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107화 (108/763)

< 107화 >

긴박한 전투가 이루어지는 무대는 점점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다. 사크란은 점점 지쳐가는지 있는 힘 없는 힘 모두 짜내어 제논을 압박하는 중이고, 제논도 어떻게든 사크란에게 안식을 선사해주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중간에 제논이 밀리는 듯하자 진으로 추정되는 마족 한 명이 뒤늦게 난입하여 합을 이루기도 했다. 5권부터 제논과 진 듀오가 하나가 되어 싸우기 시작했으니 적절한 타이밍이다.

"흐아아아아!"

결국 억누르고 억눌렀던 악마의 힘을 모두 표출시키기 시작한 사크란. 얼마나 많은 힘을 절제하고 있었는지 그에게서 새까만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제논과 진도 작정했는지 모든 힘을 개방하여 혈전에 대비했다. 이윽고 악마화가 모두 끝난 사크란이 그 둘에게 달려갔을 때 쯤, 리루스 악단이 또다른 연주를 선보였다.

바이올린의 높게 올라가는 음색으로 끝을 맺는 건 똑같았지만, 그 후에 새로운 곡이 이어졌다.

-아아. 마족이여. 어둠 속에서 태어나 빛을 갈구하는 자들이여.

여태까지 가만히 대기하고 있던 성악대의 장엄하고도 서글픈 코러스. 그와 동시에 최후의 전투가 이어지면서 '인생'이 무엇인지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나는 인생과 성악대의 합창에, 그리고 리루스 악단의 준비성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리루스가 어째서 맛보기에 불과하다고 말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도대체 이들은 이 콜라보레이션을 보여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 것일까. 글만 쓰는 나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못 정도다.

-비극의 파도를 헤쳐나가 뜻을 함께할지어니.

-어둠에 저항해 빛을 향해 나아가리라.

-신이시여. 우리에게 희망을 내려주소서.

-신이시여. 우리에게 안식을 내려주소서.

-부디 인간으로 죽을 수 있기를 소망하리라.

-아아아아아.

합창은 빠르지 않고 느릿느릿하게 이어졌으며 마지막은 절규에 가까운 합창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대 위의 전투를 끝나지 않았는데 리루스 악단은 한 번 더 합창을 반복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보통 전투는 긴박감과 긴장으로 인해 눈을 뗄 수 없지만, 이 무대는 한 사람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듯하여 한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몰입감이 무시무시함을 넘어서 어째서 이들이 세계 최고라는 걸 증명하고 있다.

이 엄청난 무대를 일궈낸 두 집단이 정말로 중세 시대에 어울리는 인재들인지 의심스러웠다. 이정도 실력이라면 전생의 문화계에서도 전혀 꿇리지 않았다.

촤악!

"끄헉! 끄으으으..."

손에 땀이 흥건해지는 비극적인 전투가 드디어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진의 노력 덕분에 빈틈을 발견한 제논이 사크란의 상체를 사선으로 깊게 베어낸 것이다.

그동안 누적된 데미지 때문인지, 악마의 회복력으로도 사크란의 상체에 길게 베어진 자상은 복구되지 않았다. 그리고 제논은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두 손으로 검을 꽉 말아쥔 이후, 비틀거리는 사크란의 심장을 향해 정확히 검을 찔러넣었다.

푸욱!

"...쿨럭!"

심장에 검을 꽂히자 새까만 피를 토해내는 사크란. 그는 부들부들 떨며 자신의 심장에 꽂혀있는 검을 바라보다가 선선히 고개를 들었다.

제논은 사크란이 고개를 듦으로서 시선을 마주치자 딱딱한 표정을 유지하면서도 심장에 찔렀던 검을 세차게 빼냈다. 검을 빼자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색 피가 튀겼다.

털썩!

"사크란 님!"

"사크란!"

악마가 되었더라도 사크란은 마족을 수호했던 스승이자 영웅.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마족들은 사크란이 무릎을 꿇자 서둘러 그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심장에 검이 관통당한 이상 사크란에게 더이상 가망이 없다는 것을. 결국 악마로 죽는다는 것을.

