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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108화 (109/763)

< 108화 >

시대를 초월한 명작 그 자체였던 공연이 모두 종료되고, 나는 세실리의 부탁에 그녀를 따라갔다. 무대가 종료되었음에도 마을의 축제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여전히 후끈거렸다.

공연이 시작된 시간이 6시인데 현재 시간은 정확히 8시이다. 체감상 1시간도 안 된 것 같았는데 시간이 그냥 녹아버렸다. 그만큼 공연이 재미있었다는 의미겠지.

아무튼 간에 마리와의 약속은 9시로 잡았으니 그전까지 세실리와 이야기를 나누면 그만이다. 세실리도 나와 마리의 대화를 들었을테니 적당히 시간을 끊을 것이다.

"훌쩍..."

"이제 좀 진정이 돼요?"

다만 예상 외로 시간이 좀 걸릴 듯하다. 세실리는 여전히 감동에서 헤어나오지 못 한 채 이따금씩 눈물을 흘렸으니까.

리루스 악단의 연주만 들었을 때도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던 그녀다. 매트릭스 극단의 공연에서는 아예 통곡 수준으로 서글프게 울었으니 심신이 지쳐있을 터.

결국 10분 동안은 세실리를 달래느라 약간의 시간을 잡아먹었다. 다행히 세실리는 내 위로 덕분에 아까 전보다 상태가 나아졌다.

현재 우리는 커다란 나무 밑에 나란히 앉아있었는데, 마을 중심부와 달리 유동 인구가 많지 않은 장소라 우리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선은 없었다.

괜히 사람 많은 곳에 갔다가 수상한 눈초리로 볼 수도 있고, 무엇보다 축제라도 밤은 언제나 조심해야하는 법이다. 황궁에서 파견한 기사단이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에 가깝다. 세실리는 차기 마왕으로 예정돼 있으니 본신의 무력이 강할테고, 그녀의 호위기사 가르츠가 주변을 지키고 있을테니.

단지 우리 둘끼리 이야기를 나눌만한 공간이 필요했기에 이런 인적이 드문 장소로 온 것이다.

"...죄송해요. 은인에게 꼴나사운 모습을 보여드렸네요."

도통 멈추지 않을 것 같던 세실리의 눈물이 드디어 멈추었다.

그녀는 축축하게 젖은 손수건으로 눈꼬리를 닦더니 민망함과 울먹임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또한 우리 둘밖에 없어 존댓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나는 손수건이 다 젖을 정도로 눈물을 흘린 그녀가 살짝 걱정되었다. 저정도면 탈수 증상이 와도 이상하지 않는 수준이었으니.

그래서 시중에서 산 음료수를 줬지만 세실리는 손을 내밀며 거절했다. 괜히 무안해져 내가 음료수를 마시고 있을 때, 세실리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쉬더니 앞을 멍하니 바라봤다.

"...정말 감동스러운 무대였어요. 그쵸?"

"네."

"그리고 감독이 마족이었다는 사실도 놀라웠고."

"저도 깜짝 놀랐어요."

연출을 위해 마법을 사용했다는 부분은 세실리를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하니 마족일 줄은 상상조차 못 하고 있었다.

선입견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마족은 예술과 멀어도 한참 멀고 전투에 특화된 종족이었으니까.

이전까지 마족이 핍박받았던 것도 있지만 역사적으로도 이들이 전투를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 활약한 펼친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 마족을 향한 시선은 완전히 달라졌으며 마족을 악마가 아닌 사람으로 대우해주기 시작했다.

매트릭스 극단의 감독, 스칼도 정체를 숨기고 있다가 인식이 달라지니 용기를 내어 본인의 정체를 밝혔을 것이다. 인식이 바뀌었다고 한들 선입견까지 바뀌는 건 아니었으니.

아마 스칼이 원하던 메세지는 부디 마족을 향한 선입견을 멈춰달라는 거겠지. 마족은 전투나 마법 뿐만 아니라 예술 같은 문화에도 뛰어난 자질을 품고 있다고 말이다.

"누나는 그 사람이 자기가 마족이라는 걸 밝혔을 때 어떤 기분이셨어요?"

"대단하다고, 그리고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분명 그런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았을텐데...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겠죠. 누누이 말했지만 마족을 향한 차별적인 시선은 여전하거든요."

그녀의 설명처럼 마족을 악마로 취급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다.

현재는 거의 인종차별급으로 간주되어 차별을 한 대상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일이 대부분이나 마족들이 상처를 받는 건 똑같다.

