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
나는 사고 방식 자체가 차원이 다른 세실리의 말을 듣고 어지러움을 느껴 머리를 붙잡았다. 내가 들은 게 정말인지 곰곰히 되새겨도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마족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세실리가 독특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 세상의 문화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마리 다음으로는 자신의 차례라니, 나로서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생각이었다.
"그... 누나?"
"네? 무슨 일이시죠?"
"제가 멍청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마리 다음으로는 누나라는 게 무슨 소리에요?"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에게 질문했다. 혹여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을까봐.
이에 세실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뭐가 잘못 되었냐는 듯, 순진한 얼굴로 도리어 본인이 의문을 드러냈다.
"말 그대로에요. 마리는 은인과 가장 먼저 연인이 된 여자이니 이정도는 양보해야되지 않겠어요?"
"아니.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하, 씨. 이걸 뭐라고 해야하지..."
너무 당황하는 바람에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나는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리며 세실리를 바라봤다. 그녀는 나와 몸을 섞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그녀를 받아들인 마당에 아예 그쪽으로 생각이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좀 갑작스럽다. 중간 과정을 스킵하고 엔딩을 보는 느낌이랄까.
내가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최대한 회전시키고 있을 때, 가만히 지켜보던 세실리가 불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은인께서는 저와 몸을 섞으시는 게 싫으신 건가요?"
아무래도 내 반응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나는 다른 사람이 들으면 기겁할만 이야기에 그녀를 쳐다봤다. 세실리는 현재 애처롭기 그지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중이다.
얼굴은 설명해봤자 입만 아프니 생략하고 몸매는... 이것도 넘어가자. 천상의 아름다움을 모조리 갖다 박은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마리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여성으로서의 매력은 세실리가 훨씬 뛰어나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녀의 외모라던지, 몸매라던지 아니다. 모든 과정을 스킵하고 몸부터 섞으려는 세실리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 뿐이다.
나는 그 생각이 든 것도 잠시, 우선 고개를 세차게 저음으로서 그녀의 불안감을 해소시켜줬다.
"아니. 아니. 설마 그럴리가.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래요. 누나도 생각하기에 다짜고짜 몸부터 섞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마리처럼 알콩달콩 연애를 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은인께서 저를 받아주신다면야 전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그 부분이 더 행복할 수도 있겠네요."
"그쵸?"
"네. 지금까지 마리랑 함께 보여줬던 걸 생각하자면... 하아..."
깨가 쏟아지던 나와 마리의 연애가 떠올랐는지 야릇한 숨소리를 내쉬는 세실리.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는 것이 스위치를 누른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다행히 그녀의 뿔이 붉은색으로 잠식될 일은 없었으나 붉어진 뺨만큼은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건지 구태여 묻고 싶지는 않다.
"아, 아무튼 누나의 생각은 잘 알겠어요. 정말로 후회하지 않으시죠?"
"혹시 제가 은인에게 처음으로 보냈던 편지를 기억하시나요?"
"편지라면..."
나는 그녀의 물음을 듣고 골똘히 기억을 되새겼다. 아카데미에 있을 당시 세실리가 사과의 의미로 나에게 부쳤던 팬레터가 있다.
"그 편지에 제 진심이 온전히 담겨있어요. 은혜를 갚기 위해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치겠다는 진심이."
"...아."
그러고 보니 팬레터에 그런 내용이 담겨있긴 했다. 몸과 마음을 기꺼이 바치겠다는 각오가 듬뿍 담겨있던 팬레터.
세실리는 그 내용에 따라 본인의 몸과 마음을 나에게 바치려 노력하고 있다. 언뜻 추종자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제논 일대기가 마족에게 끼친 영향을 고려하자면 마냥 이상한 것도 아니다.
자그마치 몇 백 년 동안 핍박받았던 삶에서 해방시켜줬는데 추종자가 안 되는 게 이상하다. 헬리움의 공주라는, 스케일이 어마어마할 뿐이지 추종자라는 건 변함이 없다.
"전 마족으로서, 우리 마족 전체를 구원한 은인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저는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남들과 비교했을 때 매우 뛰어나죠. 그리고 몸 뿐만 아니라 제 마음도 은인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네. 알겠어요. 이제 그만해요."
정신이 점점 혼미해지는 듯한 기분에 서둘러 손을 내밀머 제지시켰다. 이대로 가만히 방치해뒀다간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어쨌거나 그녀의 진심만큼은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빈말이 아니라 현재 세실리는 나만을 바라보는 추종자나 다름없는 상태다. 몸을 바치라 명령하면 기꺼이 바치는 추종자.
