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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91화 (92/763)

< 91화 >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응?"

나와 일행은 인간 여자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던 마족 남자에게 다가가 잠깐 그들을 불렀다.

마족은 내 부름에 연인으로 추정되는 인간 여자와 대화하는 것을 멈추며 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가르츠가 양의 뿔 같은 형상이라면 이 남자의 뿔은 길고 구불구불하게 위로 뻗어있었다.

외모는 마족의 종족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흑발 적안이었으며 세실리의 호위기사, 가르츠와 달리 체격이 듬직한데다 호탕하고 열정적으로 생겼다.

연인으로 추측되는 인간 여자 또한 마리와 세실리에 비해서 떨어질 뿐이지, 단아하면서 아기자기한 미모를 드러내고 있다.

다만 둘 사이의 체격이 좀 크게 나는지라 여자 쪽이 거의 달라붙는 수준으로 남자의 팔을 꼭 붙잡고 있다.

"...무슨 일이십니까?"

마족은 처음에 경계심을 듬뿍 담으며 물었으나 세실리를 발견하고는 이내 표정이 한층 누그러졌다.

아무래도 같은 마족이 곁에 있으니 적어도 불손한 의도로 접근한 게 아니라고 판단을 내린 모양이다.

다만 연인으로 추측되는 여자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마족이 경계심을 약간 풀자마자 그의 팔에 더욱 찰싹 붙었다.

나는 매미마냥 마족의 팔에 달라붙어 있는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마족과 마주했다.

이윽고 세실리처럼 붉디 붉은 눈동자와 마주하며 궁금한 점을 입 밖으로 꺼냈다.

"다름이 아니라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묻고 싶은 거요?"

"네."

"음... 귀족분들께서 무엇이 궁금하신지 모르겠지만 성심성의껏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남자는 우리의 외모와 복장을 보고 단번에 귀족임을 꿰뚫어 본 듯했다.

대신 세실리가 헬리움의 공주인 건 전혀 모르는 듯했다. 헬리움에서도 인간 사회처럼 계급이 존재하니 이 남자가 평민이라면 세실리가 누구인지 모를만도 하다.

"라이..."

그사이 아직도 팔을 붙잡고 있던 여자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마족을 불렀다. 우리가 귀족이라는 걸 알자마자 더욱 불안해진 얼굴이다.

이에 라이라고 불린 마족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툭- 툭- 두드려줬다.

듬직한 남자친구의 위로에 힘을 받았는지 여자도 약간이나마 안심한 얼굴이다.

나는 돈독해 보이는 그들의 유대감에 더욱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그녀를 안심시켰다.

"우리 나쁜 사람 아니에요. 정말로 궁금한 게 있어서 접근한 거니까 너무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라이 씨라고 하셨나요?"

"네. 라이 에스토르라고 합니다."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다른 게 아니라 우리 영지에 어떻게 오셨는지 궁금해서요."

내 질문에 라이는 나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세실리를 한 번 힐긋거렸다. 그리고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제가 마족이라서 그런 것 같군요."

"정확합니다."

"흐음..."

여자가 매달린 팔이 아니라 다른 손으로 턱을 긁적거리는 라이. 나는 그의 입이 떨어질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만약 세실리가 없었다면 내 질문을 듣고 약간의 의심을 품었겠지만 그런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라이도 어디까지나 인터뷰에 가깝다는 걸 눈치채지 않았을까.

그래도 마족인만큼 다사다난한 경험을 겪었을테니 마냥 쉽지는 않을 것이다.

"우선 당신의 영지에 방문한 이유는 다른 사람과 동일합니다. 우리 둘은 제논 일대기의 팬이니까요. 그외에는 없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그러면 개인사에 가까운 질문인데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라이 씨도 아시다시피 마족은 제논 일대기의 출간 전까지 함부로 모습을 못 드러냈습니다. 정체를 숨겨도 들통나는 순간 모진 대우를 받기 일쑤죠."

내가 설명을 이으면 이을수록 라이는 무덤덤한 표정인 반면 여자의 표정에는 의심이 더욱 강해졌다.

보아하니 라이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는데 그를 악마로 취급하는 게 불편했던 모양.

나는 여자 쪽을 한 번 힐긋거렸다가 본론에 들어섰다.

"그러나 제논 일대기가 출범되고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마족의 인식은 완전히 바뀌었고 악마로 취급받는 일은 대폭 하락했죠. 그러니 제 질문은 이겁니다. 라이 씨는 언제 헬리움 밖으로 나왔고, 또 어떤 인생을 살았으며 마지막으로 옆의 연인 분과 만났는지 궁금해서요."

