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132화 (133/763)

〈 132화 〉 혼혈(3)

* * *

제논 일대기 12권은 수많은 이종족 커플을 만들어내는 결과를 낳았지만, 흥미롭게도 그간 숨어지내던 엘프와 인간 사이의 혼혈의 등장을 본격적으로 알리게 되었다.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의문이 하나 씩, 하나 씩 수면 위로 부상하면서 자연스레 발생한 사회 현상이다.

다른 종족은 몰라도 엘프와 인간의 혼혈은 거의 없었기에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선사하기에 충분했고, 특히 알븐하임에서 격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나는 혼혈이 뭐 어때서? 라는 생각밖에 없어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고 있다. 더구나 혼혈, 그러니까 하프 엘프는 잠재력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엘프의 특성을 물려받는다.

천사 같은 외모는 물론이고 수명, 마법, 그리고 강력한 신체 능력까지. 오히려 하프 엘프는 일반 엘프보다 잠재력이 뛰어나고 인간 사회에서 살았던만큼 융통성까지 보유하고 있다.

내가 예상하건대 구세대, 특히 원로원 쪽에서 지랄하고 있지 않을까. 신디에게 얼핏 듣기로 원로원은 종족우월주의자여서 혼혈의 존재를 극렬하게 거부할 거라고.

더군다나 아르웬은 개방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으니 원로원 입장에서도 그녀를 견제할 아주 좋은 현상일 것이다.

만약 알븐하임 내에서 벌어지는 혼란을 중재하지 못 한다면 아르웬을 더욱 견제할 것이고, 설령 그렇지 않아도 시시때때로 혼혈을 건드리면 될테니까.

정치라는 건, 비열하고 간악해야 승리를 점할 수 있는 법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약간 미안해지긴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아르웬 개인의 문제였으니 간섭할 생각은 하나도 없다.

그냥 소식만 주고 받을 뿐, 그쪽에서 먼저 매달리지 않는 이상 내가 나설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아이작. 닷새 뒤에 나랑 신디 둘 모두 자리 비우니까 그리 알아."

"네?"

서적 및 논문을 읽기 위해 찾아온 엘레나 교수의 연구실.

신디가 직접 타준 차까지 마시며 여유롭게 책을 읽던 나는 엘레나의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레나만 자리를 비우는 게 아니라 신디까지 비운다는 건 여태까지 없었다.

지난 번 신디는 논문을 제출하기 위해 알븐하임으로 돌아갔지만, 엘레나가 자리를 비우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에 찻잔을 든 상태로 그녀에게 물었다.

"갑자기요? 어디로요?"

"알븐하임. 여왕님이 대국민 연설을 하신다네. 가능하면 모든 국민들이 모이길 원한다 하셨으니 찾아가야지."

"대국민 연설?"

나는 엘레나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데없이 대국민 연설이라니, 현재 알븐하임의 상황을 고려할 때 좋은 판단인지 의심스러웠다.

엘레나도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살짝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리며 특유의 사무적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너도 알다시피 알븐하임은 현재 혼혈 문제로 혼란을 빚고 있어. 그 문제를 서둘러 해결하고 싶으신 거겠지. 조급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도 문제거든."

"음... 괜찮을까요?"

"글쎄. 나도 여왕님이 연설을 하시는 건 못 봤어. 애초에 대국민 연설은 이번이 처음이실걸?"

대국민 연설이 처음이라면, 여왕이 즉위되었을 때도 하지 않았다는 건가? 내가 그런 의문을 갖고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 맞은편에 앉아있던 신디가 대신 설명해줬다.

"알븐하임의 왕은 국민들이 뽑는 게 아니라 각 가문, 그러니까 귀족들이 투표해서 선출하는 형식이야아... 누구나 참석할 수 있지만 명문가에서 왕이 선출되는 편이지이..."

특유의 흐느적거리는 말투였지만 신디의 설명은 내 귀에 속속 들어왔다. 나는 맞은편에서 차를 홀짝이는 신디에게 고개를 돌리며 다른 질문을 꺼냈다.

"이번 대 여왕도 가문에서 선출된 건가요?"

"아니이... 현 여왕님은 즉위 전까지만 해도 어디에나 볼 수 있는 사회인이셨어... 게다가 여왕이 되기에는 너무 어리셨지이... 어떻게 여왕의 자리에 앉게 되었는지는 나도 잘 몰라아... 듣기로는 처세술로 명문가들을 구워삶았다는데 소문이라서어..."

