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전에도 말했지만 축제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진정한 의미로 축제로 변하는 법이다. 그걸 반증하듯 우리 영지에는 시간이 가면 갈 수록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불과 보름 전까지만 해도 조용하다 못해 고요했던 우리 영지지만 지금은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려 어지간한 도시를 방불케했다. 아직 전시회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이정도다.
그와 동시에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우리 영지에 관광객들로 붐비는 건 당장에는 좋겠지만 그 후가 문제였으니까.
전에도 말했듯이 우리 영지는 특색이 거의 없는 수준이다. 지금은 전시회를 개최하기 위해 황실에서 다양한 지원을 해주고 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효과일 뿐이다.
전시회가 성공적으로 끝나도 그 이후의 유지비도 그렇고, 관광객들이 과연 다시 찾아올지도 의문이니 여러모로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상단들이 많이 찾아와서 다행이지만... 그래도 '
내일 전시회가 시작되어 사람들이 전보다 더욱 몰려들었다. 심지어 인간 뿐만 아니라 여러 종족도 간간이 눈에 들어왔으며 치안을 담당하는 경비경도 다수 투입되었다.
또한 영지의 모습은 전과 비교했을 때 천지차이로 달라진 상태다.
리나의 말로는 급조했다지만 원래부터 이런 식으로 미리 설계를 한 건지 아니면 감독관의 센스가 좋은 건지 급조한 티도 거의 나지 않았다.
본래 3년 후부터 영지를 발전시킬 계획이었다고 했으니 아마 그걸 그대로 앞당긴 게 아닐까.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겠지.'
황실 쪽에서도 만에 하나, 사고가 나지 않기 위해 건물을 한 두 번 정도가 아니라 여러번 검사했다. 특히 귀족과 예술가들이 머무는 여관은 좀 더 세심하게 관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밖에도 상점을 비롯한 여러 가게도 많이 생겼다. 원래 우리 영지에는 기본적인 물품을 파는 상점과 옷가게, 그리고 대장간밖에 없었으나 상단과 계약한 이후 다양한 지점들이 속속 등장했다.
물론, 사람이 오가면 오갈 수록 다양한 문제도 속속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불법 노점.
우리 영지에 전시회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빠르게 영지를 찾아와 노점을 차려 이득을 취했다.
물론 아버지와 계약하여 정식적으로 노점을 차린 경우가 더 많지만 어디에나 파렴치한 족속들은 있는 법.
아버지는 전직 기사답게 불법 노점 신고가 들어오는 순간 조사 이후 칼 같이 영지 밖으로 추방시켰다. 덕분에 길 한복판에 노점을 세워 통행을 방해는 일은 없었다.
'근데 중세 시대에 노점이라...'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 세상은 기묘하디 기묘한 곳이다. 나는 철거되는 불법 노점과 노발대발하는 노점상을 번갈아보다가 금방 시선을 돌렸다.
지금 노점상보다 중요한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부모님이 해일처럼 밀려오는 서류를 처리하느라 바쁘다면 나는 손님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첫 스타트는 마리의 가족이라 부담없이 진행할 수 있었지만, 이다음부터는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대면했다.
제국에 사는 귀족은 물론이고, 심지어 다른 나라의 귀빈까지 맞이하여 긴장감이 장난아니었다. 여기서 실수라도 했다간 나는 물론이고 우리 부모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다행히 하나 같이 전부 다 제논 일대기를 사랑해서 찾아온 사람들이라 별 탈없이 진행되었다.
게다가 이처럼 하루 일찍 찾아온 손님들은 대부분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방문한거라 하루 종일 여관에서 휴식했다.
단, 귀족 뿐만 아니라 예술가들도 리허설을 위해 하루 일찍 찾아왔다.
"만나서 반갑소. 리루스 악단의 지휘자, 리루스 휴즈먼이라 하오."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고명하신 리루스 악단을 맞이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프링글스 아저씨다.
리루스 악단의 지휘자, 리루스와 만난 내 첫 감상평이다.
