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122화 (123/763)

< 122화 >

엘레나 교수에게 추천 학생으로 임명되면서 나의 개인 시간은 매우 널널해졌다. 점수에 집착할 필요없이 원하는 강의만 들으면 그만이니 집필에도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었다.

물론 엘레나 교수가 부른다면 재깍재깍 연구실로 달려가야 된다. 그녀가 나를 추천 학생으로 임명했으니 사실상 그녀의 조수나 다름없다. 물론 파릇파릇한 신입생이라 신디처럼 막 굴리지는 않는다.

이렇다 보니 글을 쓰다가 쉬고 싶으면 엘레나 교수의 연구실에 방문하는 편이다. 마리나 세실리는 수업이 전부 끝나고 만나는 편이니 그때까지만 있으면 상관없다.

연구실에서 신디에게 작문법을 가르쳐 주는 건 일상이니 넘어가고, 엘레나 교수가 나에게 의견을 묻거나 아니면 내가 그녀에게 질문을 하여 서로 토론을 하는 등.

마지막으로 내가 보기와 달리 뛰어난 지식량와 독특한 관점을 자랑하니까 이런 저런 논문과 서적을 주면서 나를 대학원생으로 키우려는 조짐까지 보였다.

애당초 말만 토론이지 몇 백년 간 지식을 쌓았던 엘레나에게 비비기에는 무리이니 그녀는 주로 나의 독특한 관점에 집중하고 있다.

"근데 저는 추천 학생이니 그렇다 쳐도 다른 학생들은 3학년이 되면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거예요? 아무리 봐도 숫자가 너무 적은데."

"간단해. 너처럼 조수가 되어 교수들에게 지식을 받는 거지. 교수들도 여러 학생을 상대하는 것보다 한 명 한 명에게 집중할 수 있어서 효율도 은근히 좋아."

"그럼 회관에 있는 교수들에게 강의를 받는 건가요?"

"응. 네가 원한다면 내가 애들한테 부탁할게. 여기 교수들이 전부 내 제자라 기꺼이 들어줄거야."

"...괜찮아요."

역사회관의 교수가 모두 자신의 제자라는 엘레나의 대답에 할 말이 없어졌다. 하긴 장수종의 대표격인 엘프이니 그럴만도 하다.

이후로 나는 좀 더 훌륭한 지식을 얻기 위하여 서적을 살펴보다가 문득 궁금한 점 하나가 떠올랐다. 엘레나도 엘프이다 보니 자연스레 떠오른 의문이었다.

"교수님. 실례지만 교수님 나이가 몇이라고 하셨죠?"

"응? 나 아직 300년도 안 살았는데. 그건 왜?"

엘레나가 내 질문에 책을 읽다 말고 나를 쳐다봤다. 동그란 안경 너머로 초록빛 눈동자가 의문을 발했다.

나는 종족 전쟁이 발발했던 시점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다가 궁금했던 부분을 입 밖으로 꺼냈다.

"신디에게 듣자하니 엘프는 종족 전쟁을 치른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의 갈등이 심하다고 들었거든요. 실제로도 그런가요?"

"음..."

그녀는 내 질문을 듣고 의자에 등을 기대어 곰곰히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시선을 천장에 두며 한동안 고민하던 엘레나는 이윽고 대답을 하나 하나 꺼냈다.

"일단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할 수 있어. 종족 전쟁은 엘프가 종족우월주의에서 벗어나게 된 계기였거든.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고착화된 사고방식은 바꾸기가 매우 어려워. 특히 엘프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만큼 그런 점이 두드러지지. 게다가 종족 전쟁은 인간 연합이 잘했다기보다는 엘프가 자멸한 거라 더욱 그래."

"그럼 신세대에도 종족우월주의자가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긴 한데 사실상 신세대들 사이에서는 못 배운 족속들로 취급하는 편이야. 반대로 구세대들 사이에서는 박애주의자를 혐오하고. 쉽게 말해 이념 싸움이야."

"사회 현상이 인간들만큼 복잡하네요."

"사람 사는 곳이 거기서 거기란 말이 괜히 나왔겠니? 세대 사이의 갈등은 비단 엘프 뿐만 아니라 전 종족이 통틀어 나오고 있어."

전생에서 아주 유명한 구절(?)이 하나 있다.

요즘 애들은 버릇없다.

이 유명한 구절은 21세기 뿐만 아니라 멀고 먼 기원전에서조차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버릇없는 애들이 성장하여 세상을 뒤바꾸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건 왜 묻니? 세대 간의 갈등은 너희 인간들도 흔하게 볼 수 있잖아."

"그렇긴 한데 엘프는 인간과 달리 유독 규합이 잘 안 되는 성향이 강해서요. 교수님도 아이케르 전사장이 전쟁 도중에 구속된 사건 아시죠?"

"당연히 알지. 아이케르가 그나마 인간의 전투 방식을 잘 이해한 엘프였는데 법률에 어긋났다고 원로원이 구속시켰지. 같은 엘프인 내가 봐도 이해가 안 가더라고."

