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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92화 (93/763)

< 92화 >

나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겠다며 떠나간 세실리와 마리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봤다.

도중에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리겠냐고 물었는데 두 사람은 조금 오래 걸릴 거라며, 그때까지 전시된 작품을 관람하고 있으라고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금 전 상황을 유추하건데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대강 예상이 간다만 끼어들 여지가 없어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시된 작품들을 즐기고 있다 보면 돌아오겠으나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으음..."

3명이서 출발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 홀로 남게 된 기분이 이러할까. 나는 마리와 세실리가 사라진 곳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쩌다 혼자 남게 되었지만 마을에 오가는 행인들은 여전히 많았다. 다들 전시회를 관람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이며 축제를 즐기는데 여념이 없다.

내가 혼자 있다고 나에게 신경쓰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일단 돌아다녀보자.'

조금 오래 걸릴거라고 세실리가 말했으니 가만히 있는 것보다 둘러보는 편이 나을거다. 나는 발걸음을 옮겨 미처 관람하지 못한 작품을 하나 둘 씩 감상하기 시작했다.

조각상이 건물처럼 길 양옆에 나열되어 있다면 미술품은 마을 곳곳에 전시되어 다양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또한 예술품만 전시회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백성 위에 귀족이 있고, 귀족 위에 왕이 있으며, 왕국은 국가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오. 하지만 그 국가를 지탱하는 건 엄연히 백성이지. 즉, 왕이건 귀족이건 백성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라오. 헌데 크로스트 백작 그대는 그 국가의 근간을 단지 거슬린다는 이유로 모함하는 중이지. 정말이지 참된 귀족의 행실이구려. 그렇지 않소?"

"그 입 닥치게나! 감히 나를 우롱하려 들어?!"

"우롱이라니. 난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오. 사람은 사실을 콕- 집으면 화를 낸다고 들었는데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구려."

마을 중앙에 설치된 중앙 무대에서 공연하는 극단도 있다.

미리 말하지만 전시회에는 매트릭스 극단만 방문한 것이 아니며 꼭 극단이 아니더라도 취미 생활로 연극에 종사하는 배우도 간간히 존재한다.

공연장이 설치된 곳이 마을 광장이라 다른 곳보다 오가는 사람들로 인해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거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특수한 작업을 거쳤는지 배우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귀에 들어왔다.

거기다 매트릭스 극단처럼 스케일이 거대하지 않을 뿐이지 배우들의 연기력은 내 기준으로도 뛰어난 덕분에 몰입이 가능했다.

이러한 이유들 덕분에 연극을 감상하는 사람들도 꽤 많은 편이었다. 앞에 배치된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복장을 보아 대부분 귀족이고 뒤에 서서 관람 중인 사람들은 평민인 것으로 추측된다.

'귀족들은 이걸 보고 무슨 생각을 하려나.'

현재 공연장에서 극단이 연기 중인 연극은 8권 초반부이자 귀족의 명과 암을 대변해주는 장면이다.

본인의 기득권이 제논으로 인해 위협을 받자 그를 함정에 빠뜨렸으나 도리어 역으로 관광당하는 사이다 장면.

연극을 보는 사람들 대부분 평민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의외로 적지 않은 수의 귀족들도 감상하는 중이었다. 불쾌한 기색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연극 그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

솔직히 원작자로서 불편해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기우였던 모양이다. 실제로 귀족들도 8권 초반부의 장면을 보고나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했으니 그 일환인지도 모른다.

'난동을 부려도 경비경들이 제지할테니까 문제는 없겠지.'

나는 멀찍히 서서 연극을 구경하다가 다른 곳을 둘러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연극에만 몰두하기에는 전시된 작품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윽고 머지않아 내 눈길을 끈 작품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이걸 그린 사람도 있구나."

'헥토파스칼 킥'이라고, 대한민국에서 아주 유명한 밈이 있다.

여자애가 난리를 피우던 남자아이에게 드롭킥을 먹이는 장면으로, 장면도 장면이지만 헥토파스칼이라는 어감 자체가 막강하여 밈으로 승화되었다.

나는 그 장면을 제논 일대기에 상세히 묘사했다. 여주인공이자 히로인인 메리가 불량배들에게 드롭킥을 시원하게 날리면서 위풍당당하게 등장하는 것으로.