"그런 거였습니까? 이거야 원. 의심한 제가 다 민망해지는군요. 하하하."

내 질문을 듣고 의심을 완전히 풀었는지 라이가 호방하게 웃었다. 덕분에 여인도 살짝 의심이 풀어진 모습이다.

뒤이어 라이는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밝은 미소를 지으며 본인의 인생사를 하나 둘씩 꺼내기 시작했다.

"당신 말처럼 저는 헬리움 출신입니다. 그리고 약 5년 전에 인간 사회로 나왔죠. 정체를 숨기는 건 마법이 있으니 조심만 한다면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세월동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인연을 맺었죠. 물론 위기가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간혹 정체를 들켜 인연을 끊을 수밖에 없던 적도 많았죠."

"헬리움 밖으로 나온 이유는요?"

"별 거 없습니다. 헬리움에만 있으니 몸이 쑤셔서 가만히 있지를 못 하겠더군요.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나온 겁니다."

라이에게는 천성적으로 모험가 기질이 있는 듯했다.

마족이 어떤 차별을 받는지 알면서도 모험을 떠난 걸 보면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무모하다 해야 할지 모르겠다.

"헬리움 밖으로 나선 마족들은 거의 좋지 못한 비극을 겪었어. 그럴만한 가치가 있던 거야?"

가만히 듣고 있던 세실리가 다소 이해할 수 없다는 어조로 라이에게 물었다.

정중하게 경어를 사용한 나와 달리 세실리는 라이에게 말을 놓은 모습이다. 하기야 본인의 백성이니 굳이 존댓말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라이는 질문을 한 세실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본능적으로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실로 남자다운 반응에 하마터면 피식 웃을 뻔한 걸 간신히 막았다.

뒤이어 그는 억지로 세실리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켜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눈동자가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는 게 포인트다.

"크흠.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아니라 그럴만한 가치를 찾기 위해 나선 겁니다. 헬리움에서만 살기에는 우리 마족은 다른 종족보다 오래 사니까요. 비록 좋은 일도 겪고 힘든 일도 겪었지만 지금은 좋은 일을 겪고 있습니다."

"옆의 애인 분을 말씀하시는 거죠?"

"네. 제가 마족이라는 걸 알아도 제 곁에 있어준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것도 제논 일대기가 나오기 전에 말이죠."

제논 일대기 속 릴리와 진의 이야기는 결코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으니 이들같은 존재가 있을거라 예상하고 있었다만 막상 직접 만나게 되니 기분이 묘해졌다.

나는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내뿜는 중인 두 남녀를 보다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로맨틱한 이야기네요. 제논 일대기 속에서나 보던 이야기를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하하. 안 그래도 지금까지 그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그럼 지금처럼 정체를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던 건 언제부터였나요?"

"당연히 제논 일대기의 5권 이후부터입니다. 그전까지는 정체를 숨길 수밖에 없었죠."

마족의 인식이 본격적으로 변한 건 5권의 클라이막스이자 지금까지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장면, 사크란의 희생이다.

그 명장면 이후부터 마족을 향한 인식이 180도 뒤바뀌었으니 그때부터 본모습을 당당하게 드러낸 걸로 추측된다.

"그래도 괜찮아? 제논 일대기로 우리 마족을 향한 시선이 달라졌다지만 그간 발생했던 갈등의 골은 해소되기 어려울텐데."

세실리의 질문이다. 그녀는 헬리움의 공주이니 차별적인 시선으로부터 어느정도 자유로웠으나 평민의 사정은 잘 모르고 있다.

이 걱정은 자연스러운 것이, 마족이 다른 종족들에게 핍박을 받은 기간은 무려 1000년에 달한다. 1000년이라는 시간동안 서로의 감정이 희석되기는커녕 유지되었다는 의미다.

더군다나 세이비어에서 마족을 악마로 단정지으며 학살한 역사도 있었으니 둘 사이의 갈등의 골은 협곡보다 깊을 터.

그러니 마족 측에서도 그들을 고깝게 바라보거나 경멸할 수도 있으며, 다른 종족도 여전히 그들을 악마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맞습니다. 제논 일대기 덕분에 생활은 편해졌지만 여러모로 차별적인 시선은 잔존해 있죠. 한 달 전에는 마족이라는 이유로 여관에 묵지 못 하거나 의뢰를 못 받은 경우도 있습니다."

"... ..."

라이의 이야기를 듣고 전생에 만연했던 인종차별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특정 나라를 제외하고 인종차별은 엄격히 금지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종종 들려오는 소식이 바로 인종차별로 인한 범죄다.

