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아이작과 아델이 테르스 왕족들과 미묘한 만남을 갖고 있을 때, 자리를 떠났던 마리와 세실리는 마을 외곽에 인적이 드문 장소에 도착했다.
황실의 막대한 지원의 도움을 받았다고한들 마이샬 영지 곳곳에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장소가 드문드문 존재했다. 특히 마을 외곽 쪽으로 나갈 수록 그 현상이 두드러졌다.
마을과 외곽은 공간이 서로 분리된 것처럼 뚝- 하고 떨어져 있다. 덕분에 몰래 숨어들기 적합한 곳이 매우 많았다.
마리와 세실리 이 두 명 또한 마을 외곽에 서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수 십년간 대지의 양분을 먹고 자란 거목(巨木) 이 따가운 햇빛을 대부분 가려줬다.
"그래서 이런 곳까지 불러놓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마리는 팔짱을 낀 채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앞에 서 있는 세실리에게 따졌다. 그녀의 심기는 현재 매우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원래는 아이작과 단 둘이 오순도순 전시회를 즐기고 싶었으나 눈 앞의 여인 때문에 계획이 무산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지금은 아예 떨어진 상태다.
알콩달콩한 데이트를 생각하고 있던 마리로서는 불만을 넘어 짜증이 치솟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세실리의 말을 모두 무시하고 싶었으나 분위기상 그럴 수가 없었다.
굳이 지금이 아니더라도 조만간 따로 불러낼 것 같았으니까. 여자로서의 감이자 마리 특유의 날카로운 촉이 말해줬다.
귀찮은 일은 되도록 빨리 해결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판단하여 순순히 세실리의 뒤를 따라온 것이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이 나무 밑이었고.
"미안해. 너와 반드시 해야할 이야기라서."
세실리는 자신을 못마땅해 하는 마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경계심이 자연스레 풀릴 정도로 아름답고도 싱그러운 미소였다.
하지만 마리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눈매를 가느다랗게 뜬 것이 경계심만 한층 더 강해진 모습이다.
이어서 그녀는 세실리를 위아래로 빠르게 훑어보다가 콧김을 길게 내쉬더니 가슴에 손을 척- 얹으며 선언하듯이 말했다.
"미리 말하는데, 난 절대 아이작을 너에게 줄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어. 내가 먼저 아이작에게 고백했고, 아이작도 나를 좋아하니까. 알겠어?"
단호하면서도 선을 확실히 그어버리는 마리의 발언. 절대 양보하지 못 한다는 본인의 의지를 세실리에게 드러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마리의 기세에 움찔할만도 하지만 세실리에게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반대로 충분히 예상하고 있다는 듯,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 네가 아이작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옆에서 지켜봤으니까. 가슴 이야기를 할 때 나를 이용하는 건 조금 놀라웠어. 오랜만에 한 방 먹었다는 기분이 들더라고."
"알면 됐어."
"하지만 마리. 혹시 일부다처제라는 제도를 알아?"
"...뭐?"
세실리의 입에서 일부다처제가 언급되자 마리는 눈을 뜨며 자기가 잘못 들었나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에 세실리는 마리가 들은 게 맞다는 듯, 작은 미소를 유지하며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네가 들은 게 맞아. 남자 한 명이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리는 풍습이지. 너희 인간 사회 뿐만 아니라 헬리움은 물론, 애니머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형태야."
"야. 너..."
마리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지 붕어처럼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일국의 공주가, 그것도 다음 대 차기 마왕으로 예정돼 있는 세실리가 입에 담을만한 주제는 절대 아니었다.
세실리 정도 되는 위치라면 일부다처제가 아닌 데릴사위를 시행해야 정상이니까. 헬리움은 여지껏 외교를 못 했을 뿐이지, 국력 자체만 따지자면 알븐하임과 맞먹을 정도로 강력하다.