담백한 묘사가 대부분이었던 이 세계에서는 비범하기 짝이 없는 첫 등장이었기에 수많은 독자들 뇌리에 각인시켰다.

'진짜 잘 그렸다.'

아무래도 중세 시대인지라 화풍이 다를 수밖에 없지만 그걸 제외하면 내가 알던 헥토파스칼 킥과 100% 흡사했다.

보라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깡패에게 드롭킥을 날리는 메리와 양팔을 교차하며 드롭킥에 가격당하는 깡패의 표정까지.

구도, 인물, 표정 모든 것이 완벽한, 헥토파스칼 킥 그 자체였다.

'혹시 나 말고도 환생자가 더 있는 건가?'

오죽하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 정도. 나는 이 미술품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시선을 아래쪽으로 내렸다.

아까 본 조각상들처럼 설명이 쓰여있는 팻말이 달려있었다.

우선 이 화가의 이름은 칼스 즈바사. 테르스 왕국이 아닌 미네르바 제국 출신이다.

많고 많은 장면 중에 굳이 이 장면을 골라 그린 이유는 메리의 성격과 정체성을 단번에 드러내주기 때문이라고.

또한 다른 예술가와 달리 우스꽝스럽게 그려 작품을 보는 이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칼스 즈바사... 이 사람도 기억해야겠다.'

나는 내 머릿속의 헥토파스칼 킥과 일치하게 그린 칼스의 작품을 머릿속에 저장하며 수첩과 펜을 꺼냈다. 혹시라도 이름을 잊어버릴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훗날 전시회가 끝나고 몇몇 예술가들의 이름을 언급해야 내가 참석했다는 걸 사람들이 알테니 필수라고 볼 수 있다.

"후우~"

"흐이익?!"

수첩에 이름을 적고 있을 때, 누군가 내 귀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간지럽다 못해 소름이 돋는 느낌에 해괴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간질거리는 귓구멍을 후벼파면서 누가 이딴 짓을 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뒤이어 범인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황당함을 금할 수 없었다.

"...아델 누나?"

"하핫. 여기서 만나네?"

나보다 먼저 전시회를 관람하러 저택을 떠났던 아델리아였다. 나는 그녀가 특유의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반가워하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평소 아델리아는 주말에도 단출한 복장을 입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축제라서 그런지 옷에 힘을 강하게 준 듯했다.

목까지 기른 갈색 단발머리와 화장기 하나 없는 미모는 그대로였지만 옷이 날개라고, 흰색 셔츠 위에 덧입은 갈색 조끼와 각선미를 드러내는 가죽 바지로 하여금 본인만의 특색을 온전히 표출하고 있다.

아카데미에서 봤을 때와 복장만 다르지 그녀만의 유쾌하면서 활기찬 매력은 전혀 퇴색되지 않았다.

"다른 애들은 어디 가고 너 혼자만 보고 돌아다니고 있어?"

아델리아는 허리에 손을 척 얹으며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나는 아직까지 간질거리는 귓구멍을 손가락으로 후비적거리다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잠깐 일이 있어서요. 그러는 아델 누나는요? 저희 누나랑 같이 있던 거 아니었어요?"

"원래는 그랬지. 그런데 잠깐 한 눈 판 사이에 니콜이 사라졌지 뭐야."

"...설마 길을 잃을 거예요?"

"그건 아니지. 길을 잃은 게 아니라 내가 니콜을 놓친 거야."

그걸 보고 길을 잃었다고 하는 겁니다. 나는 당당함을 넘어 뻔뻔한 아델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전시회가 개최되었다지만 우리 영지는 좁은 편인데 길을 잃어버렸다니 아카데미에서는 어땠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아델은 내가 헛웃음을 흘리자 본인도 민망했는지 헤실헤실 웃으며 뺨을 긁적거렸다. 본인이 말해놓고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 어쨋거나 니콜을 만날 때까지 잠깐 동행해줄래? 내가 워낙 길치여서 저택으로도 못 돌아가거든."

"동행 정도면 상관없어요. 그런데 저택으로 돌아가는 것도 못 한다니 정도가 조금 심한가봐요?"

"아카데미에서도 숙소를 못 찾아서 하루종일 배회한 적도 있어. 대단하지?"

