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
눈치 채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눈치를 챈 이상 마리와의 대화가 서먹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내가 예상하고 있는 게 맞다면 어머니가 약을 주지도 않았을테고, 마리가 이런 옷을 입고 오지도 않았겠지.
이전까지만 해도 그런 상황이 올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또 예상치 못하게 그런 상황이 발생하고 잘 넘어갈 수 있을거라 판단했다. 하지만 문제는 세실리가 작업(?)을 통해 상승시킨 내 욕구다.
정말로 세실리가 작정한 건지, 아니면 본의 아니게 색기를 흩뿌린 건지 모르겠으나 점점 버티기가 어려워졌다. 환생하고나서 처리하기 어려웠던 성욕인데 오늘로서 한계를 맞이하기 직전이다.
'다행히 지금은 참을 수 있어.'
나는 아래로 내렸던 고개를 슬금슬금 들어올려 마리를 바라봤다. 그녀는 가슴 면적 대부분을 거의 드러낸, 노출이 심한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내 앞에 앉아있다.
심지어 아까는 멀리 있어서 확인하지 못 했으나 가까이서 바라보니 더욱 파격적이다. 왜냐하면 드레스가 시스루 같은 재질인지 새하얀 속살이 은연히 비치는 중이었으니까.
남자는 완전히 벗은 여자보다 이처럼 은밀하게 속살을 보이는 여자에게 더욱 강한 욕구를 느낀다는데 그 말을 실시간으로 체감하고 있다.
다른 여자도 아닌 마리가 이런 옷차림으로 내 앞에 나타나니 정신이 혼미해진다. 나와 몸을 섞겠다는 의지를 드레스만으로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
"아이작. 나를 왜 불렀는지 알려줄 수 있어? 그리고 이것 말고도 할 얘기가 많지 않아?"
내가 최대한 인내를 발휘하며 욕구를 간신히 억제하고 있을 때 마리가 말을 걸었다. 마리 특유의 상큼한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분위기가 분위기다보니 목소리마저 야하게 들렸다.
이에 나는 얼굴에 덮었던 두 손을 떼어내며 마리와 똑바로 마주했다. 그녀도 나처럼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미묘하게 붉어져 있었으며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다행히 긴장하고 있는 건 나 혼자가 아니었던 모양. 덕분에 자신감을 얻어 겨우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래. 할 얘기가 있어서 불렀지. 그런데 그 옷은..."
"옷이 왜?"
"...아냐. 이건 나중에 얘기하자. 시간 아니, 밤은 아직 기니까."
"... ..."
시간이 길다고 말한 게 아닌, '밤'은 길다. 언뜻 보기에 사소한 차이여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완전히 다른 의미다.
사실상 마리의 바람을 들어주겠다는, 나의 간접적인 허가나 다름없었으니. 마리도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백설기 같은 뺨이 더 붉어졌으며 방실거리던 얼굴도 점차 깨지기 시작했다.
나는 어색한 상황이 내려앉아 침묵만이 가라앉기 직전, 본론부터 들어서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마리를 침실로 불러들인 이유는 모두 알겠지만 리나와의 관계 때문이다.
비록 리나와 레오르트가 나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들은 미네르바 제국의 황족이다. 적으로 만들어봤자 도움이 되는 건 하나도 없고 이번 전시회처럼 든든한 우군으로 만들어 놓아야된다.
세실리가 나를 보호하겠다고 선언했으나 마족의 입지는 현재 확실하지도 않는 상황. 그러니 리나를 확실한 내 편으로 만들어야 앞날이 편해진다.
'정치를 그토록 꺼려했는데 인생 참 신기해.'
역시 사람의 앞날은 아무도 모른다. 정치를 싫어하던 내가 리나를 우군으로 만들기 위해 마리를 설득시키려 하다니.
그래도 이리저리 끌려다니지 않고 미리미리 대비하는 편히 이롭다. 앞으로 연재를 재개하게 되면 내 가치가 지금보다 커질 것이며 원하지 않아도 정치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리라.
"마리."
"응."
"이 이야기는 너에게 민감할 수도 있어. 리나와 관련된 거라서."
움찔-
악연을 넘어 경멸의 대상이었던 리나가 내 입에서 언급되었기 때문일까. 순간적으로 마리의 몸이 크게 움찔거리며 올라갔던 입꼬리가 급격히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불탈 것처럼 무르익었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추락하는 느낌. 괜히 말했나 싶었지만 이건 언젠가 해결해야하는 난제 중 하나다.
매도 먼지 맞는 게 낫다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계속 미루고 미루다가 사단이 나서야 수습하는 건 그만하고 싶다.
