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89화 (90/763)

< 89화 >

고대하고 고대하던, 동시에 우려하던 전시회의 아침이 밝아왔다.

비록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부랴부랴 결정된 전시회지만 제국에서 수많은 자원과 인력을 투입한 덕택에 구실 정도는 마련했다.

게다가 전시회의 구성 자체가 조용한 건물에서 작품을 관람하는 형식이 아니라 축제에 가까운 형식이다.

텅 비어있는 영지에 작품을 전시할만한 공간을 따로 정하고 그 외에는 주민들끼리 즐겁게 놀면 끝이다.

또한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음악과 연극은 저녁에 계획돼 있으니 낮에는 영지 안을 돌아다니면서 전시된 작품을 감상하면 된다.

"어때? 잘 어울려?"

모든 준비를 갖춘 뒤 본격적으로 축제를 즐기기 전의 저택 내부.

나는 축제를 위해 드레스를 착용한 마리의 모습을 보며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하얀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예뻐도 너무 예뻤으니까.

어깨는 완전히 노출된 반면 가슴은 살짝 드러났으며 백색의 드레스라 그녀의 우유빛 피부를 더욱 강조시켰다.

전반적으로 화려한 문양이 거의 없는 수수한 외관이고 치맛단도 무릎에 간신히 닿을 정도다. 덕분에 유려하면서도 길쭉하게 뻗은 그녀의 맨다리가 온전히 드러나 시선을 빼앗았다.

지난 번 행사에서 입은 드레스가 마리를 성숙하게 만들었다면, 지금 입은 드레스는 그녀의 소녀스러움을 배로 증가시킨 모습이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하던가. 이런 변신이면 어느 남자던 간에 무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다.

'와. 진짜 이 사람이 내 여자친구라고?'

오죽하면 이렇게 예쁜 여자가 정말 내 여자친구가 맞는지 현실을 의심할 정도다. 그만큼 마리가 비정상적으로 예쁘다는 뜻이다.

게다가 아름다운 것도 아름다운 거지만 개성이 워낙 뛰어났다. 푸른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하얀 머리카락하며 우윳빛 피부, 그리고 보석처럼 빛나는 파란색 눈동자까지.

다른 사람이 절대 대체할 수 없을만큼 아름다웠으며 또한 사랑스러웠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마리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솔직한 감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예뻐."

"겨우 그걸로?"

"하늘에서 내리는 새하얀 눈을 닮았다는 여자를 표현할 때 너를 참고하면 될 것 같아."

"그게 뭐야? 정말 소설 작가다운 감상평이네."

마리는 내 칭찬이 낯간지러웠는지 얼굴을 붉히며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정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은 그녀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본 것도 잠시, 팔짱을 끼며 본격적으로 감상(?)을 시작했다.

그림이나 사진으로 남겨둘 수 없으니 기억으로라도 선명히 남기기 위해서다.

"...그렇게 쳐다보면 부끄러운데?"

"너무 예뻐서 어쩔 수 없어. 미안."

"됐어. 이제 밖에 나가기나 하자."

내 솔직담백한 고백에 마리는 얼굴을 붉힌 채 나에게로 종용했다. 나도 아쉬움을 뒤로 하고 감상 모드를 끝냈다.

어차피 마리는 오늘 하루 종일 이 드레스를 입고 돌아다닐테니 기억에 남기는 건 쉬울 것이다.

하이에나 같은 남자들이 마리에게 시선을 주는 게 좀 고깝긴 하겠지만. 물론 마리는 귀족이라는 티가 너무 나서 함부로 대하지는 못 할 것이다.

그리고 황궁에서 친히 경비경을 파견하여 치안에도 신경 썼으니 범죄가 발생할 확률은 극히 낮다.

"아. 두 사람 이제 나가는 거야?"

"응?"

슬슬 마리와 함께 저택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내 귀에 세실리의 매혹적인 목소리가 들어왔다.

이에 고개를 돌려 우리를 부른 세실리를 바라봤지만 곧바로 헛숨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혹시 나도 같이 가도 될까?"

세실리가 빙긋 웃으며 우리에게 권유했지만 현재 내 귀에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세실리의 미모가 하늘을 찌를듯이 아름다웠으니까.

팔과 등은 드러낸 채 끈을 목 뒤로 고정시키는 홀터넥 드레스라고, 덕분에 그녀의 자랑거리라 할 수 있는 가슴이 더욱 부각되었다.

다른 여자였다면 섹시하다는 평만 나오겠으나 세실리의 가슴이 너무 크다보니 야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심지어 재질도 은근 달라붙는 재질이라 온전히 드러난 몸매 덕분에 시선을 빼앗아갔다.

'그런데 목걸이가...'

여기서 약간 의아한 점이 있다면, 바로 세실리가 착용하고 있는 목걸이다.

드레스는 겉보기에도 비싼 값을 자랑할 것 같지만 목걸이는 낡디 낡은 외관을 띄고 있었다.

심지어 보석 하나 박히지 않은 평범한 은목걸이라 세실리의 외모에 비교해서 더욱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와... 저건 반칙인데..."

