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115화 (116/763)

< 115화 >

다양한 의미로 화려하고, 또 화끈했던 전시회가 성황리에 종료되었다. 전시회에 예술품들은 관광객들에게 수많은 관심을 이끌기 충분했고 특히 리루스 악단과 매트릭스 극단의 합작 공연은 역사에 길이 남을 정도로 훌륭했다.

또한 여태까지 베일에 감싸져 있던 매트릭스 극단의 감독이 마족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세상의 주목을 이끌었다. 그러나 감독이 말했던 것처럼 그는 예술가에 불과했으며 마족이라고 차별하는 시선은 거의 없었다.

대신 어째서 그런 화려한 연출이 가능했던 건지 모든 의문이 풀렸기에 매트릭스 극단을 향한 관심도가 더욱 강해지는 효과를 낳았다. 또한 리루스 악단이 선보였던 '인생'이라는 명곡으로 하여금 본인들이 어째서 세계 정상에 우뚝 선 거장들인지 증명했다.

이렇듯 여운이 반드시 남을 법한 축제가 모두 끝나고, 사람들은 미네르바 제국과 마이샬 영지에 대한 호평을 내렸다. 준비 기간이 촉박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들이 얼마나 기술적으로 뛰어난지 보여줬으니.

특히 미네르바 제국으로서는 본전이 아닌, 거의 흑자 수준으로 이익을 보게 되었다. 기술은 충분히 있었으나 문화적으로는 테르스 왕국에 비해서 뒤떨어졌으나 이번 축제를 통해 또다른 문화를 제시했으니까.

특정 계층만 즐기는 문화가 아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문화. 이것만으로도 미네르바 제국의 입장으로서는 행복하기 그지 없는 일이다.

물론 테르스 왕국이 가만히 지켜볼리가 만무하다. 테르스 왕국은 다음 전시회는 무조건 자신의 수도에서 개최할 거라 엄포를 놓았으며, 미네르바 제국도 아쉬워할지언정 바톤을 넘겨줬다.

그리하여 축제의 열띈 분위기가 점점 가라앉고 있을 때 쯤이었다.

"후우..."

제논 일대기와 계약을 맺은 출판사의 사장실 안.

사장은 사무용 책상에 앉아 이번 달 매출이 기록된 서류를 보며 복잡하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서류에는 전시회 개최 전과 그 이후의 기록이 적혀있다.

제논 일대기의 휴재가 시작되면서 매출이 급락한 건 물론이고, 심지어 초고가 도난까지 당했을 때는 매출이 바닥을 찍을 뻔했다. 바닥을 찍어도 회사의 규모가 규모인만큼 큰 편에 속했으나 유지비를 고려하면 심각한 적자다.

게다가 도난 사건을 조사하면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 탈세가 적발되면서 어마어마한 벌금까지 물게 되었다. 천만다행으로 제논 일대기와 계약을 맺었다는 부분 하나 덕분에 옥살이는 면했지만 그래도 뼈아픈 손실인 건 변함이 없다.

이렇게만 본다면 출판사가 휘청이는 건 당연지사. 그러나 정말로 신이 축복을 내려주시는 건지 몰라도 전시회가 개최한 이후에 다시 한 번 매출이 상승했다.

전시회에 참석한 관광객들 대부분은 제논 일대기의 팬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공연에 감동을 받아 원작을 보기 위해 제논 일대기를 구매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무엇보다 아이작이 카이르 외전을 발매해준 덕분에 매출이 꾸준히 상승하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는, 사장으로서는 불안하기 그지 없는 현실이다.

'앞으로 휴재 기간동안 꾸준히 하락세를 유지할 거야. 어떻게든 관리해야 하는데...'

물 들어올 때 노를 젓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암흑기가 다가왔을 때다. 갑자기 찾아오는 게 아닌, 앞으로 찾아올 암흑기.

그리고 사장은 그 암흑기를 눈 앞에 목도하는 중이다. 탈세가 적발되어 어마어마한 벌금이 물린 건 둘째치고 직원들 월급과 인쇄소의 유지비를 고려해야 한다.

이중 하나라도 삐끗했다간 회사가 걷잡을 수도 없이 허망하게 무너질지도 모른다. 다행히 제논 일대기와 독점 계약을 맺은 덕분에 나라에서 지원을 해주겠지만, 이것마저도 불안하다.

'그 씨발 도둑 새끼는 왜 초고를 훔쳐가지고... 아으. 미치겠네.'

