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101화 (102/763)

< 101화 >

다행히 마리는 세실리의 속삭임을 듣지 못 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세실리는 이제 더이상 숨기지 않겠다는 듯이 내 팔을 감쌌으며 어깨에 머리까지 기대었다.

이렇게만 본다면 훈훈하고 달달한 장면처럼 보이겠지만, 문제는 나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바로 옆에 앉아있다.

아무리 세실리에게 호감이 있다고 한들, 이건 단호하게 대처해야 옳다. 마리가 실망할 수 있을 뿐더러 최소한의 예의다.

"누나. 미안하지만 이거 좀 풀어주세요."

"싫다면?"

"누나가 싫어질 것 같은데요?"

"... ..."

세실리도 내 단호한 지적에 뒤늦게나마 본인의 잘못을 깨달았는지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뒤이어 그녀는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내 옆에 앉은 마리에게 시선을 두었다.

마리는 어디 뺏어볼테면 뺏어보라는 듯이 내 팔을 꽉 껴안은 채 고양이처럼 그르릉거렸다. 물론 비유적인 표현이고 언짢다는 기색을 대놓고 드러내는 중이다.

그녀에게는 호시탐탐 남자친구를 노리는 세실리가 요망한 여우처럼 보일 터. 더군다나 외모와 매력도 본인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결코 뒤처지지 않아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의외로 뭐라 하지는 않네.'

전이었다면 세실리를 향해 당장 떨어지라니, 이게 무슨 짓이냐니 눈에 쌍심지를 켜며 소리쳤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잔뜩 경계만 하고 털만 바짝 세우고 있다.

아무래도 낮에 둘끼리 나누었던 대화로 심적 변화가 있던 것일까. 나는 세실리가 붙잡았던 팔을 놓아주자 곧바로 마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줬다.

세실리가 아무리 유혹해도 나는 너의 남자친구라고, 결코 너를 실망시킬 일은 없을거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이번만은 봐줄게."

마리도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시선을 피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질투심에 삐죽 내밀어진 입술과 어두운 밤 중에도 약간 붉어진 그녀의 뺨이 눈에 들어왔다.

어쩜 질투하는 모습도 이리 사랑스러울 수도 있을까. 나는 수직상승하는 입꼬리를 차마 숨기지 못 한 채 마리만 들릴 수 있게끔 작게 소근거렸다.

"못 믿겠으면 뽀뽀라도 해줄까?"

"...진짜 변태. 넌 진짜 빨간 변태야."

빨간 변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내 머리카락 때문에 그런 거겠지. 나는 마리의 찹쌀떡 같은 볼을 한 번 꼬집어주고는 세실리의 반응을 확인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꼴볼견이라며 인상을 찌푸릴텐데 세실리는 호기심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우리 둘을 관찰하는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깊은 관심을 표하는 중이다.

대체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이쪽을 쳐다보는 세실리에게 물었다.

"누나?"

"응?"

"무슨 생각하세요?"

세실리는 내 질문을 듣고 두어번 눈을 깜빡거렸다가 마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현재 마리는 달아오를대로 달아오른 뺨을 진정시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잠시 후, 세실리는 마리에게서 시선을 떼고 나를 직시하더니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마리가 겪고 있는 감정을 나도 느낄 수 있는지 궁금해졌거든."

"... ..."

"마리의 반응을 보면 분명 기분이 좋은 건 확실한데..."

"크흠."

역시 그녀다운 대답이다.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그사이 마리도 진정이 되었는지 손부채질을 하며 자세를 바로세웠다. 뺨에 은은한 붉은기가 감도는 건 여전했다.

"그... 공연 진행은 어떻게 되는지 알아?"

화제를 돌리기 위해 질문을 날린 마리. 나는 그녀와 눈을 한 번 마주쳤다가 공연장(을 빙자한 평야) 쪽에 시선을 두면서 대답했다.

"우선 리루스 악단이 연주를 할 거야. 그 다음에는 매트릭스 극단이 연극을 할 거고."

"공연 시간은?"

"총 합쳐서 약 3시간. 리루스 악단이 30분에서 40분가량 연주하고, 매트릭스 극단이 남은 시간동안 연극을 하겠지."

"리허설도 없이 괜찮아?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이런 공연은 리허설이 필수라고 들었거든."

가만히 듣고 있던 세실리가 약간 걱정된다는 듯이 물었다. 그녀의 말처럼 이런 대규모 공연에 있어서 리허설은 필수다.

소리가 얼마나 크게 들리는지 미리 알아야 조절할 수 있을 뿐더러 극단 같은 경우는 조명이 매우 중요하다. 등장인물을 밝게 비추어야 몸짓 하나하나 세심하게 볼 수 있으니 당연한 세팅이다.

하지만 전시회가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개최가 결정나고, 악단과 극단 모두 개최 당일 전날에 도착했다.