하긴 신디는 그때만 해도 평범한 학생 또는 엘레나의 조수였을테니 모를만도 하다. 기회가 된다면 아르웬에게 따로 물어보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럼 언제 돌아올 예정이에요? 연설만 듣고 오시는 건가요?"

"아니이... 난 오랜만에 집을 좀 방문하려고오... 지난 번에 논문을 제출했을 때 깜빡하고 안 들렸거든..."

"나는 다른 학자들이랑 의견을 나눌 생각이야. 학자들 사이에서 혼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신디 다음으로 엘레나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나는 두 엘프를 서로 번갈아 보다가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라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교수님이랑 신디는 순혈이에요? 혼혈은 겉보기에 귀만 약간 짧을 뿐이지, 일반 엘프와 다를 게 없다고 하시던데."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우리 부모님이 순혈인지 혼혈인지 확인하지 않아서. 어쩌면 먼 조상 중에 인간이 있을지도 모르지. 이참에 한 번 물어봐야겠다."

"나도오..."

멘델의 유전학 따위는 가볍게 씹어먹는 엘프의 유전이라 그들 스스로도 순혈인지 혼혈인지 모르고 있다. 정말이지 흥미로운 상황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뜨거운 감자나 다름없는 혼혈의 존재 속에도 별 생각이 없는 것 같은 두 엘프를 쳐다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두 분은 혼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별 생각 없는데? 오히려 나 같은 학자는 혼혈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겼을거야. 엘프와 인간이 접촉한지 몇 백년이 흘렀는데 혼혈이 없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 어쩌면 마족과 엘프의 혼혈이 있을지도?"

악마의 후예인 마족과 천사의 후예인 엘프 사이에 태어난 아이라...

'네팔렘인가?'

전생에 유명했던 게임 속 종족이 떠오른 것도 잠시, 이내 다른 생각이 하나 더 들었다.

'그런데 마족이랑 인간 사이에 태어난 혼혈은 없나?'

지금 당장은 하프 엘프에게만 치중되어 있으나 정말로 인간과 마족 사이에 태어난 사람이 나타날 수 있다. 다만 엘프와 달리 마족은 제논 일대기 전까지 인식이 매우 좋지 않았으니 정말로 없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 부분은 조금 있다가 수업이 모두 끝나면 세실리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엘레나 다음으로 신디가 본인의 생각을 꺼냈다.

"나도오... 알븐하임을 위해서라면 받아줘야지이... 만약 이대로 매듭을 잘못 맺는다면 알븐하임 내에 큰 균열이 생길 수도 있어... 당장 구세대랑 신세대도 갈등을 빚고 있는데 혼혈 문제까지 나타난다며언..."

"많이 심각해지겠네요."

"으응... 여왕님이 연설을 잘 하셔야 될텐데에..."

신디는 새로이 떠오른 갈등이 생겨나는 게 걱정되었는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표정 뿐만 아니라 길쭉한 귀가 아래로 처진 걸 보면 진심으로 알븐하임을 걱정하고 있다.

제아무리 엘프가 완벽에 가까운 종족이라 하지만, 결국 그들도 사람에 불과하다. 언제든지 이념 차이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으며 진정한 하나가 되는 건 매우 힘들다.

하물며 엘프는 본인만의 확고한 신념이 뿌리깊게 박혀있는 경우가 대다수라 생각을 바꾸기도 힘들다. 완고하다고 할 수 있고, 고집불통이라 할 수도 있다.

만약 그런 마음을 대국민 연설을 통해 바꿀 수 있다면, 아르웬의 재능과 능력이 출중한 것이겠지. 단 한 번의 연설로 역사를 바꾼 사례를 전생에서 수도 없이 목격했다.

'다른 나라 입장에서는 좋은 먹잇감이겠지만.'

외압으로 인해 무너진 국가는 재건할 기회가 있지만 내부에서 무너진다면 답이 없다. 앞으로 내가 쓸 제논 일대기 13권의 알븐하임도 그런 식으로 쓰러질 것이며 이건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과연 알븐하임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이번 일을 계기로 성장할지 아니면 그 반대일지.

사람의 진정한 능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위기에서 나오는 법이었다.

"부디 잘 됐으면 좋겠네요."

"잘 되야지이... 어쩌면 내 자식도 혼혈로 태어날 수도 있는데에..."

"인간이랑 결혼하려고요?"

"그건 아니지마안...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너처럼 잘생기고 성격 좋은 인간이 있을 수도 있고오..."

"제가 엘프 기준에서도 잘생긴 편인가요?"

