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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88화 (89/763)

< 88화 >

아이작이 본인의 영지에서 손님들을 응대하고 있을 때 황궁에서도 예우를 담아 귀빈들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수도를 거치지 않고 마이샬 영지에 직접 방문한 사람들은 대부분 평민이거나 예술가, 그리고 백작 이하의 귀족들이다.

그 이상의 계급은 대부분 국가에서 중요 관직을 맡고 있어서 방문할 나라에게 공식적으로 초청을 보내는 편이다.

물론 비공식적으로 방문할 수도 있지만 괜히 사고라도 난다면 외교적으로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어서 지양하고 있다.

특히 미네르바 제국과 테르스 왕국은 견원지간이나 다름없는 사이인만큼 사소한 방문이라도 복잡한 절차를 거치고 있다.

그리고 현재, 테르스 왕국은 본래 자신의 수도에서 전시회를 개최하려 했지만 미네르바 제국에게 떠넘기듯이 권한을 양도했다.

미네르바 제국은 개최할 생각은 없고 그저 어필만 했으나 갑작스레 양도받으니 바쁘디 바쁜 나날을 보내기 시작했다.

보름을 살짝 넘어선 기간 안에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서 높은 관직의 귀족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야근을 했으며 이건 황궁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황태자와 황녀와 같은 왕족들이 일을 안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다른 곳에 시선을 두는 순간 나라가 몰락한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인지하고 있는 제국이다.

이로인해 황제로 즉위하지 않더라도 그 밑의 자식들은 특정 분야를 담당하여 정사를 돌본다.

500년의 역사 속에서 황제가 다양한 실책을 저질러도 나라를 말아먹을 수준의 암군이 탄생하지 않은 이유다. 게다가 레킬리스 공작가가 옆에 착 달라붙어 지켜보고 있으니 일을 할 수밖에 없다.

덕분에 황태자 레오르트, 그리고 황녀 리나는 최근 밀려들어오는 업무량으로 인해 제대로 된 잠도 못 자고 귀빈을 맞이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군. 최근 잠을 못 잔 건가?"

하늘처럼 푸른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 마지막으로 베일 듯한 콧날이 인상적인 미남자가 생글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왠지 모르게 시시때때로 장난을 잘 칠 것 같이 싱글벙글 웃는 그 미모가 짜증났던 것일까. 그와 마주하고 있는 레오르트도 싱긋 웃으며 한 마디 꺼냈다.

"누구 덕분에. 반대로 자네는 얼굴빛이 좋아보이는군."

"우리는 어디까지나 주최하는 쪽이 아니라 즐기는 쪽이니까. 기대를 한가득 담고 왔지."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미남자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레오르트의 눈 밑이 꿈틀거렸다. 그간 해일처럼 몰려오는 업무량으로 인해 그의 눈 밑에는 다크 서클이 진하게 새겨져 있었다.

황태자이니 관리를 엄중하게 받았을텐데도 불구하고 다크 서클이 새겨진 걸 보면 그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평소 예리함을 품던 파란색 눈동자에도 희미하게나마 빛을 잃을 정도로 피로에 젖은 상태다.

반면 푸른색 머리카락의 미공자이자 테르스 왕국의 왕태자, 라오스 듀커드 폰 커쳐스는 멀쩡했다. 오히려 멀쩡하다 못해 활기로 넘쳐났으며 여유까지 묻어나왔다.

대외적으로 라오스가 제국을 방문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전시회 관람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이유이지 내적으로는 복잡한 정치가 얽혀있었다.

테르스 왕국으로서는 전시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되어도 그만, 실패하면 쌍수를 들만한 일이었기에 마음을 편하게 먹고 올 수 있었다.

솔직히 전시회가 성대하게 망했으면 좋겠으나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적다. 제국에서도 테르스 왕국의 의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만큼 촉박한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을테니까.

