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잠깐 뒷목이 서늘해지는 착각이 들었지만 아르웬과의 대화가 끊기는 일은 없었다.
나는 어른인 척 하지만 중간중간 어린애처럼 구는 아르웬이 마음에 들었고 아르웬도 본인 나름대로 나를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으니.
이후로 알게 된 사실은 아르웬도 책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책벌레라는 점. 그리고 오래 산 엘프답게 나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성인 엘프는 걸어다니는 도서관급이라는데 그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하는 질문들마다 꼬박꼬박 대답해주는 것도 모자라 부가 설명까지 해주어 나를 감탄케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녀는 나에게 엘프와 인간 사이에 간극이 얼마나 큰지 실감시켜줬다.
"음... 이 책이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구나. 발간된지 80년은 된 책인데."
"8... 80년? 그렇게나 오래 됐어?"
"우리 엘프들 사이에서 나름 유명했던 책이니라. 우리 성지에도 보관돼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보다 10배는 가까이 살았다는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는지 아르웬은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단종되었던 서적들을 모두 읽었다. 심지어 세세하게 기억하여 나를 한 번 더 놀라게 만들었다.
원래 발간된지 20년이 넘는 책은 출판은 물론이고 유통되는 것조차 매우 어렵다. 도서관을 방문해도 구석진 자리에 보관돼 있어 찾는 것도 힘들다.
이렇다보니 제논 일대기처럼 전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책이 아닌 이상 한 권이라도 구매하기 위해서는 난해한 과정이 요구된다.
그러나 아르웬은 발간되었던 당시에 그 책을 정독한 걸 넘어 모두 기억하고 있다. 덕분에 나는 새삼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아르웬을 바라보게 되었다.
소녀같은 행동거지 때문에 반말을 하고 있었으나 이제 슬슬 존댓말을 사용해야지 않을까, 라는 시덥잖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뭐, 그렇다고 나에게 말을 높일 필요는 없다. 그대도 이게 편하지 않겠느냐?"
"...편하긴 하지. 그래도 놀라운 건 변하지 않아."
"인간의 시선으로는 그렇겠지. 허나 우리 엘프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개개인이 걸어다니는 성지일 뿐더러 강력한 군단이나 마찬가지이지. 책의 이야기를 모두 기억하는 건 일도 아니리라."
역시 엘프 특유의 종족 특성은 어디 가지 않는다고. 아르웬은 내가 진심으로 감탄하자 콧대를 추켜세우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래도 오만함이나 자만심은 아닌 것이, 이 둘은 남이나 자기자신에게 해악을 끼쳐야 진정한 의미로 탄생하는 법. 아르웬 같은 경우는 순수한 의미로 자부심에 가까웠다.
물론 소녀처럼 귀여운 외모를 가진지라 어린아이가 재롱을 부리는 것 같다. 분명 나이가 나보다 훨씬 많은데 행동거지는 영락없는 어린애다.
나는 어디 한 번 부러워해보라는 듯, 아직까지 우쭐거리고 있는 아르웬을 보다가 피식 웃으며 팩트를 툭- 찔렀다.
"그런 엘프들이 500년 전 종족전쟁에서 큰 굴욕을 겪었지 아마?"
"... ..."
내가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팩트를 때려버리자 아르웬의 미소가 유리마냥 와장창 깨져버렸다.
엘프는 역사를 중요시 하는 관습이 있어 그들에게 종족전쟁은 그야말로 굴욕 중의 굴욕일 터. 그러나 반드시 배워야 하는 역사다.
"...우리 선조가 어리석긴 했지."
아르웬은 고개를 반대쪽으로 스윽- 돌리고는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부정하지 않는 걸 보면 개념이 확실하게 박혀있는 듯했다.
나는 그녀의 반응에 작게 웃었다가 곧바로 긍정적인 이야기를 꺼내어 기분을 풀어줬다. 엘프에 대해 나쁜 말만 했다간 아르웬이 나를 싫어할 수도 있다.
"그래도 그걸 반면교사 삼아 엘프도 큰 발전을 이루었지. 중간에 다시다난한 사건사고가 터졌지만 지금은 주변 국가와 교류도 활발히 하고 말이야. 듣자하니 이번 대 엘프 여왕이 본격적으로 개방 정책을 펼쳤다고 했지?"
신디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과거의 엘프는 스스로를 신에게 선택받은 종족이라 굳게 믿으며 다른 종족과 거리를 두었다. 정확히는 다른 종족의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본인들이 나서봤자 힘으로 억누르는 것밖에 되지 않았으며 굳이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 했으니까. 실제로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다른 종족의 문명이 엘프에 버금갈 정도로 발전하고, 종족전쟁이 터지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엘프는 스스로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필멸자임을 똑똑히 인지하고 주변과의 교류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 그렇다. 알븐하임은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주변과 단절하다시피 국가를 운영했지. 하지만 여왕이 즉위하고나서는 완전히 바뀌었니라."