머리는 털 하나 없이 말끔하여 햇빛마저 반사되었지만 콧수염이 다소 독특했다. 유쾌할 것 같으면서도 전문적인 면모를 띄고 있다 해야할까.
아무튼 간에 첫 인상 하나만큼은 만점이라 해도 무방했다. 명망높은 예술가들은 대부분 깐깐하거나 거만한 편인데 리루스는 사뭇 달랐다.
편지에서 보았다시피 리루스는 상당히 점잖고 겸손한 편이었는데 그것조차 감출 수 없는 카리스마가 물씬 흘러나왔다.
'지휘자'라는 직업에 딱 어울리는 모습이었으며 단정하게 차려입은 예복으로 하여금 정중함을 풍겼다.
"붉은 머리가 참으로 독특하구려. 맹수처럼 빛나는 눈도 마찬가지고."
"리루스 씨도 콧수염이 인상적이십니다. 관리하기 힘드실텐데."
"표정처럼 말투도 무뚝뚝하군. 그래도 고맙소. 이 콧수염의 진가를 알아보는 이가 적은데 그대는 알아주는군."
리루스는 독특한 콧수염을 살살 잡아당기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본인의 콧수염을 일종의 아이덴티티로 생각하는 것 같다.
겉모습처럼 성격도 독특하다고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있는 사실 그대로 말한거라 따로 입을 열지 않았다. 실제로 저런 콧수염을 관리하려면 어지간한 노력과 정성이 아닌 이상 매우 힘들다.
나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있는 프링글스 아저... 아니, 리루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무대는 마음에 드셨습니까? 리루스 씨도 아시겠지만 급하게 만든거라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을 겁니다."
"전혀 아니라오. 오히려 급조한 티가 전혀 나지 않았소. 물론 테르스 왕국에 있는 무대와 차이가 나지만 그건 시간이 있었으니 가능했지. 만약 미네르바 제국에도 시간이 있었다면 이것보다 더 훌륭한 무대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오."
리루스의 말마따나 제국에게 시간만 충분했더라면 훨씬 멋진 무대를 건설했을 것이다. 테르스 왕국에서 엿 먹어보라는 심보로 전시회 개최를 떠넘겨서 문제지만.
그래도 마음에 든다고 하니 나에게도 제국에게도 다행인 부분이다. 하지만 불안 요소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럼 전시회를 축제처럼 개최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도 큰 문제가 아니오. 나 뿐만 아니라 제논 일대기를 사랑하는 이들이 한데 모이며 즐기는데 이게 축제가 아니면 뭐겠소? 그리고 일정을 보아하니 낮에는 그림이나 조각을 보여주고 저녁에는 우리들이 나서더군. 확실히 계획을 잘 조율한 것 같소."
낯간지러운 말을 연달아 하는 프링글스 아저... 아니 리루스다. 덕분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리루스 악단만 이런 것이지, 다른 예술가들의 생각은 다를지도 모른다.
특히 매트릭스 극단은 화려한 연출력을 자랑하는만큼 프라이드가 높다고 들었다. 비단 매트릭스 극단 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가들도 대체적으로 자존심이 높은 편이다.
"마음에 드셨다니 저희에게는 안심이 되는군요.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즉각적으로 조시하겠습니다."
"음... 불편하다기보다는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소."
"그게 뭐죠?"
내가 살짝 긴장을 담아 묻자 리루스는 아쉽다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제논 작가가 정말로 우리의 공연을 보러 오는지 모르겠소."
"... ..."
"비록 출판사에서 참석한다고 말했으나 확실한 건 아니잖소? 어쩌면 피치 못할 사정이 발생할 수도 있지."
프링글스 아저씨 눈 앞에 있는데요.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리루스의 말로 인해 쓴웃음은 의문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제논에게 보여주고 싶은 무대가 있소. 매트릭스 극단도 기꺼이 허락한 일이라 더 아쉽군."
"보여주고 싶은 무대요?"
"그렇소. 단언컨대, 제논 일대기 팬에 있어서 완벽한 무대가 될 것이오."
도대체 이 변태들... 아니, 이 사람들이 무슨 무대를 만들었길래 저리 자신만만한 걸까.