내가 목걸이에 집중하고 있을 때 옆에서 마리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 또한 고개를 끄덕임으로서 공감했다.

같은 여자이자 세실리를 고깝게 바라보던 마리마저 감탄을 입 밖으로 내뱉을 정도이니 현재 세실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번 행사 때의 세실리가 입은 드레스가 파격적이라면, 지금은 본인의 강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옷차림 하나만으로도 야시시함을 풍기고 있는데다가 고혹적인 외모로 하여금 내 시선을 강탈하는 중이었다.

꽈악-

유혹당하면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걸까. 나도 모르게 마리의 손을 붙잡아버렸다.

마리도 내가 손을 붙잡자 잠깐 움찔했지만 이내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세실리는 우리 둘이 손을 붙잡자 미묘한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빙긋 웃으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너희 둘의 데이트를 방해했다면 미안해. 사실 이 영지는 처음이라 나도 안내원이 필요하거든."

"아... 네."

"만약 너희가 거절한다면 나도 그냥 물러갈게."

나는 세실리의 부탁을 듣고 마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때마침 마리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피식 웃더니 다시 세실리에게 고개를 돌려 대답을 꺼냈다.

"알았어. 오늘만이다?"

"정말? 정말로 허락한 거지?"

마리가 허락할 줄은 생각치도 않았는지 세실리가 격한 반응을 보이며 반겼다. 붉은색 눈동자가 살짝 크게 떠지며 환희를 드러내더니 우리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물론이고 마리조차 떨떠름한 반응을 지을 정도다. 게다가 이쪽을 향해 걸어올 때 살짝씩 흔들리던 세실리의 가슴에 시선이 빼았겨 말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다행히 옆에 마리가 있다는 걸 인지하고 나서 서둘러 그녀의 반응을 체크했다. 정신을 차린 나와 달리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세실리의 흉부에 집중된 상태다.

푸른색 눈동자가 미약하게 떨리는 걸 보아 무시무시한 존재감에 압도된 모양이다. 심지어 이쪽을 향해 걸어올 때 조금씩 흔들렸으니 남녀를 불문하고 시선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을 것이다.

뒤이어 마리는 침을 꼴깍 삼키더니 시선을 떼어 얼떨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 알았어. 그대신 너는 내 옆에 있어야 한다? 아이작 옆으로 절대 오지 마."

"괜찮아. 나도 어차피 전시회가 목적인걸? 정말 허락해주는 거 맞지?"

"맞으니까 더이상 캐묻지 않아도 돼. 나도 너랑 얘기 좀 하고 싶은 게 있거든."

자꾸만 시선이 아래쪽으로 가려는 걸 막으려는지 마리의 눈동자가 약간씩 흔들리는 게 포착되었다.

같은 여자인 마리가 저정도인데 남자인 나는 오죽할까. 결국 버틸 수가 없어 눈을 질끈 감는 것으로 인내했다.

살결을 노출하는 것보다 살짝만 가린 게 더 야하게 느껴진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세실리는 본인이 서큐버스의 후예라는 걸 만천하에 광고하는 중이다.

'그때 유혹당한 게 이상하지 않다니까...'

비밀을 밝혀냈을 때 그녀가 나에게 저지른 행동이 떠올랐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찔하다 못해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음을 최대한 진정시켰다. 바로 옆에 여자친구가 있는데 이런 생각이 들다니 남자친구로서 실격...

'...은 무슨. 남자가 그냥 슬픈 동물이지.'

마리가 과연 이해해줄 수 있을지 의문이나 나중에 한 번 크게 혼나는 게 나을 것 같다.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서서히 뜨며 앞을 바라봤다.

방긋방긋 웃는 세실리의 얼굴이 시야에 잡혔다. 차마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아 애써 시선을 회피하며 헛기침을 토했다.

"아이작은 어때? 마리도 허락했는데."

"...저는 상관없어요. 그런데 경호원은 어디에 있어요?"

"그건 걱정하지 마.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테니까."

"그렇다면야..."

듣자하니 헬리움에서도 능력이 뛰어난 기사라고 했던가. 마족의 기준으로도 능력이 출중하니 안심할 수 있다.

'그런데 세실리는 다음 대 마왕으로 예정돼 있다 하지 않았나?'

아카데미에서도 그렇고 굳이 경호원을 대동할 필요가 있나 싶다. 물론 구색을 맞추려는 것일 수도 있을테니 내가 왈가왈부할 일이 못 된다.

아무튼 간에 세실리도 합류했겠다, 나는 모든 준비를 끝내고 저택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 옆에 서 있는 마리와 마리의 옆에 선 세실리도 따라 움직였다. 저택 밖으로 나오나자마 화창한 날씨가 우리를 반겨주어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비가 안 와서 천만다행이다.'