이 세상은 그 인종차별보다 더한 종족차별이 존재할테니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덜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린 아직 멀었구나."

세실리는 라이의 이야기를 듣고 쓸쓸하게 웃었다. 확실히 전보다 훨씬 나아졌을 뿐, 마족을 향한 선입견은 여전했다.

라이는 세실리의 쓸쓸한 미소를 보더니 걱정 말라는 투로 얘기했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를 향한 좋지 못한 시선은 남아있지만, 더이상 우리 마족이 위축될 일은 없을테니까요. 공주님도 아시겠지만 제논 일대기는 우리 마족에게 자긍심을 품어줬습니다."

"...날 알고 있었구나?"

"물론입니다. 그 목걸이를 낄 수 있는 건 왕족밖에 없으니까요. 뒤늦게 알아뵈어서 죄송합니다."

나는 라이의 말을 듣고 오늘 세실리가 착용했던 목걸이를 확인했다.

겉보기에는 낡고 오래된 은목걸이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마족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행사에서도 저 목걸이를 꼈었나?'

이놈의 기억력이 좋지 않아 그때도 이 목걸이를 착용했는지 모르겠다. 그때 세실리의 드레스가 워낙 파격적이라 그것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야. 보아하니 애인이랑 잘 즐기고 있는 것 같았는데 괜히 내가 방해한 것 같네."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즐거운 이야기였죠."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볼게. 넌 우리 마족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좋겠어?"

"아까도 말했다시피, 제논 일대기에 알려준 내용대로 나아가면 충분합니다. 악마로 태어났으나 빛을 향해 나아가는 그 누구보다 인간다운 존재. 이거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라이는 만면에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충실히 대답했다. 확고한 신념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대답이었으며 의심이라고는 하나도 묻어있지 않았다.

내가 책에 쓴 내용이 특정 사람들에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준다. 실로 뿌듯한 결과이지 않을 수 없었다.

"...네 말이 맞아. 그게 우리 마족의 정체성이지. 아무튼 간에 대답해줘서 고마워."

"공주님도 부디 빛을 찾길 바라겠습니다."

라이는 세실리에게 덕담을 건내주면서 팔에 붙어있던 여자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보아하니 라이는 저 여자와 인연을 맺으면서 빛을 찾은 것 같다.

비록 수명 차이로 인한 헤어짐이 있겠지만,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리라.

이순간만큼은 그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줄테니.

"빛이라..."

세실리는 작게 중얼거리더니 나에게 천천히 고개를 옮겼다. 나 또한 그녀와 얼굴을 마주했다.

이어서 한동안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녀는 생긋 웃더니 라이에게 시선을 옮겼다.

"고마워. 덕분에 나에게 빛이 무엇인지 다시 깨달은 것 같아."

"도움이 됐다니 영광입니다."

"영광은 무슨. 그럼 우리는 가볼게. 아참. 당신 이름이 어떻게 되죠?"

"...베로니카 에첸스라고 합니다."

"베로니카 씨도 라이의 곁에 꼭 붙어있으세요. 우리 같은 마족은 빛이 떠나가면 방황하기 일쑤니까."

"...네."

외모처럼 소심하디 소심한 대답이다. 세실리는 베로니카의 대답을 듣고 빙긋 웃더니 나에게 말했다.

"우리도 이제 가자."

"네. 마리?"

"...그래."

마리는 내 부름에도 나를 쳐다보지 않고 세실리에게만 시선을 고정시켰다.

대답을 해도 뭐랄까... 왠지 모르게 경계를 하고 있다고 할까. 게다가 팔짱까지 끼며 자신의 몸을 더욱 밀착시켰다.

덕분에 물컹한 감각이 느껴져서 당황했지만 마리의 표정을 보고 의문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마리의 푸른색 눈동자에는 짙은 경계심이 깔려있었으니.

아까 전 세실리와 라이가 나누던 대화를 듣고 무언가 느낀 바가 있던 모양이다. 내가 그리 생각하는 동안 마리는 세실리를 바라보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세실리."

"응? 왜?"

"너 혹시 이상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지?"

불안함이 담긴 그녀의 물음에 세실리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이내 싱긋 웃었다.

그리고 눈을 반쯤 뜨며 붉디 붉은 눈을 요사스럽게 빛내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답했다.

"글쎄? 난 네가 무슨 질문을 한 건지 모르겠어."

"너..."

"음... 마리? 이참에 우리끼리 잠깐 개인적인 대화를 나눠볼까?"

세실리는 그 말을 남기더니 나를 바라보며 말을 끝마쳤다.

"너에게 중요한 말이 될 수도 있거든."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녀의 뿔에 붉은빛이 더욱 진해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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