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혼혈(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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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르웬에게 전달한 내용은 히틀러가 정권을 꽉 쥐어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연설 중 일부다.
히틀러는 그 연설 하나로 세계 1차 대전 패배로 열등감에 빠져있던 독일인들에게 우월감과 자긍심을 심어주었으며 더 나아가 본인의 입지를 확고히 만들었다.
이후로 나치 정당이 세워지고, 자신의 모든 적들을 숙청했으며 국민의 눈과 귀를 가려 단체로 세뇌시켰다. 그 다음에는 폴란드를 침공하여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실제로 어느 영국의 한 스파이가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배신을 할 뻔했다고 할 정도였으니 그의 연설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 수 있다. 연설문 자체도 낙심해 있던 국민들을 북돋아 주기에 안성맞춤인 내용이었다.
"자, 장난치지 말거라! 내가 어떻게 이런 연설을 하겠느냐!"
"크하하학!!"
아르웬이 얼굴을 붉히며 빼액 소리치자 나는 책상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도 뒤늦게 연설의 내용이 이상하다는 걸 깨닫은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재 내 머릿속에는 아르웬이 강한 억양과 과장스러운 제스쳐로 알븐하임의 백성들에게 소리치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안 어울린다.
"아, 배야. 오랜만에 크게 웃어보네."
"으으으... 놀리지 말거라. 난 진지하단 말이다..."
내가 눈물을 닦으며 말하자 아르웬은 풀이 죽은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다만 붉어진 얼굴은 여전하고 귀 또한 하늘 위로 바짝 솟아있다.
엘프는 본인의 감정이 움직이는대로 귀에 변화가 일어난다고 들었다. 그러므로 지금 그녀는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의미다.
게다가 잔뜩 삐졌는지 입술을 댓발 내밀며 아이처럼 뾰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누가 이렇게 귀엽고 아름다운 엘프를 보고 알븐하임의 여왕이라 생각하겠나.
여왕이 아닌 평상시의 모습만 봐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이때까지 여왕으로서 아르웬은 본 적이 없으니 도통 상상이 가질 않았다.
다만 장난은 그만 하는 게 좋을 듯했다. 나는 토라져 있는 아르웬에게 곧바로 사과했다.
"알았어. 더이상 장난은 안 칠게. 그래도 임시 연설문도 나름 괜찮지 않아?"
"객관적으로 보면 훌륭한 연설문이다. 하지만 뭐랄까... 자긍심을 심어주는 연설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선동하기 위한 것인지 잘 모르겠구나. 내가 원하는 연설과는 방향이 전혀 다르다."
"정확하네."
실제로 히틀러도 그 연설로 패배감에 찌들어있던 독일인의 자신감을 끌어올렸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선동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꼭 나에게 부탁해야되는 일이야? 보통 연설문은 다른 사람이 써주고 네가 직접 검수하잖아."
"그대처럼 글솜씨가 훌륭한 사람은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없기 때문이니라. 특히 마음을 움직이는 글은 그대밖에 모르고."
"얼굴에 금칠하는 것도 적당히 해줬으면 좋겠는데."
"겸손도 과하면 보기 좋지 않다. 그대의 글은 이미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데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저렇게 단호히 말하니까 도로 내가 민망해진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뒷목을 매만졌다가 본론부터 꺼냈다.
"좋아. 그러니까 아르웬 너는 내가 연설문은 작성해줬으면 하는 거지? 알븐하임 내에서 발생하고 있는 혼혈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서."
"그렇다. 지금 알븐하임은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혼란에 빠져있다. 혼혈이 언제부터 알븐하임에 스며들었는지, 그리고 또 선조 중에 혼혈이 있는지 없는지 파악할 수 없는 상태지."
알븐하임에서 혼혈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회적 현상이다. 그나마 인간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는데, 엘프는 수명이 짧아 세대 교체가 자주 일어나는 인간과 달리 혼혈을 찾기가 쉽다.
하지만 겉으로 특징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사실상 알븐하임은 혼혈과 융화될 수밖에 없다.
나는 알븐하임의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생각하는 것도 잠시,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라 아르웬에게 물었다.
"엘프에게 순혈의 상징이 커? 그것도 종족우월주의 아냐?"
"그렇다. 허나 그대도 알다시피 엘프들 마음 속에는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일종의 선민사상이 깃들어 있지. 신의 선택을 받은 종족의 피와 그렇지 않은 종족의 피. 이것만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엘프는 보면 볼 수록 이해할 수 없는 종족이란 말이지."
