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90화 (91/763)

< 90화 >

전에도 언급했지만 예술가는 배고픈 직업이다. 본인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도구가 필요하며, 그 도구의 가격조차 만만치 않다.

더군다나 예술가들은 본인만의 신념이나 철학 같은 부분이 확고하여 기껏 완성된 작품을 폐기하기 일쑤다. 이탓에 돈은 돈대로 나가고 작품은 작품대로 완성도가 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런 구조로 인해 예술은 귀족들이나 즐기는 문화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귀족에게 돈이란 도박이나 사치를 심하게 부리지 않는 이상 썩어넘치는 것이니 예술계에 종사하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러므로 유명한 예술가들을 훑어보면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귀족이거나 돈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 상단이다. 때문에 예술은 한동안 귀족의 전유품이었으며 현재처럼 악단이나 극단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테르스 왕국에서 제이로스 혁명이 발발한 이후 문화가 전국민적으로 퍼졌으며 평민이나 하층민임에도 불구하고 예술계에 몸을 던지는 이들이 증가했다.

물론, 어지간한 천재성을 보유하지 않는 이상 성공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했으며 대부분 돈을 탕진하여 손을 떼는 편이다.

예술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데 정작 자신의 작품을 알아주는 이들이 있어야 돈을 벌 수 있는, 그런 아이러니한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다.

허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꾸준히 본인만의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들이 있는 법이다. 애시당초 예술가는 돈보다 명예를 택한 부류가 많으니 손을 뗄래야 뗄 수 없다.

이때문에 평민이나 하층민 출신의 예술가들은 하나 같이 독기가 강하며 본인만의 신념이나 철학이 확고하다. 여기에 더해서 지칠 줄 모르는 인내심과 체력까지.

이런 부류들은 둘 중 하나다. 참다 참다 지쳐서 나가떨어지거나 기어코 성공하여 대중들에게 본인의 이름을 각인시키거나.

이 세상 사람들은 후자의 경우를 장인 정신이니 뭐니 하면서 추켜세우지만 전생의 기억이 있는 나에게는 딱 이 한 마디로 정리가 가능했다.

'변태'라고.

"...이게 뭐야?"

그리고 나는 그런 변태들에게 시간과 돈, 그리고 영감만 있으면 어떤 결과물이 나타나는지 마을에 입성하자마자 여실히 체험할 수 있었다.

내가 마을 입구에서부터 당당히 자리를 차지한 무언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세실리가 한 마디 툭 내뱉었다.

"조각상이네."

"조각상인 건 나도 알아. 그런데 이게 무슨... 왜 이렇게 커?"

세실리의 감상평에 마리가 대신 받아쳤다. 하지만 그녀도 나처럼 어마어마한 위용을 뿜내는 조각상에 정신을 빼앗긴 모습이다.

나는 한동안 못 박힌 듯이 자리에 서서 조각상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현재 내가 보고 있는 조각상의 외양을 설명하자면 젊어보이는 남자가 몽둥이를 든 중년인에게 두들겨 맞고 있다.

젊은이는 때리지 말라는 것처럼, 쭈글거리는 자세로 막기에 급급했고 중년인은 신난다는 표정으로 몽둥이를 휘두르는 중이다.

여기서 괄목할 점은 세심하게 묘사돼 있는 근육도 근육이지만 표정이 가장 인상적이다.

생동감이 넘쳐야 된다고 말해야할지, 아니면 진짜 사람의 표정을 본따서 조각했다고 할지.

무엇보다 이걸 다 '조각'을 한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퀄리티가 무시무시하다.

"여기 팻말도 있네. 내용은... 스승에게 훈련받는 제논이라는데?"

조각상을 감상하고 있는 도중에 팻말을 발견한 세실리가 우리에게 설명했다.

조각상을 보자마자 이미 직감한 거지만 1권 초반부에 있던 장면을 고스란히 묘사할 줄은 생각치도 못 했다.

나는 쓸데없이 고퀄리티인 작품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많고 많은 장면 중에 왜 이걸..."

"그것도 여기 적혀있어. 스승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배우는 게 남일 같지 않아서 조각했다네."

친절한 설명 고맙습니다, 세실리 누나.

그래도 황당한 건 여전해서 쉽사리 헤어나올 수 없었다.

표정이 정말로 일품이라 얼굴에서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원작자로서 기분이 어때? 첫 도입부 내용을 그대로 갖고 온 거잖아."

"흐익!"

작품에 시선을 떼지 못 하는 사이 세실리가 내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농후한 그녀의 목소리가 귀 안쪽을 파고들었다.

안 그래도 섹시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인데 귓가에 대고 소근거리니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귀가 간지럽다 못해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였다.