엘프 여왕이 이룩한 업적에 대해 언급하자 왠지 모르게 뿌듯해 하는 아르웬이다. 아무래도 신디처럼 엘프 여왕을 존경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우쭐거리는 아르웬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으니 어른스러운 건 당연한 건데 외모가 외모인지라 어른인 척 연기하는 아이 같다.
"아르웬은 엘프 여왕을 좋게 보고 있구나. 내가 아는 엘프도 그러던데."
"그 엘프는 분명 젊은데다가 제대로 된 시선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하다. 하긴, 이번 대 여왕이 통치를 잘하긴 했지."
"그런 것 치고는 80년 전 쯤인가, 외교적으로 큰 패착을 지었다고 들었어. 관세를 잘못 매겨서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봤잖아."
아르웬의 말처럼 이번에 즉위한 엘프 여왕이 전반적으로 통치를 잘한 건 맞다. 그러나 엘프 치고는 지극히 어린 나이에 여왕이 된 탓인지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방금 전 내가 언급한 관세 사건이다. 미네르바 제국에서 관세 문제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알븐하임에게 돈을 뜯어내는 수준으로 외교를 맺었다.
만약 연륜이 깊거나 조금만 더 신중했다면 곧바로 사기에 가깝다는 걸 눈치챘겠지만 엘프 여왕은 그러지 못 했다. 이럴 때 나서야 하는 세력이 원로원인데 아마 일부러 엿을 먹은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여태까지 엘프의 왕들은 원로원의 압박을 이기지 못 하고 스스로 자리에 내려왔으니 그 일환이지 않을까 싶다.
"그, 그건 어쩔 수 없었느니라! 그래도 그 이후로는 아무 문제도 터지지 않았잖느냐..."
처음에는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가 이윽고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아르웬. 로브 아래로 시무룩해진 표정을 보아하니 이제 장난은 그만쳐야할 듯싶었다.
그래도 반응은 보고 싶었다. 나는 그녀의 울적한 기분을 살살 달래주기 위해 긍정적인 면모를 알려줬다.
"뭐, 네 말이 맞아. 그 사건 이후로 엘프 여왕은 외교적으로 큰 손실을 본 적이 없지. 심지어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들었고 말이야. 본래 엘프는 현재에 안주하여 발전을 경시하는 편인데 이번 엘프 여왕은 좀 다르더라."
"어떤 게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내가 좋을 말을 꺼내려고 하자 아르웬은 시무룩한 표정을 언제 지었냐는 듯, 은회색 눈동자를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나를 바라봤다.
본인의 감정을 숨길 생각이 하나도 없는 이 순수한 아이가 정녕 100살이 넘는 것일까. 인간은 나이를 먹는다는 걸 인지하면 성격이 점점 변하는 법인데 엘프는 그 과정이 느린 것일 수도 있다.
나는 기대감에 차 있는 아르웬의 얼굴을 지그시 마주하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의견을 입 밖으로 꺼냈다.
"발전을 끊임없이 갈구하고 그러기 위해서 다른 나라와 연을 맺는거지. 당장 아카데미에서 근무하는 교수들 중 몇몇은 엘프야. 내가 알기로 엘프는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매우 고단한 과정을 거쳐야한다고 들었거든.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모셔가야할 인재인데 선듯 보내줬잖아."
"흠. 흠. 그리고?"
아르웬은 더 말하라는 듯이 헛기침을 하며 나를 종용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알고 지식으로서는 여기가 한계다.
"더 말하고 싶지만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서는 여기까지밖에 말 못 해.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큰 위업인 건 확실하지."
엘프는 본인들이 다른 종족보다 우월하다 믿으며 밖으로 잘 나가려 하지 않았다. 가끔씩 몇몇 별종들이 밖으로 나가 세상을 경험하지만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많은 엘프 학자들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는 중이고, 그걸 토대로 알븐하임을 차근차근 발전시키는 중이다.
다만 장수종의 특징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느긋함' 때문에 그 속도가 더딘 편이다. 그래도 과거에 비해서는 놀라운 성과라 볼 수 있다.
"그대는 이번 엘프 여왕을 호의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냐?"
"사람으로서는 모르겠는데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는 좋게 보고 있지. 그 분이 펼친 정책에 수많은 반발이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사회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야. 멀리 가지 않아도 인간의 역사를 보면 이해할 수 있어. 위인으로 기록된 사람들이 펼친 정책을 보면 그 당시 말도 안 되는 거였거든."