그러므로 앞으로 스칼 또한 다양한 시선을 받을 것이며, 그중에는 차별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용기를 얻을 수 있던 이유도 결국 당신 덕분이죠. 당신이 쓴 책이 아니었더라면 그 사람도 평생동안 정체를 숨겼을 거예요."

세실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촉촉하게 젖어 은은하게 빛나는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정말 아름다웠다.

나는 그녀의 얼굴과 한참을 마주하다가 부끄러움에 먼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데 고개를 돌리니 그녀가 은근슬쩍 내 손을 붙잡았다.

마리처럼 말랑말랑함이나 부드러움이 아닌, 수 십년간 단련하여 거칠거칠한 느낌이 전해졌다. 니콜이나 아델리아 같은 손이다.

"은인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공연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거나 그런 감평은 없는건가요?"

"...물론 있죠."

대답은 했지만 세실리와 눈은 마주치지 못할 것 같다. 마주치게 된다면 홀린듯이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으니.

사실 세실리가 나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지금까지의 행동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 모르고 있다면 둔탱이를 넘어 아예 모르는 척 하는 거겠지. 그러나 나는 한사코 거부할 생각이다.

이 세상이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고 권력이 높은 남자들이 많은 여자를 거느린다고 하지만 난 그런 자신이 없다. 책임을 질 수 없으면 아예 처음부터 책임을 질만한 일을 벌리지 않으면 된다.

무엇보다 마리에게 큰 상처가 될 게 뻔하며 나에게는 전생의 사고방식이 뿌리깊게 박혀있다. 천성이 모질지 못한 나로서는 거부감이 자연스레 들 수밖에 없었다.

이에 나는 세실리가 붙잡은 손을 슬금슬금 빼려고 시도하려던 찰나였다. 세실리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힘을 꽉- 주면서 빠져나가지 못 하도록 만들었다.

"...이러려고 부른 거군요."

"이제 눈치채셨나요?"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묻자 세실리가 미약한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때 여운에 빠져있을 뿐더러 세실리가 울고 있어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끈끈이주걱에 잡혀들어간 파리의 느낌이 이러할까. 나는 손을 빼는 건 포기하고 하늘을 올려다 봤다.

전생에서는 별 하나 보기 힘들었는데 이곳은 공기가 맑아서인지 별들이 강을 이루어 은하수가 펼쳐져 있다. 육안으로도 이런 광경이라 내가 정말로 다른 세상에 왔다는 걸 실감시켜줬다.

뒤이어 한동안 은하수로 가득 채워져 있는 하늘을 올려다 보고, 다시 고개를 아래로 내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선 연재를 다시 시작하려고요. 이런 무대까지 보여줬는데 연재를 하지 않으면 그건 그것대로 실례겠죠."

"정말이에요?"

"네. 하지만 학업 때문에 연재 주기가 많이 길어질 거예요. 최소 2~3달에 한 권이 나오겠죠."

"그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연재를 재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제논 일대기가 연재된다는 게 기뻤는지 세실리가 약간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에 내가 부끄러워져 뒷목을 매만지고 있을 쯤, 그녀가 불쑥 물었다.

"그럼 카이르와 엘리샤의 이야기도 나오겠네요?"

"어... 그렇죠."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 궁금했거든요."

비극으로 끝납니다만. 나는 차마 말할 수 없어 어색하게 웃었다.

괜히 연기했다간은 다 들통날 수 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꽉!

그사이 세실리가 붙잡았던 손에 힘이 더 가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움찔해서 고개를 돌리니 아뿔싸.

새빨간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세실리의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하아아아..."

내가 주춤거리고 있을 때 달뜬 숨소리를 내쉬는 세실리. 슬쩍 위를 쳐다보니 그녀의 뿔은 이미 붉은색으로 가득 채워진 상태였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마족들은 특정 기간마다 악주기라는 생리와 비슷한 현상이 찾아오는데, 욕망이 가득 차오르는 시점이라 보통 하루동안 명상을 하는 편이다.

하지만 지금은 명상을 할 시간도 없는데다가 이미 그녀의 눈이 풀려있는 상태다. 나는 그녀에게 여러 의미로 잡아먹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급히 세실리를 불렀다.

"누, 누나? 괜찮으세요?"

"네... 아직까지는 참을만해요."

다행히 선은 넘지 않은 모양...

"그런데 곧 있으면 못 참을 것 같아요."