초고 도난 사건 이후로 금고는 새로운 걸 구매했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게다가 범인은 벽 채로 뜯어갔으니 당분간 초고를 출판사가 맡을 일은 절대 없을 것이고, 아이작도 신간이 아닌 이상 초고를 보낼 일이 절대 없다.

'앞으로 2년. 2년만 버티면 돼. 제논 일대기가 새로 나오기 전까지는 인쇄소를 가동 중지시켜서라도..."

사장이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하는 와중이었다.

쿵! 쿵! 쿵! 덜컹!

"사장님! 속보입니다!"

"으악!"

문 밖으로 누군가 급히 달려오더니 문이 부서질 정도로 강하게 열어젖혔다. 그에 깊이 생각하고 있던 사장은 깜짝 놀라 까무러칠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연 사람은 매튜였는데, 그는 지난 번 초고 도난 사건 이후로도 꾸준히 근무 중이었다. 사장도 그런 일을 겪어 퇴직하지 않으려나 걱정했으나 매튜는 묵묵히 출근했다.

물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사장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다가 노크도 없이 안으로 들어온 매튜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이게 대체 무슨 무례인가! 아무리 자네라도...!"

"그건 됐고 이것부터 읽어보세요! 제논이 보낸 편지입니다!"

"이런 건... 뭐?"

사장은 호통을 치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매튜가 팔랑거리고 있는 손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의 손에는 평범한 편지 한 통이 쥐어져 있었다. 다급하게 오는 바람에 약간 구겨진 상태였으나 사장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제논이 보낸 편지다. 이거 하나만으로 사장은 격양된 목소리로 매튜에게 지시했다.

"그, 그거 당장 이리 내놓게! 정말로 제논인가?"

"예! 여기 친필 사인 보십쇼! 이 알 수 없는 문자는 제논의 친필 사인이 맞습니다!"

사장은 떨리는 손으로 매튜에게서 편지를 전달받았다. 뒤이어 두 눈을 빠르게 굴려 친필 사인을 체크했다.

친필 사인이라 함은 아이작이 '한글'로 자기 이름을 쓴 것이다. 전생의 이름이 아닌 이 세상에서 환생하고난 이름.

제논 특유의 사인이 맞다는 걸 직감한 사장은 허겁지겁 편지 봉투를 뜯었다. 매튜는 편지를 보자마자 곧바로 사장실에 직행했는지 뜯은 흔적은 하나도 없었다.

마침내 편지의 내용물이 공개되고, 사장은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편지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이 편지에 무슨 내용이 담겨있는지에 따라 출판사의 명운이 갈릴 수도 있다.

[안녕하세요.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제논 일대기의 작가, 제논이라고 합니다. 최근 제가 태어난 고향에서 제논 일대기를 위한 전시회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단지 예술가 분들에게 제 작품을 위한 예술품을 마음대로 취급해도 된다고 했지, 전시회까지 열 줄은 몰랐으니까요.]

처음에는 전시회가 개최되어서 놀랍다는 반응이 적혀있다. 허나 여기서 괄목할 점은 '태어난 지역'이다.

여태까지 추측만 무성했지 밝혀진 거라고는 하나도 없던 제논이었지만, 이 편지에 적힌 내용을 통해 하나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미네르바 제국 출신이며 어쩌면 마이샬 영지에서 태어났을지고 모른다고.

사장은 놀라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어 흥분한 것도 잠깐, 집중력을 끝까지 유지하며 내용을 읽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고향에 방문할 겸, 전시회가 어떻게 개최될지 궁금하여 마이샬 영지에 방문했습니다. 수 십년 전에는 이름도 없는 고향이었는데 마이샬 영지라는 지역명이 붙어있어 새로웠습니다.]

사장의 예측은 적중했다. 제논(아이작)은 미네르바 제국, 그것도 마이샬 영지 출신이다.

미네르바 제국은 마이샬 영지에서 전시회를 개최한 이유를 수도가 포화 상태이기 때문이라 설명했지만, 막상 제논이 마이샬 영지 출신이라고 하니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우연에 우연일 수도 있었기에 속단은 금물이다. 사장은 전시회가 개최된 마이샬 영지에 대해 곰곰히 떠올리다가 매튜에게 물었다.

"매튜. 마이샬 영지가 언제부터 영주가 직접 관리하게 됐지?"

"네? 그... 그리 오래 되진 않았습니다. 아마 10년도 넘지 않은 걸로 아는데..."

"10년이라..."

이 편지에는 수 십 년 전에 고향을 떠났다고 언급돼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논을 고령의 현자로 추정하고 있는 바, 설득력이 매우 깊었다.