시덥잖은 농담 따먹기였다. 신디는 내 농담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빡거렸다.

"에...?"

그러면서 멍청하면서도 귀여운 소리를 내기까지. 연구실에만 있고 빛을 보지 않아 창백함에 가까운 피부가 은은하게 붉어지는 걸 보면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뒤늦게 자각한 모양이다.

나는 신디의 사고 회로가 멈춰있는동안 서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지인들의 수업이 끝나려면 약간의 시간이 남아있으나 숙소로 돌아가서 글이나 쓸 생각이다.

"농담이에요.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나 놀리지 마아..."

"너처럼 놀리기 쉬운 애가 어디 있다고 그러니?"

신디가 투덜거려도 엘레나가 조용히 딜을 넣었다. 당연히 신디는 특유의 우울한 표정으로 꿍얼꿍얼거렸다.

그 모습에 웃음을 흘리고는 두 명에게 인사했다.

"전 일단 숙소로 가볼게요. 이 책도 들고 갈게요."

"마음대로 하렴."

"안녀엉..."

나는 두 엘프에게 인사한 뒤에 연구실 바깥으로 나왔다. 현재 시간은 약 3시. 모든 수업이 끝나려면 1시간 30분 정도가 남아있다.

그때까지 숙소에서 뒹굴뒹굴거리거나 13권을 집필하면 될 터. 이미 전개는 다 정리해 놓았으니 13권도 12권처럼 빨리 출시될 것으로 예상되는 중이다.

"그..."

"응?"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한참 길을 걷던 도중이었다. 누군가 내 뒤에서 소심한 목소리로 부르는 것이 귀에 들어왔다.

이에 고개를 뒤로 돌렸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 쯤, 아래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여, 여기니라."

"어?"

정말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는 설마하면서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전시회에서도 봤던 것처럼, 흰색 바탕의 로브를 뒤집어 쓰고 있는 작디 작은 소녀의 머리통이 눈에 들어왔다. 후드 아래로 내려오는 은회색 머리카락이 내 시선을 이끌었다.

이윽고 나를 부른 사람도 고개를 천천히 들어 얼굴을 보여줬다. 은하수처럼 빛나는 은회색 눈동자가 총명함을 발산했으며, 소녀처럼 귀엽고 앙증맞은 미모를 갖고 있는 소녀였다.

후드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미모를 감추지 못한 그녀는, 약간 긴장된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아르웬?"

알븐하임의 여왕이자 닷새 후에 대국민 연설을 진행할 엘프, 아르웬이었다. 뜬금없는 그녀의 등장에 놀라고 있을 쯤, 아르웬이 살짝 떨떠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그대여. 혹시 이름이..."

"아이작 맞아."

"마, 많이 컸구나. 그때 이후로 반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목소리도 바뀌었고..."

내 키가 많이 크긴 했지. 주변 사람도 항상 그렇게 말해서 이제는 별 감흥도 없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보니 아르웬의 키가 작긴 작다. 전시회에서 나란히 섰을 때는 내 어깨를 살짝 넘기는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가슴팍에 닿인다.

엘프는 태생적으로 신체 능력이 좋다지만, 그게 꼭 체격으로 귀결되는 건 아닌 모양이다. 저렇게 작아도 돌 따위는 맨손으로 으스러뜨릴 수 있는 악력을 갖고 있는 걸로 안다.

"그래서 왜 찾아온 거야? 조만간 연설을 한다고 들었는데?"

"그, 그건 누구한테 들었느냐?"

"다른 엘프한테서. 인연이 닿은 사람이 있거든."

"그렇구나... 사실 그것과 관련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다."

"관련이 있어서?"

내가 의문을 보이자 아르웬은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연설문 작성에 도움을 줬으면 해서..."

"... ..."

"글을 잘 쓰는 사람이 그대밖에 생각나지 않더구나."

왠지 국민들에게 탄핵당한 대통령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

솔직히 약간 황당하긴 했지만, 일단 아르웬을 숙소까지 데려왔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숙소는 타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으나 몰래 들여온다면 문제가 없다.

더군다나 아르웬 같은 경우는 마법으로 몸을 숨길 수 있으니 들킬 염려는 하나도 없었다. 아카데미 내에서 마법 사용이 금지라는 것도 텔레포트처럼 마나 사용량이 큰 마법만 아니면 된다.

"그래서 연설하는 걸 도와달라고?"

"염치없지만... 그렇다."