그리고 이 사실을 누구보다 알고 있는 건 사크란 본인이다. 그는 연신 기침을 하면서 검은 피를 토하다가 간신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일생을 바치고, 본인이 악마가 되면서까지 끝내 지킨 사람들. 사크란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섞여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다가 읊조리듯이 입을 열었다.

"사냥꾼들이여... 이 말은 명심하거라..."

"... ..."

"소중한 이들을 위해... 스스로 악마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사람이 눈 앞에 있다. 사크란은 최후의 최후의 순간까지 동족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숭고하고 거룩한 운명인 걸까. 내가 만든 캐릭터라지만 사크란만큼 헌신적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와 손등으로 눈꼬리를 비비는 동안, 사크란은 헐떡이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것이 진정한 인간의 용기이며 희생일지어니... 나는 악마가 아닌 인간으로 죽는 것이다."

사크란의 희생 파트는 주인공 일행, 특히 진에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최후반부, 대악마의 영혼을 흡수해야 완전히 소멸하는데 진은 기꺼이 자기자신을 희생시켰다.

사실상 사크란의 비극을 통해 진의 운명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일종의 복선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진은 스토리가 진행되면 진행될 수록 사크란을 생각하는 경우가 빈번해지니.

아무튼 사크란의 희생 파트는 여기가 끝이다. 뒤이어 사크란이 밝은 입자가 되어 사라지는 것으로 인생의 종착점에 다가가지만...

"젊은 인간이여... 하나만 묻겠다."

각색이라도 한 것인지, 사크란은 자신의 몸이 밝은 입자가 되어가면서 제논에게 질문했다.

원작에는 저런 대화없이 그저 소멸되었기에 원작자인 나로서는 살짝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런데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그동안 사크란의 몸 반쪽이 빛이 되어 사라져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그는 기지를 발휘하여 제논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내가... 악마로 보이나?"

"...아뇨."

제논은 사크란의 질문에 놀란 것도 잠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뒤이어 그는 점점 사라져가는 사크란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단호한 목소리로 그에게 아름다운 말을 전달했다.

"누구보다 인간답습니다. 사크란 씨."

"...하하하."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듯한 사크란의 웃음소리. 원작에서 사크란은 웃은 적이 절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웃으니까 뭐랄까.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 같은 느낌이 전해졌다. 원작자인 나조차도 놀라운 캐릭터 해석이다.

"그거 다행이군..."

마지막으로 사크란은 고개를 천천히 하늘 위로 올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리더니...

"정말로... 다행이야..."

누구보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빛의 입자가 되어 완전히 사라졌다.

샤아아아아-

"...어?"

원작을 초월해도 한참 초월한 결말에 멍한 얼굴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을 때, 하늘 위에서 무언가가 떨어져내렸다. 그에 나는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위로 들어올렸다.

빛이 눈처럼 송글송글 내려오고 있다. 무슨 비유적 표현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빛이 하늘에서 눈처럼 떨어지는 중이었다.

마치 사크란이 소멸되면서 발생한 빛의 입자가 떨어지는 것처럼, 관람석에서 빛이 꽃잎처럼 흩날리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아..."

"우와..."

아름다운 연출에 나뿐만 아니라 양 옆에 앉은 여인들도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각자 다른 반응을 보였다.

마리는 눈을 깜빡거렸다가 빛을 향해 손을 살짝 뻗었고, 세실리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빛이 손 위에 안착하도록 만들었다.

나 또한 빛이 내 손바닥 위로 내려앉도록 만들었는데 그 빛은 이내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빛이 사라지자 고개를 들어올려 아름다운 광경을 다시 한 번 마주했다.

"예쁘다..."

대체 감독이 뭐 하는 사람이길래 마지막까지 가슴이 먹먹해지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일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으면 과학이 부족한 중세 시대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연출을 준비한 것일까.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시대를 앞선 천재라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짝- 짝- 짝-

모두가 넋이 나가 아무런 반응도 못 하고 있을 때, 누군가 박수를 쳤다. 뒤이어 그 박수 소리에 홀린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 씩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짝짝짝짝-

처음에는 작게 들리던 박수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짝짝짝짝!

"우아아아!"

"멋지다!"