"...리나는 왜?"
좋았던 분위기에 초를 친 게 조금 기분 나빴는지 마리가 고운 미간을 살짝 좁히며 나에게 질문했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하며 말투였다.
이에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려던 시선을 최대한 그녀의 얼굴에다 고정시켰다. 여기서부터 입을 잘 털어야 마리도 더이상 기분 나빠하지 않고, 가라앉았던 분위기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 터.
나는 인상을 써도 예쁜 마리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평소 궁금하기도 했고, 앞으로 리나, 그리고 레오르트 님과 가까이 지낼 생각이거든. 너도 알다시피 제논 일대기는 신간이 발매될 때마다 덩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졌어. 완결이 될 쯤에는 아마 국가조차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
"...리나를 아군으로 만드려는 거구나? 훗날 잘못되었을 때 너와 가문, 그리고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정확해."
레킬리스 공작가 출신답게 마리는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짚어냈다. 다만 불만스러운 얼굴은 여전했다.
아마 그녀로서는 자존심이 상할만한 이야기일 것이다. 레킬리스 가문 출신인 자신이 있는데 어째서 황족을 끌어들이는 거냐고.
하지만 내 정체가 탄로났을 때, 수많은 시선들이 나에게로 집중될 것이며 어두운 손길 또한 뻗쳐올 것이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아군을 많이 두어야 된다.
"세실리로는 부족해? 걔도 너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고 했잖아."
충분히 예상했던 질문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부족하지는 않지. 하지만 그렇다고 충분하지도 않아. 지난 번 초고 도난 사건처럼, 이 세상에는 전부 불확실한 것 투성이야. 최악의 경우 내가 납치당할 수도 있지."
"... ..."
"그리고 가장 두려운 건... 나 때문에 너와 내 가족들이 다치는 거야."
내가 무슨 짓을 당하는 건 상관없다. 나 혼자 피해만 입으면 그만이었으니.
하지만 가족은 아니다. 지금까지 가족들이 나에게 보여준 사랑과 헌신을 고려했을 때 그들은 나에게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가족들이 나로 인해 해를 입는다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전생에서 가족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사고로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미연에 방지하고 싶다.
"특히 너만큼은 무슨 짓을 해서든 지켜주고 싶어. 너는 내가 제논이라는 걸 알기도 전에 나를 먼저 좋아했고, 고백까지 했으니까. 너는 나에게 둘도 없는 보물이자 소중한 여자야. 그런 네가 다친다고 상상만 하면... 평생동안 괴로움에 몸부림치겠지. 내가 제논이라는 걸 밝히기 전까지는 네가 날 보호하겠지만, 그 이후에는 내가 널 지켜줄 차례야."
"... ..."
"부디 이런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해. 이기적이라 해도 괜찮아. 너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테니까."
"...정말이지, 너 다운 생각이구나."
속에 담아놓았던 심정들을 모두 꺼내자 마리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에 고개를 들어올리니 이게 왠 걸.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녀와 딱 마주쳤다. 푸른색 눈동자에는 진득한 감정이 담겨있었으며 촉촉하게 젖어있다.
뒤이어 그녀는 눈을 천천히 감으며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눈을 열어 나와 똑바로 마주했다.
"사람 마음을 갖고 노는 말을 하네? 그 말, 정말로 책임질 수 있지? 나를 지켜준다는 거."
"두 손을 자르는 한이 있더라도 지켜줄 거야."
"그렇게까지 말하면 안 받아들일 수가 없겠네. 좋아. 난 받아들일게."
다행히 설득시킨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 것도 잠시, 긴장의 끈을 단단히 붙잡으며 묻고 싶었던 질문을 꺼냈다.
리나를 아군으로 만들었다고 한들, 마리와 껄그러운 관계를 유지하는 이상 진척이 더딜 게 분명하다. 어떻게든 이 둘의 사이를 풀어주어야 앞날이 편할 것이다.
"아군으로 두는 걸로는 부족해. 난 너와 리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거든."
"...그건 또 왜? 아군으로 두면 그만인 거 아니었어?"
트라우마를 건드렸는지 눈쌀을 찌푸리며 대놓고 싫어하는 기색을 드러내는 그녀였다. 전과는 달라도 확연히 다른 반응.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할 말을 이어나갔다. 평소 궁금했던 부분이자 어떻게든 개선해나가야 할 문제 중 하나다.
오지랖이 넓다고 할 수 있지만, 아군이 될 사람들끼리 신경전을 벌이는 건 옳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내가 총대를 매는 거고.
"아군으로 두어도 사람 사이의 묵힌 감정은 이성을 마비시키기 마련이야. 무엇보다 리나도 너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는 것 같거든.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만일에 대비하고 싶어."
