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120화 (121/763)

< 120화 >

상황이 모두 정리되었겠다, 이후의 일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우선 세실리와 아르웬이 맹약을 맺는 것을 시작으로, 소환을 위하여 시리스에게 머리카락까지 받았다. 마리처럼 흰색 머리카락이었지만 시리스는 붉은기가 은은하게 돌고 있었다.

세실리와 아르웬 사이의 맹약도 마법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마법에 문외한인지라 둘이서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세실리가 종이를 허공에 소환시키더니 손가락으로 유려하게 움직인 후, 그곳에 아르웬이 사인하듯이 이루어졌으니.

어쨌거나 맹약도 끝났겠다, 나는 아르웬 일행이 떠나기 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걱정말라는 듯이 말했다.

"이런 말 하기에는 그렇겠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 난 뒤끝이 있는 성격은 아니니까."

"...배려해줘서 고맙구나. 그대의 자비는 내 평생 잊지 않겠다."

"평생까지야. 어차피 난 인간이라 100년도 못 살아. 차라리 잊고 사는 편이 낫겠지."

"... ..."

내 말에 아르웬이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은회색 눈동자와 마주했다.

뒤이어 그녀는 피식거리며 씁쓸한 웃음을 짓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인간과 엘프의 사랑 이야기를 적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까 이상한 기분이 드는구나."

"종족마다 정해진 수명은 신조차 바꿀 수 없는 문제니까. 뭐, 소설 속의 이야기가 현실에서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건 절대 아냐."

나는 그 말을 하면서 세실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세실리는 나와 얼굴을 마주하자 빙긋 웃으며 고개를 꾸벅이는 것으로 답했다.

새하얀 그녀의 뺨에 홍조가 약간 깃든 걸 보아 내 말이 무슨 의미를 담았는지 눈치챈 모양이다. 그녀는 내가 말했듯이 후회하며 사는 것보다 그리워하며 살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물론 이게 정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후회하는 삶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그대는 보면 볼수록 신기한 사람이구나. 책으로 얻는 지식은 한계가 있을텐데 또다른 세상을 창조할 능력을 갖고 있다니. 심지어 약관도 되지 않아 보이는데."

그건 내가 지구에서 건너온 환생자라 그래.

다만 위의 말 대신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구에서는 아르웬의 상식을 모두 박살낼만큼 다양한 문화와 볼거리가 존재한다.

나는 그저 지구의 문화를 받아들인 환생자에 불과하며, 여기서는 세상을 뒤흔드는 대문호일지는 몰라도 지구에서는 평범하디 평범한 웹소설 작가였다.

이렇다 보니 제논 일대기는 특정 목적을 넣지 않고 순전히 취미로 즐길 수 있었다.

"여왕님."

"말이 길어졌구나. 우린 이만 가보겠다."

시리스의 부름에 아르웬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나와 세실리 또한 각자 예법을 갖추며 떠나가는 엘프 일행을 배웅했다.

이윽고 약간의 빛무리와 함께 마법이 발동되는 듯싶더니 세 사람 모두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고위급 마법 중 하나인 텔레포트를 매우 손쉽게 쓰는 모습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인간들은 언제쯤 저런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을까. 인간들이 마법을 본격적으로 사용할 수 있던 시기가 종족 전쟁 이후부터였으니 100년 정도 지나면 되는 것일까.

나는 아르웬 일행이 사라진 장소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옆으로 옮겼다. 세실리가 빙글빙글 웃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중이었다.

"아이작."

"응. 누나."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세실리가 먼저 나를 불렀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응해줬다.

이윽고 세실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로 하여금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혹시 마리랑 했어?"

"...응?"

"내가 저택을 떠나고 난 뒤에 마리랑 했냐고 물었어. 지난 번에 마리에게 빨리 안 하면 내가 먼저 해버릴 거라고 언질을 해놓았거든."

그때 저택에서 마리한테 그런 말을 한 거였나. 마리에게 위기감을 형성시켜 일을 치루도록 만들다니, 소름이 돋으면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도 나와 하고 싶은 것일까. 나는 세실리의 질문을 듣고 활활 타올랐던 저택의 깊은 밤을 상기했다.

이로 인해 얼굴이 살짝 붉어질 수밖에 없었으며 세실리도 내 반응을 보고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했구나?"

"...했지."

"흐응."

내가 부끄러움과 민망함이 담긴 목소리로 답하자 세실리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야릇한 비음까지 흘리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으며 긴장의 끈이 붙잡게 되었다.

이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마리와 몸을 섞었으니 이제는 자신이라고 말하려는 걸까. 가르츠도 있는데 그런 말을 했다간...

