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
이전에 내가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제논 일대기는 어디까지나 사실을 기반으로 한 소설일 뿐, 실제 일어났던 일은 절대 아니다.
마족이 사람들에게 차별을 받고 있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어떤 신념을 갖고 있는지 집필 당시에는 전혀 몰랐으며, 카이르와 엘리샤의 로맨스도 얼핏 들었던 이야기일 뿐 내가 직접 보거나 겪은 건 아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내가 위의 일들을 모두 경험했다고 착각하는 중이다. 사크란의 희생 같은 경우는 한때 마족에게 은혜를 받은 것이고, 카이르와 엘리샤는 아예 경험담이라는 소리까지 나왔다.
만약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면 그냥 저냥 넘어갔을 수도 있겠지만, 제논 일대기는 정말로 '있을법한' 이야기들로 구성돼 있는 탓에 독자들이 흠뻑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여태까지 본 적이 없던 문장력과 가독성까지 겸비했으니 사람들이 소설에 빠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튼 위의 조건들을 고려하여 사람들은 나를 수 십년간 홀로 세상을 경험한 현자로 추측하는 중이며, 동시에 알븐하임의 성지까지 방문한 이력이 있는 학자라 생각하는 중이다.
만약 전생에서 사실을 기반으로 한 소설을 썼다면 흔히 말하는 '고증'을 지적했겠지만 여기는 무엇이든지 이루어지는 판타지 세상.
오히려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전투와 마법이 난사되는 게 지극히 정상이고, 반대로 '증기 기관차'가 고증으로 지적될 정도로 상식이 뒤바뀐 곳이다.
실제로 드워프의 나라, 마키나에서 증기 기관차를 발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워낙 복잡하다 보니 독종을 제외하면 전부 나가떨어졌다는 소식이 내 귀에 들어왔다.
아무튼 간에 나로서는 고증을 세세하게 따질 필요가 없어 좋았지만 그래도 불안한 건 영 마찬가지였다. 밑천이 드러나는 순간 내 정체가 발각되는 시간이 점점 다가온다는 의미였으니.
하물며 스토리가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종족을 비추기 시작했다. 인간, 마족, 엘프, 드워프, 수인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이야기가 등장할 예정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자문을 받아야 할 사람이 필요한데, 마족은 세실리가 있으니 괜찮고 엘프는 아르웬과 시리스가 있다. 드워프는 책으로도 알려진 지식이 많을 뿐더러 비중이 크지 않아 문제는 없다.
남은 건 단 하나, 현재까지도 인간과 사이가 좋지 않은 수인 뿐이다. 게다가 수인의 나라, 애니머스는 건국된지도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 거의 모른다.
'레오나가 있긴 한데... 걔는 좀 껄그럽단 말이야.'
그나마 친분이 있는 수인이 레오나 뿐이지만 그녀와의 관계는 좋다고 할 수도,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그냥 가끔 가다가 안면을 비추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비록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되었지만 그렇다 해서 일상이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역사학 강의만 듣고 있어서 그녀와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다.
'우선 엘프와 다크 엘프 간의 이야기부터 집중하자. 수인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려면 시간이 걸릴테니까.'
나는 수인을 어떻게 묘사해야할지에 대한 고민을 떨쳐내고 집필에 전념했다. 제논 일대기 속 수인의 나라는 폐쇄 정책을 펼치고 있어 뒤늦게 나타난다.
무엇보다 지금은 수인보다 엘프가 급선무다. 알븐하임 침공만 해도 무려 2권에 달하는 분량을 할애할 예정이다.
그러므로 수인보다는 알븐하임의 구조부터 정리하는 일이 우선이다. 다행히 아르웬으로부터 자문을 받았기에 무리는 없었다.
'일단 의회가 제일 높은 집단이고 그 밑이 전사장, 그리고...'
엘프의 군대는 인구가 많은 인간과 달리 소수정예로 활동하는 편인데, 엘프 전사 한 명 한 명이 일당백인 이유도 여기서 기인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민간인조차 매우 강력한 힘을 소지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에게 기본적인 무술과 마법을 전수받는 건 물론, 최초의 아카데미라 불리는 '르케론'에서도 단련을 받는다.
그리고 보통 전사하면 검과 방패를 가지고 싸우는 사람을 떠올리겠지만, 엘프는 마법사까지 포함한다. 대신 마법에 특화된 전사들은 '마도사'라고 부르는 편이다.
아무튼 간에 '전사장'이라는 직위는 위의 모든 집단을 통솔하는 사령관이다. 사령관인만큼 개인의 무력 또한 인간에게 있어서 파멸적이며 직접 나서는 경우는 잘 없다.
이 탓에 종족 전쟁 당시에도 굳이 인간들을 상대하는데 전사장까지 나서야 되나? 라며 출전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사실 사령관이라는 직급을 고려하자면 당연한 일이지만 저 오만한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것이다.