이다... 가 아니라 한계에 봉착했다. 그와 동시에 미묘한 체향이 그녀에게서 점점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남자의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시키는, 일종의 페로몬 같은 것일까. 나는 점점 색기로 가득해지는 세실리에 가슴이 두근거린 것도 잠시, 황급히 입을 열었다.

이러다간 지난 번처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번질 수 있다. 저번에는 마리가 난입해서 망정이지, 지금 이곳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불빛 하나 없어 깜깜하여 누군가 지나가도 우리를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여기까지 온 것도 세실리가 마법을 통해 길을 밝혀줘서 가능한 일이었다.

"정신 차리세요. 누나는 헬리움의 공주잖아요? 참을 수 있어요."

"...그래. 참아야죠. 참아야 하는데..."

세실리는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제 딴에는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했으나 가슴을 퍽- 퍽- 치는 걸 보니 곧 있으면 폭발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에 내가 어쩔 줄 몰라하며 허둥지둥거리고 있을 때, 세실리는 고개를 아래로 숙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고마운데... 어떻게 버티라는 거야..."

"누나?"

"안 되겠어. 더이상은... 안 돼."

퍽!

세실리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번쩍 들어올리더니 나를 강하게 밀쳐버렸다. 당연히 내 몸은 힘없이 땅 위로 넘어갔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 하고 있을 쯤, 내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덮쳐왔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도 붉디 붉은 세실리의 눈동자만큼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누나?"

"죄송해요. 정말로 죄송해요."

"누나!"

"욕망에 진 저를... 용서해주세요."

이이상은 안 된다. 나는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바둥거렸다.

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세실리가 한 손으로 내 두 손을 묶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만큼 나와 세실리 사이에 무력이 하늘과 땅 차이로 난다는 증거.

지난 번에는 마리가 난입하여 사고를 막을 수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이러다가 정말로 야외에서 일을 저지를 수도 있다.

스윽-

내 위로 올라탄 세실리는 내 뺨을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그리고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면서 야릇하게 말했다.

"하아... 이 부드러운 뺨. 이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 전부 가지고 싶어..."

"... ..."

"이 여린 몸에 쾌락을 선사해서... 내 걸로 만들고 싶어... 머리카락 한 올까지 전부..."

서큐버스의 후예라는 말이 진실인 듯, 그녀는 야시시하면서도 위험한 말들을 꺼내면서 나를 자극시켰다. 색기까지 내뿜어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이로인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고 하반신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으나 최대한 마리를 떠올리면서 거부 의사를 나타냈다.

"누나! 제발 정신 차리세요! 이건 우리 둘에게 좋지 않은..."

"아니. 분명 너도 좋아할 거야. 왜냐고? 내가 그렇게 만들거거든."

"... ..."

안 되겠어, 이 여자. 어떻게 하지 않으면...!

내가 더이상 안 되겠다 싶어 박치기라도 하려던 찰나, 그녀는 내 빰을 어루만지던 손으로 얼굴을 고정시켰다. 어마어마한 힘에 고개조차 바둥거릴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에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호위기사라던 가르츠는 어디로 갔는지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

마침내 세실리가 혀로 입술을 할짝이며 조용히 읊조리더니...

"잘 먹겠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천천히 아래로 천천히 내리며 입을 살짝 벌렸다.

그에 내가 속으로 마리에게 사죄하며 눈을 질끈 감는 순간이었다.

번쩍!

암흑으로 채워진 주변을 일순간 밝게 비출 정도의 세기라 눈이 부실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눈이 멀 듯한 밝기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후로 몇 초가 흘렀을까, 빛은 점점 사라지더니 이내 완전히 꺼졌다. 빛이 사라지면서 나 또한 눈을 천천히 떴다.

갑작스레 빛이 터져나온 탓에 시야에 희뿌연 무언가가 걸렸지만, 물건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큰일날 뻔했네요."

어느새 내 위에서 떨어진 그녀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얼굴에는 안도와 민망함이 섞여있었다. 나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그녀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이어서 그녀는 나를 바라보더니 쓰게 웃으며 목걸이에 담겨있는 능력에 대해 설명해줬다.

"이 목걸이는 우리 헬리움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 중 하나에요. 악주기가 찾아왔을 때, 혹은 욕망을 절제하지 못할 때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능력을 갖고 있죠."

"그럼 방금은..."

"네. 하마터면 은인에게 몹쓸 짓을 할 뻔했죠. 정말 죄송합니다."