"... ..."
"너를 믿지 못 하는 건 아니야. 황족과 척을 지는 건 지금은 몰라도 언젠가 부메랑처럼 돌아올 거야. 혹여 리나가 나쁜 마음을 먹게 된다면 우리에게 최악의 적이 나타나는거지."
"후우..."
내 설득으로 머리가 냉정하게 식었는지 마리가 눈을 감으며 재차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행히 먹혀들어간 모양이다.
이어서 마리는 턱을 괸 자세를 유지하며 시선을 다른데로 돌리고는 손가락으로 볼을 툭- 툭- 건드렸다. 잠시 후, 생각을 정리했는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언젠가 해결해야하는 문제겠지. 어찌 보면 나도 쪼잔했던 구석이 있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냥... 너도 알다시피 나와 리나는 어릴 때 친구였어. 레킬리스 가문은 황제의 측근 중 한 명이었으니 자연스레 가까워졌지. 나이도 똑같겠다, 우리 아버지는 나를 황궁으로 보내셨어. 예절 교육을 포함한 모든 교육은 황궁에서 받았지. 그때까지는 괜찮았는데... 문제는 사교회였어. 내가 12살 때의 일이었지."
"사교회라..."
일개 시골 깡촌을 다스리는 우리 가문과 달리 고위급 가문은 어린 나이 때부터 사교회에 데뷔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때부터 인맥과 서서히 넓혀 훗날 미래를 도모하는 것이다.
특히 마리와 리나는 엄청난 관심을 받았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무려 황녀와 공작 영애였으니. 관심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다.
"너도 알고 있지만 나는 사람의 진심을 본능적으로 꿰뚫어볼 수 있어. 지금은 괜찮지만 그때는 너무 어려서 표정 관리를 하나도 못 했지. 반면 리나는 완전히 달랐어. 표정 관리가 완벽한 건 물론 화려한 말재간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지."
"설마 질투한거야?"
"에이. 나를 뭘로 보고. 그냥 대단하구나~ 라고 생각했지."
내 추측에 마리가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질투를 느낄만도 한데 너무 순수했던 나머지 질투를 느낄 새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문제는... 리나도, 나도 아닌 다른 곳에서 나타났어. 황녀인 리나와 공작가 영애인 나. 이것만 본다면 완벽했겠지만... 네 말처럼 질투를 느끼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야."
"누가 험담을 하거나 이간질이라도 한 거야?"
"맞아. 15살 때부터 백작가 영애가 우리 둘을 미묘하게 갈라놓기 시작했지. 나는 물론이고 리나도 전혀 모르는 사이에 말이야."
본격적인 정치질을 시작이었다. 나는 심각한 이야기가 나올 듯한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경청했다.
마리는 그런 나를 힐끔거리더니 피식 웃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나는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손이 간혈적으로 떨리기 시작한 것을. 트라우마가 가슴 속 깊이 박혀들어간 듯했다.
"보통 귀족들의 실세는 공작도, 후작도 아닌 백작급인 건 너도 알고 있지? 그 영애의 가문도 실세 중 하나였어. 하지만 그만큼 욕심이 많았지. 위로 올라가려는 욕심이 말이야."
"... ..."
"그 애는 나를 철저하게 고립시키기 시작했어. 내가 리나에게 접근할 때마다 되도 않는 이유로 떨어뜨리고, 또 리나에게는 안 좋은 말을 남겼지. 당연히 리나는 믿지 않았지만 그게 쌓이고 쌓이니까... 리나도 나를..."
"그만. 됐어."
이쯤이면 그만 말해도 될 것 같다. 나는 서둘러 마리의 손을 붙잡으며 단호하게 말을 잘라냈다.
두 손을 떠는 건 물론이고, 목소리까지 떨면서 말하던 마리는 내가 손을 잡자마자 고개를 서서히 들어올렸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 했지만 어느새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다.
나는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마리를 바라봤다. 언제나 당당하고 활기차던 모습은 온데간데도 없이 사라져 있으며 친구에게 배신당한 사람만이 남아있다.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한 것만큼 끔찍하고 괴로운 기억은 거의 없다. 특히 어린 나이에 그런 경험을 겪었으니 상처는 더욱 깊게 새겨졌겠지.
다행히 오해를 풀고, 일도 잘 처리한 듯싶었지만 마리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그토록 리나를 혐오하고 경멸하던 이유를 대강 알 것 같았다.
"내가 괜히 물은 것 같네. 정말 미안해. 그런 일이 있는지도 모르고..."