제아무리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두 집단이라고 한들 리허설을 하지 못 한다면 여러모로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다.

"그렇긴 하죠. 그래도 리루스 악단에게 듣기로는 리허설을 충분히 했다고 말했으니 괜찮을 거예요."

"그럼 다행이긴 한데..."

"누나는 리루스 악단의 연주를 들어본 적이 있어요?"

나는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세실리와 대화하다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랐다. 그녀는 마족이고, 제논 일대기 발간 전까지 헬리움 바깥으로 나온 적이 거의 없다.

리루스 악단이나 매트릭스 극단 또한 헬리움에 입국했다는 소식은 현재까지 듣지 못 했다. 애당초 헬리움은 여태껏 입국 금지 국가로 지정되어 있었으니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간다.

그러니 세실리는 두 집단과의 접점이 없다는 뜻인데 말을 들어보면 예술에 조예가 깊어보였다.

"그건 아니야. 다만 헬리움 내에서도 악단이 있어서 어느 정도 상식은 가지고 있어. 리루스 악단이 세계 최고의 악단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

"그런데 왜 불안해하는 거예요?"

"만에 하나, 그들이 제 실력을 못 낼까봐 그래. 앞으로 리루스 악단이 연주할 음악은 사크란의 일생이잖아. 사크란의 일생은 우리 마족의 인생을 단편적으로 드러내줬지."

세실리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 것 같다. 리루스 악단이 연주할 음악의 내용은 사크란의 인생이다.

제논 일대기 속 사크란은 마족의 비극적이면서도 숭고한 운명을 단편적으로 보여줬으며, 마지막에는 악마가 아닌 인간으로 생을 마감하는 장엄함까지 독자들에게 각인시켰다.

한 마디로 마족의 인생을 대변하는 거라 해도 무방하다. 세실리는 리루스 악단이 그 내용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까봐 우려하고 있다.

"누나가 뭘 걱정하는지 알 것 같네요.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건 음악을 듣고 그 속에 담겨있는 뜻을 유추하는 게 아니라 내용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음악을 듣는 거니까요."

"신나는 음악이 나오면 어떻게 해?"

"음... 그럴 일은 없겠지만 원래 음악이라는 게 내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잖아요? 들어보면 알겠죠."

웃긴 상황에 구슬픈 음악을 추가해 그 상황이 더 재미있게 만드는 것처럼, 슬픈 장면과 대비되게 흥을 돋구는 음악을 넣어 왠지 모를 비극성을 더 강조시키는 것처럼, 음악은 오묘한 매력을 갖고 있다.

물론 리루스 악단이 미쳤다고 터키 행진곡 같은 음악을 선보이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세계 최고라고 명성이 자자한만큼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제 슬슬 시간이 된 것 같은데...'

무대를 빙자한 평야 위에는 앞으로 리루스 악단이 연주할 악기들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자연과 하나로 동화되어 있는 느낌이 운치 있고 보기 좋다.

게다가 황궁 쪽에서 무슨 마법을 펼쳤는지 몰라도 바깥의 소음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마을에 축제가 한창인데도 말이다.

시간을 거의 짜내는 식으로 부랴부랴 준비했지만, 레오르트와 리나가 미친듯이 고생한 덕에 무난히 진행될 것 같다. 특히 건물을 세우지 않고 평야 자체를 무대로 임의로 지정한 건 그들의 센스가 돋보이는 선택이었다.

"아이작. 저기 좀 봐."

"응?"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슬슬 몰려오고 있을 때, 마리가 내 팔을 툭- 툭- 건드리며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에 마리가 손가락으로 가르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니 전에 봤던 리나와 레오르트, 그리고 테르스 왕족이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VIP정도가 아니라 VVIP급에 해당하는 인원들이니 우리보다 무대를 보기에 더 적합한 자리에 앉아있다.

가지각색의 매력을 뿜내는 그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을 때, 내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리나가 이쪽을 쳐다봤다. 리나도 우리를 발견했는지 눈에 살짝 크게 떴다.

나는 리나가 우리를 보자마자 말없이 손을 흔들어줬다. 리나도 옆에 앉아있는 레오르트와 테르스 왕족을 힐긋거렸다가 고개를 꾸벅 숙이는 걸로 인사했다.

'마냥 쉬운 자리가 아니구나.'

황녀는 언뜻 보면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처럼 보이지만, 하나 하나 훑어보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권력을 손에 가지고 있으면 뭐하나. 제대로 다룰 수 있어야 진짜 힘이 되는 법인데. 무엇보다 저런 자리에서는 가면을 쓰고 행동해야 뒤탈이 없다.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가면을 써서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는 사람보다 처음부터 본심을 드러내는 사람이 훨씬 좋다. 그래서 내가 마리와 사귀는 거고.

"음..."