무엇보다 일부다처제는 로맨틱한 사랑보다 정치적인 이유가 얽혀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힘없는 약소국이 강대국과 끈끈한 연을 맺기 위해 왕녀를 시집보내는 것처럼 말이다.
마리에게는 다른 걸 다 제쳐두고 세실리가 아이작을 정치적인 도구로 사용한다는 부분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일부다처제고 나발이고 그런 건 절대 허락할 수 없다.
이에 그녀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리며 세실리에게 쓴소리를 내뱉었다.
"하. 너는 리나랑 다를 줄 알았는데... 내가 사람을 잘못 봤네. 설마 그런 시커먼 속내를 숨기고 있을 줄이야."
"... ..."
"과연 아이작이 받아줄 거라고 생각해? 정치를 그렇게나 싫어하는 애를?"
아이작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부하는 마리였다. 물론 그의 가족을 제외한다면.
어쨋거나 아이작은 소박하고, 남을 배려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으며 글쓰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청년이다.
제논 일대기를 쓴 이유도 어디까지나 취미에 불과했으며 그저 머릿속에 있던 또다른 세상을 끌어내어 책으로 담아낸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본인의 인기를 실감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뭐, 가끔씩 이상한 부분에 꽂히는 경향이 있지만 마리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무뚝뚝하던 아이작의 반응을 볼 수 있어서 훨씬 좋았다.
애초부터 정치적인 의도로 아이작에게 접근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호의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발전한 관계다. 적어도 아이작을 향한 사랑은 누구보다 더 순수하다고 자신할 수 있다.
"음...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건 절대 아니야. 정치는 부가적인 요소일 뿐, 아이작을 향한 내 마음은 진심이거든."
세실리는 마리의 연이은 독설에도 불구하고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다. 여기에 더해서 생글생글 웃으며 얼굴을 살짝 붉히기까지.
사랑을 고백하면서 수줍어하는 여자의 반응이다.
이로인해 도리어 당황한 건 마리였다. 전에도 말했듯이 그녀는 사람이 말할 때 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본능적으로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태어났다.
그리고 지금 세실리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꺼낸 말이 모두 진실이라고 가슴이 소리치고 있다.
정치적인 의도는 하나도 들어있지 않고 사람 대 사람으로서 오고 가는, 매우 순수한 마음.
마리는 그걸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언제부터?"
"믿어주는 거야? 정말로?"
마리가 아무런 의심없이 믿어주자 세실리는 환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두 손을 맞잡은 것이 감격했다는 반응이다.
그에 마리는 고개도 끄덕이지 않고 침묵으로 대응했다. 세실리의 마음이 진심이던 거짓이던 상관없다. 진심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었으니.
만약 그녀의 진심이 매우 불순하다면 칼 같이 거절할 생각이었으며 설령 깨끗하다 해도 마찬가지다.
마리는, 모처럼 한치의 가식 없이 진실된 아이작을 누군가와 공유할 생각이 티끌만큼도 없다.
매일매일 얼굴을 보고 싶고, 그걸 넘어 하루종일 포옹을 하고 싶을 뿐더러 다양한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공유하게 되는 순간 그 시간마저 반으로 뚝 갈라지게 된다.
과거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경험이 있던 그녀로서는 아이작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믿어준다니 정말 고마워. 그리고 언제부터였냐면... 약간 애매하네. 아이작에게 호감을 가졌을 때는 학기 초였고, 그게 사랑으로 변한 건 제논 일대기 9권이 나오고 난 이후부터지. 정확히는 너와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눴을 때야. 기억나지?"
"... ..."
알다마다. 그 이후에 약간 조급해져 아이작과 독대하여 이애기를 나누었고, 마리가 먼저 키스를 함으로서 교제를 시작했다.
비록 구렁이 담 넘듯이 과정이 이상했지만 결과가 좋았으니 문제는 없었다.
"그때 네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지. 비밀을 공유해야만 형성되는 신뢰라면 개나 줘버리라고. 그건 단지 그 사람의 비밀을 좋아하는 거지 그 사람 자체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말이야."