단, 이건 모두 아이작의 페이크라는 걸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 아이작은 사람들이 자신을 현자로 추정하고 있으니 대충 떡밥을 던져준 셈이나 다름없다.

이미 마음 속으로 마이샬 영지를 문화 거리로 만들겠다고 다짐했고, 부모님에게도 미리 동의를 구했기에 출신지를 언급할 수 있던 것이다. 때마침 휴재를 번복하여 크기를 더 키울 수도 있을테니 너무 빨리 들키지 않는 이상 문제는 없다.

'미네르바 제국은 운도 좋군.'

물론 사장은 속지 않았다. 1권의 초고를 가지고 왔을 때, 호크가 직접 출판사를 찾아와 사장과 개인적인 면담을 했으니까. 이미 서로가 서로의 동업자여서 그닥 놀라지 않았다.

단지 이런 떡밥을 던진 이유에 의문을 품었을 뿐.

사장은 무슨 이유로 이런 사실을 밝혔는지 의문을 품은 것도 잠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제논이 떡밥을 뿌리든 말든 사장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정작 자신에게 제일 중요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이샬 영지에 도착하니 여러 작품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림은 물론이고 조각상과 연극, 그리고 음악까지... 그림 중에는 '칼스 즈바사'의 헥토파스칼 킥이 제일 마음에 들더군요. 제 머릿속에 있던 장면과 놀라울만치 똑같았습니다. 여태까지 심오한 주제를 드러내는 예술품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칼스 씨의 작품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임팩트가 강한,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제논 일대기를 쓰는 이유가 독자 분들에게 '재미'를 선물해주기 위해서였는데 제 마음에 쏙 들더군요.]

이밖에도 편지에는 리루스 악단의 연주를 통해 귀가 정화되었다니, 매트릭스 극단의 연극은 생애 최고의 공연이었다니 등등.

본인의 전시회에 참석했다는 증거를 하나하나 드러내면서 예술가들을 칭찬했다. 이에 사장은 기분이 점점 고조됨을 느끼면서 눈에 힘을 주었다.

이것만 해도 본인의 출판사가 제논의 대변인이 되기에는 충분하다. 이미 제논이 원하는 바를 대신 말해줌으로서 대변인이 되었으나 초고 도난 사태 이후로 사람들이 꺼림칙해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 편지 하나만으로 그 부분을 모두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본인의 회사는 가치가 수직상승하겠지.

사장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장미빛 미래를 그려가고 있을 때, 거의 다 말라가는 강에 물을 들이붓는 내용이 편지에 나왔다.

[전시회를 통해 여러분들이 제 작품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제 작품이 얼마나 사랑받는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원래라면 휴식을 위해 휴재를 결정했지만, 이번 전시회를 통해 마음 속에 묵혀있던 감정들이 모두 해소되는 기분이었어요. 덕분에 결심할 수 있었습니다. 2년 동안 하기로 한 휴재를 번복하도록 하겠습니다.]

휴재를 번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문장 하나가 사장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의 동앗줄이나 똑같았다.

게다가 사장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독자들이 가장 원하는, 제논 일대기 연재 재개 공지였다.

"아아...!"

사장은 감격에 젖은 표정으로 편지를 바라봤다. 개인 사정상 신간이 발매되는 기간이 길어질거라니, 이번 1년동안은 길면 3개월에 한 번 나올거라는 부가 설명이 들어있었으나 사장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그에게는 휴재를 번복하고 연재를 재개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했으니까. 그는 떨리는 손으로 인해 어느덧 꾸깃꾸깃해진 편지를 응시하다가 마지막 내용을 읽었다.

[여러분. 문화는 분명 아름답지만 그 문화에 대해 알지 못 하면 그저 잘 만든 것에 불과합니다. 저는 제논 일대기를 남녀노소, 그리고 계급을 불문하고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그런 문화로 남았으면 합니다. 전시회에 참석한 사람들도 모르는 것 없이 축제를 즐기기에 바빴죠. 개인 사정상 제가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하는지, 또 누구인지 알려드릴 수 없지만 전시회가 개최될 때마다 그곳으로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하는 독자분들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빌며 저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나긴 장문의 편지가 드디어 끝이 났다. 하지만 사장은 편지를 모두 읽었음에도 망부석처럼 꼿꼿하게 서 있을 뿐, 작은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그에 걱정되는 건 당연히 옆에 서 있던 매튜였다. 그는 사장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저... 사장님?"

"...매튜."

"예?"

"당장 신문사 기자 불러."

편지에서 눈을 뗀 사장의 표정은.