단 한 명. 인간의 진면목을 알아 본 아이케르를 제외하고.
그는 인간 연합이 기상천외한 전략전술을 앞세워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자 위기를 느끼고 본인이 직접 출전했지만, 안타깝게도 알다시피 원로원에게 꼬투리를 잡혀 체포되었다.
'알븐하임에는 4명의 전사장이 있어. 엘프 전사는 죽을 때까지 군에 몸을 담는다고 했으니 은둔 고수 같은 건 절대 없을거야.'
고집스러운 면모가 강한 엘프는 그 특유의 성격 때문에 본인이 몸을 담은 직업에 일생을 전부 바치는 편이다. 정년퇴직 같은 건 없고 설령 부상을 당해도 고문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알븐하임이 침공 당해도 꿋꿋이 버티겠지만, 악마측 간부와 전투를 벌이면서 전력이 야금야금 깎여나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엘프는 왜 마법사를 공군처럼 활용하지 않는 거지?'
지난 번 세실리가 나를 공중에 띄웠던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엘프도 조금만 노력을 기울이면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닐 수 있다.
마법사를 공군처럼 활용한다는 말이 조금 웃길 수도 있겠지만 엘프나 마족은 실제로 가능하기에 드는 의문이다. 정찰기나 폭격기처럼 활용한다면 인간들은 손도 못 쓰고 당할 것이다.
물론 편협하고 고지식한 엘프들은 정면승부를 당당하게 고집하니 이것조차 비겁한 술수라며 무시할 확률이 높겠지만. 이건 제논 일대기에 전사장 한 명을 더 추가하면서 설정을 넣는 게 좋을 듯하다.
'이걸로 생각이 바뀐다면 뭐...'
애당초 '공군'이라는 개념이 이 세상에는 없으니 허허 웃으며 넘어갈 수도 있다. 증기 기관차처럼 웃기는 소리로 치부하겠지.
나는 이후로도 스토리를 쭈욱 써내려가다가 도중에 펜을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엘프에 관한 지식은 많이 알고 있어도, 정작 그들의 전투 방식은 전혀 모르고 있다.
정면승부를 고집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들이 어떤 무기를 사용하는지, 그리고 마법을 병행하면서 싸우는지, 마지막으로 편제가 어떻게 돼 있는지 등등.
딱히 기밀이라 할 건 아니지만 가장 기초적인 부분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마땅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자 시리스를 소환하기로 마음먹었다.
'겸사겸사 다크 엘프의 자세한 생활상도 물어봐야겠다.'
알븐하임이 악마들에게 침략당하고, 결국 세계수마저 불태워지면서 엘프들은 본인들의 고향을 떠나게 된다. 그 피신지 중 하나가 다크 엘프가 몸을 숨기고 있던 숲이다.
실제로도 다크 엘프는 인적이 드문 깊은 숲에서 부족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데다가 말만 부족 생활이지, 사실상 도시나 다름없다.
다크 엘프는 마족처럼 각박한 생활을 보낸만큼 손재주가 상당히 좋다고 시리스가 언급한 적이 있다.
'그래도 묻는 편이 훨씬 좋겠지.'
나는 펜을 잠시 내려놓고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러자 돌돌 말려진 롤링 페이퍼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장이 아닌 거의 수 십장에 달하는 용량이어서 매우 두꺼웠는데 모두들 눈치챘겠지만 시리스를 소환하기 위한 마법지다. 이 종이를 찢으면 시리스에게 연락이 갈테고 그녀는 내 소환에 응하거나 거절할 수 있다.
'이번에는 목욕하다가 오지는 않겠지.'
지난 번에 한 번 불렀다가 알몸 차림으로 온 적이 있다. 당황한 상태로 물어보니 목욕 중이었다고...
결국 소환에 응할 때는 적어도 옷은 입으라고 말하며 돌려보냈다. 이후에는 딱히 부를 일이 없어서 한 번도 소환하지 않았지만 과연 이번에도 그러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다크 엘프는 평범한 엘프보다 융통성이 있다지만 시리스는 딱딱한 편이다. 다행히 숙소에만 소환을 하여 걸릴 일은 없다지만 왠지 긴장된다.
스윽-
잘 말려진 두루마리에서 한 장을 빼내자 알 수 없는 문자들로 가득 채워진 마법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 마법지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시리스의 머리카락 한 가닥이 필요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넓은 곳으로 걸어갔다. 뒤이어 거침없이 종이를 찢었다.
쫘악!
종이는 정확히 두 갈래로 찢기자마자 푸른 입자로 변하여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제 시리스에게 연락이 갔을테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런 사소한 일에 부르는 건 좀 미안하긴 해도 그녀는 불만없이 따라주고 있다. 사실 말만 심부름꾼이지 반쯤 노예나 다름없다. 물론 실제로 노예처럼 대하지는 않는다.
'오늘은 조금 늦네.'
