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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121화 (122/763)

< 121화 >

레킬리스 공작가의 딸, 마리 하우젠 레킬리스는 최근 행복한 나날을 즐기는 중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한 덕분에 아카데미에서 좋은 성적을 받은 건 물론이고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거의 없었다.

올해만 해도 다양한 사건사고를 겪었지만 슬기롭게 넘길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악연이라 할 수 있는 리나와의 관계가 전보다 훨씬 진척되었다.

아이작의 조언을 받아 둘이서 담판을 지었고 리나가 그때는 정말 미안하다며, 허리를 굽혀 사과하는 것으로 둘의 관계는 조금이나마 가까워졌다. 물론 마리도 스스로가 너무 쪼잔했다며 리나에게 사과하는 건 잊지 않았다.

이처럼 실타래처럼 얽히고 섥혔던 리나와의 악연을 청산하니 남은 건 단 하나. 남자친구 아이작과의 관계다.

아이작이 누구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정체를 알고 싶어서 안달이 난 제논 일대기의 저자, 제논이다.

물론 주변의 지인들이 아이작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나 그가 남자친구라는 사실이 더욱 중요했다. 그것도 평범한 사이가 아닌, 밤일까지 치른 남자친구.

첫 날 밤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성에 눈을 뜬 바람에 하루가 멀다 하고 관계를 치르는 중이다. 때마침 아이작도 엘레나 교수에게 추천 학생으로 임명받아 시간이 널널해진 참이었다.

마리가 학업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이작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케어해주니 불행할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너무 행복한 바람에 가끔씩 꿈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무엇보다, 마리에게는 최근 아이작에게 생긴 변화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길을 걷는 도중에 나란히 서 있는 아이작을 불렀다.

"아이작."

"응?"

마리의 부름에 아이작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그동안 마리는 최근 3개월 동안 바뀌어도 너무 바뀐 아이작의 외모를 천천히 뜯어봤다.

그전까지는 갓 태어난 새끼 펭귄마냥 귀엽고 순수한 미모를 지녀 보호 욕구를 일으켰는데, 지금은 눈매가 날카로워지고 젖살도 눈에 띄게 빠져 전보다 늠름해졌다.

이뿐만일까. 남자는 여자보다 늦게 성장한다는 속설을 증명하듯, 최근 몇 달간 키가 훌쩍 커버린 모습이다.

원래는 170cm를 겨우겨우 넘던 그가 현재 180cm를 가뿐히 넘는 장신이 된 건 물론, 아버지의 유전자가 빛을 발하기 시작하여 어깨도 벌어졌다. 듣자하니 너무 갑작스레 성장한 바람에 교복을 2주일에 한 번씩 바꿨다고.

하지만 마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불렀어?"

"흐으."

마리는 아이작이 입을 열자마자 귓가를 속삭이는 듯한 달콤한 목소리에 황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에 띄게 커져버린 몸도 몸이지만 그녀가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바로 목소리다.

전에는 소년처럼 가녀린 목소리를 지닌 것에 반해, 지금은 어엿한 성인으로서 중저음에 꿀이 뚝- 뚝- 떨어질 듯했다. 귓가에 잘 자라고 속삭이면 그대로 기절할 것 같은 아름다운 목소리.

남자의 매력적인 목소리는 여자에게 큰 호감을 주기에 충분한데, 아이작은 목소리 뿐만 아니라 개성적인 미모까지 보유하고 있다.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대문호에다가 외모도 흠잡을 곳 하나 없으며, 목소리까지 완벽하다. 과연 이런 남자가 세상에 존재하는지 의문이었지만, 그게 자신의 남자친구라는 걸 깨닫게 되는 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에 마리는 짜릿한 전율이 이는 것을 느끼며 아이작의 팔을 꽉 붙잡았다. 성장하기 전에는 달라붙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신장 차이로 인해 매달리는 수준이었다.

"아이작. 아이작."

"응. 마리."

"헤헤."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길래 이런 완벽한 남자를 만나게 된 것일까. 그녀는 베시시 웃으며 아이작의 팔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아이작도 그녀의 애교에 황금색 눈동자를 깜빡였다가 피식 웃으며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에 마리는 더욱 쓰다듬어달라는 듯이 고양이처럼 고롱고롱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으응~"

"내가 그렇게도 좋아?"

