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숨겨왔던 진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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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리에게서 자문을 받기로 결정이 났지만 내 조사는 멈추지 않았다. 주말에는 공용연무장에서 니콜과 아델리아의 대련 장면을 꾸준히 관람했다. 대련이 끝나면 겸사겸사 식사도 같이 할 예정이다.
전투 장면은 내가 상상하는대로 써도 고증이 훌륭하다며 아버지가 칭찬해줄 정도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해놓는 편이 좋다.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만 아는 게 좋으니까.
특히 인간은 다른 종족과 달리 개개인마다 전투력이 극과 극으로 나뉘어질만큼 다양하다. 우리 아버지처럼 드래곤을 토벌한 전적이 있는 사람과, 반대로 나처럼 일반인에 불과한 사람도 있다.
더구나 인간들 대부분은 민간인에 불과하며 군대에 소속된 기사들마저 편차가 심하다. 그러니 제논 일대기에서도 밸런스 조절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며 어느 정도 개연성이 맞아야 된다.
무엇보다 인간들 사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이른 바 '재능'이라 할 수 있다. 일정 이상의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 꼭 재능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그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재능이 필요하다.
엘프나 마족, 그리고 수인은 태생적으로 뛰어난 부분들이 많으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인지 다른 종족과 달리 실력마다 구분을 하는 식이다.
일례로 제논의 재능을 두고 말이 좀 있었으나 이거는 그냥 넘어가는 수준이었고 현재 제논이 얼마나 강한지, 또한 칠죄종은 또 얼마나 강력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는지가 최대의 관심사라 할 수 있다.
'모 해적 만화마냥 서로 무기를 부딪혔을 뿐인데 하늘이 갈라지는 정도는 되려나?'
나는 종족 전쟁과 관련된 서적을 읽으면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종족 전쟁은 엘프 연합과 인간 연합이 본격적으로 충돌한 대전쟁이었으니 그에 따른 기록이 상당수 보존되어 있다.
가령 인간 마법사가 엘프의 기지를 향해 대량살상마법을 발동시켰다면 천지가 울리고 하늘에서 화염이 폭포처럼 떨어져내렸다는 묘사가 있었으며, 엘프는 천둥 벼락이 비처럼 쏟아졌다고 적혀있다.
아무튼 '마법사'라는 존재는 전생으로 따지자면 미사일 같은 비대칭전력이라 볼 수 있다. 솔직히 마법은 내가 무슨 묘사를 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거라 문제는 없다.
제일 큰 문제는 바로 백병전. 그러니까 실력자들이 서로 무기를 쥐고 박터지게 싸우는 방식의 전투다.
대부분의 역사 서적에는 누가 누구와 맞붙어 싸웠다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지 그 여파에 대한 건 거의 없었다. 아버지가 말씀해주시길, 강자들끼리 붙는다면 며칠은 소요되는 건 기본이고 주변 환경이 풍비박산난다고.
이 탓에 서로 병력을 물리고 승자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 대부분이며, 세세한 기록이 없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승자만이 알고 있을 터.
나는 스토리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수면 위로 드러나는 밸런스 문제에 턱을 괴며 고심했다. 제논은 먼 훗날 대악마의 영혼을 흡수한 진을 1대1로 쓰러뜨리지만 그때까지의 여정이 쉽지만은 않다.
어떻게 하면 독자들을 납득시킬만한 밸런스를 꾸릴 수 있을까. 아무래도 성장물이다 보니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우선 칠죄종 사이에서는... 당연히 교만과 식탐이 제일 강해야지.'
교만은 타락한 엘프, 식탐은 진의 아버지이자 악마인만큼 이 둘은 제논 일행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위기로 닥쳐온다. 그전까지는 칠죄종을 하나 하나 쓰러뜨리는 거고.
참고로 제일 먼저 리타이어되는 칠죄종은 다름아닌 '분노'다. 이미 분노가 어떤 상황에서 퇴장할지 모두 구상되지만 전에도 말했다시피 수인은 자문을 구해야 된다.
자문을 구할만한 수인은 당장 레오나밖에 없는데 과연 그녀가 허락해줄지 의문이다. 괜한 의심을 살 수도 있고.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따로 조사하는 게 있으니 도와달라고 하면 받아줄까? 책을 읽으면서 골똘히 생각하는 도중이었다.