라오스는 그저 축제를 즐기자는 마인드로 제국을 찾아온 것이다.

"근데 제국에서 무리를 해서라도 전시회를 빨리 개최할 이유가 있었나요? 저는 이해가 안 가는데."

라오스의 왼쪽에 앉아있던 귀여운 소녀가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라오스처럼 푸른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녔으며 긴 생머리와 단정하게 자른 앞머리가 특징이었다.

또한 인형처럼 깜찍한 외모와 가녀린 체구로 하여금 보호 본능을 일으켰다.

이 소녀의 이름은 라라 듀커드 폰 커쳐스. 테르스 왕국의 제 3왕녀이자 사남매 중 막내다.

큰 언니인 1왕녀는 이미 결혼하여 공식적으로 참석한다는 성명을 내지 않고 마이샬 영지로 향했으며 작은 언니인 2왕녀는...

"라라. 그런 질문은 실례이니 가급적이면 하지 말라고 했잖니?"

중앙에 앉은 라오스의 오른편에 앉아있었다. 여자치고는 중저음에 낮은 목소리가 특징이다.

외모 또한 그에 부합하듯이 딱딱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선천적인 아름다움은 감출 수 없었으며 포니테일로 질끈 묶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성숙한 미모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가장 독특한 점은 바로 그녀의 옷차림. 보통 이런 공식적인 상석에서는 드레스를 입어야 되지만 그녀 혼자만 기사들이 입을법한 제복 차림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히리야 듀커드 폰 커쳐스.

배경을 모두 제외하고도 테르스 왕국에서 출중한 능력으로 유명한 기사다.

"하면 안 되는 질문이었어요?"

"그래. 우리는 어디까지나 전시회를 즐기러 온 거라고 몇 번을 말했잖니?"

"그럼 사과할게요. 죄송합니다."

히리야의 다그침을 듣고 라라가 앞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에 레오르트는 물론, 그의 옆에 조신하게 앉아있는 리나도 쓴웃음을 지었다.

현재 라라의 나이는 고작 12살밖에 되지 않았으며, 궁금한 건 다 물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나이다.

하지만 히라야의 말처럼 결례를 저지른 건 변하지 않았기에 라오스도 진중한 목소리로 사과를...

"아니. 라라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 때마침 나도 궁금했던 부분이거든."

...하기는 무슨 그 반대였다. 히리야는 문제를 더 키우려는 라오스를 찌릿 노려보다가 팔짱을 끼며 묵묵히 눈을 감았다.

이런 복잡하고도 더러운 정치 세계는 그녀에게 질색이었지만 입장이 입장이다보니 억지로 참석한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왕국에 잔류하여 남은 훈련에 매진하고 싶었다.

그사이 라오스는 이 기회에 제대로 압박할 생각이었는지 생글거리는 얼굴로 남매에게 물었다.

"전시회를 개최하는 건 시간이 오래 걸려도 상관없는 일이지. 그런데 지금처럼 급히 준비를 할 필요가 있나 싶어."

"다 사정이 있다네. 자네들이 알 필요는 없어. 어차피 즐기면 되지 않은가?"

"흠. 혹시 제논 일대기의 작가와 크게 관련된 일인가?"

예리한 라오스의 지적은 레오르트는 물론 괜찮은 척 커피를 마시던 리나마저도 흠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지극히 미미한 반응이어서 라오스는 눈치채지 못 했다.

뒤이어 레오르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대답을 꺼냈다.

"역시 눈치가 빠르군. 자네의 말이 맞아. 제논에게 하루빨리 보여주고 싶어서 개최 일정을 앞당긴 거라네."

"거짓말도 잘 하는군."

블러핑이라고, 가끔 가다 진실이 거짓으로 들리는 경우가 적잖이 존재한다. 지금 레오르트가 꺼낸 진실도 라오스에게는 거짓으로 다가왔다.