"까, 깜짝이야. 놀랐잖아요."

"후훗. 그래서 대답은?"

내가 놀라던 말던 세실리는 빙긋 웃으며 나에게 물었다. 그에 귀를 손으로 감싸며 다시 작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나는 그림에도 약간의 소질이 있어서 삽화를 추가하는 편이다.

덕분에 독자들도 등장인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또한 그림 뿐만 아니라 이야기 속에도 외모 묘사 하나만큼은 열심히 한 편이다.

그래서일까. 조각상이 묘사한 제논과 스승의 모습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판박이다.

'이거 하나 조각하려고 몇 달이 걸렸을까...'

조각사에게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마음이다. 이건 단순히 팬심 정도가 아니라 존경을 보내는 수준이었으니까.

비록 나는 조각가가 아니지만 이정도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정성을 쏟아부었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특히 조각가는 스승의 도움이 없이는 성장이 거의 불가능하며 심지어 천부적인 재능에 결과물이 바뀐다.

"뿌듯하면서도 조각가에게 존경심이 드네요. 저는 글만 쓰면 되지만 이 사람은 조각을 했잖아요."

"너무 자신을 낮추는 거 아니야? 너는 글로 세상을 바꿨잖아."

"시선이 다를 뿐이죠. 어쨋거나 다른 것도 한 번 둘러보죠. 마리, 가자."

"응? 아아. 알았어. 가자."

조각상을 감상하느라 한동안 조용하던 마리를 부르고 다른 작품을 찾아 발걸음을 움직였다.

뒤이어 얼마 가지 않아 또다른 조각상을 찾을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 거리 전체에 조각상이 전시된 모양이다.

"이건 진이랑 릴리인가?"

"뿔이 있는 걸 보면 확실하네."

"예쁘다."

거리에 지나다니는 행인들과 관광객이 많았지만 조각상들을 감상하는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가끔 가다가 세실리나 마리에게 시선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도 작품을 관람하는데 집중했다.

"저 여자 마족 아니야?"

"그러게. 마족 중에 참석한다고 한 사람이 있었나?"

"보아하니 귀족들인 것 같은데 괜히 건드리지 말자."

하지만 역시 중세 시대라고, 가끔씩 내 귀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수근거림이 귀에 들어왔다.

특히 가장 거슬렸던 건 단연코 마리와 세실리를 향한 음담패설이다. 흘려듣고 싶어도 흘려들을 수가 없어 눈쌀이 찌푸려졌다.

물론 두 여자 모두 각자 개성에 맞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데다가 몸매가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있어 자연스레 눈길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럴 때는 유독 밝은 내 귀가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아무것도 안 들렸으면 좋겠...

딱!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세실리가 말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다소 시끌벅적했던 마을의 소음이 하나도 들리지 않고 주변이 고요해지는 것이 아닌가. 마치 이 공간에 우리밖에 없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조용해졌다.

이에 눈을 깜빡거리다가 세실리를 쳐다보니 그녀가 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침묵 마법이야. 주변이 조금 시끄러워서 조치를 했지. 아이작 네가 불편해하길래."

"...혹시 이번에도 얼굴에 다 드러났나요?"

"응. 난 저런 이야기 많이 들어서 상관없지만 네가 불편해하니까 나도 기분이 나빠져서. 그리고 이게 훨씬 낫잖아?"

나는 세실리의 배려에 쓴웃음을 지었다. 겨우 나 하나 때문에 마법을 사용했으니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을 것이다.

마법을 숨 쉬듯이 사용하는 마족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한 거다.

'그런데 자기도 기분이 나빠진다라...'

굳이 뒷말을 붙일 필요가 있었을까. 나는 상냥하게 웃는 세실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잠시 접어뒀다.

지금 중요한 건 전시회지 세실리의 마음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바로 옆에 여자친구도 있는 마당에 이런 생각을 가지는 것 자체가 실례다.

이에 세실리에게서 얼굴을 떼어 마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리는 전시회 자체에 빠져들었는지 조각상을 뚫어져라 감상하는 중이었다.

"마리도 괜찮지?"

"응? 뭐가?"

"음... 아냐."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볼을 꼬집었다. 마리는 볼이 꼬집히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드러냈다.

"볼을 왜 꼬집어? 뽀뽀라도 해달라는 거야?"

"조금 있다가. 우선 다른 곳부터 둘러볼까?"

"알았어. 그나저나 갑자기 왜 주변이 조용해졌지?"

"조금 시끄러워서 세실리가 마법을 썼어."