마리가 생각나서 그럴까. 나는 옆자리에 앉아있는 마리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는 내가 뚫어져라 바라보자 흠칫하더니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왜, 왜 그런 눈빛으로 쳐다봐?"

"마리."

"응?"

"그냥 불러봤어."

"...뭐야, 진짜."

마리는 실없는 내 말에 김샌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나는 작게 웃어주며 말없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마리도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이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보들보들한 손의 감촉이 전달되어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마리는 도대체 리나와 무슨 일이 있었길래 사이가 이런 걸까?'

보아하니 리나가 마리를 배신한 정황이 있는데 괜한 트라우마를 자극할까봐 지금까지 안 묻고 있었다. 하지만 미래를 보았을 때 리나와 친분을 쌓는 건 나에게 좋으면 좋았지, 결코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제논 일대기가 다시 연재가 된다면 지금보다 덩치가 훨씬 커질 것이며, 다양한 곳에서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때까지 정체를 숨기겠지만 원래 영원한 건 없다.

그러니 리나나 세실리 같은 권위자와 손을 잡아야하는 건 피할 수 없다. 마리의 가문이 레킬리스 공작이라 해도 나라 간의 다툼에 끼어들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나는 준비가 한창인 무대에 시선을 고정시킨 마리의 옆모습을 조용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마리."

"응?"

"축제가 끝나면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할 이야기가 있거든."

내 부탁에 마리는 푸른색 눈동자를 깜빡였다가 반대로 나에게 물었다.

"그건 상관없는데 어디로 갈거야? 혹시 또..."

음흉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다가 내 팔을 주먹으로 툭- 치는 마리. 나는 왠지 모를 창피함에 세실리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세실리는 악단이 준비되는 과정을 지켜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실제로 지금 무대에는 악기를 정비하기 위해 간단하게 연주 중이었으니 시선이 팔릴만도 하다.

이에 괜찮겠다 싶어 마리의 귓가에 입을 갖다 대며 작게 속삭였다.

"그게 아니라, 너랑 따로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서. 중요한 거야."

"그래? 어디로 갈까?"

나는 그녀의 질문에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가 아무 생각없이 대답을 꺼냈다.

"내 침실에 올래? 잠깐 커피나 마시면서 이야기하면 될 것 같아."

"... ..."

"너랑 좀 깊게 관련된 거라서."

"... ..."

그리 말하자마자 마리의 반응이 좀 심상치 않았다. 처음에는 눈을 끔뻑거리면서 상황 파악이 덜 된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얼굴이 목덜미부터 붉어지는 것이 아닌가.

멍한 얼굴 그대로인데 피부만 빨개지니 어딘가 고장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나에게는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 자체가 의문이었다.

내가 의문을 품으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마리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흰색 머리카락 사이로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 귀는 붉어질 대로 붉어진 상태였다.

"정말이지... 사람 미치게 만드네..."

"마리?"

"저택 침실은 기본적으로 방음이 되는데...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거야... 게다가 밤 중에 커피까지... 지난 번 에스코트 때도 그렇고 진짜 모르는 것 같은데... 어떡하지?"

손으로 얼굴을 덮어서 웅얼거리는 탓에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하지만 내가 실수를 했다는 건 분명했다.

침실로 부른 이유도 어차피 부모님과 마리의 부모님이 계시니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실리도 그래서 침실로 부른 거고.

나는 마리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며 그녀를 연이어 불렀다. 허나 마리는 이거 놓으라는 듯이 어깨를 털며 마른세수를 하기 바빴다.

"신사숙녀 여러분! 오래 기다려셨습니다. 곧 있으면 리루스 악단의 공연이 시작될 예정이니 모두 자리에 착석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마리를 부르는 동안 준비가 모두 끝났는지 무대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내 귀를 자극시켰다. 마이크를 사용한 것처럼 쩌렁쩌렁한 음량이었다.

이에 고개를 앞으로 돌리니 말끔하게 정복을 차려입은 중년인이 무대 중앙에 당당히 서 있었다. 아침에 봤던 리루스 악단의 지휘자, 리루스다.

나는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연주가 시작되는가 싶어 무대 쪽으로 고개를 고정시켰다. 그동안에도 옆에서 마리가 작게 웅얼거렸다.

"...그냥 모르는 척 하고 가볼까?"

"마리."

"후우. 그래.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야. 암. 어쩔 수 없고 말고."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아이작."

"응?"

"'초대'는 받아줄게. 알았지?"

내가 꺼냈던 말은 '라면 먹고 갈래?'에 정확히 부합한 권유였다.

하지만 나는 사교계에 참석한 적도 없고, 대인관계도 비교적 최근에 가진 터라 기본적인 상식이 부족한 상태.

심지어 밤 중에 커피를 마신다는 건 잠을 자지 않겠다는 것과 똑같은 맥락이다.

남녀가 침실에서 단 둘이, 그것도 잠을 자지 않는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알았어."

나는 아무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