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
이후로 우리는 저택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도중에도 마을은 축제의 열기로 후끈거렸으며 멈출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중간에 맛있어 보이는 먹거리가 있어 사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시간이다보니 곧바로 저택으로 돌아갔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중에 세실리와 다정하게 팔짱을 끼는 건 덤이다.
팔짱을 끼게 되니 가슴의 촉감이 그대로 전달된다. 나는 차곡차곡 쌓여가는 성욕을 느끼면서 인내심을 발휘했다.
'잘 해결할 수 있을까...'
막상 저택으로 돌아가서 마리에게 모든 사실을 말하자니 약간 심란했다. 일부다처제가 용인되는 세상이라지만 각자의 생각이 있는 법이다.
특히 마리는 나에게 먼저 고백을 했고, 내가 그 고백을 받아들였으니 배신감도 상당할 터. 부디 상황이 무던하게 흘러갔으면 좋겠다.
"긴장되니? 마리에게 사실을 말하려는 게?"
"당연하지. 누나도 알잖아. 마리랑 내 관계가 얼마나 좋은지."
"흐응. 하긴, 보는 사람이 질투날 정도로 좋아보였지. 그래도 걱정하지 마. 네가 우려하는 사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테니까."
세실리는 마리를 설득시킬 수 있을거라 확신하는지 자신만만한 모습이다. 나는 미심쩍어 했으나 저리 자신있으니 일단 믿어볼 계획이다.
비록 마리가 상처를 받겠지만, 그 상처가 아물 수 있도록 내가 어르고 달래주면 된다. 그리고 이전에 세실리와 따로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으니 설득은 쉬울 것이다.
그리하여 불빛이 켜진 저택으로 돌아오고, 세실리는 우리 가족보다는 마리부터 찾아갔다. 나도 뒤를 따라가 마리와 만나고 싶었으나 세실리가 나를 제지했다.
그에 의문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니 세실리가 방긋 웃는 표정으로 이해하기 힘든 말을 꺼냈다.
"너는 일단 깨끗이 목욕이나 해. 마리에게는 내가 언질을 할테니까."
"언질을 한다고?"
"응. 어차피 9시가 되면 너희끼리 이야기를 나눌 거잖아? 그것도 '침실'에서 단 둘이."
유독 침실을 강조한 세실리다. 반쯤 접힌 눈매와 고혹적인 목소리로 말하니 자꾸만 이상한 쪽으로 상상이 간다.
내가 마리를 침실로 부르는 이유는 그저 단 둘이 있기 위해서지, 그렇고 그런 짓을 하려는 게 아니다. 마리도 그쪽으로 생각하지 않을테고.
물론 세실리가 끌어올릴대로 끌어올린 이 성욕 때문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세실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상황이 흘러가진 않을 것이다.
"알았어. 그럼 부모님에게 인사는 하고 갈 거지?"
"응. 인사드리고 나서 헬리움으로 복귀해야지. 아, 그리고 너희 부모님에게도 말씀드려. 내가 초대해서 일주일 후에 헬리움을 방문할거라고. 그럼 난 갈게."
"안녕."
"아. 그 전에..."
쪽-
세실리는 떠나기 전, 고개를 불쑥 내밀더니 내 뺨에다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나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공격(?)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뺨에다가 손을 대었다.
촉촉한 느낌과 더불어 이 따스한 감각을 보자면 확실히 그녀가 나에게 볼 뽀뽀를 한 게 맞다. 세실리도 장난이라는 듯 싱글벙긋 웃고 있으나 얼굴이 미약하게 붉어져 있다.
"이건 감사의 표시. 키스는 마리에게 허락받고나서 할게."
"... ..."
"100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 오늘만큼 행복한 날은 없었어. 평생동안 잊지 못 할 거야. 그럼-"
세실리는 가슴 중앙에 손을 얹으며 우아하게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했다. 그리고 나에게 빙긋 웃어주더니 등을 돌려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나는 그녀가 등을 돌리며 떠나가는 순간에도 쉽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녀의 뒷모습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멍해져 있을 뿐.
그러나 이윽고 피식 웃게 되었다. 장난스러운 면모는 역시 그녀답다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했다.
'오늘만큼 행복한 날...'
여러 생각이 드는 말이다. 그만큼 세실리가 나를 특별히 여기고 있다는 의미겠지.