"...똑똑히 기억하고 있네."
"덕분에 똑똑히 깨닫게 됐어. 나는 아이작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걸."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마리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세실리의 설명에 눈 밑을 꿈틀거렸다.
세실리는 마리의 표정을 보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더니 가슴에 손을 살포시 얹었다.
아이작의 얼굴을 떠올려서일까. 평소보다 심장이 더 강하게 요동쳤다.
마족 특유의 인내심으로도 억누르지 못 할만큼 강하게 뛰었으며, 악주기가 다가와서 그런지 욕망이 강하게 이는 것도 느껴졌다.
'예정보다 더 빨리 찾아오겠어...'
본래 악주기는 일정 기한마다 찾아오지만 특수한 경우가 더 빨리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바로 마족에게 마약이나 다름없는 '욕망'이 차오를 때다.
욕망을 강하게 느끼면 느낄 수록 뿔의 붉은 기운이 더욱 강해지며 버틸 수 없으면 악주기가 찾아온다. 그리고 그 악주기마저도 참지 못 하면 악마가 되는 것이고.
세실리도 비슷한 경우다. 이전이었다면 그저 그렇구나하며 넘어갔겠지만 아이작을 향한 마음을 자각하고나서부터 욕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 욕망이 어떤 형식으로 발현될지 그녀 본인조차 모르고 있다. 여태까지는 생리 현상처럼 무심하게 다가왔다면 지금은 약을 한 것처럼 갑작스레 찾아왔으니.
다행히 악마가 될 일은 절대 없을 거라 단정할 수 있으나 인간 여자가 생리 때 난폭해지는 것처럼, 자신도 비슷한 현상을 겪을지도 모른다.
세실리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안정시킨 뒤, 다시 천천히 눈을 떠 마리를 바라봤다.
"처음에는 나도 헷갈렸어. 이 마음은 아이작 그 자체를 향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 마족의 구원자를 향한 것일까? 라고. 하지만 결론은 의외로 쉽게 나오더라."
"...무슨 결론인데?"
"두 개 다야."
아주 명쾌했지만 동시에 이해하기 어려운 결론이었다. 허나 마리는 곧바로 이어진 세실리의 설명으로 인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아이작은 제논 일대기의 작가고, 제논 일대기의 작가는 아이작이지. 누구를 사랑하냐고? 둘 다 의미 없는 소리야. 어차피 동일인물인데 무엇에 더 가치를 두는 건 이상하지 않아? 우리 마족을 구원해준 건 제논 일대기를 집필한 작가, 즉 아이작이지. 아이작을 향한 마음은 진실이라는 건 이때문이야."
기적의 논법이 세실리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마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실제로 그녀의 말이 모두 맞다.
아무리 서로를 분리하려고 해도 결국 아이작이 제논 일대기의 작가라는 건 결코 변할 수 없는 사실이며 진리와도 같은 것. 그러니 세실리가 아이작을 향해 연심을 품어도 이상하지 않다.
제논 일대기는 세실리 같은 마족에게 있어서 하늘이 내려준 구원이었으니까. 1000년 동안 진행된 모진 핍박과 차별을 단번에 해소시켜준, 그야말로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보물이다.
세실리는 마리가 입을 꾹 다물며 자신의 말을 경청하자 빙긋 웃더니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우리 마족을 구원해준 아이작에게 보답하고 싶어. 솔직히 내가 여자로서의 매력은 절대 뒤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아. 너도 인정하지?"
"...인정해."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마리는 세실리의 외모를 찬찬히 뜯어봤다.
비단처럼 내려오는 칠흑색 머리카락과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붉은색 눈동자. 전반적으로 성숙한 이미지를 풍기는 아름다운 외모였으며 앵두 같은 입술은 미묘한 색기를 뿜내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단연코 몸매라고 할 수 있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는 가슴은 말할 것도 없고 부드럽게 이어지는 허리와 골반 라인도 눈이 부실 정도의 매력을 발산하는 중이다.