"응."

"나도 좋아."

남자다우면서도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목소리가 마리의 귀를 간지럽혔다. 그녀는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이 아이작의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그러면서 은글슬쩍 전보다 살짝 커진 가슴 사이에 끼우는 건 잊지 않았다. 아이작이 성장한 것처럼 그녀도 다양한 의미로 성장한 덕분에 성숙한 매력을 띄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작은 팔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못 말린다는 듯이 웃기만 할 뿐, 전처럼 부끄러워하거나 창피해하지는 않았다. 이미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에 이정도는 애교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마리 쪽에서 장난을 쳤으니 자신 쪽에서도 장난을 칠 생각이다. 그는 얼굴을 천천히 내밀어 마리의 귓가에다 대고 속삭였다.

"지금 나 유혹하는 거야? 언제든지 말만 해."

"헤으으..."

결국 사르르 녹아버린 마리였다.

*****

나는 아이스크림처럼 사르르 녹아버린 마리의 표정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도 내 팔을 붙잡은 힘은 풀지 않았다.

전시회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이래, 내가 급격히 변화한 것처럼 마리도 비슷했다. 우선 키가 약간 커졌으며 외모 또한 소녀가 아닌, 한 명의 어엿한 성인으로 성장했다.

무엇보다 지금 내 팔에 느껴지듯이, 안 그래도 큰 가슴이 더욱 커진 상태다. 물론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세실리보다는 아니지만 첫날밤보다 확실히 커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따르자면 가슴은 누군가 만져주면 크기가 커진다는데 아마 그 영향도 있지 않을까. 속옷을 새로 맞춰야한다며 투덜거리던 마리의 모습이 떠올라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예쁘고 몸매도 훌륭한 여자가 내 여자친구라는 게 가끔씩 믿기가 어려웠지만, 그래서인지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오늘은 안 돼. 내일 시험이라 공부해야 되서."

내가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정신을 차렸는지 마리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겨우겨우 대답했다. 손가락으로 볼을 누르면 붉은 물이 뚝- 뚝- 흘러나올 것 같다.

나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아쉬워하는 것도 잠시, 시험 기간이라는 소리에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무슨 시험이야?"

"수학 시험. 아이작은 부럽다. 역사학만 시험을 보면 되잖아."

마리가 부러워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나는 엘레나 교수에게 추천 학생으로 임명받아 다른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 역사학에만 집중하면 그만이고 2학년부터는 엘레나 교수의 조수로서 활동하게 된다.

하지만 이 세상의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 다른 강의에 참관하기도 한다. 대신 시험은 거의 치지 않고 정말로 참관만 하는 식이어서 교수들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대신 역사학 시험을 잘 봐야지. 기껏 추천 학생으로 임명되었는데 탱자탱자 놀았다가 취소되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져."

"그래도 부러워. 너만큼 역사를 좋아해야 교수님이 추천해주시겠지?"

"그냥 운이 좋았지."

내가 노트를 정리하는 동안 엘레나 교수가 우연히 발견했을 뿐이다. 이후로 연구실에 방문하고 신디에게 작문법을 가르쳐주는 대가로 서적과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

마리는 나에게 부럽다는 눈빛을 보내다가 팔을 붙잡은 채로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투덜거렸다.

"아~ 진짜 부럽다. 나도 빨리 3학년이 되고 싶어. 3학년부터는 그 과목에만 집중하면 되잖아."

"너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아니면 엘레나 교수님에게 부탁해. 너도 역사학에 들어올 거잖아."

"옛날이라면 그럴 생각이었는데, 생각을 바꾸려고. 난 정치학에 들어갈 거야."

"언제는 나랑 같이 있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원래는 그랬지만 마음이 바뀌었어. 너에게 도움이 되려면 정치를 배우는 게 좋겠지. 리나랑 화해도 했겠다, 이게 더 좋지 않겠어?"

어쩜 이리 기특하고 깜찍한 말만 골라서 하는 걸까. 정말이지 참을 수 없을만큼 사랑스럽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 일을 저지르고 싶었지만 내일이 시험이다보니 겨우겨우 인내했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 나중을 기약하면 된다.

"그나저나 너는 괜찮아?"

"뭐가?"

"지금 11권 때문에 난리도 아니잖아. 너희 영지에는 조문을 오는 사람들까지 있다며?"