"최고다! 최고!"

잠시 후, 천둥 소리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크기로 변했다. 단순한 박수가 아니라 모든 관객이 자리에서 일어난 기립박수였으며 환호까지 더해져 열광적인 분위기를 띄었다.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느릿느릿하지만 어딘가 혼이 나간 심정으로 천천히 박수를 쳤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 세상이 지구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만큼 훌륭한 연출이었다. 영화도 아닌 연극으로 이런 공연을 펼치다니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일었다.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하면 이런 무대를 만들 수 있지?"

"흐윽... 정말 멋져..."

마리와 세실리도 박수를 치면서 저마다 평가를 내렸다. 마리는 감탄에 끝난 반면 세실리는 내 손수건으로 눈물을 연신 닦으면서 오열에 가까울 정도로 흐느껴졌다.

'진짜 나처럼 환생자나 그런 건가?'

물론 크리스토퍼 놀란이나 스티븐 스필버그가 환생했더라도 이런 공연을 감독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세실리가 언급했듯이 악마가 쏟아져 나오는 장면은 마법을 이용했다.

그러므로 마법에 능통한 단원이 있다는 의미인데 그런 마법사가 뭐하러 연극일에 동참하는 것인지도 의아했다. 말빨로 구워삶았는지 아니면 마법사가 감독인지 모르겠지만 능력이 출중하다는 건 변함이 없다.

짝짝짝짝...

절대 멈추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던 박수 소리는 시간이 가면 갈 수록 점점 잦아들었다. 하늘에서 내리던 빛의 눈도 이제 거의 그친 상황이다.

잠시 후, 박수 소리가 거의 다 멈췄을 때 쯤, 인생을 끝까지 지휘하던 리루스가 등을 돌리더니 관객들을 향해 말했다.

"모두 즐거운 공연이 되셨나요? 제가 이런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분명 감동스러운 무대였을거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저도 합작을 할 때 매트릭스 극단의 연극을 보고 감탄했거든요."

리루스는 겸손하게 이 모든 감동을 매트릭스 극단에게 전했지만, 사실 리루스 악단의 연주도 굉장하면 굉장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요리로 치자면 매트릭스 극단의 공연은 메인 디쉬고, 리루스 악단의 연주는 맛을 내기 위한 설탕이나 소금, 그리고 각종 향신료다. 만약 인생이 연주되지 않은 채 연극이 이어졌다면 어딘가 밋밋함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여러분들께 이 공연을 보여드릴 수 있어서 정말로 영광이었습니다. 저는 리루스 악단의 지휘자, 리루스였으며 앞으로도 멋진 연주를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끝낸 리루스는 신사답게 허리를 살짝 굽히며 인사했다. 당연하게도 그가 인사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제 리루스가 인사를 했으니 매트릭스 극단도 나와야 할 터. 내가 그 생각을 하자마자 악단의 뒤로 배우들이 속속 등장...

뚜벅- 뚜벅- 뚜벅-

...하지 않고 사람 한 명이 천천히 무대 중앙으로 걸어왔다. 나는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그 사람의 외모를 훑어봤다.

로브를 뒤집어 써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듬직한 체구를 보아하니 남자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결코 배우라고 볼 수 없는 음침함이며 분위기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게 아니었는지 주변의 관객들이 낯선 남자의 등장으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게 누구냐는 의문을 시작으로 또다른 연극이 펼쳐지는 게 아니냐는 기대까지.

나도 비슷한 심정이었기에 과연 무슨 일이 펼쳐질까 살짝 기대했다.

"...크흠."

그사이 무대 중앙에 도착한 남자는 헛기침을 통해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자연스레 관객들의 웅성거림도 멈추었다.

뒤이어 그는 좌중을 둘러보더니 다시 한 번 더 헛기침을 한 후, 나긋나긋하면서도 중저음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매트릭스 극단의 감독, 스칼이라고 합니다."

"뭐?"

"감독이라고?"

"그게 정말이야?"