"그건 전혀 자랑거리가 못 되는 거예요. 아무튼 전시회는 즐기고 있죠?"

"즐기고 있기는 한데..."

아델리아는 내 질문에 약간 망설이더니 이내 밝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 미소에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억지로 짓고 있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든달까. 방금 전 그녀의 진짜 미소를 보아서 더욱 강한 의문이 들었다.

"응. 문제없이 즐기고 있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흐음... 알겠어요."

"귀염둥이 너는 어때? 네 영지에서 개최된 전시회잖아. 기분이 좋지 않아?"

서둘러 화제를 돌리려는 그녀의 질문. 덕분에 사정이 있다는 걸 대충 간파했지만 모르는 척 하기로 정했다.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다. 나는 보다 더 자세한 속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주제를 이어나갔다.

"당연히 좋죠. 우리 영지 역사상 오늘처럼 활기를 띄는 건 오늘이 처음이니까. 특히 종족을 불문하고 축제를 즐기는 모습이 가장 뿌듯해요."

"아. 그러고 보니까 수인 뿐만 아니라 마족도 가끔씩 보이더라. 난 정말 놀랐어. 마족은 보통 정체를 숨기기에 급급하거든."

"이게 다 제논 일대기 덕분이죠. 누나는 제논 일대기가 나오기 전에 마족을 어떻게 생각하셨어요?"

"나는 별 생각 없었는데? 마족이고 나발이고 나 혼자 먹고 살기 바빠서 남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거든."

본인은 흘러가듯이 이야기했지만 나로서는 결코 흘려들을 수 없었다. 아델리아의 과거를 단편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었기에.

보아하니 그녀에게 생각보다 복잡한 과거가 얽혀있는 듯했다. 원래 웃음이 많은 사람들은 내면의 상처가 많다고 들었다.

어쩌면 아델리아도 그런 것이지 않을까. 나는 싱글벙글 웃는 아델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 번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누나의 고향은 어디에요? 우리 누나에게 듣기론 엄청 멀리 있는 곳에서 산다고 들었는데."

"어... 그런 곳이 있어. 지역명도 없는 마을이라 알려주기도 애매하네. 애초에 아카데미에 들어간 것도 천운이었어."

내 질문에 아델리아는 머리 뒤로 깍지를 끼면서 대답했다. 시선이 오른쪽으로 향하는 걸 보면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결코 평민이라 생각할 수 없는 미모도 그렇고 귀족과 큰 연관이 있는 건 확실하다.

나는 거짓말을 하는 그녀를 한 번 힐긋거렸다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쉽겠어요."

"뭐가?"

"지역이 멀어서 가족이랑 축제를 즐기지 못 한다는 거요."

"가족이라..."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린 아델리아는 킥- 웃더니 아련함을 담으며 작게 대답했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합쳐져 아련함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그러게. 네 말대로 원래 이런 축제는 가족이랑 즐겨야 되는데."

"... ..."

"엄청 재미있을 거야. 동생들이랑 재미있게 수다도 떨고, 부모님이랑 같이 맛있는 것도 사먹고..."

평소 괄괄하던 아델리아와 전혀 다른 분위기며 목소리다. 평소 허스키했던 목소리가 낮아지니 미묘함을 풍겼으나 마음 속에 억눌려 있던 슬픔마저도 느껴진다.

혹시, 과거에 가족을 잃어버린 경험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표정을 짓는 건 불가능하다.

나도 전생에서 가족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경험이 있어서 그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는 알고 있다. 딱 아델리아처럼 하늘을 올려다보며 추억을 회상한다.

옛날에는 일상에 지나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가 어느 때보다 행복했던 시절. 누구보다 든든한 우군이었던 가족들.

나는 아델리아가 추억 속에 잠겨있는 동안에 잠자코 기다려줬다. 추억에서 억지로 끌어내는 건 지양할 생각이다.

"음..."

그런데 갑자기 왜 나를 쳐다보는 거죠. 아련한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아델리아가 상념에서 빠져나왔는지 시선을 옮겨 나를 바라봤다.

하늘색 눈동자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아델리아에 의문을 품었을 쯤, 그녀가 씨익 웃더니 나지막이 입을 열였다.