'...이 사람은 또 어디 갔어?'

세실리를 피해 뒤를 본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방금 전만 해도 가르츠가 뒤에 있었는데 지금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눈치가 쓸데없이 빠르다고 해야할지. 남몰래 자리를 비켜준 그의 약삭빠른 행동에 살짝 어이가 없어졌다.

스윽-

그사이 세실리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나에게로 서서히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나와 세실리 사이의 거리는 숨소리가 느껴질만큼 가까워졌으며 아름다운 그녀의 미모가 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나는 뒤로 한 발짝 움직였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마리와는 완전히 색다른 미녀가 얼굴을 들이대니 심장이 강하게 두근거렸다.

더군다나 이미 세실리를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은 바, 지금 내 심정을 부정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였다.

"...좋았어?"

그렇게 우리 둘이 서로를 한참동안 시선을 교환하고 있을 때, 세실리가 살랑거리는 목소리로 넌지시 물었다. 이에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하려는 찰나, 나는 그녀의 뺨이 붉어졌다는 걸 파악할 수 있었다.

본인이 질문해놓고 본인이 부끄러워하는, 무언가 미묘한 모양새다.

이에 왠지 모를 자신감을 얻어 세실리의 어깨를 조심히 밀어냈다. 그러자 세실리도 힘을 주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천천히 물러났다.

마침내 우리 둘의 사이는 살짝 벌어졌고, 이렇게 보니 그녀의 얼굴이 노을처럼 붉어져 있다는 걸 확실하게 체크할 수 있었다.

'...남자 경험이 전혀 없다고 했었지?'

세실리는 평소 야한 장난을 하던 것과 달리 남자 경험이 하나도 없는 여자다. 무려 100년 이상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직위가 직위이다보니 함부로 접근하는 남자가 거의 없었다고.

게다가 장난기가 많은 그녀의 성격상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남자가 사실상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은 즉슨, 방금 전 그 행동도 나름대로 용기를 낸 것일 터.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채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엄청 좋았어."

"그, 그렇구나..."

내 시선을 피하며 쑥쓰러워하던 세실리는 입을 오물거리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다른 질문을 건냈다.

"마리는? 마리는 뭐래?"

"그건 당사자에게 직접 묻는 편이 좋지 않을까?"

"여, 역시 그게 낫겠지? 알았어."

역시라는 말을 보면 그녀도 마리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던 듯하다. 그녀는 어깨를 붙잡은 내 손을 두 손으로 붙잡아 천천히 내렸다.

이어서 길고 가느다란 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어색한 웃음을 띄며 말했다.

"그... 나는 마리한테 이야기를 듣고나서 해도 될까? 막상 하려니 좀 부끄러워서... 그리고 너도 당분간은 마리랑 하는 게 좋을테고..."

"난 상관없어. 누나가 편한대로 해."

"저, 정말로? 나랑 할 생각이 있는거야?"

"누나 같이 아름다운 여자가 부탁하는데 그 어느 남자가 거부할 수 있을까?"

내가 말한 거지만 약간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정중하게 거부했을텐데 현지화가 제대로 되었는지 기꺼이 받아들였다.

"아이작...!"

그러나 세실리는 감동이라도 받았는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가 그대로 내 품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살짝 놀란 것도 잠시, 나에게 매달린 채 격하게 기뻐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줬다.

세실리의 칠흑색 머리카락은 비단결 같은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꼭 기쁘게 해줄게! 그때까지만 열심히 마리랑 하고 있어. 알겠지? 나도 마리한테 들으면서 노력할테니까."

"언제는 내가 원할 때마다 해준다고 하지 않았어?"

"원래는 그랬지만 어머니에게 들었어. 남자든 여자든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상대방에게 더욱 큰 쾌락을 선물해줄 수 있다고. 난 네가 과일처럼 농익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따먹을거야."

따먹는다고 하니까 기분이 이상하다. 그래도 생각보다 괜찮은 방법이긴하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비록 이럴 때 쓰는 말은 아니지만 효과는 있을 것이다.

마리도 첫 날 밤 내 아랫도리에 달린 기둥을 보고 경악했으니까. 다행히 마리가 잘 받아줘서 망정이지 다른 여자였다면 시도조차 못 했다.

"따먹는 건 누나가 아니라 나이지 않을까? 참고로 마리는 하다가 기절했어."

"그, 그래? 첫 날에 그정도는 아니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는데..."

부끄러워하는 세실리를 보니 내 마음 속의 음흉함이 꿈틀거렸다.

하마터면 '여기서 확인해도 돼'라는 말을 꺼낼 뻔했지만, 가르츠가 어디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가까스로 억누를 수 있었다.