본디 예술가들이란 시대를 불문하고 변태적인 성정이 없지 않아 있었기에 궁금함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눈을 빛내며 리루스를 바라보다가 은근슬쩍 찔러보았다.
"저에게 언질 정도만 해줄 수 있습니까?"
"그건 안 되지. 미리 알면 재미가 없잖소? 대신 완벽한 무대를 위해 출발하기 전부터 매트릭스 극단과 리허설을 여러번 했다는 것만 알려주겠소."
일종의 콜라보레이션 같은 것으로 보인다.
자그마치 세계적으로 유명한 두 거장이 하나로 합쳐 만든 무대이니 기대가 되었다.
"알겠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힘드실텐데 편히 쉬시길 바라겠습니다."
"환대해주어서 고맙소. 기회가 된다면 이 영지를 아예 문화 도시로 바꾸었으면 좋겠구려. 괜히 귀찮게 여기저기 돌아다닐 필요가 없을테니까."
"한 번 고려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저도 욕심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서."
"허허허. 제논을 위한 거리라... 같은 예술가로서 질투가 나지만 팬으로서는 기대가 되는군."
이후로 리루스는 자신의 무대를 즐겁게 시청하기 바란다며 자리를 떠났다. 떠나기 직전까지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그에게 호감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그나저나 콜라보라...'
과연 예술가들이 어떤 무대를 보여줄까. 다른 곳도 아니고 연출력의 끝판왕이라 불리는 매트릭스 극단과의 콜라보다.
비록 전생의 영화와 비교하는 건 다소 무리겠지만 저렇게 자신만만하니 살짝 기대가 된다.
나는 리루스가 귀족 및 예술가 전용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까지 배웅해주다가 다시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리루스 뿐만 아니라 맞이해야 할 사람이 아직 남아있다. 곧 있으면 매트릭스 극단이 도착할테니 미리 미리 준비해 놓을 생각이다.
'진짜 귀빈급은 내일 방문할테고...'
공작 이상의 귀빈들은 이미 수도의 황궁에 도착한 상황이다. 황실에서 머무르다가 시간이 되면 마차를 이용하려 우리 영지에 도달할 것이다.
지금쯤이면 레오르트와 리나가 상대하고 있지 않을까. 어쩌면 세실리도 함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저택으로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아이작!"
"어?"
낯익은 남자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그것도 나에게는 아주 반가운 목소리가.
이에 설마하며 고개를 돌리니 내가 통과한 대문에서부터 이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처럼 붉은 머리카락과 황금빛 눈동자가 인상적이었으며 전체적으로 유쾌하기 생긴 미남자.
내 친형이자 몇 달 전 네이비 기사단에 입단하여 훈련 중이라 들었던 브리스다.
"브리스 형? 진짜 형이야?"
"이야. 이거 얼마만이니? 못 본 사이에 키가 큰 것 같기도 하고?"
내가 깜짝 놀라자 브리스는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나는 도무지 믿지 못할 상황에 어버버거리다가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외모만 놓고 봤을 때 변한 건 없지만 군인인지라 햇빛 아래에서 훈련한 탓에 피부가 많이 탄 상태였다.
또한 반팔 티셔츠를 입어 드러난 팔에도 잔상처가 자잘하게 새겨져 있었고, 전보다 체격이 살짝 커진 느낌이다.
"휴가라도 나온 거야? 훈련 중이라 하지 않았어?"
"원래 그렇긴 한데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부단장님이 나를 보내셨어. 아마 우리 영지에서 전시회가 열린다고 하니 보내준 것 같더라. 듣자하니 황실에서 지시가 떨어졌다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 ..."
대충 누구의 입김이 들어갔는지 알 것 같다. 그래도 브리스를 볼 수 있어서 좋긴 하다.
내심 브리스가 전시회를 볼 수 없어서 아쉬웠는데 시기적절하게도 이런 선물을 해주다니. 조만간 감사 인사라도 전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훈련은 할만해?"
"말도 마. 덕분에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한 달 동안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내내 싸워본 적 있어?"
"그런 걸 인간이 어떻게 해? 엘프도 엄청 힘들어할텐데."