"귀염둥이. 뭐 읽어?"
"응?"
가만히 앉아 책을 읽는 도중에 누가 나를 친근한 목소리로 불렀다. 시리스처럼 허스키한 목소리이나 활기찬 톤을 가진 여인의 목소리.
모두가 예상한대로, 방금 전 막 대련을 끝마치고 온 아델리아다. 그녀는 훈련용 목검을 어깨에 짊어진 채 하늘빛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땀을 많이 흘렸는지 진하게 풍기는 체취에 살짝 흠칫거렸으나 책을 덮으며 조용히 답했다.
"그냥 책 읽고 있었어요. 누나는 대련 다 끝났어요?"
"나는 끝났지. 이제 니콜만 남았어. 후아."
아델리아는 숨을 거칠게 내쉬고는 내 옆에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서로 간의 팔이 밀착될 정도로 가까이 앉았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괄괄한 성격도 있을 뿐더러 아델리아는 니콜처럼 친누나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니콜이 차분함과 엄격함이 공존한다면 아델리아는 장난꾸러기에 철없는 누나라고 해야할까.
아무튼 전시회 당시에는 우리 저택에 스스럼없이 방문한 것도 그렇고 니콜과의 관계를 보자면 반쯤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진짜 가족에게는 버림받은 탓에 애정을 갈구하는 불쌍한 사람.
저렇게 활기찬 성격도 본인의 상처를 가리기 위한 가면이라 생각하니 더욱 애처롭게 느껴졌다.
"왜 그런 눈으로 봐? 혹시 내가 예뻐서 그래?"
"... ..."
방금 말 취소. 나는 옷을 펄럭이며 개구쟁이처럼 구는 아델리아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예쁘긴 예쁜데 그런 말을 하니까 확 깨네요."
"정말? 나 예뻐?"
"양심이 있으면 거울이나 보고 그런 말을 하세요."
"어쩜 이리 예쁜 말만 골라서 할까?"
아델리아가 내 볼을 살짝 꼬집으며 기쁨을 담아 말했다. 만약 땀을 흘리지 않았다면 와락 껴안거나 자기 얼굴을 내 얼굴에 마구 비벼겠지.
특유의 진한 스킨십은 그녀만의 애정 표현이어서 이제는 별 감흥이 없었다. 이건 나 뿐만 아니라 니콜에게도 똑같이 하는 행위여서 특별하다고 여기진 않았다.
"좋아. 오늘은 특별히 이 누나랑 데이트 할 특권을 줄게. 어때? 굉장하지?"
"저 여자친구 있는 거 누나도 알잖아요."
"에이.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누나가 잘해줄게."
"장난치지 마세요."
가끔 가다가 은근슬쩍 나에게 데이트 신청을 걸어서 난감할 때도 있었다. 그녀도 내가 마리와 사귀는 건 알고 있으니 대개 장난식으로 권유하는 것이다.
아델리아는 장난기가 많고 나이값을 못 하는 성격이라 가끔씩 진심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래도 말투를 보나 표정을 보나 장난인 것 같았기에 나 또한 피식 웃으며 대처할 수 있었다.
"여자친구 때문에 그렇지? 걱정 마. 여자친구한테 들키면 당당하게 첩으로 들어갈 거라고 내가 말할게."
"갑자기 그런 얘기가 왜 나와요? 전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첩이 싫으면 호위 기사로 들어가도 될까?"
"졸업이나 하고 얘기하세요."
사실 아델리아에게 졸업은 이미 따놓은 당상이다. 무학 조교를 할만큼 실력이 출중하여 기사단에게 스카우트 될 일만 남아있다.
그러나 그녀의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기사단에 들어가는 건 약간 애매하다고 볼 수 있다. 과연 그녀는 테르스 왕국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계속 이대로 남아있을까.
민감하디 민감한 질문이어서 함부로 물을 수도 없었다.
"졸업이라... 가능하면 늦게 했으면 좋겠는데."