'선견지명(先見之明)'이라고, 당시에는 이해는커녕 거센 반발이 일어났던 정책이 후에 빛을 발하는 경우가 많다. 전생에서도 자주 봤던 현상이고.
그러나 사람은 결코 완벽할 수 없는 법. 선견지명에 가까운 정책을 펼쳤다고한들 부작용은 있는 법이다. 반발하는 사람들 또한 그 부작용을 우려하여 목소리를 높혔을 가능성이 높다.
"대신 현명한 왕이라면 그 반발의 원인을 알고, 그 반발이 단지 자신을 정치적으로 끌어내리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나라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인지 파악해야 돼. 만약 후자라면 훗날 부작용이 없도록 신중하게 고려해야겠지. 전자라면 뭐... 난 정치를 몰라서 모르겠네. 두 개 다 섞인 경우도 많아서."
"... ..."
내 설명이 끝나도 아르웬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말똥말똥하게 빛나는 은회색 눈동자에 나를 향한 흥미로움이 담겨있었다.
"...대단하구나. 약관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니."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거야."
"그건 지식이지 그대와 같은 시선은 아니다. 지식을 갖고 있는 것과 응용하는 건 천지차이니라."
"그래? 난 잘 모르겠네."
나는 아르웬의 칭찬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전생의 영향으로 남들에 비해서 남들과 다른 시선을 갖고 있는 것도 한몫할 것이다. 나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들이 이 세상에서는 파격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으니.
전생에서는 평범했던 내 문체가 이곳에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고 찬사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아무튼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너는 왜 서점에 들린 거야? 무슨 책을 사려고?"
"딱히 사고 싶은 책은 없다. 성지에는 이 세상 모든 책들이 보관돼 있다 해도 무방하니까. 단지 전시회가 개최되는 곳의 서점은 어떤지 궁금해서 방문한 것이니라."
"그래서 어때? 솔직히 제논 일대기의 명성에 비해서는 뛰어나지는 않지?"
"냉철히 평가를 내리자면 그렇다. 물론 성지로 인해 내 눈이 높아진 것일 수도 있지. 하지만 책을 보관한다는 건 곧 지식을 보관한다는 거나 마찬가지. 규모는 작을지언정 그 의의는 결코 평가절하할 수 없노라."
아르웬은 우아한 목소리로 사근사근 본인의 생각을 꺼냈다. 종족 특유의 자부심과 그녀만의 신념이 깃들어있는, 아주 개성적인 대답이었다.
나는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둘러보는 그녀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럼 제논 일대기는?"
"응?"
"엘프인 네가 생각하기에 제논 일대기는 어떻게 생각해?"
내가 이런 질문을 할지 몰랐던 걸까. 아르웬은 내가 제논 일대기에 대해 묻자 무언가 찔렸는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그녀는 나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옆을 힐긋거렸다. 잠깐 시선을 피한 건가 싶어 그녀의 눈동자가 움직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아무도 없이 텅 비어있는 허공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내 시선을 피한 게 맞다.
이윽고 아르웬과 다시 한 번 얼굴을 마주쳤을 때 쯤,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있다."
"뭐?"
"정말 재미있다고 말했느니라."
그녀의 입에서 긍정적이 대답이 흘러나왔다. 다만 얼굴이 살짝 붉어진 걸 보면 약간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그래도 원작자의 입장에서 뿌뜻하기 그지 없는 일. 나는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아르웬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다.
아르웬은 나와 눈높이가 맞자 당황했지만, 나는 그녀의 은회색 눈동자와 정면으로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어떤 부분이 재미있었어? 엘프에게는 그닥 재미없을 것 같은데?"
"그, 그게 무슨 소리냐! 비록 주인공이 인간이지만 또다른 세계가 창조된 거나 마찬가지이거늘. 그리고 카이르와 엘리샤의 애절한 이야기에 우리 엘프도 감동을 받았노라."
흥분까지 하며 열렬히 제논 일대기를 신봉하던 아르웬이 카이르와 엘리샤를 언급했다. 역시 사랑 이야기는 남녀를 불문하고, 그리고 종족을 불문하고 모두에게 통하는 모양이다.
나는 아무리 봐도 어린애 같은 그녀의 모습에 작게 웃어주었다가 넌지시 질문했다.
"그럼 너는 두 사람이 이어졌으면 좋겠어?"
"질문 같은 질문을 하여라. 당연히 이어져야 하지. 그래야만 우리와 인간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돈독해지지 않겠느냐?"
"흠... 그래?"
안타깝지만 얘야.
"그랬으면 좋겠네."
카이르는 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