"내 말이. 그런데 악으로 깡으로 버티니까 되긴 하더라. 아버지는 지금 안에 계셔?"
"서류 더미에 파묻히고 계셔."
"아버지도 고생하시고 계시네. 아, 그렇지. 아이작. 너 혹시 헬리움의 공주와 친분이 있어?"
"응?"
나는 브리스의 질문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택에 오기 전에 세실리와 만난 적이라도 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브리스가 저런 질문을 할 이유가 없다.
브리스는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문을 표하자 방금 전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저택에 오기 전에 누가 나를 보면서 네 이름을 부르더라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같은 붉은 머리는 흔하지 않잖아? 그래서 얼굴을 봤는데 헬리움의 공주인 거야."
"어디서 만난 거야?"
"영지 입구에서 봤지. 그런데 마차를 안 타고 두 발로 온 것 같더라. 자기 경호원이랑 함께."
"응? 어떻게?"
"마법이라도 썼겠지. 처음에 목소리를 들은 방향도 하늘 쪽이었어."
하긴 마법을 숨 쉬듯이 사용할 수 있는 마족인데 굳이 마차를 이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수도가 아니라 곧바로 우리 영지에 찾아왔다는 건 의외였다.
'조금 있다가 한 번 찾아가야겠네.'
아마 지금쯤 귀족 전용 여관에 머물고 있지 않을까. 내가 속으로 그 생각을 하고 있을 쯤이었다.
"아무튼 헬리움의 공주랑 무슨 사이야? 너를 부르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는데."
"그냥 친한 친구 사이야."
"흠... 단순히 친구라기에는 정말 반갑다는 기색이었는데..."
브리스가 작게 중얼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나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 속에 짙은 의구심이 깔려있었다.
도대체 세실리가 어떤 반응을 보여줬는지 모르지만, 브리스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아마 격하게 반겼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제 3자의 입장에서는 의심할만하다.
'이러다가 바람둥이로 낙인찍히는 건 아니겠지?'
나는 애써 그의 시선을 피하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브리스도 저택에 들어서는 순간 나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
"그나저나 선임들은 다들 좋아? 듣자하니 네이비 기사단 같은 곳은 짓궂은 사람들이 많다는데."
"말도 마. 내가 견습이라고 틈만 나면 놀린다니까. 심지어 지난 번에는 검을 얻다 두고 왔냐니, 대장간에 가서 하나 사러 갔다 오라니 괴상한 말까지..."
"... ..."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레파토리다.
전생에서 입대를 했을 때 저런 부조리는 거의 없어진 편이었지만 인터넷에서 자주 본 기억이 있다.
아무래도 컴퓨터는커녕 텔레비전도 없는 군대일테니 전생보다 훨씬 심한 부조리가 만연하고 있을 터.
뭐, 네이비 기사단 같은 경우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투를 치루는 곳이라 부조리를 일으킬 시간도 없을거다.
부조리를 저지를 시간에 죽지 않도록 몸을 키우겠지
"그리고 최근에는 소속 가문의 아가씨가 망언을 했다는 소문까지 돌더라고. 이때문에 분위기가 좀 안 좋아."
"망언?"
"응. 군인은 집 지키는 짐승이라고 했다던데? 다행히 가문에서 추방까지는 안 시켰지만 지금쯤 엄청 고생하고 있을거야. 단순한 훈련소가 아니라 기사 양성소에 집어넣어더라고."
따로 조사하지 않아도 100%의 확률도 아이라다. 자업자득이라고, 나는 입 안까지 번지는 고소함에 속으로 키득거렸다.
평범한 병사를 훈련시키는 곳도 아니고 기사 양성소라니. 훈련 기간도 훨씬 길 뿐더러 훈련의 강도조차 괴랄한 걸로 유명하다.
본래는 일반 훈련소에서 재능있는 사람을 뽑아 기사 양성소로 투입시키지만 아이라의 가문에서 찔러넣은 모양이다.
더군다나 정신머리를 싹- 고쳐놓으라 지시까지 했을테니 그녀의 암울한 미래는 안 봐도 비디오다.