어쩔 때는 명예와 긍지를 좇는 종족이지만, 가끔은 이처럼 오만함 때문에 스스로를 잡아먹는 종족이다. 자부심이 자만심이 되고, 선민사상이나 우월감이 교만이 되는 것처럼 엘프는 극단적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그럴만한 '힘'마저 가졌으니 교만에 빠져들 위험성이 높다. 결국 혼혈 사태는 반쯤 엘프 특유의 교만함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지금 순혈이랑 혼혈이 서로 충돌하고 있어?"
"아직 그정도는 아니다. 스스로를 혼혈이라 밝힌 사람들은 대부분 높은 직급에 앉아있기 때문이지. 다만 내 주변 사람도 혼혈이 아닐까? 라는 의심이 싹 틔우는 중이지."
"이대로 방치하면 심해지긴 하겠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싹이 틔었을 뿐이지 꽃이 만개하지는 않았다. 꽃이 만개하게 되는 순간 겉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질테니 아르웬이 연설을 통해 진정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문제는 혼혈조차 차별하는 엘프가 과연 아르웬의 연설을 듣고 진정하겠냐는 것. 상황이 마냥 쉽지만은 않다.
최악의 경우, 누군가 선동하여 혼혈들을 전부 몰아내는 것. 만약 이 꼴이 난다면 똑같은 경험을 겪었던 다크 엘프들은 알븐하임은 변하지 않았다며 완전히 등 돌리게 될 것이고, 자연스레 국력 또한 급감할 게 뻔하다.
아직은 폭풍 전의 고요함일 뿐, 여기서 제대로 수습하지 못 한다면 알븐하임에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부담스럽긴 하겠다.'
나는 알븐하임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아르웬을 빤히 쳐다봤다. 저 작디 작은 어깨에 한 나라의 국운이 정해져 있다니 얼마나 힘들까.
더군다나 엘프는 고집불통인 사람들이 많고, 원로원처럼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현명함과 교활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어리디 어린 아르웬이 상대하기에는 벅찬 존재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굳이 나에게 연설문을 부탁한 이유도 알븐하임 내의 사람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인 게 아닐까. 새삼 알븐하임의 정치 구조가 궁금해졌지만 거기까지는 간섭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어찌 보면 이것 또한 아르웬에게 내려진 시험이라 할 수 있으니. 나는 약간만 도와주면 그만이다.
"어쨌거나 알겠어. 연설문을 작성하는 건 내가 도와줄게."
"그, 그게 정말인 것이냐?"
"그래. 대신 보답은 있어야겠지?"
"보답..."
보답이라는 소리가 나오자마자 밝아졌던 아르웬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 연설문을 부탁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하기 부끄럽지만, 나는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중인 제논 일대기의 저자다. 적어도 필력 하나만큼은 인정받고 있다는 의미이며 그런 내게 부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정체까지 숨기고 있는 마당에 아르웬이 직접 나서서 부탁했다. 보답을 하지 않는다면 그건 양심을 팔아먹은 짓이겠지.
'근데 마땅히 보답을 받을 게 없네.'
초고 도난 사태는 이미 성지의 책을 받는 것으로 끝났고, 시리스는 심부름꾼을, 레인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건 순전히 아르웬 개인과의 거래다.
그런데 아르웬에게서 받을 게 없다는 것이 골치거리다.
돈? 이미 쌓일대로 쌓이고 난 돈에 큰 관심이 없다. 무엇보다 여자친구 두 명에게 돈이 많은데 뭐가 필요할까.
명예? 난 제논 일대기 저자다. 말이 필요 없다.
지위? 뭣 하면 리나에게 부탁하면 된다.
지식? 성지에서 꼬박꼬박 책을 받아 읽는 중이다.
여자? 마리와 세실리가 있다. 마리는 밤일까지 꾸준히 하고 있으며 조만간 세실리와도 할 것 같다.
'와... 생각해보니 진짜 없네?'
20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남자가 원하는 건 다 가졌다는 걸 자각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소탈한 성격을 가진데다 권력에도 욕심이 없어서 원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받지 않는다고 말해도 이상하다. 아르웬 입장에서는 나에게 신세를 다시 한 번 지는 것인데 그녀만 불편해질 수도 있으니.
나는 어떤 보답을 받아야 아르웬도 납득할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 음흉한 생각마저 들었으나 저 멀리 집어던졌다.
'...아, 그래. 이거면 되겠다.'
다행히 하나가 남아있다. 제논 일대기에도 참고할 수 있는 거라 괜찮을 것 같다.
"혹시 마법에 대해 상세히 알려줄 수 있어?"
"마법? 그대는 마법사가 아니잖느냐?"
내 부탁에 아르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리송하다는 반응을 드러냈다. 그녀의 말처럼 나는 마법사도 아니고 그냥 체력이 좋은 민간인이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건 마법을 전수받는 게 아니라, 마법의 종류와 그 효과에 대한 것들이다. 텔레포트나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법이 아닌, 엘프들만이 쓸 수 있는 마법.