"아, 아냐. 그 후로 오해도 풀었고, 그 백작 영애는 가문에서 추방당했거든. 사실 리나도 나에게 허리까지 숙이며 사과했어. 내가 사과를 받지 않았을 뿐이야."
"사과를 안 받은 게 아니라 못 받은 거겠지."
사람 사이의 신뢰는 한 번 깨지면 복구하기가 극히 어렵다. 평생동안 고쳐나가려 애를 써도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벽에 박힌 못을 빼내도 그 구멍이 남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에 뚫린 구멍은 결코 고칠 수 없다.
"...너는 그러지 않을 거지?"
마리는 손등으로 눈물을 대충 훔치고 촉촉하게 젖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아주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너에게 진실만을 말할거야."
"그런 애가 세실리랑 바람났니?"
"... ..."
이러면 할 말이 없어지는데. 마리는 내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자 장난이라는 듯,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내 볼을 꼬집으면서 천연덕스럽게 굴었다.
"이렇게 예쁜 여자친구를 두고 다른 여자를 만들기나 하고 말이야. 심지어 그 여자가 더 예쁘네? 괘씸해서 안 되겠어. 오늘 밤새도록 괴롭혀야지."
"...세실리랑 잘 얘기했어?"
"응. 세실리는 내가 특별히 허락할게."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몰라도 불편하다는 기색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후련함에 가까운 느낌.
게다가 세실리보다 우위에 서 있다는 뉘앙스를 보아 선택권은 마리가 꽉 쥔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다행이라 여기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내 볼을 꼬집은 마리의 손목을 슬며시 붙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상 위로 올려놓았다. 마리도 내 손길에 따라 아무런 저항없이 팔을 움직였다.
"... ..."
그렇게 우리 둘은 아무런 말없이, 그저 손만 잡은 채 서로를 바라봤다.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었다.
나는 마리의 얼굴부터 시작해서 시선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가녀린 목덜미부터 시작하여 면적 대부분이 노출돼 존재감을 자랑하는 가슴, 그리고 이브닝 드레스 너머로 은은하게 비춰지는 속살까지.
한 폭의 그림 같은 자태에 눈을 뗄 수가 없었으며 동시에 내 욕구를 바늘로 찌르듯이 자극시켰다.
이제 꺼릴 게 없다는 듯, 대놓고 욕정어린 시선으로 마리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아이작."
마리가 부끄러워하는 기색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이에 나는 느릿느릿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회피하더니 앞으로 넘어온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리고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음성으로 말한다.
"그... 공연 중에 네가 말했잖아. 침실에서 커피나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응."
"그게 무슨 뜻을 가졌는지 알고 있어?"
자세한 의미는 모르지만, 그 유명한 라면 먹고 갈래? 와 비슷하지 않을까.
정작 떠드느라 커피는 한 모금도 마시지 못 했지만, 그 의미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미 나도 단단히 마음을 먹은 상태였으니.
나는 얼굴을 잔뜩 붉히며 부끄러워하는 마리의 손을 더 강하게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아."
"... ..."
"...마실거야?"
내 간접적인 질문에 마리는...
"...응."
직접적인 대답을 함으로서 허락했다.
나는 대답을 듣고 턱을 서서히 젖혀들었다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그녀에게 물었다.
"후회하지 않아?"
"너니까 후회하지 않아."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하고 때에 따라서 답답할 수도 있어."
"나는 왈가닥인데다가 고집이 세."
마리는 내 우려 섞인 질문들을 하나하나 명료히 받아쳤다. 그러면 그럴수록 용기를 얻었는지 이윽고 나와 정면으로 마주해 시선을 교환했다.
나는 결의와 긴장, 그리고 기대와 애정이 골고루 섞여있는 마리의 눈동자를 직시하다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리도 내가 에스코트하듯이 손을 붙잡은 채 일어서자 따라 일어났다.
"...아이작."
"응. 마리."
"사랑해."
얼굴을 잔뜩 붉힌 채 미소를 머금으며 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마리.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귀엽고, 또 섹시해서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얼굴을 서서히 가까이 접근시키다가 마리의 코앞에 멈춰세웠다. 마리는 내 얼굴이 코 앞까지 다가와도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나도."
스윽-
마주잡았던 손을 풀어 서서히, 부드럽게 올라가다가 등 뒤로 향한다. 비어있는 다른 한 손도 그녀의 얇은 허리를 스쳐지나가 등으로 옮겨졌다.
내 두 손이 몸을 뱀처럼 스멀스멀 움직일 때마다 마리의 가녀린 몸이 움찔거렸다. 그사이, 나는 마침내 마리를 껴안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정면만 보고 있어서 몰랐지만, 등까지 시원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등의 감촉이 내 손을 타고 그대로 전달된다.
