을 천천히 정리한 후, 하나하나 설명을 꺼냈다. 신디에게도 들었던 이야기라 말하는 건 쉬웠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인간과 엘프는 300년 전 종족전쟁을 치렀어. 인간은 물론이고 엘프에게도 상당한 피해를 안긴 전쟁이지. 하지만 엘프에게 300년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약 30년 전이야. 반면 인간은 3세기가 훌쩍 지나간 시점이지. 인간은 역사에 기록된 전쟁이지만 엘프는 여전히 기억되고 있어. 이 때문에 입국 절차가 까다로운 거겠지. 엘프에게는 전쟁의 여파가 지속되고 있을테니까."
"혹시 모를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거야?"
"어찌 보면 그렇겠지? 다만 엘프는 개방 정책을 펼친지 얼마 안 됐다는 걸 명심해. 당연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어. 원래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리는 법이니까."
"오옹..."
내 설명을 듣고 납득이 가는지 마리가 감탄했다.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리나도 비슷한 얼굴이다.
뒤이어 마리는 베시시 웃더니 내 팔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리고 얼굴을 마구 비비며 행복에 겨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똑똑하고 잘생긴 사람이 내 남자친구라니... 난 정말 행복한 여자인 것 같아."
"마리. 리나가 보고 있는데?"
"보라고 해. 어때? 부럽지?"
마리가 나와 팔짱을 끼며 리나에게 까불었다. 최근에 둘이 화해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그림이었다.
리나도 마리의 천진난만함에 피식거리더니 못 말린다는 듯이 말했다.
"부럽네. 나도 아이작 같은 남자가 있었으면 좋겠어. 잘생기고, 똑똑한데다, 그리고..."
리나가 잠깐 말을 멈추더니 서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윽고 눈동자가 중간에 멈추며 입을 꾹 다물기까지. 그와 동시에 미미한 홍조가 일어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쯤, 리나가 시선을 슬그머니 돌리며 헛기침을 토했다.
"큼큼. 아무것도 아냐. 그냥 부럽네."
"너 또 그 생각하고 있지?"
리나가 말을 돌리려고 할 때 마리가 대뜸 그리 물었다. 그 질문이 꽤 잘 먹혔는지 리나가 크게 당황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아, 아니야! 절대 아니야! 내가 변태도 아니고...!"
"그런 것 치고는 얼굴이 새빨간데? 너 설마..."
"조, 조용히 해! 아이작이 오해하잖아!"
갑자기 내 이름이 왜 언급되는 걸까. 내가 궁금해하는 동안 리나는 빨개질 대로 빨개진 얼굴로 나와 마주했다.
마리와 비슷한 색채의 눈동자가 내 얼굴에 고정된 것도 잠시, 자꾸만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올라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꿀꺽
수세에 몰린 것인지, 아니면 긴장한 것인지 리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평소 점잖은 그녀의 성격을 고려하자면 의외의 반응이다.
"흐응."
그사이 마리는 건수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나와 팔짱을 풀고는 리나에게 슬글슬금 다가갔다. 미묘한 비음을 흘린 것과 표정을 보아하니 장난기가 발동된 모양이다.
뒤이어 리나에게 다가간 마리는 귀에다 대고 작게 소근거렸다.
"...!"
뭐라고 말한 건지 모르겠다만, 짤막한 마리의 말 한 마디로 리나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새하얀 그녀의 피부가 모두 붉어졌으며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눈에 포착되었다.
마리는 대체 무슨 말을 했던 걸까. 내가 궁금해 하고 있는 사이 마리가 실실거리며 웃더니 다시 나와 팔짱을 끼며 찰싹 달라붙었다.
"무슨 말을 한 거야?"
"아무것도 아냐. 그냥 장난 좀 친 거야."
"하으으..."
장난을 좀 친 것 치고는 반응이 꽤나 격렬했다. 두 손을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를 차마 들어올리지도 못 하고 있었으니까.
"헤헤."
"... ..."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는 나에게 찰싹 달라붙은 채 헤실거리기 바빴다. 이후로 우리는 저 멀리 보이는 검문소로 발을 디딜 수 있었으며.
"안 됩니다. 아무리 승인을 받았더라도 마족은 여왕님이나 원로원이 직접 허가하지 않은 이상 알븐하임에 발을 디딜 수 없습니다."
"제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요? 저는 분명 여왕에게 직접 허락을 받았고, 여기 문서도 있어요. 설마 여왕이 직접 내린 공문인데 그걸 못 믿으시는 건가요?"
"저희 여왕님이 무슨 이유로 마족의 입국을 허락하겠습니까? 제대로 된 증거를 대십시오."
"후우...!"
입국 절차로 실랑이를 벌이는 중인 세실리과 마주하게 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