자존심 상하지만 여자로서의 매력은 마리보다 세실리가 우위에 서 있다.
마리는 객관적으로 보아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울컥하여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난 절대 아이작을 다른 사람이랑 공유할 생각이 없어. 너에게 빼앗길 생각은 더 없고."
"미안하지만 네 의견은 중요하지 않아. 아이작의 의견이 중요하지."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야?"
세실리의 도발적인 발언에 마리가 날을 잔뜩 세운 목소리로 그녀를 몰아넣었다. 자신의 의사 따위는 무시하는 세실리의 행태가 점점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에 세실리는 아까와 다른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음흉해 보이기도 한, 매우 음습한 미소였다.
뒤이어 그녀는 털을 곤두세운 고양이처럼 하악질을 하는 듯한 마리를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네가 꼭 정실이라는 것처럼 얘기하네? 아직 연애 단계지, 정식으로 약혼이나 결혼을 한 것도 아니잖아?"
"이...!"
"그리고 난 정치적으로도 아이작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어. 아직 초반 단계이지만 우리 헬리움은 다른 국가와 교류를 맺기 시작했고, 우리 마족은 태생부터 강력한 힘을 갖고 있으니 외교적으로 이득을 볼 수 있겠지."
비록 헬리움이 반강제적으로 폐쇄적인 입장을 취했다지만 세실리는 무려 한 나라의 공주다.
마리가 황제 다음 가는 권력을 지닌 레킬리스 공작의 딸이라지만, 아무래도 세실리에 비해서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한 명의 여자로서, 그리고 한 국가의 권력자로서.
두 가지 모두 세실리에 비해 한참 밀리는 입장이어서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절대 안 돼.'
이건 선전포고다. 아이작을 어떻게든 사수하겠다는 세실리의 선전포고.
그리고 마리, 자신은 아이작을 무조건 보호해하는 공성전을 치뤄야 된...
'...응? 잠깐만.'
마리는 머릿속에서 의문이 하나 두둥실 떠올랐다. 세실리가 매력이 뛰어난 건 맞지만 그녀는 마족이며 아이작은 인간이다.
기본적으로 수명 차이가 3배 이상 나는데 세실리가 이 부분을 모를리가 절대 없다. 더군다나 마족은 참을 수 없는 분노나 슬픔을 느끼면 악마로 변하게 된다.
제논 일대기 속에 등장한 스승과 엘프 여왕처럼 애절한 스토리도 기대할 수 없다. 아이작은 스승처럼 마나를 다루는데 극에 달한 강자가 아닌, 그저 평범하디 평범한 인간이다.
장수해도 100년인데 마족에게 있어서 100년은 인간으로 따졌을 때 대략 20년 정도가 된다. 게다가 아이작은 현재 17살로, 장수를 해도 90년이다.
아이작이 수명 문제로 죽고 나서, 혼자 남게 될 세실리는 과연 버틸 수 있을까? 마리에게는 그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세실리."
"응. 마리."
"너는 아이작과 함께 할 시간이 정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 아이작이 죽고 난 이후의 시간보다?"
"...드디어 눈치챘구나."
세실리는 마리가 본질을 꿰뚫는 질문을 하자 어딘가 후련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뒤이어 그녀는 고개를 위로 들어올렸다.
나무로 가려져 있지만, 나뭇가지 사이로 푸르런 하늘이 밋밋하게 보였다. 따사로운 햇빛마저 가려주는 중이다.
그녀는 한동안 하늘을 올려다 보다가 다시 고개를 내려 마리를 바라봤다. 마리는 세실리의 대답이 나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는 중이다.
"네 말이 맞아. 나는 마족이고 아이작은 인간이지.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고, 언젠가 나와 아이작은 헤어지게 될 거야."
"괴로울 거야."
"그래. 당연히 괴롭겠지. 그래서 네가 아니라 아이작의 의견이 중요하다 한 거야. 종족간의 수명 문제는 신조차 해결할 수 없을테니까."