나는 그녀가 뽀뽀를 했던 뺨을 문지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세실리의 조언대로 몸을 깨끗하게 씻을 참이다.
'아. 그러고 보니 손수건을 못 받았네.'
헬리움에 도착하고 나서 돌려받으면 되겠지. 나는 씻으러 가기 전, 지나가던 하녀에게 커피와 다과를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
하녀는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이며 알겠다고 답했고, 나 또한 몸을 씻기 위해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 후로 침실에서 책을 읽으며 여유롭게 마리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똑- 똑- 똑-
"아이작? 안에 있니?"
"응?"
노크와 동시에 어머니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마리가 오려면 시간이 남았고, 하녀인 줄만 알았는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니 고개를 퍼뜩 들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다른 사람도 아닌 어머니가 찾아오셔서 의아해했지만 일단 책을 내려놓고 출입을 허가했다.
"들어오세요."
"그럼 실례할게."
끼익-
어머니가 문을 열고 침실로 들어오셨다. 밤이라서 나풀거리는 잠옷용 드레스를 입고 계셨으나 내 눈에 띈 건 드레스가 아닌 그녀의 손에 들린 물건이었다.
분명 하녀에게 지시했던 다과 세트를 어머니가 직접 들고 오셨다. 나는 깜짝 놀라 의문도 채 느낄 새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머니는 어딘가 흐뭇해 보이는 표정을 유지한 채 나에게 물었다.
"다과는 이곳에다가 놓으면 되니?"
"이, 일단 그렇긴 한데 어째서 어머니가...?"
내가 그리 묻자 어머니는 테이블에 다과 세트를 놓으면서 알 수 없는 대답을 꺼내셨다.
"우리 아이작도 이제 다 컸구나. 마냥 어린애인 줄만 알았는데."
"네?"
"혹시 모르니 이 약은 꼭 먹으렴. 만일이라는 게 있으니까."
어머니는 내가 어리둥절하는 동안 테이블 위에 약 한 알을 올리셨다. 동글동글한 구슬처럼 생겼으며 새하얀 약이다.
나는 동그란 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게 무슨 약이냐는 의미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싱글벙글한 표정을 유지한 채 손을 내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빠 아들 아니랄까봐 눈치가 없구나. 이것도 유전이겠지. 마리 그 애도 고생하겠네."
"어머니?"
"효과는 30분 후에 나타나니까 지금 먹으렴. 어서."
어머니가 약을 먹으라고 재촉하자 나는 떨떠름한 심정으로 약을 집었다. 동그랗고 크기도 작아 물이랑 마실 필요는 없을 듯했다.
나는 동그란 알약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다시 한 번 어머니를 바라봤다. 어머니는 내가 약을 먹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같다.
"...이상한 거 아니죠?"
"얘는. 엄마가 우리 아들에게 이상한 걸 먹이겠니?"
"그건 그렇죠."
꿀꺽-
약간 의심이 가긴 했으나 어머니가 준 것이니 안심하고 약을 먹었다. 어머니는 내가 약을 먹자마자 미소를 더욱 진하게 지으시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 아이작은 참 능력도 좋아. 어디서 그런 애를 데려온 거니?"
"그냥 우연히 만난거죠. 어머니도 마리가 마음에 드세요?"
"물론. 공작가인 건 둘째치고 됨됨이가 훌륭하더구나. 신붓감으로 딱이야."
저런 말씀까지 하시는 걸 보면 마리가 마음에 쏙 든 모양이다. 하긴 마리는 모난 곳 하나 없는데다가 우리 가문처럼 권위의식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어머니가 좋아할만도 하다.
공작의 직위도 아무런 문제도 없다. 내가 제논 작가라는 걸 밝히게 되는 순간부터 입장이 뒤바뀌는 셈이니.
물론 그걸 밝히지 않아도 레킬리스 가문 특성상 나를 받아들일 것이다. 애당초 가족과 함께 귀족 전용 여관이 아닌 우리 저택에 방문한 것부터가 이미 도장을 찍은 거나 다름없다.
'신붓감이라...'
나는 어머니가 언급했던 신붓감이라는 소리에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마리와 결혼하고, 알콩달콩 신혼을 보내다가 뜨거운 밤을...
'...미친.'