"너 같은 동생이 있다면 정말 좋을텐데. 매일매일 귀여워 해줄 것 같아."

"전 누나처럼 왈가닥인 사람은 좀..."

"에이. 너무 튕기지 마. 나도 동생들에게는 잘해준다고? 그리고 너처럼 귀여운 동생이 있으면 막 보호해주고 싶다니까? 니콜이 어째서 너를 아끼는지 알 것 같아."

"어허. 손 치우세요. 저 여자친구 있는 몸입니다."

"지금은 없잖아. 조금만 만지자. 응?"

"안 돼요."

나는 변태처럼 달라붙는 아델리아를 제지하며 완강히 거부했다. 아델리아도 어디까지나 장난이었던 건지 내 제지에 힘없이 밀려났다.

그래도 나 같은 동생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던 모양인지 내가 단호하게 거부하자 꽤나 아쉽다는 모습이다.

"칫. 우리 사이에 이러기야? 너무하네."

"우리 사이가 뭔데요?"

"친구 동생이랑 누나 친구 사이?"

"그런 걸 남이라고 합니다."

"너무 야박한 거 아니야?"

"첫 만남부터 공을 집어던진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네요."

"...그거는 진짜 미안해."

아델리아와 재잘재잘 떠들면서 전시회를 구경하면서 중간중간  길거리 음식도 구매했다. 당연하지만 가격은 모두 내가 지불했다.

원래는 아델리아가 대신 돈을 내려고 했으나 영주의 아들로서 그것만큼은 사양하고 싶었다.

이때문에 아델리아가 고맙다며 은근슬쩍 내 볼살을 만지려고 했지만 내가 으름장을 놓자 아쉬워하며 물러났다.

"그나저나 네 여자친구랑 마족 공주님은 언제 돌아오냐?"

"글쎄요. 시간이 조금 걸린다고 했는... 응?"

한가롭게 닭꼬치를 먹으며 돌아다니던 도중이었다. 유독 한 곳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을 발견하여 나의 궁금증을 유발시켰다.

아델리아도 나와 비슷했는지 같은 방향에 시선을 고정시키면서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구경거리라도 난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죠. 한 번 가볼까요?"

"그러자. 때마침 심심했는데 잘 됐네. 하암."

아델리아는 꼬치에 남아있던 고기를 한꺼번에 다 해치우고는 뒤로 휙- 던졌다. 아무데나 무단 투기를 한 건 아니고 뒤에 쓰레기통이 있어서 그곳에 넣은 거다.

뒤도 보지 않고 정확히 쓰레기통에 꼬치를 던져버린 아델리아의 기술에 묘한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나는 군중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이어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 수록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귀에 속속 들어왔다.

"테르스 왕국에서 왕족들이 찾아왔다고?"

"그래. 왕태자와 왕녀 2명이라는데?"

"별 일이구만. 우리 제국에 테르스 왕족이 찾아오다니."

귀에 들어오는 이야기를 유추하건데 아무래도 테르스 왕국에서 귀빈들, 그것도 왕족들이 찾아온 모양이다.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여 고개를 쭈욱- 내밀었지만 사람들이 하도 많은 탓에 얼굴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결국 조금 있다가 기회가 되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포기했을 쯤, 나는 뒤늦게 아델리아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녀석들이... 여기에 왔다고...?"

"아델 누나?"

무언가 큰 충격이라도 받은 걸까. 아델리아의 안색이 급속도로 창백해지며 하늘색 눈동자가 정처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도, 심지어 팔을 잡아 흔들어도 아델리아는 제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 있을 뿐이었다.

"누나."

"... ..."

"누나. 정신차려."

"아? 아아."

결국 볼을 쭈욱 잡아당기며 강제로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아델리아는 볼이 꼬집히자 화들짝 놀라더니 하늘색 눈을 두어번 깜빡거렸다.

뒤이어 어딘가 멍해진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숨을 길게 내쉬며 활짝 웃었다. 억지로 웃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 뿐더러 나사가 빠져있는, 정말 어색한 미소였다.

"미, 미안. 잠깐 멍 때렸나보네."

"어디 문제 있는 건 아니지?"

"전혀. 나는 건강 빼면 시체인 몸이야."