이후로 마을 깊숙히 들어가 본격적으로 전시회를 빙자한 축제를 즐기기 시작했다. 황궁에서 다양한 지원을 해준 덕분에 먹을거리는 물론이고 볼 거리도 풍부했다.

특히 눈 여겨 볼 점은 행인 중에 인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족이 오가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인간이 제일 많았지만 엘프와 드워프, 수인, 심지어 '마족'까지 전시회를 관람하고 있다.

마족은 세실리처럼 칠흑 같은 흑발에다가 붉은 눈, 마지막으로 악마의 상징인 뿔을 갖고 있으니 더욱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마족도 있네요."

"그러게... 나 혼자만 참석한 게 아니었구나. 꿈만 같아..."

세실리는 자신을 제외한 마족이 전시회를 즐기는 모습에 놀람도 잠시, 살짝 젖어있는 목소리로 본인의 심정을 꺼냈다.

제논 일대기가 출범하기 전까지만 해도 마족은 시한폭탄 취급을 받아 대놓고 거리를 활보하는 건 불가능했는데 지금은 축제를 즐기고 있다.

언제나 마족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그녀로서는 감동에 젖을 수밖에 없다.

나도 그녀처럼 놀란 건 마찬가지였으나 이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전시회를 즐기는 중인 사람들을 바라봤다.

전시회 하나만으로 모든 종족이 한데 모여 축제를 즐기고 있다. 제논 일대기가 나오기 전이었다면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으며 그만큼 세상이 변했다는 증거였다.

'점점 더 욕심이 나네.'

아버지는 이 전시회 자체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여지가 있다고 했지만, 막상 전시회를 두 눈으로 지켜보니 욕심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었다.

지금의 전시회처럼 모든 종족이 행복하게 즐길 수 있는 축제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종족간의 갈등의 골은 여전하겠으나 그건 차차 좁혀나가면 되는 것이다.

나는 인파 속에 섞여 전시회를 구경 중인 마족들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옮겼다.

세실리는 자기가 보는 광경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듯, 두 손을 꼭 맞잡은 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모라시여... 저와 우리 마족에게 이런 축복을 내려주셔서..."

"... ..."

마족이 주로 모시는 신, 모라에게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자니 내 가슴이 다 뭉클해졌다. 본인은 공주의 신분이어서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나 다른 마족은 아니었을테니 더 감동스러웠겠지.

괜히 민망해져 뒷목을 매만지다가 시선을 옆으로 돌리니 마리와 딱 눈이 마주쳤다.

마리도 세실리가 기도하는 모습을 봤는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나에게 속삭였다.

"우리 귀여운 작가님. 이제 작가님이 얼마나 대단하신지 알겠죠?"

장난스럽게 굴자 그냥 말없이 볼을 꼬집어주는 걸로 대신했다. 백설기처럼 새하얗고 말랑말랑한 볼을 꼬집을 때마다 중독성이 장난아니다.

마음 같아서는 주물주물거리고 싶었지만 보는 사람이 많아 그럴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나는 마리의 볼을 꼬집고는 세실리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이윽고 세실리가 천천히 눈을 뜨며 촉촉하게 젖은 붉은눈이 드러나자 그녀에게 제안했다.

"누나. 한 번 저 사람에게 가보는 건 어때요?"

"응?"

내가 권유하자 세실리가 의문에 찬 표정으로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왠지 모르지만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더욱 짙어진 느낌이 들었다.

"누나도 궁금하시잖아요. 저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이곳으로 왔는지. 인간과 같이 있는 걸 보면 재미있는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한 번 물어보는 건 어떨까요?"

"으음..."

세실리는 내 설명을 듣고 인간의 무리와 섞여 작품을 관람하는 마족 쪽을 바라봤다.

만약 헬리움에서 온 귀족이었다면 예복을 입고 있겠지만, 현재 인간 무리와 섞여있는 마족은 독특하게도 장비를 착용하고 있다.

그러니 헬리움 밖으로 나와 세상을 떠돌고 있는 낭인이나 모험가일 확률이 높다는 것인데 제논 일대기는 1년 전에 막 출범했으니 여태까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이윽고 세실리는 한 인간 여자와 정답게 대화를 나누는 마족을 지켜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알았어. 한 번 가보자."

"좋아요. 마리?"

"흥. 이번만 봐줄게."

봐주기는 뭘 봐준다는 걸까. 나는 마리가 새침하게 대하자 의아함도 잠시 발걸음을 옮겼다.

세실리도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전보다 환한 표정을 지으며 작품을 관람하고 있는 마족을 향해 다가갔다.

"참자. 참아... 여기서 저지르면 안 돼..."

다가가는 도중에 세실리는 자신의 가슴을 약하게 두드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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