세실리가 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슬쩍 뿔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까 전만 해도 붉은색으로 가득 채워졌지만, 지금은 끄트머리가 검은색이었다. 욕망이 완전히 해소된 건 아니어도 다행히 임시방편 정도는 된 듯하다.

'와... 그럼 진짜 좆될 뻔했네?'

첫 경험을 야외에서 할 뻔했다. 그것도 여자친구가 아닌 다른 나라의 공주님이랑.

그동안 세실리는 나를 보며 우물쭈물거리더니 매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날렸다. 얼굴은 방금 전 일 때문에 붉어질대로 붉어진 상태였다.

"저... 은인."

"...아, 네. 말씀하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정말 죄송합니다. 지난 번에도 그랬지만 욕망에 이기지 못해 이번에도 은인에게 큰 실례를 끼쳐드렸네요..."

스스로도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알고 있는지 머리까지 숙이며 사죄하는 세실리. 나는 헝클어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세실리의 색기가 내 몸에 침투된 것처럼, 내 몸이 다 화끈거렸다. 도중에 끊은 듯한 애매한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나는 손부채질을 통해 얼굴을 식히면서 대답했다. 그럼에도 열기는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괜찮아요. 그런데 악주기가 내제된 욕심이 튀어나온 거라고 했으니 아까 전에는..."

"...네. 부끄럽지만 제 진심이죠."

"어우..."

세실리가 부끄러움에 이기지 못 했는지 고개를 푹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나 또한 민망해져서 감탄 아닌 감탄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평소 나를 덮치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다는 의미인데, 그만큼 세실리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의미했다.

나는 순식간에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무어라 말을 꺼낼지 고민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누나의 마음은 잘 알겠어요. 누나도 저를... 좋아한다는 거죠?"

"...네. 부끄럽지만 은인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 ..."

세실리는 전처럼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돌직구를 날려버렸다. 창피함에 고개를 숙이며 고백하는 모습을 보자니 정말로 귀엽고도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최대한 이성을 유지해야한다. 비록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 세상이라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한 둘이 아니다.

수명 문제야, 이미 그녀에게 대안책을 제시해줬으니 문제가 없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마리다.

"...누나. 솔직히 말해서 저도 누나에게 이성으로서의 호감이 있어요. 하지만 저는 책임질 자신이 없어요. 당장 마리도 신경 써야 하는데 둘이라니... 여러모로 많은 문제를 낳겠죠."

"알고 있어요."

"상황에 따라서 누나에게 사랑을 주지 못 할 수도 있어요."

"전 괜찮아요."

"제가 그렇게 좋은 건가요?"

내가 뭐라고 일국의 공주인 세실리가 이토록 나를 원하는 것일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세실리라면 나보다 훨씬 더 좋은 남자와 만날 수 있을텐데. 내가 제논 일대기의 작가라지만 굳이 나를 선택해야하나 싶었다.

그런 의문을 가지며 세실리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는 아래로 내렸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리며 나와 똑바로 마주했다.

이미 마음을 굳게 다짐했다는 의지와, 동시에 애처로움이 깃들어 있는 표정이었다.

"네.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우리 마족을 구원해준 신의 은총이자, 배려가 깊은 당신이."

"... ..."

"설령 당신이 거부한다고 해도 저는 당신의 유산을 지킬 거예요. 당신이 태어난 이 영지와, 앞으로 태어날 당신의 후손 모두. 이게 헬리움의 공주로서,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보답이니까요."

받아주지 않아도 끝까지 마음을 유지하겠다. 나는 세실리의 결연한 다짐을 듣고나서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저렇게까지 나를 좋아하는데, 약간은 받아줘도 되지 않을까?

감정은 받아들이라고 소리쳤지만, 이성은 마리와의 의견이 중요하다고 외치고 있다. 나는 이성과 감정 사이에 갈팡질팡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결정을 내렸다.

"...아무래도 마리와 상의는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가, 감사합니다! 정말로..."

"대신 아까 전처럼 절 덮친다면 곧바로 칼 같이 잘라낼 겁니다. 적어도 첫 경험은 마리와 하고 싶으니까요."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마리는 제논이 아니라 아이작이라는 인물 자체만을 보고 사랑해준 여인이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런데 세실리는 이걸 듣고 어떻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나로 하여금 당혹스럽게 만드는 발언을 꺼냈다.

"마리와 성관계를 맺는다면 그 다음에는 저라는 소리인가요?"

"...네?"

"그럼 최대한 빨리 은인께서 마리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겠네요. 그러면 저도..."

"... ..."

할 말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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