테르스 왕국에서 이 잡듯이 찾고 있는 사람을 제국에서 먼저 찾는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겼기에. 심지어 지난 번에는 꼬리까지 밟아 곧 있으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그런 자신감 덕분에 라오스는 레오르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 판단했다. 레오르트로서는 실로 다행스러운 부분이었지만 마음이 요동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사실상 도박수에 가까운 말이었으니까. 여태까지 꺼낸 말은 거짓이 아니라 모두 진실이었다.

개최 일정을 어떻게든 앞당겨 아이작에게 보여준다. 그동안 레오르트와 리나가 그에게 저지른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 무리를 감행한 것이다.

'많이 성급했지...'

넉넉잡아 1년 후에 전시회를 개최해도 되지만, 그렇게 되면 테르스 왕국에게 기회를 빼앗길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된다면 아이작은 당연히 테르스 왕국에 방문할 가능성이 크지만 더 나아가 그곳의 문화에 심취할 수도 있다.

특히 리나의 말을 따르자면, 아이작은 역사를 사랑해 마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테르스 왕국을 찾아가 문화 연구를 할지도 모른다.

제국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눈 뜨고 코 베이는 식으로 빼앗길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역사학자로 제국에 종속되는 거지만 레오르트에게는 그게 그거다.

그런 레오르트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라오스는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시종일관 여유롭게 대했다.

"어쨋거나 잘 알겠어. 너희 제국이 준비하는 거니 마음 놓고 구경해도 되겠지. 제논도 참석한다 했으니 운이 좋으면 찾을 수도 있고."

"제논을 찾는다면 어쩔 셈이죠?"

레오르트가 아닌 리나가 경계심이 들어있는 음성으로 물었다. 레오르트와 달리 그녀는 아이작이 제논이라는 걸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이탓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라오스는 그녀의 질문에 한 눈을 치켜뜨며 의문을 드러낸 것도 잠시, 별 일 아니라는 투로 입을 열었다.

"당연히 우리 왕국으로 정중히 모셔가야지. 참고로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정중하게 데려갈 거야. 너희 제국에서 채가기 전에 말이지."

"제논은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본인의 마음을 드러냈어요. 그러다가 또 연재를 중단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우리 왕국이 언제 예술가들을 압박한 적이 있어? 리루스 악단에게 애국가를 작곡해달라고 했어, 아니면 매트릭스 극단에게 선전용 연극을 만들어달라고 했어? 심지어 제이로스 혁명을 연극으로 재현시켜도 우린 가만히 있었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시위 전까지 아이작의 명성을 이용할 계획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제국의 힘이 아무리 강력하다고한들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게 되는 순간 의미가 없어지니까.

안 그래도 수도 없이 인재를 빼앗던 제국이었으니 테르스 왕국으로서는 어떻게든 수를 써야만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제논의 명성을 이용한 선전이었다.

그러나 흔히 말하는 휴재 사태가 발생한 이후에 그 마음을 깔끔하게 접을 수밖에 없었다. 제이로스 혁명 같은 사건이 다시 한 번 발생하는 것만큼은 막아야했다.

대신 노선을 다른 방향으로 틀었다. 책을 쓰는 건 자유롭게 놓아두되 제논을 어떻게든 왕국에 귀속시키도록 만들자.

그거 하나만으로도 미네르바 제국은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밖에 없다. 테르스 왕국은 제이로스 혁명으로 인해 흔들리던 내실을 더욱 탄탄하게 마련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그리고 그런 거물급 예술가를 묶어두기 위해 가장 확실한 방법은...'

라오스는 팔짱을 끼며 묵묵히 앉아있는 히리야와 햄스터처럼 과자를 우물거리는 중인 라라를 번갈아봤다. 두 여자 모두 각자 개성에 맞는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으며 직위 또한 일국의 왕녀다.

세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제논에게 가장 적합한 여자들이다. 만약 평범한 예술가였다면 과분하다 못해 어림도 없는 이야기겠지만 제논이어서 가능했다.