침대에 앉아있는 아르웬이 내 질문을 듣고 조용히 답했다. 후드를 벗어서 아름다운 그녀의 외모가 드러났으며, 몹시 송구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게 그녀는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전적이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레인의 하드 트롤링으로 발생한 문제였지만 그녀에게도 책임이 있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시리스가 군말없이 심부름꾼 역할을 수행 중이고, 아르웬은 성지에 있는 책을 나에게 전달하고 있으니 무언가 부탁할 입장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처럼 직접 나선 걸 보면 그만큼 급박한 모양이다.

나는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듯한 아르웬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문득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어 입을 열었다.

"여왕으로 즉위할 때도 연설을 하지 않았다고 했지?"

"그렇다."

"알븐하임은 왕을 어떻게 뽑길래 연설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거야? 지인에게 듣기로는 가문이 투표해서 선출된다고 들었는데."

"백성들 앞에서 하는 연설은 이번이 처음이니라. 여왕으로 즉위하기 전, 원로원과 알븐하임의 유력 가문 앞에서 포부를 밝힌 적이 있지. 하지만 이건 연설이 아니라 말 그대로 포부를 밝힌 것 뿐이니라."

"그럼 여왕의 자리를 사실상 스스로 올라간 거야?"

"그건 또 아니니라. 그대가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왕좌의 주인은 수 십년 동안 몇 번이나 바뀌었지. 내가 나설 당시에는 가문에서도 꺼림칙함을 느꼈는지 후보가 거의 없었다."

"흠..."

보아하니 알븐하임 정치 사정이 복잡한 것 같다. 원로원이 있다고 했으니 아마 그들의 압력에 못 이겨 스스로 내려온 게 아닐까.

게다가 가문의 후원을 받지도 않고 자력으로 여왕의 자리에 오른 걸 보면 아르웬의 정치적 능력이 뛰어나다는 걸 방증하고 있다. 그 능력을 통해 여태까지 원로원과 대치하고 있었을 터.

초고 도난 문제는 판단 미스와 레인의 트롤링이 시너지를 이루어 발발한 사태지 아르웬이 무능하다는 건 절대 아니다. 개개인은 미숙할지라도 지도자로서는 훌륭한 덕목을 갖고 있는 것으로 대중에게 평가되는 중이다.

"연설의 내용은 당연히 혼혈과 관련된 이야기겠지?"

"그대의 말대로다. 어떻게든 작금의 사태를 해결해야 되는데... 솔직히 너무 어렵구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연설은 역사적으로도 찾아보기가 어려우니..."

실제로 그녀의 말마따나 연설은 중요성은 멀리 가지 않아도 링컨, 마틴 루터 킹 이 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물론 이건 긍정적인 역할을 했을 때의 이야기고 부정적인 건 히틀러와 괴벨즈가 있겠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연설은 본인의 노력도 노력이겠지만 재능이 아주 중요하다. 국어책 읽듯이 딱딱하게 읽는 것보다 호소력이 짙은 목소리로 연설하는 것. 이 둘의 차이점은 명백하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연설문의 내용이다. 시대가 흘러도 링컨과 마틴의 연설문이 어째서 두고두고 회자되는지, 그리고 히틀러가 어떻게 하여 독일을 휘어잡았는지 연구되는 걸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나는 시무룩해하는 아르웬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잠깐만 기다려봐."

문득 재미있는 장난이 하나 떠올라 노트에다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르웬은 처음에 의문을 드러냈지만 내가 책상에 앉아 무언가 쓰기 시작하자 가만히 기다려줬다.

그로부터 대략 5분이 지나고, 나는 페이지의 반을 채운 임시 연설문을 아르웬에게 전달했다. 아르웬은 내가 연설문을 전달하자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힐긋거렸다.

"심심해서 써본 연설문이야. 한 번 네가 읽어보고 판단해."

"그렇다면야..."

임시 연설문이니 그녀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받아들였다. 이윽고 은회색 눈동자가 노트 페이지로 향했다.

그로부터 약 1분 정도가 지났을까, 아르웬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진심으로 감탄했다.

"정말 멋진 연설문이로구나! 역시 제논 일대기 작가다운 문장력이다. 헌데..."

하지만 감탄을 하는 것도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왠지 선동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왜지...?"

"큭큭큭..."

나는 차마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아르웬에게 준 연설문의 정체는 다름아닌...

"그대여? 이건 아무리 봐도 이상한데... 글만 봐도 강한 악센트가..."

"푸하하하하!"

그 유명한 히틀러가 정권을 휘어잡게 해준 연설되시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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