여태까지 몇 번 정도 언급했지만, 엘프는 종족 전쟁 당시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규합이 잘 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인간 연합으로부터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야기일 뿐 아이케르 전사장 구속 사태를 보면 알 수 있다.

더군다나 다크 엘프 측에서 지원을 보내려고 했으나 원로원 쪽에서 칼같이 거절했다고 아르웬이 알려줬다. 인간 연합에게 밀리는 와중에도 다크 엘프가 추방자라는 이유때문에 거부한 것이다.

반대로 인간들은 어떻게든 승리를 점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암살자를 보내는 건 기본이고, 많은 희생이 있을지라도 보급로를 차단시켰다.

다만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섞여있다 보니 종족 전쟁 이후 발생한 후폭풍이 무시무시했다. 그중 대표적인 게 바로 현재까지 이어진 미네르바 제국과 테르스 왕국 간의 갈등이다.

나는 엘레나의 설명을 듣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구했다.

"정녕 엘프가 하나로 규합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종족 전쟁 같은 대규모 전쟁이 발발했을 때 법률이니 뭐니 하면서 따질 것 같긴 한데."

"여왕님은 그러지 않겠지만 아마 원로원 쪽에서 말이 나오겠지. 이빨 빠진 호랑이라 해도 다리가 없어진 건 아니거든. 지난 번 네가 시험지에 적었던 말처럼, 역사는 반복되는 법이야."

"많이 힘들다는 거군요."

"그렇지. 무엇보다 신세대라 해서 구세대랑 다른 건 크게 없어. 종족 특징인지 모르겠지만 엘프는 본인이 옳다고 믿는 걸 굳게 믿는 편이거든. 이때문에 아이케르 전사장 같은 위인이 더욱 눈에 띄었던 거고."

역시 소설은 소설로 써야할 듯했다. 객관적인 시선을 갖고 있는 엘레나가 저리 말할 정도로 엘프라는 종족은 그만큼 융통성이 더럽게 없는 모양이다.

아르웬도 신세대 엘프답게 여러모로 파격적인 정책을 고루 펼치고 있지만, 간혹 가다가 융통성이 없는 면모를 보면 확실하다. 현재 내 심부름꾼 노릇을 하고 있는 시리스도 마찬가지고.

지난 번에 한 번 소환을 했다가 목욕 중인 상태로 온 걸 보면 분명하다. 그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그대로 다시 돌려보냈던 기억이 있다.

"그럼 엘프와 다크 엘프 간의 융화는 더더욱 불가능하겠네요?"

"그건 확답을 내려줄 수가 없네. 나는 다크 엘프가 어떤 목적을 지닌 민족인지 거의 모르거든.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200년을 넘게 살면서 친분이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 현재 내 주요 연구 리스트 중 하나야."

실제로 다크 엘프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 미지의 종족 중 하나다. 가끔 가다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기는 하나 무슨 목적을 가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물론 나는 시리스라는 아주 유용한 심부름꾼이 있기에 남들과 다른 편이다. 그들은 숲이나 산 깊숙한 곳에서 부족 생활을 영위하며 어렸을 때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고 어엿한 전사로 성장한다.

간혹 가다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정보 수집 겸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돈을 버는 거라고. 다크 엘프 전사 한 명 한 명이 일당백 수준을 넘으니 용병일을 조금만 하면 된다고 들었다.

이처럼 불편한 생활을 꾸준히 이어나가는 이유는 알븐하임에서 본인들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리는 거라고 시리스가 설명해줬다.

'애향심이 강할 수밖에 없긴 하지.'

다크 엘프는 다른 엘프보다 융통성이 있고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더라도 결국 같은 엘프다.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의식이 기본적으로 깔려있으며 그만큼 강하다.

그리고 알븐하임은 신의 뜻을 따라 엘프가 세운 최초의 문명이자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최초'라고 불릴만한 것들은 거의 다 알븐하임에 있으니 애향심이 강한 건 당연하다.

'근데 그런 알븐하임을 박살낸다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나는 천장을 올려다 보면서 12권의 전개를 생각했다. 12권은 메리가 제논에게 고백하는 게 주된 내용이지만, 종반부에는 악마가 알븐하임을 기습하기 위해 계략을 꾸미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알븐하임의 본격적인 침공은 13권에서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하필 그때 당시 엘프 여왕 엘리샤는 카이르의 죽음 이후로 정신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상태라 제대로 대비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이뿐만이 아니라 제논 일행도 악마들의 계속된 위협에 엘프 전사장과 함께 정찰을 나갔으며, 그때부터 의회의 트롤링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르웬의 반응이 궁금하네.'

이번 11권이 나왔을 때도 아르웬은 시리스를 통해 본인의 마음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혹시 카이르와 엘리샤가 떨어진 이유가 자신 때문이냐는, 어처구니 없으면서도 귀엽게 느껴지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미 정해놓았던 스토리라 그녀의 오해가 풀리게끔 잘 설명하는 건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르웬은 영 불안했는지 필요한 게 있다면 시리스를 통해 말하라고 부탁했다.

똑- 똑- 똑-

내가 머릿속으로 열심히 스토리를 구상하는 동안 누군가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이에 문 쪽으로 고개를 들린 순간, 문 뒤로부터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에요오... 들어갈게요오..."