"그거 참 불쌍하네. 피해는 없었지?"
"우리는 피해고 나발이고 국경을 지키느라 정신이 없어. 다행히 엘프 정찰병이나 몬스터의 활동이 거의 전무한 수준이라 여유로워."
"휴가는 언제 끝나?"
"3박 4일. 선임들 말로는 3.4초짜리 휴가라는데 설마 그정도겠어? 내일은 전시회라 시간이 빨리 가긴 하겠다만 즐길대로 즐길 수 있겠지."
"음... 기사단에 제논 일대기 있어?"
"당연히 있지.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더라."
나는 브리스와 그동안 풀지 못 했던 이야기 보따리를 원없이 풀며 저택으로 돌아갔다.
덕분에 전시회를 보다 더 즐겁게 보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여기가 그의 저택이구나."
아이작과 브리스가 저택 안으로 들어간 직후였다. 푸른색으로 가득 채워진 하늘에서 그들을 내려다 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헬리움의 공주 세실리였다.
인간이었다면 하늘에 당당히 서 있는 세실리를 보며 경악했겠지만 그녀는 마족. 엘프와 더불어 마법의 축복을 받았다는 종족이다.
마법을 이용해 하늘을 돌아다니는 건 기본이고, 공간과 공간 사이를 넘나드는 텔레포트까지 사용할 수 있으니 이정도는 식은 죽 먹기다.
'형제가 서로 닮은 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다르구나.'
높디 높은 창공에서 저택을 내려다 보고 있어도 세실리에게는 눈 앞에 있는 것처럼 다 보였다. 마족이라 선천적으로 시력이 월등할 뿐더러 이것도 마법을 이용하면 쉽다.
'그때 그냥 같이 저택으로 갈 걸...'
세실리는 저택 안으로 들어간 형제를 보며 아쉬워했다. 영지 입구에서 붉은 머리만 보고 아이작인 줄 알았다가 뒤늦게 브리스라는 걸 알아채고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다시 하늘로 도망쳤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브리스와 함께 저택으로 들어올 수 기회였는데 그걸 걷어찬 것이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그녀로서는 아까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브리스와 만났을 때 외출용 옷을 입었다는 거다. 만약 전시회에 입을 드레스였다면 이 안타까운 마음이 더 깊어졌겠지.
전시회에 입고 나올 드레스는 아이작이 가장 먼저 봤으면 하는 바램이다. 신입생 행사 때처럼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찌릿해진다.
"...공주님?"
세실리가 머릿속으로 아이작을 떠올리고 있을 때 그녀의 옆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세실리를 불렀다. 당연히 그도 마족이었으며 세실리가 위로 솟아나 있는 뿔을 갖고 있다면 그는 양의 뿔 같은 형상을 띄고 있었다.
외모 또한 마족 답게 칠흑 같은 검은색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갖고 있었지만, 검은색 복면을 착용하고 있어 자세한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래도 겉으로 드러나는 외관만 따지자면 충분히 미남이다.
그의 이름은 가르츠 발락. 세실리의 경호원으로 발탁된 '리퍼'의 단원이다.
가르츠도 마족인만큼 마법에 통달하여 세실리처럼 하늘에 서 있는 게 가능했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발락 경.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 ..."
가르츠는 세실리의 지시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나 내심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착각했다지만 붉은 머리의 사내를 보며 반갑게 달려간 것도 그렇고 지금 하늘 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도 그렇고.
리퍼의 단원으로서 왕족의 개인사는 배제하는 게 기본 원칙이지만, 오늘 세실리가 보여준 행동만 해도 의구심을 품기에 충분했다.
평소 세실리는 남자에게 거의 관심이 없었는데 저 붉은 머리의 남자에게는 깊은 호기심과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리퍼의 단원이어도 궁금할 수밖에 없다.
'겉으로는 별 볼 일 없는 저택이긴 하다만...'
기본적인 방범 마법은 깔려있는 저택이지만, 가르츠에게는 의미가 없는 수준이다. 결국 인간이 설정한 것에 불과하니 저정도는 가볍게 뚫고 갈 자신이 있다.