왠지 그녀가 노예가 된 듯한 기분인지라 살짝 꺼림칙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착잡하다는 표정으로 세실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네요. 저는 수직적인 관계보다는 수평적인 관계를 좋아하거든요. 굳이 저에게 모든 걸 바칠 건..."
"어차피 은인은 100년 후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텐데 이정도는 해야되지 않을까요?"
"... ..."
이러면 할 말이 없어지는데. 나는 말문이 턱- 하고 막히는 세실리의 반박에 입을 벌린 상태로 굳어버렸다. 아까도 느낀 거지만 사고 방식 자체가 판이하게 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실리는 생글생글 웃으며 내가 말을 할 때까지 조신하게 기다리고 있다. 이에 떠나가려는 영혼을 간신히 붙잡았다.
"...그렇게까지 말씀한다면 할 말이 없어지네요. 누나 마음대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저는 어떤 조건이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 ..."
그녀가 가슴에 손을 올리며 답하자마자 가슴 속에 묵혀있던 음습한 감정이 불쑥 치고 올라왔다. 리나와 말을 놓았을 때에도 느꼈던 감정이다.
심지어 방금 전까지 세실리와 대형 사고를 칠 뻔했던지라 차마 해서는 안 될 상상까지 들었다.
'...아까 전 그 색기 때문이겠지.'
평소였다면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까 세실리가 뿜어냈던 색기가 내 오감을 자극시키는 바람에 욕망을, 그러니까 성욕을 자극시켰다.
환생하고나서 여태까지 해소하기 난감했던 욕구 중 하나가 성욕이었는데 그걸 트리거처럼 건드렸으니 사고가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갔다.
나는 콧잔등을 꾹- 꾹- 누르면서 어떻게든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다행히 평소 체력 훈련을 통해 인내심이 남들보다 향상되어 추스릴 수 있었다.
"...제가 원하는 건 간단해요. 제가 누나에게 말을 놓는 대신, 누나도 저에게 말을 놓아주세요. 다른 사람이 있을 때나, 저와 단 둘이 있을 때나 상관없이. 이정도는 충분하죠?"
"음... 알았어. 말 놓으면 되지?"
말을 놓으니 추종자가 아니라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세실리다. 역시 말을 놓는다는 건 단순히 친근감을 표시가 아니라 서로 간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효과가 있다.
나는 세실리가 나에게 말을 놓자마자 어딘가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은인으로 대우한다니 뭐니 해서 부담스러웠는데 그 부담감이 모두 사라졌다.
"충분해. 그럼 나도 누나한테 말 놓는다?"
"응. 그런데 누나라는 말은 계속 쓸 거야?"
"누나가 싫으면 안 쓸게."
"아냐. 너 마음대로 해. 누나가 아니라 세실리라고 불러도 되고. 정말로 이걸로 되겠어?"
"그럼 뭐가 더 있는데?"
"예를 들면..."
세실리는 말을 흐리며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부끄러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슴 만지게 해달라거나?"
"... ..."
"계속 언급했지만 내 몸과 마음은 전부 네거야. 네 마음대로 다뤄도 돼."
"...사양할게."
정말이지, 자꾸만 내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세실리다. 마리와 만나지 않았다면 진작에 일을 저질렀지 않았을까.
그만큼 세실리는 남자로서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여자이며 나에게 너무 과분했다. 그래도 본인이 좋다니 넘어가겠지만.
하지만 내가 받아들였다고 한들, 마지막 관문이 하나 남아있다. 나는 다시 한 번 콧잔등을 누르면서 염려하던 부분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런데 누나. 마리에게 허락은 받을 수 있겠어? 나야 괜찮지만 마리가 받아줄지 의문인데..."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 누나에게 다~ 방법이 있으니까. 그리고 너의 가치가 점점 커지는만큼 정치적으로 보호해줄 사람이 반드시 필요해. 제아무리 마리의 가문이 제국에서 황제 다음 가는 권력을 지닌 공작이라고 해도 국가가 지켜주는 건 아니거든."
"그러면 나야 다행이지만..."
비록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 세상이라지만 전생의 영향 때문인지 바람 피는 기분이다. 전생에서 일부다처제는 이슬람 문화권에서만 이루어지던 풍습이었으니.
물론 서양 쪽에서는 아내가 있음에도 원만한 합의를 이루면 애인을 따로 두는 경우가 간혹 있다. 허나 이것조차 아내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헬리움의 공주인 세실리가 더욱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공작의 딸을 여자친구로 두고, 헬리움의 공주를 또다른 애인으로 두는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경우일까.