살아있는 것들은 본래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 그것이 자연의 이치다.
인간을 포함한 사람은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유산'을 남기려고 애를 쓰는 중이다. 그것은 '지식'이라는 형태로 스며들어 사람을 더욱 발전시킨다.
인간이 남들보다 발전 속도가 빠른 이유도 여기서 기인한다. 엘프와 마족 같은 장수종은 수명이 너무 긴 바람에 느긋한 마음가짐이고, 인간은 그 반대였으니.
세실리는 마리에게서 시선을 옮겨 마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따로 마나로 감지하지 않아도 시끌벅적한 기운이 여기까지 전달되었다.
"아까 그 마족을 보고 나서 하나 생각해 놓은 게 있어. 그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말이야."
"... ..."
"설령 아이작이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난 그를 기억하기 위해 그의 영지에 지원을 해줄 거야. 아무리 비밀을 숨긴다고 해도 언젠가 아이작이 제논 일대기의 작가라는 걸 알게 되겠지. 그리고 그의 영지는 자연스레 문화 도시로 발전할테고."
"그럼 정치적으로 도와준다는 건..."
"맞아. 욕심많은 자가 그의 영지를 함부로 농락할 수 없도록, 내가 보호할 거야. 이건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마족도 마찬가지겠지."
그렇게 된다면 마이샬 영지는 최소한 200년 가까이 안전하다.
미네르바 제국과 외교적인 거래를 한다면 헬리움의 전사들이 마이샬 영지에 배치되는 것도 문제가 없을 것이며 제국과 헬리움이라는 둔둔한 우군이 생기니 서로에게 이익인 셈이다.
마리는 머나먼 미래까지 넘보는 세실리의 혜안에 감탄한 것도 잠시, 왠지 모르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저렇게까지 지극정성인데 수명이라는 매우 커다란 벽이 막고 있었으니.
물론 그 벽을 넘어선다고한들 아이작은 절대 못 준다. 마리는 속이 뻥 뚫린 듯한 기분에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내 당당함을 되찾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네 마음은 잘 알겠어. 그래도 아이작은 절대 못 주니까 그리 알아."
"흐응~"
세실리는 마리의 선언에 색기가 담긴 비음을 흘리더니 눈매를 반으로 접었다. 그에 마리가 불길함을 느꼈을 때 쯤, 세실리가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글쎄~ 어떻게 될까나?"
"무, 무슨 소리야? 아까는 분명..."
"마음은 주지 못 해도 몸은 줄 수 있잖아? 그러니까..."
이윽고 세실리는 마리를 지나치기 직전,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소근거렸다.
"내가 먼저 가져가 버릴 수도 있다?"
귓구멍을 파고드는 세실리의 야시시한 말. 그 말이 마리의 뇌를 강타했다.
"...!!"
마리의 몸이 크게 움찔거리며 푸른색 눈동자가 화등잔만하게 떠졌다. 입 또한 떡- 하고 벌어진 것이 세실리의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곧이어 백설기 같은 피부가 점점 붉어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귀까지 노을처럼 빨개졌다. 세실리가 무슨 뜻을 담고 이야기했는지 명확히 인지한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세실리가 그 말을 했기에 함부로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마음만 먹는다면 정말로 할 기세였으니까.
"그럼 난 이만 가볼게."
"... ..."
장난 아닌 장난을 친 세실리는 마리의 어깨를 손으로 톡- 치며 그녀를 지나쳤다. 세실리가 지나쳤음에도 불구하고 마리는 못 박힌 듯이 제자리에 서 있을 뿐이다.
그렇게 세실리가 멀찍히 떨어졌을 때 쯤, 마리는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세차게 돌렸다. 세실리는 이미 마을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좋아. 해보자는 거지?"
마리는 이것 보라는 듯이 씨익 웃더니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누가 빼앗길 줄 알고?"
그녀의 푸른색 눈동자에 기이한 열망이 화염처럼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