충격적인 선언에 관객들의 웅성거림이 전보다 훨씬 커졌다. 비단 관객들 뿐만 아니라 나도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여태까지 매트릭스 극단의 감독은 정체를 밝힌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베일이 감추어진 존재였다. 그런 신비주의와 더불어 화려한 연출력이 시너지를 이룬 덕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집단과 계약을 맺을 때도 대리인을 내세웠다. 며칠 전 매트릭스 극단이 우리 저택으로 찾아왔을 때도 감독이 아니라 대리인을 통해 의사를 주고받았다.

그러할지언데 오늘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의도조차 알 수 없었다.

"아마 모두들 혼란스러우실 겁니다. 여태까지 정체를 꽁꽁 숨기던 감독이 어째서 이곳에 나타났는지 의문이 들었을테니까요. 참고로 사칭이 아니라 진짜 감독이 맞으니 의심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 ..."

"오늘 여러분들에게 제 모습을 보여준 이유는 간단합니다. 공연이 정말로 즐거우셨는지 묻고 싶었거든요. 어때요. 공연은 즐겁게 시청하셨나요?"

"""네!!""

우렁찬 대답은 VIP석이 아니라 평민들이 앉는 자리에서 터져나왔다. 품위를 지키기 위해 VIP들은 말없이 박수로 대답을 대신했다.

감독은 관객들의 반응에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즐겁게 보셨다니 저로서는 정말 다행이네요. 사실 원작을 살짝 각색한 거라 마음에 드셨는지 조마조마했거든요. 여기 있는 분들 대부분이 제논 일대기를 사랑하시는 분들일테니 제가 어디를 고쳤는지 알고 계실 거예요."

사크란의 유언에 대해 언급한 감독이다. 사실 그건 원작을 초월했다고 무방할 정도로 캐릭터 해석이 훌륭했다.

"이 자리에 계실지 모르겠지만 제논 님이 계신다면 감사의 말씀과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처럼 훌륭한 소설을 써주셨는데 겨우 이것밖에 표현하지 못 했으니까요. 심지어 제 마음대로 해석까지 했죠."

"... ..."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내가 그의 앞에 가서 엎드려 절하고 싶을 정도다.

고작 글로만 채워져 있는 소설을 이처럼 화려하게 탈바꿈시킬 수 있는 능력자는 저 감독밖에 없을 것이다.

"여태까지 제 연극은 돈이 많은 사람이나, 아니면 귀족 분들만이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관객석을 보니 뭐라고 할까...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가 이런 건가 싶었습니다. 리루스 악단과의 합작도 제게 좋은 경험이었고요."

"... ..."

"그... 아무튼 주절주절 서론이 길었는데,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스윽-

감독은 그리 말하더니 얼굴을 꽁꽁 숨기고 있던 로브를 훌러덩 벗어던졌다. 그에게 집중하고 있던 나는 그가 로브를 벗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뿌, 뿔? 설마..."

"마족이었어?"

"세상에..."

칠흑색 머리카락과 더불어 머리에 솟아난 악마의 뿔. 그리고 피처럼 새빨갛게 빛나는 눈동자까지.

중저음의 목소리와 달리 순둥순둥한 미모를 가진 감독은, 다름아닌 마족이었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극단의 감독이 마족이라는 사실에 관객석은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시끌시끌해졌다. 감독은 이 모든 걸 예상했다는 듯, 빙긋 웃더니 특유의 나긋나긋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모두들 보시다시피 저는 마족입니다. 제논 일대기가 세상에 나타나기 전까지 핍박을 받던 마족."

"... ..."

"하지만 여러분들. 제 공연을 보셨을 때 어떤 느낌이셨나요? 이런 무대를 설계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궁금했겠지만, 아마 절대 마족이라고 생각하시지는 않았을 겁니다."

특유의 나긋나긋한 말투에는 미묘한 힘이 실려있었다. 시끌거렸던 관객석도 감독이 말을 하자 삽시간에 조용해졌으며 그의 이야기에 경청했다.

나는 감독이 마족이라는 부분에 놀란 것도 잠시, 세실리를 힐긋 바라봤다. 그녀는 마법을 사용했다는 부분에서 대충 짐작했는지 그리 놀랍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훌쩍."