같은 마법의 대가인 세실리에게 부탁하면 되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엘프는 천사의 후예고 마족은 악마의 후예다. 이 탓인지 마족의 마법은 '파괴'에 치중되어 있는 편이다.
반대로 엘프는 육각형이 꽉 채워져 있다 보면 된다. 지원이면 지원, 공격이면 공격, 방어면 방어 등등. 대신 마족보다 출력이 다소 약한 편이다.
"아니어도 참고할 수는 있지. 그리고 마법을 가르쳐 달라는 게 아니라 어떤 이름인지, 그리고 어떤 능력인지 알려달라는 거지. 가능하면 글로 써서 보내줘."
"마족의 공주가 있지 않느냐?"
"세실리는 마족이잖아. 엘프와 마족이 사용하는 마법은 그 궤를 달리한다 들었어."
"흠. 일리가 있구나. 알겠다."
고개를 끄덕이던 아르웬은 내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그거면 충분한 것이냐?"
"난 충분해."
"아이작. 나는 알븐하임의 여왕이다. 만약 부탁하기 어려운 것이어도 기꺼이 들어주도록 하마. 이대로 빚만 지는 건 싫으니."
"음..."
아르웬이 가슴에 손을 올리며 상냥하게 제의하자 나는 팔짱을 끼며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뒤이어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지금은 로브 차림이라지만 저 안에는 지난 번처럼 타이트한 드레스가 모습을 감추고 있을 터. 머리카락 색과 같은 은회색 드레스는 아르웬의 몸매를 과감하게 드러내줬다.
분명 어려보이는 외모와 달리 골반이 훌륭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을 때조차 시선이 갔을 정도였으니 더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겠다.
'아놔. 음란마귀가 또...'
나는 서둘러 음란마귀를 물리치고 아르웬을 바라봤다. 그녀는 정말로 미안한 것인지 안절부절 못 하는 표정이다.
"괜찮아. 연설문만 쓰는 건데 뭐. 아니면 내가 연설하는 것까지 도와줄까? 그러면 하나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그, 그게 무엇이냐? 지금 말해도 기꺼이 들어줄 수 있다."
"지금 말하면 재미없지. 일단 여기서 한 번 연습해볼래?"
"그럼 연설문은..."
"그걸로 해."
아르웬은 내가 임의로 작성했던 글로 연설하는 게 썩 내키지 않았는지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내용 자체는 국민들을 고양시키기에 충분했다.
뒤이어 아르웬은 침대에서 일어나 목을 풀더니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나 또한 그녀를 마주하다가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안 외워도 되는거야?"
"이미 다 외웠느니라."
"... ..."
"우리 엘프는 응용력이 떨어질 뿐, 한 번 본 건 절대 잊지 않는다."
역시 마족과 함께 개사기 종족 맞다. 인간에다가 일반인인 내가 더 슬플 지경이다.
그런 마음을 지니며 질투심 어린 눈빛으로 아르웬을 쳐다보고 있을 쯤, 그녀는 살짝 긴장한 것인지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두드렸다.
기왕이면 로브까지 벗어서 눈 요기를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으나 선을 넘는 것 같아 애써 억눌렀다.
이윽고 아르웬은 굳게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주먹을 꽉 쥐더니...
"우리 알븐하임의 국민들은! 신들의 선택을 받아 최초의 문명을 세웠으며 더 나아가 마법을...!"
"푸흡..."
첫 문장부터 웃음이 터져버렸다. 과격한 제스쳐까지 취하니 영락없이 그분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하지만 아르웬은 꿋꿋하게 연설을 이어나갔다. 진지해서 더 웃기다.
"비록 종족 전쟁에서 패배했으나 우리는 잘못을 깨달아 한층 더 발전했다! 그러니 엘프들이여! 다시 한 번 일어... 에라이. 씨팔."
결국 그녀조차 이건 아니겠다 싶었는지 드물게 걸쭉한 욕을 내뱉었다. 그리고 침대에 털썩 앉으며 빼액 소리쳤다.
"진짜 못 해먹겠네! 이게 선동이지, 뭐가 연설이야?!"
"으하하하하!"
"웃지 마! 난 진지하다고 말했잖아! 이 빨간 인간놈아!!"
"아이고, 배야! 흐하하하핰!!"
아르웬이 빼액 소리치건 말건 나는 바닥에 쓰러져 웃기에 바빴다. 초등학생이 웅변하는 것 같아 참을 수 없는 귀여움을 선사했다.
"웃지 말라고!!"
"크하하핰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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