"그리고 이번 달 월급에서 특별히 보너스를 주도록 하겠네."

성인(聖人)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온화했다.

*****

제논 일대기가 휴재를 취소하고 연재를 시작한다. 이 소식 하나만으로도 이 세상 모든 제논 일대기 팬들이 열광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이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제논의 출신이 미네르바 제국, 그것도 마이샬 영지라는 부분을 주목했지만 연재 재개보다는 관심이 덜했다. 이 부분은 팬들보다는 나라의 수뇌부가 더욱 관심을 끌었다.

미네르바 제국은 이게 왠 떡이냐면서 제논의 출신지에 대해 언급하며 기분이 좋다는 성명문을 보냈고, 반대로 똥줄이 탄 테르스 왕국은 미네르바 제국이 헛짓거리를 한 게 아니냐며 반박했다.

그러나 제논(아이작) 특유의 친필 사인이 드러나면서 상황은 미네르바 제국에게 유리하게 작용되었다. 벌써부터 마이샬 영지를 문화 거리로 만들겠다는 등, 문화력을 발전시키기 위한 도약 단계에 나섰다.

이렇듯 제논, 그러니까 아이작이 보낸 편지 하나로 세상이 다시 한 번 떠들석해지고 있을 때 전혀 예상치 못한 이익을 본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자네가 제논이 언급한 그 화가인가? 한 번 자네의 작품을 볼 수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왔네만."

"아, 그게 저..."

"혹시 다른 작품도 있으신가요? 제논이 재밌다고 했으니 저희에게도 보여주세요."

"잠깐만요."

예술가 특유의 붉은색 빵모자와 물감을 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앞치마. 독특하게 기른 콧수염과 땡그란 푸른색 눈동자. 아이작이 보았다면 '마리오'를 닮았다고 말했을 것 같이 생긴 인물.

무명의 예술가이자 헥토파스칼 킥을 그려낸 화가, 칼스 즈바사였다. 아이작의 편지에 칼스의 작품이 언급됐을 뿐만 아니라 재미있다고 표현했으니 자연스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칼스는 지금까지 흔하디 흔한, 무명의 예술가였으나 제논의 언급 하나로 순식간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덕분에 느닷없이 본인의 집으로 찾아온 사람들을 보며 크게 당황했다.

사람들에게 재미와 웃음을 선사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예술계에 몸을 던졌으나 여태껏 소득을 본 경우는 전혀 없었다. 더군다나 본인의 귀족도, 부자도 아닌 평민이었던지라 하루하루 굶주리며 그림에 매진했다.

하지만 제논 일대기를 향한 팬심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크란의 최후를 표현할 때 가끔 가다가 빵빵 터졌던 장면들 위주로 삼았다.

그 결과물이 헥토파스칼 킥이었으며, 우스꽝스럽다고할지언정 칼스에게는 만족스러웠기에 전시회에 개시했다. 물론 무명이어서 큰 주목을 이끌진 못 했다.

"저... 여러분? 죄송하지만 잠시 후 찾아오실 수 있나요? 제가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되서..."

"흠. 이거 실례했군. 여기 우리 가문의 증표가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게토 자작가에 찾아오게나."

"우리 저택에도 방문해주세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찾아오기에도 편하실 거예요."

"저희도..."

칼스는 쏟아져 나오는 방문 요청에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증표를 하나하나 받아냈다. 무명에다가 가난한 예술가였던 그에게는 이런 대접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이윽고 방문 허가증을 무더기로 받은 칼스는 집에 들어오고 나서도 한동안 떨떠름히 멍하니 서 있었다. 이게 정말로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집에 들어오고나서 물감 특유의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제논 일대기의 한 장면을 그렸을 뿐인데 단기간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는 것을.

특정 계층만 느낄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 아닌, 모두에게 재미와 웃음을 선물하는 본인의 예술품이 드디어 빛을 보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논이 마음에 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 ..."

칼스는 방금까지 그리다가 말았던 캔버스를 바라봤다. 본인의 이름이 제논의 편지에 언급되어 기쁜 나머지 또다른 장면을 그리는 중이었다.

자기는 그저 팬아트 개념으로 그렸을 뿐인데,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칼스는 눈을 끔뻑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 이게 머선 일이고..."

한편, 본인의 편지 하나로 예술계의 또다른 거장을 탄생시킨 것도 모르는 아이작은...

"마리."

"왜?"

"언제까지 우리 저택에 있을거야?"

"평생동안 있고 싶은데?"

마리와 간접적인 부부 생활을 즐기는 중이었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