하지만 저택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사뭇 다르다. 갈무리 했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강력한 기운 하나가 저택을 당당하게 수호하는 중이었으니.
가르츠가 무미건조하면서도 호기심이 새겨진 눈빛으로 저택을 빤히 쳐다보고 있을 때, 세실리는 투시 마법으로 저택을 훤히 들여다봤다.
당연히 그녀의 시선은 아이작에게 고정돼 있었으나 이내 눈 밑을 꿈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마리도 있구나.'
언제 왔는지 몰라도 마리가 이미 저택에 도착한 상황이었다. 전시회가 내일 시작되는데 귀족 전용 여관도 아니고 저택에 머무는 걸 보면 아예 기정사실로 만드려는 듯했다.
그 생각을 들자 세실리는 손을 꽉 말아쥐었다. 그에게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것도 자신이고, 그의 정체를 먼저 눈치챈 것도 자신이다.
하지만 제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 한 채 실수를 저질렀다. 만약 흥분하지 않고 천천히 다가갔다면... 미래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설령 아이작이 자신을 부담스러워 해도 상관없다. 제논 일대기의 작가가 아닌, 자기자신을 바라봤으면 좋겠다는 말을 해도 상관없다.
제논 일대기의 작가가 아이작이고, 아이작이 제논 일대기의 작가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전부 의미없는 말들이다.
'시간을 그때로 되돌릴 수 있다면...'
세실리는 아이작과 마리가 남들 모르게 포옹까지 하는 모습을 생생히 지켜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악주기'가 슬슬 찾아와서 그런지 마음 속에 음험한 욕망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조금만... 조금만 참자. 그리고 지금은...'
그녀는 욕망을 간신히 억누른 뒤에 투시 마법으로 저택 내부를 샅샅이 뒤져봤다. 단면도처럼 보는 건 불가능하지만 방의 구조 정도는 확인할 수 있다.
이윽고 아이작의 방으로 추정되는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째서 확신을 내릴 수 있냐면 다른 방보다 책장이 훨씬 많았으니까.
아이작이 책벌레라는 것 정도는 이미 꿰뚫고 있다. 그리고 역사를 좋아하다 못해 사랑하는 것까지도.
'그리고 저곳에...'
1권을 제외한 제논 일대기 초고들이 잠들어 있다. 마족에게 있어서 보물을 한참 넘어선 성유물이나 다름없는 초고들이.
허나 저택에 깔린 방범 마법의 수준이 너무 부족하다. 인간은 막을 수 있어도 엘프나 마족 같은 이종족이라면 손쉽게 침입할터.
더군다나 전시회가 마이샬 영지에서 시작되니 분명히 의심을 품고 일을 저지르는 불한당도 있을 것이다. 물론 제국 측에서 미리 방지하겠으나 그래도 불안하다.
만약 여기서 초고가 모두 다 도난당하게 된다면... 아이작이 낙담하는 걸 넘어서 절망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제논 일대기를 절필할 수도 있겠지.
그것만큼은 막아야한다. 세실리는 굳게 다짐하며 곁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가르츠를 불렀다.
"발락 경."
"네. 공주님.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투시 마법으로 2층 오른쪽에 있는 방을 보세요. 다른 방보다 책장이 많이 있으니 구분하기 쉬울 겁니다. 확인하셨다면 고개를 끄덕이세요."
"확인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저택으로 들어갈 겁니다. 그리고 저 방에 들어서는 순간 감지 마법을 설치하세요. 누가 침입하면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가르츠는 내심 왜 그래야 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꾹 내리눌렀다. 자신은 그저 왕족의 명령에 따르면 되는 검에 불과했으니.
세실리는 충성스러운 가르츠의 대답을 듣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인내심이 일반 마족보다 몇 배는 강한 리퍼답다.
"아. 그리고 그건 가지고 왔죠?"
"우리 마족의 역사가 담긴 책이라면 갖고 왔습니다."
"좋아요. 그러면..."
세실리는 빙긋 웃더니 저택을 대문 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정식으로 방문할 준비를 하죠."
"예. 공주님."
손님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