대신 아델리아도 그 점을 떠올렸는지 씁쓸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다만 손은 여전히 내 뺨을 꼬집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불행한 가정사를 떠올리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가족 때문에 그래요?"
"그런 것도 있지만..."
아델리아가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올려 나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나 또한 높은 콧대가 인상적인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뒤이어 그녀는 피식 웃더니 갑작스레 내 얼굴을 덥썩 끌어안았다. 예기치 못한 기습 행동에 나는 깜짝 놀라 바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우리 귀염둥이를 못 본다는 게 가장 크지! 고작 몇 개월만에 듬직한 모습으로 자랐는데 얼마나 더 클지 보고 싶잖아!"
"아, 좀..."
땀도 땀이지만 내 얼굴을 자기 가슴에 파묻은 바람에 부끄러움이 앞선다. 사생아로 태어났으나 역시 왕궁에서 잘 먹고 잘 잔 덕분에 아델리아도 훌륭한 존재감을 자랑했다.
게다가 체취도 꽃처럼 사근사근한 향기를 풍기고 있다. 마리도 땀을 흘리면 기분 좋은 향기가 솔솔 풍기던데 여자들은 다 이런 건가 싶다.
"좀 떨어져! 제발! 숨 막힌다!"
"조금만 이렇게 있자~ 누나의 소원이야."
"소원은 무슨...!"
아무튼 간에 아델리아는 한동안 나를 꽉 껴안으며 본인의 소원을 성취했다. 일반인인 나로서는 억척스러운 그녀의 힘을 이길리가 만무했기에 결국 그녀가 원하는대로 해줄 수밖에 없었다.
아, 물론.
"너는 생각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저번에 내가 말했지! 마리 그 애는 이제 여자친구가 아니라 사실상 약혼자란 말이야! 게다가 밤일까지 치렀다고!"
"미, 미안... 아이작이 너무 귀여워서..."
"귀여운 건 동감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너 계속 그러다간 아이작한테 접근 금지 해버릴테니까 그리 알아. 알겠어?"
"저, 접근 금지만은 안 돼! 내 인생에 있어서 유일한 힐링이라고!"
니콜에게 그대로 적발되어 단단히 혼났다. 나는 무릎 꿇으며 애걸복걸하는 아델리아와 그 앞에 서서 호되게 다그치는 니콜을 번갈아봤다.
아델리아가 워낙 강하게 껴안았던 탓인지 곳곳에 체취가 배었다. 식사가 끝나면 마리와 데이트를 해야 되는데 설마 들키는 건 아닌가 걱정되었다.
"그럼 아이작에게 그런 장난을 치지 말던가. 그러다가 안 좋은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 내가 책임을 지면 되지 않을까? 마리 그 애는 부인으로 두고 나는 첩으로?"
"말이 되는 소리를... 그리고 책임은 아이작이 져야하지 네가 왜 져? 책임의 방향을 이상한 곳으로 두지 마."
"... ..."
니콜도 아델리아의 변명이 얼마나 같잖았는지 조목조목 따졌다. 아델리아 본인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그렇지? 말이 안 되는 소리... 겠지? 하하..."
"... ..."
나는 아델리아의 웃음을 보며 일말의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짓는 듯한, 인위적인 미소에 가까웠으니.
입꼬리도 파르르 떨리는 것이 울분을 숨기려는 것 같은 모습이다.
'...그러고 보니 손수건을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 했을 때 엄청 기뻐했었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찔러본 것일까. 평소에 활발한 성격인만큼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그래. 그리고 너는 기사가 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거잖아. 너도 슬슬 졸업하고 근무할 기사단도 알아봐야지. 알겠어?"
"...니콜."
"응?"
"혹시..."
아델리아는 무릎을 꿇은 채로 나를 한 번 힐긋거렸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어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억지로 미소를 짓더니 니콜에게 말했다.
"아, 아무것도 아냐. 계속 얘기해."
"... ..."
니콜도 무언가 눈치챈 게 있었던 걸까. 그녀는 나에게 시선을 옮기더니 표정을 굳히며 아델리아에게 말했다.
"너 잠깐 나 좀 따라와."
이후로 그들은 나를 대련장에 방치한 채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거 왠지...'
상황이 복잡하게 흘러갈 듯한 예감이 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