"... ..."

나는 마리의 질문을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현재는 11권이 나오고 약 사흘이 지난 시점이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카이르의 죽음, 더 나아가 인간과 엘프 간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났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심지어 실제로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닌데 카이르를 위한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고.

솔직히 말해 격한 반응이 나오는 건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때마침 카이르 외전이 나왔던지라 그의 평가가 상승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욕만 좀 얻어먹고 끝날 줄 알았던 건 순전히 내 착각이었다. 출판사는 물론, 영지에 조문을 왔다는 사람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으니.

어머니의 편지에 적힌 내용에 따르자면, 하나같이 엄숙한 표정으로 카이르와 관련된 예술품 앞에 흰색 국화꽃을 놓고 간다고. 참고로 전시회 당시에 배치되었던 예술품은 그대로 놔둔 상태다.

'이럴 줄 알았으면 12권까지 함께 발매하는 건데...'

11권에는 카이르의 죽음이 하이라이트고, 12권은 제논과 메리의 관계가 집중적으로 조명된다. 메리가 스스로 엘프임을 밝힘과 동시에 제논에게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내가 세실리에게 해줬던 대사가 등장한다. 누구처럼 후회하며 살 바에야 차라리 그리워하며 사는 편이 낫다고. 그러니 너를 사랑하겠다고 말이다.

덕분에 제논도 충격으로부터 빠져나와 한 단계 더 성장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며 질투에게 복수하기 위해 단련에 단련을 거듭하게 된다.

물론 이는 모두 12권에 나올 장면들이고 현재는 11권이 더 중요하다. 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할지 난감하여 버릇적처럼 뒷목을 매만졌다.

"...나도 이정도일 줄은 몰랐지.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과장인 줄만 알았어."

"그러게 누가 그렇게 애절한 스토리를 만들어놓고 함부로 죽이래? 독자들의 환상을 보기 좋게 박살내니 이렇게 되는거야."

"조용히 말해. 누가 들을라."

다행히 지금 주변에 돌아다니는 행인이 없어서 망정이지, 마리의 발언은 꽤 위험한 편이었다. 마리도 그 사실을 뒤늦게 눈치챘는지 헙! 하며 손바닥으로 다급히 입을 막았다.

이어서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가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등장인물을 죽이는 건 좀 위험할 거 같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카이르가 부활하거나 그러진 않아?"

"음... 안 할 걸?"

"안 할 걸은 또 뭐야? 고민하고 있다는 거야?"

"등장해도 결말부에 등장할 거야. 애초에 확정된 것도 아니고."

원래는 카이르는 등장이 전혀 없을 예정이었지만, 독자들의 성토가 심하게 이어지다보니 마음이 조금씩 바뀌는 추세다. 단, 스토리가 꼬일 것을 염려하여 등장해도 에필로그에 등장할 것이다.

어떤 형식으로 등장하냐면, 내가 이 세상에 환생한 것처럼 카이르와 똑같은 영혼이 환생하는 식이다. 엘리샤와 만나는 순간 전생을 모두 기억해내 다시 한 번 이어진다는, 그야말로 시대를 초월한 사랑 이야기.

'근데 그 전에 진 때문에 좆 될 거 같은데...'

카이르가 이정도인데 진이 죽을 때면 이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 하지는 않을 터. 이때문에 스토리를 변경해야 할지 고민될 정도다.

스토리를 변경하면 여태까지 뿌려놓은 떡밥과 복선을 회수하지 못 하는 꼴이라 졸작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고 그대로 진행하면 독자들에게 욕을 무진장 얻어먹을 것이다.

하물며 어머니조차 진과 릴리가 이어지길 바라는 독자 중 한 명이니 어쩌면 호되게 혼날 수도 있다. 나로서는 착잡하기 그지 없는 상황일 수밖에 없다.

"뭐, 네가 따로 생각해 놓은 게 있겠지. 난 어차피 제논이랑 메리가 이어지면 그만이니까. 설마 그 둘도..."

"아무리 그래도 주인공과 여주인공은 이어지게 해줘야지."

"잘 생각했어. 암. 명색이 주인공인데 자식은 봐야지. 진이랑 릴리도 마찬가지겠지? 참고로 우리 어머니가 기대하고 계셔."

"... ..."

설마 파혼당하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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