허나 히리야는 이미 군인의 길을 선택하여 애매했고 라라는 나이가 너무 어리다. 정략결혼이라한들 최소한 성인이 되어야 가능하다.

무엇보다 제논은 현재 나이가 많은 현자로 추정되고 있는 바, 여자에 욕심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래도 이정도 정성을 보여준다면 제논도 마지못해 승낙해줄 터.

더군다나 굳이 히리야와 라라가 아니어도 된다. 비록 내다버린 자식이지만 '핏줄'이 이어진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까.

라오스는 헤일로 아카데미에 쫒겨나듯이 입학한 핏줄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 생활은 할만해?"

"어느 나라의 인재들이 우리 제국에 몸을 바친 덕분에 정말 편안하지. 문화와 복지 모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일세."

"하하하. 그야 그렇겠지."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건... 아. 혹시 아델리아 때문인가?"

레오르트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바가 있었는지 라오스에게 물었다. 리나도 그에게 들은 바가 있었는지 무덤덤한 표정이다.

이에 라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레오르트의 생각이 맞다는 걸 알려줬다. 다만 얼굴에는 미미한 불쾌함이 실려있었다.

"자네가 생각하는 사람이 맞을거야. 대신 그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으면 좋겠군."

"흠... 굳이 버렸어야 했나? 히리야처럼 기사가 되어도 상관없을텐데. 현재 아카데미에서 무학 조교를 맡는 중이고."

"... ..."

히리야는 레오르트가 본인을 언급해도 눈을 지그시 감으며 가만히 있을 뿐,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굳이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 했다는 모습이다.

그런 히리야의 무례한 반응에도 레오르트는 개의치 않았다. 앞뒤가 꽉 막혀있는 히리야의 성정은 여태까지 많이 보았기에 어련히 넘길 수 있다.

"만약 성을 버리고 평범하게 살았다면 그랬겠지. 하지만 사생아 주제에 인정받겠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별로 좋게 보이지 않아서 말이야. 아바마마도 본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실수라 말씀하셨고."

"아카데미에서는 크로스라는 성을 갖고 있다만."

"아카데미로 보내기 전에 왕족의 성을 사용하지 말라고 협박했거든. 아마 크로스라는 성은 자기 어머니의 성일 거야. 천하디 천한 창녀의 성이지."

"... ..."

제이로스 혁명 이전의 매운맛이 잔존해 있는 대답이다. 레오르트는 테르스 왕국의 국왕, 프리드리히의 개인사를 떠올렸다.

테르스 왕국민에게 프리드리히는 온화하면서도 왕답지 않게 한 여자만 사랑한 로맨티스트로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프리드리히 본인도 따로 첩을 두지 않고 오로지 왕비 한 명만 바라보며 사랑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터졌으니, 바로 프리드리히가 왕비를 만나기 전 욕정을 해소하기 위해 만났던 매춘부와의 관계다. 하필이면 그때 피임을 실패하여 아이가 생겼다고.

만약 매춘부가 조용히 있었다면 모를까. 밑바닥 인생을 전전했던 탓에 욕심이 생겨 대뜸 프리드리히를 찾아갔다.

그 사건 하나 때문에 왕궁이 난리가 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프리드리히는 격하게 부정했지만 하늘을 닮은 아이의 푸른색 눈동자가 그의 자식이라는 걸 대변해줬다.

다행히 그 사건을 철저하게 은폐한 덕분에 바깥으로 새어나갈 일은 없었고, 아이는 받아들였지만 어머니는 쥐도 새도 없이 사라졌다고.

'니콜에게 장난을 자주 치는 것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라서 그랬던가.'

언제나 생기발랄하게 웃는 얼굴 속에는 지독한 외로움이 담겨있다. 물론 레오르트에게는 그다지 관심을 끌만한 사항이 아니었던지라 대충 넘겨버렸지만.