그만큼 내 가치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나 복잡하기는 매한가지다.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돼. 너는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끝이거든. 내 몸과 마음은 오로지 너만을 위한 것이니까. 한 번 관계를 맺고 헌신짝 버리듯이 버려도 난 모두 받아들일거야."
"난 그딴 쓰레기처럼 살고 싶진 않아."
소중한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던 아델리아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세실리가 그녀처럼 펑펑 운다고 상상만 해도 마음이 불편하다 못해 찢어지는 기분이다.
세실리는 내가 안색을 굳히며 단호하게 답하자 기분 좋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어. 비록 나에게는 짧게 느껴질 순간이겠지만, 그 행복은 영원히 이어질 거라는 점. 부디 알아줬으면 해.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면서 사는 게 아닌, 그리워하면서 살 수 있도록."
"나도 누나가 후회하지 않도록 노력할게. 누나가 원하는 걸 말해봐. 난 받기만 하는 건 별로라서."
"그럼 안아줄 수 있니?"
세실리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부탁한다. 두 팔을 벌리게 됨으로서 그녀의 큰 가슴이 더욱 부각되어 내 눈길을 이끌었다.
포옹을 하게 되는 순간 그녀와의 관계는 빼도박도 못하게 된다. 확실하게 책임을 져야된다는 소리.
하지만 이미 마음은 결정을 내린 참이다. 나를 위해 무한한 헌신과 사랑을 보내는 세실리에게 이정도 보답은 해야하지 않겠나.
이에 살짝 머뭇거린 것도 잠시, 나 또한 두 팔을 활짝 펼치며 세실리에게 다가갔다. 세실리는 내가 다가가기도 전에 폴짝 뛰어들어 나를 꽉 껴안았다.
"으응... 이게 은인의, 아니 아이작의 몸... 따뜻하고 좋은 냄새가 나..."
"... ..."
세실리가 내 품에서 귀여운 소리를 내어도 아무런 말조차 할 수 없었다. 포옹을 하게 되면서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자랑하던 가슴의 감촉이 고스란히 전달되었으니까.
숨이 막힐 정도로 짓눌리는 것이, 남자의 원초적 본능을 살살 건드리다 못해 머리채를 붙잡아 끄집어내는 느낌이다. 마리와 포옹을 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마리는 사랑이 성욕을 가볍게 눌러버린다면, 세실리는 성욕이 사랑을 강제로 짓밟아버린다. 체취 또한 활활 불타기 시작한 장작에 기름을 들이부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참자. 참아... 이때까지 잘 버텼잖아...'
여태까지 잘 참아왔던 성욕이다. 여기서 빵! 하고 터뜨릴 수는 없는 노릇. 어떻게든 인내심을 발휘해야한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세실리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나를 안다가 잠시 후 팔에 힘을 풀었다.
"하아... 너무 좋았어. 내 안의 욕망이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느낌이야. 진작에 이럴 걸 그랬네."
달뜬 숨소리를 내쉬더니 나를 똑바로 마주하며 말하는 그녀. 나는 차마 눈을 마주칠 용기가 나지 않아 시선을 회피한 후에 볼을 긁적였다.
누나는 욕망을 해소하고, 누구는 욕망이 한가득 쌓이다니 이 얼마나 불합리한 구조일까. 어쩌면 그녀의 욕망이 나에게로 전달된 것일 수도 있다.
"그... 조금 부끄럽네."
"마리랑 비교하면 어때? 묵직함이 느껴지지?"
"... ..."
"아이작 얼굴 또 빨개졌다."
앞에서 세실리가 키득거려도 입도 벙긋하지 못 했다. 지금은 피가 쏠린 하반신을 어떻게든 진정시켜야 한다.
이미 포옹을 했을 때부터 불끈거렸으나 세실리도 얼핏 눈치채지 않았을까. 하반신은 뒤로 물리고 상체만 앞으로 쏠리는, 매우 엉거주춤한 자세였으니 느끼진 않아도 분명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정말이지 걸어다니는 음란물 수준이다. 이러다가 나중에 얼굴을 보기만 해도 흥분할까봐 두려웠다.
"...이제 슬슬 저택으로 돌아가자. 누나도 알고 있겠지만 마리랑 선약을 잡아놨거든."
"응. 알았어. 아, 그전에 아이작. 너에게 하나 알려주고 싶은 사실이 있거든."
"뭔데?"
내가 화끈거리는 얼굴을 달래고 있을 때 세실리는 웃는 얼굴이 아닌, 살짝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아이작은 혹시 다크 엘프에 대해서 알고 있어?"
"다크 엘프?"
"응. 과거 내전 때문에 동족으로부터 추방당한 부족이야. 우리 마족처럼 주로 어둠의 신 모라를 믿고 있지."