"하아..."
포옹을 하니 마리가 뜨거운 숨소리를 내쉬었다. 뒤이어 내 몸을 더듬거리면서 조심히, 그리고 강하게 나를 껴안았다.
이때까지 했던 포옹과 달리, 그녀의 살결과 심장 소리가 온전히 느껴졌다. 이브닝 드레스 너머로 커다란 가슴이 나를 짓누른다.
마시멜로우처럼 말랑말랑하여 작은 압박에도 형태가 자유자재로 변하는 마리의 가슴. 이걸 내 손으로 만지면 어떤 기분일까.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마리는 나에게 달콤한 첫 날 밤을 선물해주는 여자이니 유리 공예품처럼 소중하게 다루어야 된다.
"...아이작. 아래에 뭔가..."
"네가 이리 만든거야."
"... ..."
마리도 이미 불끈거리기 시작한 내 남성을 느낀 모양이다. 그녀는 부풀어오를 대로 부푼 내 아랫도리를 계속해서 아래를 힐끔거렸다.
이에 나는 어딜 한 눈 파냐는 듯, 등에 갖다 대었던 두 손을 아래로 쓸어내렸다.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그녀가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흥악!"
갑작스러운 자극에 몸을 부르르 떨며 괴상한 소리를 내뱉는 마리. 깜짝 놀란 나머지 나를 감싼 두 팔에 힘이 더 가해졌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등이 파였다는 뜻은 내 손이 그 아래까지 침범할 수 있다는 의미. 나는 그녀의 등을 소중히 보듬어주다가 어느 순간부터 허리 밑까지 쓸어내렸다.
은밀한 비처까지는 아니지만, 엉덩이와 넓은 골반을 도자기 다루듯이 쓸어줌으로서 그녀의 애를 태우기 시작했다.
"흐응... 하앙..."
마리는 신선한 자극이 연거푸 이어지자 몸을 부르르 떨면서 신음을 흘렸다. 나는 그녀가 차마 나를 바라보지 못 하고 고개를 떨구자 한 손으로 턱을 붙잡아 억지로 들어올렸다.
"으응...? 읍!"
그리고 이어지는 기습적인 키스. 마리는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몸을 뻣뻣하게 굳혔으나 이윽고 힘을 빼며 받아들였다.
이에 한 손은 뒷머리를, 한 손은 그녀의 등을 붙잡아 마음껏 탐닉했다.
츕! 츄웁! 츕!
단순히 입술을 맞추는 키스가 아닌, 서로를 탐하는 것처럼 격렬한 딥키스. 내가 마리의 머리를 단단하게 고정시킨 것처럼, 마리도 내 목을 껴안으며 호응했다.
입술을 핥거나 살짝 깨물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집어넣어 제 짝을 찾아 주위를 더듬거린다.
마침내 서로의 혀가 얽히고 섥히며 타액을 교환하고, 서로의 사랑을 갈구한다.
"후아..."
"... ..."
그렇게 탐닉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우리 둘은 사전에 합을 맞춘 것처럼 입술을 떼었다.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은색 실선이 길게 이어졌다가 뚝- 하고 끊어졌다.
나는 입 안에 달콤한 맛이 풍기는 것도 잠깐, 마리의 얼굴을 바라봤다.
혀를 길게 내밀고 눈이 풀려있어 황홀하다는 감정을 여실히 표현하고 있다. 우아함보다는 천박함이 어울리는 표정.
그리고 방금 전 격렬한 입맞춤으로 인해 드레스의 끈 하나가 흘러내려 그녀의 한 쪽 가슴이 완전히 노출되었다.
"...마리."
"하아... 하아..."
이미 흥분할대로 흥분했는지 대답조차 제대로 못 하며 숨을 헐떡이는 그녀. 나는 얼굴을 서서히 갖다 대면서 그녀의 귀에다 속삭이듯이 말했다.
"사랑해."
"나, 나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자마자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그녀의 얼굴을 상냥하게 쓰다듬어주다가 고개를 아래로 내려 가늘고 긴 목덜미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혀로 상냥하게 핥으면서 살내음을 마음껏 음미했다. 씻고 와서 달달한 비누향이 오감을 자극시켰다.
"흐응..."
그녀도 만족스러운지 야릇한 비음을 흘리며 몸을 흠칫흠칫 떨었다. 나는 그녀를 천천히 침대 쪽으로 이끌었고...
"하앙!"
이미 드러난 그녀의 한 쪽 가슴을 붙잡음으로서, 저택의 깊은 밤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