나는 어쩔 줄 몰라하는 세실리를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천천히 껴안았다.

세실리도 순간 움찔거렸으나 이내 손을 더듬거리며 내 등을 감싸안았다.

풍만한 가슴의 감촉과 함께 은은한 향기가 내 오감을 자극시켰다. 이대로 일을 저지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정도로 아름다운 체향이다.

"...아이작."

"응."

"키스는... 지금 해도 될까?"

그 물음에 품 안의 세실리를 슬며시 떼어냈다. 곧이어 기대감과 긴장으로 채워진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올망졸망한 눈빛으로 애원하는 듯한 세실리를 바라보다가 싱긋 웃어주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공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 ..."

그 말이 기폭제가 되었던 것일까. 세실리는 본인의 욕망에 휩쓸린 듯, 내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으며 입술을 갖다 대었다.

나는 세실리가 부드러운 입술을 갖다 대며 키스를 시도하자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역시 남자 경험이 없다는 게 맞는지 입술을 대는 것조차 서툴렀다.

그러나 서큐버스의 피가 이어져 있다고,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혀가 내 입 안을 파고들기 위해 살살 움직이는 중이다. 나는 그녀가 원하는대로 가만히 있었다.

톡-

세실리의 혀 끝이 내 혀 끝과 살짝 부딪혔다. 그러자 세실리의 몸이 찌르르- 하며 떨렸다.

혀와 혀가 섞이진 않고 끝만 서로 부딪히면서 몇 분을 있었을까, 세실리가 입술을 조심히 떼었다. 탐욕스럽게 서로를 탐하는 딥키스가 아니어서 입술 사이로 은색 실선은 이어지지 않았다.

"하아..."

세실리는 달콤한 숨소리를 내뱉으며 나를 쳐다봤다. 몽롱하게 풀려있는 붉은색 눈동자와 눈에 띄게 올라온 홍조.

나는 평소와 달리 첫 키스로 인해 정신없어 하는 그녀가 너무 귀여워서 뺨을 살포시 붙잡았다. 세실리는 내가 뺨을 잡아주자 두 손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떼어내려는 게 아닌, 그저 붙잡기 위함이었는지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세실리에게 물었다.

"어때? 첫 키스의 느낌은."

"...미칠 것 같아."

세실리는 몽롱한 표정 그대로 작게 대답했다. 간간이 뜨거운 숨이 흘러나오는 걸 보아 키스만으로 잔뜩 흥분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대로 진행했다간 고속도로가 뚫릴 위험이 있어서 그만두는 편이 좋을 듯하다. 내가 뺨에서 손을 떼자 그녀도 내 손을 놓아줬다.

"남은 건 훗날을 기약하자. 알았지?"

"...응. 나도 참을게."

"그럼..."

나는 부끄러워하는 세실리를 바라보다가 싱긋 웃으며 한 가지 부탁했다.

"헬리움을 좀 소개시켜줄 수 있어?"

그리하여 세실리의 도움을 받아 하루종일 헬리움을 돌아다니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바로 이틀 뒤가 아카데미 개학이라 서둘러 채비를 마친 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재회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이후로 전시회로 늦어진 아카데미 개학이 진행되고...

"아이작! 빨리 저기로 가자! 저기가 깔끔하고 좋다고 들었어!"

"...오자마자 하려고?"

"내가 며칠동안 참았는지 알아? 엄마한테 배운 기술도 있으니까 긴장해! 오늘은 내가 이길테니까!"

"하하하..."

개학을 하자마자 성욕의 화신이 되어버린 마리와 정을 나누느라 시간을 전부 소모했다.

아무래도 세실리의 차례가 오려면 조금 오랜 시간이 걸릴 듯했다.

'설마 글 쓸 시간도 없는 건 아니겠지?'

나는 마리에게 모텔처럼 생긴 건물로 질질 끌려가며 속으로 되뇌었다. 정말로 수업을 끝날 때마다 마리랑 몸을 섞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아, 참고로 이긴다고 호기롭게 선언했던 마리는 반대로 호되게 당해버렸다.

소프트웨어(기술)가 아무리 발달해도 하드웨어(신체 및 체력)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더라.

"...나도 운동이나 할까?"

"주말에 같이 할래?"

"운동은 싫은데..."

"스트레칭이라도 해. 유연성이라도 길러야지."

행복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

제논 일대기가 휴재를 번복하고 어언 2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꽤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세상의 모든 독자들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아이작이 개인 사정으로 인해 연재가 길어질 거라 미리 말해놓았고, 무려 1년 이상 휴재할 뻔했던 제논 일대기였기에 독자들은 감지덕지했다.