피곤에 쩔어있고 흐물거리는 말투가 인상적인 엘프 여인, 신디의 목소리였다. 이윽고 문이 열리면서 그녀의 얼굴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짙게 깔린 다크 서클과 반쯤 감긴 듯한 눈매, 그리고 하나로 대충 묶은 머리는 여전했으나 엘프답게 미모는 출중했다. 오히려 퇴폐미가 느껴지니 내가 아는 엘프와 달리 미묘한 매력을 풍기고 있다.

그리고 오늘은 평소보다 왠지 기뻐보이는 표정이다. 눈은 피로에 젖어있었지만 입꼬리는 살짝 올라간 상태였으니.

'그러고 보니 논문을 제출하려고 위그드라실로 갔었지?'

나는 그녀가 논문을 제출하기 위해 알븐하임의 성지 중 하나, 위그드라실로 향했다는 걸 기억했다. 그동안 내가 억지로 떠먹여 주는 수준으로 가르쳐 준 덕분에 신디의 작문법은 일취월장한 상황이었다.

엘레나에게 먼저 검수를 받았을 때도 이정도면 충분하다며, 어서 빨리 위그드라실로 가라고 했을 정도이니 괜찮지 않을까.

내가 그 생각을 하는 동안 엘레나는 신디를 보더니 기대가 담긴 표정으로 물었다.

"어때? 잘 됐어?"

"네에... 무사히 통과되었어요오... 이제 편히 잘 수 있겠다아... 헤헤헤..."

신디는 베시시 웃으며 후련하다는 얼굴이었다. 전에도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을텐데 엘프는 걸어다니는 도서관이라 불리는만큼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된다.

그 전공에 한해서는 거의 만물박사에 준하는 지식을 갖고 있어야 되며, 위그드라실에 제출해야 되는 논문조차 말이 안 되는 수준으로 어렵다.

사실 당연한 것이, 엘프는 장수하는만큼 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데다가 그간 쌓여있는 논문의 숫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주제를 선정해도 비슷한 것들이 수두룩하게 넘쳐나니 통과가 극히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신디의 논문이 통과되었다는 건 축하해줘야 하는 일이다.

"축하해요. 이제 신디도 박사 학위를 딴 건가요?"

"으응..."

신디는 흐느적거리는 말투로 대답하더니 나에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이윽고 내 앞에 다가와서는 나의 손을 조심히 붙잡았다.

그에 살짝 당황했지만 진심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은 신디를 보며 가만히 있어줬다. 뒤이어 그녀는 흐느적거려도 진심어린 목소리로 나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네 덕분이야아... 정말 고마워어..."

"제가 뭘 했다고. 전 글 쓰는 법만 알려준 거예요. 연구는 오로지 신디가 한 거고."

사실이다. 나는 신디에게 작문법만 알려줬지 연구는 신디가 스스로 주도한 일이다.

하지만 신디는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맑게 웃었다.

"네가 도와준 건 사실이야아... 아이작 네가 없었다면 분명 몇 십 년은 걸렸을 거얼..."

"신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아무튼 이제 뭐 하실 거예요? 박사 학위까지 땄으니 엘레나 교수님 밑에 있을 필요는 없잖아요."

이제 신디도 마음만 먹으면 교수 혹은 학자가 될 수 있다. 엘레나 교수의 조수 노릇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신디도 그걸 알았는지 내 손을 풀어주고 곰곰히 생각했다. 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에... 당분간은 여기 있겠지이... 아직 못 읽은 논문이랑 책도 많고오..."

"그래요?"

"으응... 그러니까 너도 자주 찾아와줘어...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도 되고오... 내가 되는대로 도와줄게에..."

"그러면..."

나는 무슨 질문을 할지 고민하는 것도 잠시, 방금 전 엘레나에게도 했던 질문을 신디에게 묻기로 정했다. 참고도 신디는 내 손을 여전히 붙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신디는 엘프가 진정 하나로 규합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비단 엘프 뿐만 아니라 다크 엘프까지 포함해서."

"...그런 건 소설에서나 나오지 않을까아...? 그리고 난 다크 엘프가 뭐하는 사람들인지 몰라아..."

음. 역시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로 취급하는구나. 나는 신디의 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참... 오늘 위그드라실에서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는데에..."

"무슨 소식이요?"

"이번에 나온 제논 일대기 있잖아... 거기에서 카이르랑 엘리샤가 헤어진 거..."

"아. 그거요. 그건 왜요?"

신디는 자각하지 못 했는지 내 손을 꼭 붙잡은 채로 대답을 꺼냈다.

"그거 때문에 말이 좀 많더라아... 학자들끼리 싸우던데에..."

"...그런 걸로 왜 싸워요?"

"너무 현실적이라서어... 실제로 엘프 쪽에서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 탓에 인간이 마음을 돌리거나 먼저 죽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거드은...."

"... ..."

"현재 전국적으로 설문하고 난리도 아니야아... 조만간 논문도 나오지 않을까아...?"

12권의 반응이 참 기대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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