아까부터 생각이 왜 자꾸 그런 쪽으로 가는지 모르겠다. 아마 세실리의 요망한 행동으로 인해 성욕이 불끈불끈 달아올랐기 때문이겠지.
나는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써 헛기침을 토했다. 여지껏 잘 참아왔던 욕구를 자극시켰기에 참는 것조차 힘들었다. 마리와 대화가 끝나면 따로 해소해야할 듯싶다.
어머니는 그걸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셨는지 나를 놀리셨다.
"어머. 부끄러운 거니? 너무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단다. 네 나이대에 약혼은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저희 연애한지 겨우 1개월밖에 안 됐어요."
"연애를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해. 정략결혼이라는 게 왜 있겠니? 애당초 귀족들 사이에 연애는 흔치 않은 일이란다. 보통 가문끼리 합의를 통해 약혼을 맺는 일이 다반사지."
안 되겠다. 이미 어머니는 마리를 신붓감으로 점찍으신 모양이다. 저렇게 떠드시는 걸 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하던 간에 듣지 않으실 터.
나는 어머니가 상상의 나래에서 빠져나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귀담아들으실 것 같지가 않다.
똑- 똑- 똑-
"아이작. 나야. 들어가도 돼?"
벌써 9시가 다 된 모양이다. 문 너머로 마리가 노크를 하며 출입을 부탁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어머니는 정신을 차리고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셨다가 다시 나에게 돌리며 응원의 말을 건내셨다.
"아무튼 힘내렴.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법이야.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돼. 알겠지?"
"...네."
내 대답에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시고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윽고 문을 열어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리와 딱 마주쳤다.
"앗. 안녕하세요. 안에 계셨군요."
"그래. 너도 준비는... 다 한 것 같네?"
"물론이죠. 어머니에게도 허락을 맡았어요."
멀리 떨어져 있어서 둘끼리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모르겠다. 마리의 모습도 어머니에게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아이작은요? 설마 아직도 모르고 있나요?"
"아마 그런 것 같네. 눈치 없는 건 지 아빠를 닮아서..."
"괜찮아요. 그럼 전 이만 들어가볼게요."
"좋은 밤 보내렴."
머지않아 어머니가 문 밖으로 나가고, 마리가 어머니에게 공손히 인사하셨다. 나는 문 너머로 보이는 마리의 모습을 보고 감탄을 자아냈다.
축제 동안 입었던 드레스가 그녀의 몸매를 부각시키는 드레스였다면, 지금은 흰색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있다. 허나 그 드레스조차 남자의 본능을 자극시키는 패션이다.
이브닝 드레스답게 어깨와 팔, 그리고 가슴을 모두 노출시켰으나 특히 가슴 부분이 노골적이었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가린 탓에 가슴골이 훤히 드러날 정도.
마리는 섹시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는데 저 모습을 보고나서 완전히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세실리가 대놓고 섹시미를 강조한다면 마리는 평소와 달라도 전혀 다른, 이른바 반전 매력을 선사했다.
'와... 진짜...'
예뻐도 너무 예쁜 게 아닐까. 나는 마리가 점점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떼지 못 했다.
전이었다면 부끄러움에 시선을 돌렸을텐데 지금은 시선을 돌릴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아름답다는 말조차 부족한 그녀의 자태를 두 눈으로 똑똑히 각인시키고 싶었다.
그사이, 마리는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뒷짐을 진 채 특유의 방실거리는 미소를 띄며 입을 열었다.
"나 왔어. 그런데..."
잠깐 말을 흐린 그녀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나랑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커피까지 준비한 거야?"
은글슬쩍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깊게 파인 그녀의 가슴골을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세실리 때문에 욕구가 차곡차곡 쌓여가던 시점이었는데 이런 자극은 맵다 못해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망했다.'
하반신 중심부에 점점 피가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란 참으로 슬픈 동물이지만, 그 어떤 남자라도 여자친구의 이런 섹시한 모습을 본다면 참을 수 없을 것이리라.
나는 한동안 마리의 얼굴과 가슴을 번갈아보다가 손으로 얼굴을 덮고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마리."
"왜?"
"...아냐."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리고 어머니가 나에게 준 약의 정체도.
전생에서는 보통 여자가 먹는 약이지만...
"...일단 앉을까?"
이 세상에는 남자가 먹는 피임약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