헛소리를 하는 걸 보면 문제가 있는 게 확실하다. 나는 옹기종기 모여있는 군중들 너머에 있을 테르스 왕족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아델리아는 그들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테르스 왕국에서 왕족들이 찾아왔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자마자 혼이 빠져나간 반응을 보였으니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 같네.'

서둘러 이곳을 탈출하는 것이 나에게도, 무엇보다 아델리아에게도 신상에 좋을 것 같다.

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아델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내가 손을 붙잡자 아델리아가 움찔 떠는 것이 느껴졌다.

"...귀염둥아?"

"여기 있지 말고 다른데나 가죠. 사람이 많아서 비집고 들어가기도 어렵겠네."

"그... 잠깐 여기 있으면 안 될까?"

"왜요?"

"화,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내 개인적인 일이니까 너 혼자 가."

아델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부탁한다. 그리고 아직까지 창백한 안색과 떨리는 눈동자, 그리고 뺨에서 흐르기 시작하는 식은땀까지.

그 짧은 사이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 것만 해도 무시할 수 없는데 아델리아는 입술까지 파르르 떨고 있다. 긴장을 넘어 불안 증세를 보이는 중이다.

이대로 가다간 아델리아에게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 극도의 불안 상태에 놓이면 사람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법이니.

그녀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괜히 복잡한 일에 휘말릴 수도 있으니 단호하게 거부했다.

"안 돼요. 지금 누나 상태가 어떤지나 알아요? 저쪽이랑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안정을 취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 절대 아니야.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니까 어서 손 떼. 잠깐만, 잠깐만 확인하면 된다니까?"

아델리아는 다급해졌는지 이거 놓으라며 손을 찰싹 찰싹 때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잡아끌었다. 불안 증세가 심해져서 그런지 힘을 제대로 줄 수 없는 모양이다.

얼마나 불안해 하면 아카데미에서 무학 조교를 맡고 있는 그녀가 이리 유약해질까.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무시했겠지만 니콜의 소중한 친구여서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우선 심호흡을 하시고 마음부터 차분히 가라앉히세요. 손만 잡고 있는데 맥박이 요동치는 게 느껴지니까."

"그, 그래? 그정도로 심해?"

"가슴에 손을 올리고 생각하시는 게 어떨까요?"

내 권유에 아델리아가 본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본인의 상태를 파악했는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쉬었다.

이에 아델리아의 손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아델 언니?"

낭랑하면서도 앳된 목소리가 귀를 비집고 들어왔다. 어리디 어린 목소리에 나는 물론이고 아델리아도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 내 눈에 들어온 건 아델리아처럼 하늘색 눈동자였다. 마리와 리나처럼 진한 파란색이 아닌, 아쿠아 마린과 같은 옅은 색채.

그 다음으로는 여자애 곁에 있는 두 명의 남녀들. 하나같이 하늘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닌 미남미녀여서 독특한 개성을 뿜내고 있다.

빨간색 머리카락을 지닌 나와 확연히 대비되는 색깔이라 더욱 신비롭게 다가왔다.

"아델 언니다!"

잠깐 시간이 멈춘 듯한 상황 속에서 인형처럼 귀엽게 생긴 소녀가 눈을 반짝거리며 아델의 이름을 크게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아델리아가 몸을 흠칫 떨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이윽고 소녀가 아델리아에게 다가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기 직전,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며 제지시켰다.

어깨를 붙잡은 손의 주인은 옆에 서 있던 딱딱한 표정의 여인이었는데, 드레스가 아닌 기사가 입을 법한 제복을 입은 모습이다. 포니테일로 묶은 스타일과 합쳐져 성숙한 매력을 은연 중에 흩뿌리고 있다.

"안 돼."

"엥? 히리야 언니?"

제복의 여인이 중저음의 간결하고 무뚝뚝한 말투로 저지하자 소녀가 의문에 찬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소녀의 의문에도 히리야라 불린 여인의 시선은 오롯이 한 곳에 고정된 상태였다.

다른 건 몰라도 결코 호의적은 시선은 아니었다. 사실상 경멸에 가깝다고 무방한 수준이다.

나는 그 시선이 향한 곳을 향해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 ..."

앞의 사람들과 똑같은 아델리아의 하늘색 눈동자가 정처없이 흔들렸고.

두근- 두근- 두근

손만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심장이 격하게 요동치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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