"어느 정도 알고는 있어."
엘레나 교수의 연구실에서 찾은 서적 중에서 본 적이 있다. 다크 엘프는 세상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은밀히 움직이는 탓에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내가 알고 다크 엘프는 구릿빛 피부를 가졌으며, 기본적으로 은신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밖에 모른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아 내 흥미를 이끌었다.
"그럼 다크 엘프들의 은신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도 알고 있어?"
"응. 그런데 다크 엘프는 왜?"
"네 초고를 훔친 범인이 다크 엘프거든."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나는 세실리가 알려준 충격적인 진실에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다크 엘프가 초고를 훔친 건 그렇다 쳐도, 무슨 이유로 그들이 초고를 훔친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 초고의 가치가 어마어마하다 한들 과연 그들이 어떻게 사용할지 의문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다크 엘프는 인간 사회에 관심이 거의 없으며, 동족과의 교류에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도난 사건 이후 우리 헬리움이 따로 조사하게 되면서 알게 된 사실이야. 아마 지금쯤이면 미네르바 제국 수뇌부에게도 이 소식이 전달되었겠지."
"다크 엘프가 내 초고를 훔쳐서 무슨 이득이 있는데?"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지. 하지만 본인들의 욕심을 위해서 훔쳤을 가능성이 높아."
"흠..."
조금 당황스럽다. 동시에 신문에서 알븐하임이 보였던 성명문이 생각났다.
자기들은 이런 저급한 짓을 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물론 알븐하임에서 추방당한 다크 엘프였으니 동족으로 취급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우리는 기회를 통해 그 범인을 색출해냈어.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후에 헬리움을 방문할 거야. 그때 너도 같이 왔으면 해서."
"알았어. 범인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긴 하네."
"어린 아이라면 용서해줄 거야?"
세실리가 약간의 걱정을 담아 묻는다. 저 질문을 한 것을 보아 아무래도 범인의 나이가 어린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걱정이 기우라는 듯,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아니. 내가 왜? 자기 힘을 이용해서 내 초고를 훔쳤는데 어찌 보면 죄질이 더 나쁘지."
"생각 외로 단호하네."
"어린애들은 자기 힘을 자각하는 순간 더 영악해지는 법이라."
전생에서 촉법소년이라니 뭐니 하는 것들을 수없이 목격했다. 특히 어린애들은 나이가 어릴수록 어리다는 걸 영악하게 이용하는 경우가 흔하다.
"뭐, 머리까지 박으면서 용서해달라고 하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겠지. 따끔하게 혼을 내는 건 변함이 없지만."
"만약 네 초고를 또 훔치려고 했다면?"
"음... 그러면..."
나는 시선을 위로 두면서 고민하다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마 부모님이 홀수냐고 물었을 것 같은데?"
"푸흡!"
신랄하기 짝이 없는 내 패드립에 세실리가 빵!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어디간 통쾌해 보이기까지 한, 보는 나조차도 기분이 좋아지는 웃음이다.
"푸하하하. 정말 재치있는 질문이네. 그런 질문은 어떻게 생각한 거야?"
"그냥 생각한 거지."
"푸흐흐흐... 아, 정말이지. 아이작은 정말 사랑스럽네."
"크흠."
이제는 내가 부끄러워질 차례다. 세실리가 온화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하자 나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회피했다.
"아무튼, 일주일 뒤에 헬리움으로 가면 된다고?"
"그때는 내가 발락 경을 시켜서 네 저택으로 보낼거야. 너는 그냥 준비만 하고 있으면 돼."
"알겠어."
"아. 혹시 이것 때문에 제논 일대기에다가 나쁜 말을 적을거야?"
나는 세실리의 질문을 듣고 곰곰히 생각했다. 마족을 구원했던 것처럼, 다크 엘프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적는다면 분명 그들에게도 큰 악영향이 끼칠 거다.
그러나 공과 사는 구분해야한다고, 괜히 그랬다간 스토리가 꼬일지도 모른다. 엘프가 오만한 건 맞지만 앞으로 내가 제논 일대기에 쓸 엘프들은 오만함을 깨우치고 진정한 하나로 거듭나는 종족이니까.
다크 엘프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을 추방했던 동족과 하나가 되어 악마들을 무찌른다는, 어찌 보면 평범하디 평범해 보이는 스토리다.
하지만...
"나쁜 말은 안 적을 건데, 조금 문제가 있겠지. 다크 엘프 뿐만 아니라 엘프 전체에."
"그게 뭐야?"
이에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스포일러라서 말 못 해줘."
소설 속 알븐하임은 엘프들의 오만함으로 악마들에게 무너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