"그나저나 그건 왜 묻지? 아델리아가 전시회에 참석하는지 묻고 싶은건가?"

"역시 너는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어."

"욕을 시원하게 박기 전에 장난은 그만두지."

저런 장난기는 유전임이 확실하다. 아델리아도 그렇고 라오스도 그렇고 틈만 나면 장난을 쳐댔으니까.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유쾌하게 장난을 치던 라오스는 레오르트의 말에 어깨를 으쓱거렸다가 본론으로 돌아왔다.

"일단 맞긴 해. 잘 살고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아직까지 인정받고 싶은지 묻고 싶거든."

"만약 성을 버린다고 하면 어쩔텐가?"

"너희들이 알아서 해. 선전용으로 써던 말던 우리 왕국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거든. 그 천한 년은 어디까지나 아바마마의 '실수'에 불과하니까."

한 사람의 탄생과 인생을 단순히 '실수'라고 여기는 태도. 아이작이 듣는다면 눈쌀을 찌푸릴만한 태도였지만 이들에게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상식이다.

군주가 정치적으로 실책을 저지르면 백성이 불만을 토하겠지만 사생활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냥 그렇구나~ 라며 넘겨짚을 뿐, 개인적인 인성은 중요하지 않다.

이에 레오르트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알았네. 어디까지나 내 예상이지만 전시회에 참석할걸세."

"고마워. 그럼 이제 우리도 슬슬 준비할까? 내일 즐기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쉬는 게 좋을 것 같네."

이리하여 전시회 전 날 밤이 점점 다가왔고.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 드라트 아이실리아 빈이라고 합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환영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저희가 공주님을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죠. 그나저나 정말로 아름다우시네요."

"감사합니다. 아이작의 얼굴이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했는데 남작 부인에게서 물려받은 모양이에요."

"어머. 그 말씀은 우리 아이작이 예쁘다는 건가요?"

아이작은 갑작스러운 세실리의 방문에 곤혹을 겪고 있었다.

그녀의 방문에 처음에는 모두가 당황했지만 세실리의 화려한 말재간을 통해 자연스레 녹아내릴 수 있었다. 심지어 아이작의 어머니와는 말이 잘 통했는지 벌써부터 이야기꽃을 피우는 중이다.

"그리고 아이작. 여기 네가 원했던 책."

"응? 무슨 책이에요?"

"마족의 역사가 담겨있는 책이야. 헬리움의 학자가 선별했으니 아마 너에게 큰 도움이 될 거야."

"오오...! 정말 감사합니다. 누나."

"감사는 무슨. 내가 더 감사하지."

무엇보다 아이작조차 세실리에게서 역사 서적을 선물받고 간단하게 함락(?)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큰 불만을 가진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마리다.

그녀는 아이작과 오순도순 지낼 생각에 가득 차 있었으나 세실리의 방문으로 모두 무산되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표출할 수 없으니 답답할 노릇.

결국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아이작을 으슥한 곳으로 불러낸 후, 그를 엄하게 다그쳤다.

"아이작."

"...응."

"너의 여자친구로서 미리 말할게. 전시회 동안에는 나랑 항상 붙어있기. 떨어지거나 다른 여자를 바라보면 손도 못 잡게 할 거야."

"그럼 키스는 해도 돼?"

"...넌 진짜 변태야."

마리의 아이작의 역공에 얼굴이 붉어짐을 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에 아이작은 능글거리는 말투로 연이어 물었다.

"그래서 대답은? 키스해도 될까?"

"...지금 말고 나중에. 세실리가 몰래 볼 수도 있잖아. 찾아온 걸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부끄러워?"

"됐어! 이 빨간 변태야! 내일 원없이 하면 되잖아!"

"빨간 변태는 또 뭐야?"

여러모로 다사다난한 전시회가 될 듯한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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