지난 번 소환까지는 내가 종이를 찢으면 시리스가 곧바로 응하여 소환되었다. 다만 오늘은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소환이 약간 늦는 편이다.
차마 거절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면 소환에 응하지 않아도 된다고 언질을 해뒀으니 아마 그때문이지 않을까. 시리스는 아르웬의 호위도 겸하고 있으니 다방면으로 바쁠 수밖에 없다.
이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책상으로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부르셨습니까?"
"응?"
허스키하면서도 낮고 중후한 여인의 목소리. 이처럼 독특한 목소리의 주인은 딱 하나밖에 없다.
이에 나는 반쯤 돌렸던 등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시리스의 모습을 보고 기함했다.
저번처럼 목욕을 하다가 알몸 상태로 온 건 아니나 속옷만 입고 온지라 거기서 거기였다. 심지어 구릿빛 피부와 어울리는 검은색 속옷이라 시선이 엄한 곳으로 향했다.
11자로 갈라진 복근은 물론이고, 풍만한 가슴을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속옷이 선정적으로 다가왔다. 평상시의 옷차림도 노출이 많은 편이었는데 지금은 속옷만 달랑 입고 와서 내 남심을 자극시켰다.
나는 당황한 눈길로 시리스를 위아래로 빠르게 쳐다보다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왜, 왜 그런 옷차림이에요? 옷은 얻다 두고?"
"숙면을 취하는 도중에 왔습니다."
"... ..."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간은 오후 1시 30분.
다크 엘프가 야행성인지 아니면 그냥 낮잠을 자다 온 것인지 모르겠으나 속옷 차림으로 자는 건 시리스의 잠버릇일 확률이 크다.
그동안 시리스는 내가 어지러워하는 듯하자 지난 번 알몸 사태가 떠올랐는지 특유의 허스키한 보이스로 입을 열었다.
"속옷이어도 알몸은 아니니 괜찮을 거라 판단 하에 소환에 응했습니다."
"아뇨. 제가 안 괜찮아요."
융통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시리스의 행동에 머리가 아파왔다. 호위로서는 적격일지는 몰라도 일상은 영 젬병인 모양이다.
문제는 시리스 그녀는 뭐가 문제라는 걸 모르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는 거다. 덕분에 다크 엘프의 성문화를 심히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반쯤 노예인 심부름꾼이라지만 목욕을 하다가 온 것도 그렇고, 자다가 속옷 차림새로 온 것도 그렇고 정조가 있는 건지 아니면 없는 건지 잘 모르겠다.
나는 마른세수를 하다가 시리스를 힐끔 바라봤다. 구릿빛 피부와 더불어 여전사 특유의 탄탄한 몸매까지 합쳐지니 그 파괴력이 가히 무시무시했다.
"그... 다크 엘프는 정조라던가 그런 건 없어요? 아르웬에게 듣기로 엘프는 반려가 아닌 타인에게 알몸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정조가 더럽혀진다는데..."
"그건 엘프의 관습입니다. 저희는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가기에 성에 있어서 관대한 편이죠. 반려가 사고나 병으로 죽어도 마음이 맞는다면 또다른 반려를 들일 수 있습니다. 물론 불륜이나 강간은 규율에서조차 크게 엇나가는 행위이기에 엄격한 처벌이 내려지게 됩니다."
"무슨 처벌이요?"
"남자는 성기를 잘라내고 여자는 불에 달군 꼬챙이로 안쪽을 지져서 불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히익..."
덕분에 다크 엘프의 무시무시한 풍습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아무튼 이건 둘째치고-
"...일단 깨운 건 정말 죄송해요. 시리스 씨가 원하신다면 돌아가서 자도 됩니다."
"그럼 여기서 잠깐 숙면을 취해도 되겠습니까? 방금 전까지 훈련을 하다가 온 탓에 텔레포트를 시전할 마나조차 없습니다."
시리스는 정말 피곤한 건지 딱딱한 말투와 달리 황금색 눈동자가 점점 감기고 있었다. 억지로 눈을 뜨고 있었지만 끔뻑끔뻑거리는 걸 보아 한계에 도달한 듯했다.
다크 엘프는 몇날며칠 동안 밤을 지새우는 훈련을 받는다는데 저리 피곤해할 정도면 얼마나 피곤한 걸까. 나는 그녀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허락을 내렸다.
본래 숙소는 타인의 침입이 금지되어 있지만, 반대로 몰래 들여보내면 아무도 모른다. 시리스가 여기서 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마음대로 하세요. 이불도 있으니 따뜻하게 주무시고요."
"감사합니다. 그럼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시리스는 소환되자마자 내가 자는 침대에 비척비척 들어가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피로해 보이던 얼굴처럼 푹신한 침대에 눕자마자 잠을 청하...
"침대에서 좋은 향기가 납니다."
"...그냥 잠이나 자세요."
아무래도 자문은 시리스가 자고 나서 구해야할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