우리 영지는 전생의 대한민국처럼 뚜렷한 사계절이 특징이다. 그래서 지금쯤이면 비가 자주 와야 정상이지만 아직까지 그런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하늘도 구름 한 점 없이 말끔하여 내 마음마저 뿌듯해졌다. 뒤이어 나는 하늘을 올려다 보다가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저택 정문에는 경비원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대문을 여는 중이다. 마리의 저택과 달리 간소하고 평범한 외양의 대문이었지만 불만은 없다.

반대로 이런 축제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열심히 근무하는 경비경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고생하시네요. 근무가 언제 끝나죠?"

"곧 있으면 황궁에서 파견한 기사단이 올 겁니다."

"그럼 조만간 축제를 즐길 수도 있겠네요."

"하하. 그렇죠. 도련님도 축제를 즐기시길 바라겠습니다."

경비경과 서로 덕담을 주고 받은 뒤 대문 밖으로 발을 디뎠다.

축제가 진행되고 있는 마을과 저택 사이의 거리는 약간 떨어져 있으니 조금만 걸으면 금방 도착할 것이다.

그때까지 뭘 하나면, 당연히 잡담이다. 때마침 마리가 세실리에게 먼저 말을 걺으로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세실리. 이런 질문 하기에는 좀 그럴 수도 있는데 해도 될까?"

"응? 뭔데?"

"어떻게 하면 가슴이 그렇게 커질 수가 있어?"

변화구 없는 돌직구가 그대로 세실리에게 꽂혀들어갔다. 당사자인 세실리는 물론이고 가만히 듣고 있던 나조차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듣는 사람이 우리밖에 없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못 들은 척 했을 것이다. 어쩌면 모르는 사람인 척 했을 수도 있고.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의 푸른색 눈동자에는 짙은 호기심과 미약한 열망(?)이 담겨있었다. 세실리도 그걸 눈치챘는지 본인의 가슴을 한 번 쳐다봤다가 마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민망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왜 묻는 거야?"

"아이작이 자꾸 쳐다봐서."

"야."

"왜 부정하려고 해? 내가 모를 줄 알고?"

내가 어이없어 하자 마리가 명료히 받아쳤다. 전부 사실이라 할 말이 없어졌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는데 말할 수 없다는 기분이 이런걸까. 나는 어디 말할테면 말해보라는 표정의 마리와 눈싸움을 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항상 말하는 거지만, 남자는 슬픈 동물이다. 이에 마리는 의기양양해지더니 세실리에게 재차 말했다.

"나도 너처럼 커지면 아이작이 다른 곳에 눈을 안 돌릴 거 같아서 그래. 네가 이런 드레스를 입을 때마다 아이작이 너만 바라보잖아."

"마리. 너도 결코 작은 편이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지."

세실리는 투정을 부리는 아이를 타이르는 것처럼 사근사근한 말투로 마리에게 말했다. 실제로 그녀의 말마따나 세실리가 압도적인거지 마리도 평균보다 큰 편이다.

귀족이기에 평민보다 잘 먹고 잘 자는 건 물론이고, 몸매 관리까지 받았을터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크면 여러모로 불편한 점도 많아. 너도 대충 알고 있지?"

"알고는 있지. 그래도 아이작이 좋아할 거 같아서."

"그런 이야기는 나 없을 때 하면 안 될까?"

듣는 사람이 부끄러워 미칠 것 같다. 내가 애원하는 수준으로 부탁하자 마리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나를 놀려댔다.

"왜? 부끄러워?"

"당연히 부끄럽지. 어디 가서 그런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잠깐 귀 좀 빌려줘."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마리가 귀를 빌려달라고 손짓했다. 나는 또 무슨 요망한 짓을 벌일까 싶어 흠칫거렸다가 잠자코 귀를 빌려주었다.

이어서 마리는 세실리를 한 번 힐긋거리더니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두 손을 동그랗게 말며 내 귀에다 대었다.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왜냐고?"

-어차피 나중에 다 볼텐데.

그 말 하나로 인해 잘 가고 있던 내 두 다리가 우뚝 멈추었다.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 한 채 마리를 쳐다봤다.

마리는 본인 입으로 말해놓고도 창피했는지 새하얀 뺨에 홍조가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싱글벙글 웃는 표정을 보아 미리미리 빌드업을 쌓아놓은 듯했다.

솔직히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여자는 사랑에 빠질 수록 요물이라도 되는 것인지 점점 영악해졌다.

"자~ 이제 장난은 그만할게. 이제 축제를 즐기러 가자."

내가 한동안 못 박힌 듯 서 있기만 하자 마리는 내 손을 잡아 이끌며 마을로 걸어갔다. 나는 정신을 못 차린 채로 그녀의 손길에 이끌려갔다.

우리 둘이 앞서나가도 세실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마치 세계가 둘로 분리된 것처럼, 마리는 세실리가 제자리에 있던 말던 내 손을 잡아끌기 바빴다.

"...재밌네."

왠지 모르게 불길한 세실리의 읆조림을 끝으로, 전시회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미친. 이게 뭐야?"

"조각상이네."

"조각상인 건 나도 알아. 그런데 이게 무슨... 왜 이렇게 커?"

마을에 입성하자마자 세상에 변태는 많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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