그냥 울기에 바빴거든. 나는 어느새 흥건히 젖어있는 손수건을 바라봤다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옮겼다.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는 마족은 어떤 종족인가요? 제논 일대기가 발간되기 전까지는 악마, 그리고 시한폭탄과 다름없는 존재였겠죠. 사실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 마족은 항상 내면의 악과 싸워야 하는, 그런 비극적인 숙명을 지니고 태어난 종족이거든요."

"... ..."

"하지만 제논 일대기가 등장한 이후부터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제논 일대기는 우리 마족에게 절망이 아닌 희망을 선물해줬죠.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고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용기도 선물해줬습니다."

얼굴에 아주 금칠을 해주시는구나. 너무 부끄러워서 몸을 베베 꼬고 싶은 욕구가 무럭무럭 차올랐다.

창피함에 몸을 꿈틀거리고 있을 때, 감독은 다시 한 번 좌중을 둘러보더니 조용히 본인의 말을 이어갔다.

"저 또한 그에 용기를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마족이지만 예술을 사랑하는, 평범한 예술가에 지나지 않죠. 부디 우리 마족을 악마로 보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이며, 만약 이곳에 제논 님이 계시다면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상 매트릭스 극단의 감독, 스칼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짝짝짝짝짝!!!

스칼이 허리를 깊게 숙이며 공손하게 인사하자 귀가 멀 듯이 박수 소리가 다시 한 번 더 터져나왔다. 이윽고 스칼의 곁에 몇몇 사람이 다가왔는데 아무래도 극단의 배우들인 듯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마족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었다. 매트릭스 극단은 제논 일대기가 발간되기 한참 전부터 유명했는데 이때까지 함께 한 걸 보면 그들도 생각이 깨어있는 사람들인 모양이다.

그리하여 여러모로 여운이 남는 공연이 끝이 났다. 하지만 사람들은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 했다. 여운을 즐기느라 감상에 젖어버린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공연을 통해 받은 감상이 쉽게 떠나지를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아 여러번 상상하게 만들었다.

'...이건 고마워서라도 써야된다.'

둘의 공연은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솔직히 이정도 퀄리티를 보여줬으면 그 보답으로 휴재 따위는 때려쳐야한다.

비록 학업 때문에 최소 2개월에 한 권 정도 발간되겠지만, 그런 노력을 보여줘야되지 않겠는가. 나는 눈을 감으며 앞으로의 전개를 상상했다.

"정말 굉장한 무대였어. 그렇지?"

"...응."

"너는 언제 갈 거야?"

옆에서 마리의 나에게 질문했다. 나는 힘없이 팔을 내저으며 대충 답했다.

"너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 난 잠깐 여기에 있을게."

"풉. 얼마나 좋으면 힘이 다 빠져있니. 귀엽게."

마리는 내 대답을 듣고 살풋 웃더니 볼을 살짝 꼬집었다. 반응도 할 기운이 없어서 그녀가 원하는대로 해줬다.

"그리고... 아이작."

"응."

"침실에는 언제 가면 돼?"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구나.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적당한 시기를 알려줬다.

"9시 쯤이면 괜찮겠지."

"9시라... 알았어. 기대해도 되지?"

뭐를 기대한다는 거야. 나는 의문에 가득 찬 표정으로 마리를 바라봤다.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어딘가 부끄러운지 양볼을 붉히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더더욱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뭐를?"

"음... 아무것도 아냐. 난 이만 가볼게."

그러면서 후다닥 도망치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지는 마리.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대체 뭐지?"

내가 중얼거리고 있을 때 옆에서 세실리가 나에게 물었다.

"흐극... 아이작..."

"네?"

"나랑 훌쩍... 잠깐 얘기 좀 할래? 크읍..."

나는 아직까지도 눈물을 흘리는 세실리를 황당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봤다. 공연 내내 울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미모는 상대적으로 멀쩡했다.

아, 물론.

'...저러다 탈수가 오는 건 아니겠지?'

흠뻑 젖어있는 손수건으로 하여금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훌쩍거리는 세실리와 손수건을 번갈아보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알았어요."

"흑... 고마워..."

세실리는 그리 대답한 후 내 손을 조심히 붙잡더니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너에게 진짜로 하고 싶은... 히끅. 말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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