그동안 전시회가 열렸던 마이샬 영지에 방문하거나 다양한 팬아트를 만드는 등. 이 세상에 별로 없는 유희거리를 즐기면서 시간을 소비했다.

그렇게 인내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특보! 제논 일대기 11권의 원고가 출판사에 도착하다!]

모두가 기다리던 소식이 신문에 실리면서 환호를 이끌어 내었다. 드디어 기다림의 끝이 왔다며, 또다시 제논 일대기에 빠져들 시간이 도래했다면서 가히 신앙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출판사도 그간 멈췄던 인쇄소를 풀 가동시켜 제논 일대기 11권을 찍어냈다. 신기술을 접목한 덕분에 제논 일대기 11권은 공장에 찍어내듯이 생성되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제논 일대기 11권을 마음껏 사들였고, 서점은 물 밀듯이 쏟아져오는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혼이 빠져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충격! 제논의 스승, 카이르의 죽음. 과거, 자신의 제자였던 '질투'에게 전사해...]

[카이르 외전이 나온 이유가 여기 있었다. 더 큰 슬픔과 비극을 선사하기 위한 초석.]

[별이 떨어진다는 묘사를 통해 카이르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된 엘프 여왕, 엘리샤. 과연 그녀의 반응은?]

설마 설마했던 일이 벌어지면서 독자들에게 매우 큰 충격을 안겨줬다. 여태까지 불안한 말(플래그)들을 내놓았던 카이르였기에 독자들은 불길함을 느꼈는데 그 불길함이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심지어 카이르와 엘리샤의 애처로운 사랑 이야기는 많은 독자들에게 애틋함을 선사했기에 그 충격은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최후의 순간, 카이르의 독백은 독자들의 눈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단 한 번만... 단 한 번만 그녀의 미소를 볼 수 있다면...

죽음의 순간에도 사랑하는 여자의 미소를 보고 싶어하는 카이르. 이 독백 하나만으로도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었다.

평생을 사랑하는 사람과 이어지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결과는 비극으로 치달았다. 만약 인간 대 인간이었다면 진작에 이어졌겠지만 하필이면 엘프 여왕을 마음에 두고 있어서 시기를 놓쳐버린 것이다.

[수많은 독자들이 카이르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몇몇 사람들은 오열한 나머지 탈진 증상을...]

[정녕 수명을 초월한 사랑은 이루어 질 수 없단 말인가? 소식을 듣게 될 엘리샤와 제논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제논이 질투를 죽이는 건 정해진 수순. 하지만 스승마저 이긴 질투에게 어떤 방식으로 승리를 점할 것인가?]

사크란의 희생에서도 보았듯이, 카이르의 죽음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절대 다수의 독자들이 카이르의 죽음에 슬퍼하며 진심으로 애도했다.

그리고 그 현상은 신문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매튜."

"네. 사장님."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뭐지?"

"추모 행렬입니다. 카이르의 죽음으로 인해 독자들이 우리 출판사 앞에 꽃을 놓고 가더군요."

"아니. 마이샬 영지도 아니고 왜 우리 출판사에?"

"마이샬 영지에도 행렬이 이어지는 중이랍니다. 특히 카이르와 관련된 예술품 앞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꽃이 놓여져 있다고 들었어요."

"... ..."

사람들이 출판사 뿐만 아니라 마이샬 영지에 전시된 예술품에 애도의 의미로 꽃을 선물했다. 비록 상상 속의 인물이라지만, 워낙 임팩트가 강렬하고 캐릭터 자체가 매력적이어서 사람들이 스스로 행동에 옮긴 것이었다.

그렇다면 사크란의 희생 당시에는 이런 일이 없었나?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그때는 전시회도 개최되지 않았고 마족들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던 시기였다.

하지만 제논 일대기가 문화 그 자체로 승격된 지금은 아니다. 캐릭터가 죽는다는 건 앞으로 제논 일대기에서 그 캐릭터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으니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하물며 카이르는 제논의 스승으로서 꾸준히 인기를 끌었고, 외전을 통해 인기가 수직상승한 케이스다. 흔히 '덕질'을 하려는 사람이 막 생기려는 찰나에 캐릭터가 죽어버린 것이다.

아무튼 카이르의 죽음은 아이작이 예상하지 못 했으나 또다른 문화를 낳았고, 마이샬 영지는 때아닌 관광객 방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건 또 뭔데?"

엘레나 교수에게 추천 학생으로 등록되어 시간이 널널해진 아이작은 신문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이러다 진이 죽으면 폭동이 일어나겠네...?"

그는 속으로 큰일났음을 직감했다.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