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나는 창문 밖의 광경을 구경하다가 다음 날이 되어서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상의했다. 이렇게 된 참에 마이샬 영지를 하나의 문화 도시로 지정하는 게 어떠냐고.
전생의 김광석 거리처럼, 유명 인사가 태어났다는 근거 하나만으로 아름답게 꾸민다면 분명 영지가 크게 발전할 거라고 의견을 드러냈다.
물론 그 후에 일어날 후폭풍을 걱정하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출생지는 그대로 두되, 나의 진짜 거주지를 알려주지 않는 방향으로 계획을 잡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조사를 하더라도 뒤탈은 없을 것이며 설령 정체가 들켜도 입만 잘 털면 문제가 없을 거라 말했다.
평소 한적했던 영지가 눈에 띄게 발전되는 모습을 직접 목도한 탓에 욕심이 약간 섞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설득력이 있으니 문제가 없을 거라 판단했다.
그리고 내 이야기를 들은 부모님의 반응은...
"흠..."
"취지는 좋긴 한데..."
애매하시다는 반응을 보이셨다. 아버지는 생각이 깊으시니 그렇다 쳐도 어머니까지 선듯 동의하지 않으신 건 의외였다.
이에 내가 정치적으로 문제가 많냐고 묻자 어머니는 말없이 아버지를 바라보셨다. 그리고 한동안 턱을 만지면서 고민을 하시던 아버지는 우묵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아이작."
"네. 아버지."
"네가 한 이야기는 분명 너에게도, 그리고 우리 영지에게도 정말 좋은 일이란다. 발전력을 보다 더 빨리 늘릴 수 있는데다가 관광 효과가 극대화되겠지. 어쩌면 전시회 장소가 아예 이곳으로 고정될 수도 있고 말이야."
사실 뒷부분이 제일 큰 목적이긴 하다. 괜히 이곳 저곳 돌아다닐 필요없이 주기마다 우리 영지에서 전시회를 보여줬으면 하니까.
대신 강압적으로 우리 영지에서만 해! 이런 건 아니고 전시회 전까지 본인들 마음대로 작품을 공개할 수 있다. 전시회는 어디까지나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예술가들이 한데 모여 공개하는데에 의의를 두는 것 뿐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내 작품의 인기가 꾸준히 이어져야 한다는 조건이 있지만 현재 상황을 보면 그럴 일은 희박하다.
아버지는 그럼 왜 회의적인 입장을 내놓으시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쓰게 웃으시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근시안적인 이야기지, 멀리 본다면 여러모로 불안 요소가 많단다."
"불안 요소요?"
"그래. 일단 내가 이 나라의 기사로 근무하면서 몇 가지 깨달았지. 일간 첫 번째로 우리 제국은 욕심이 많아도 너무 많아. 너도 알다시피 우리 제국은 호시탐탐 테르스 왕국을 노리는 중이란다."
아버지가 검지 손가락을 펴며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미네르바 제국의 문화 욕심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흡수한 문화를 바탕으로 테르스 왕국을 집어삼켜 세계의 패권을 단단히 잡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군사력과 경제력은 이미 끌어올릴대로 끌어올렸고 수 백년의 역사를 통해 내실도 탄탄하게 마련했겠다, 주변 나라에 눈을 돌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대신 신성 교국인 세이비어는 종교적인 문제 때문에 절대 건드릴 수 없고 상업 국가인 벨루아 왕국은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 다른 곳은 이종족이 세워 함부로 대하기가 까다롭다.
그러니 같은 인간 종족이면서 종족전쟁 이후 숙적으로 지냈던 테르스 왕국을 우선 순위로 두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이샬 영지를 문화 도시로 만드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제가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부탁하면 제국도 그만두지 않을까요?"
"당장은 그렇겠지만 100년 뒤에도 과연 그럴거라 생각하니?"
"네?"
"네가 죽고 난 후에도 우리 제국이 가만히 있을 것 같냐고 물었단다."
나는 아버지의 반박을 듣고 눈을 깜빡거렸다. 내가 멍청한 것인지 몰라도 아버지가 하신 말씀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아버지도 내 표정을 통해 생각을 읽으셨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꺼내셨다.
"아이작. 문화의 진정한 힘은 단기적이지 않고 후대까지 꾸준히 이어진다는 부분에 있단다. 네가 죽고 나서도 제논 일대기를 포함한 네 작품들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겠지. 그리고 네 정체가 밝혀진다면 우리 영지도 네가 말한 것처럼 될 수도 있고."
"그럼 지금이 적기가 아니라는 건가요?"
"그것도 그렇지만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고 해야겠구나. 얄궂게도 말이지."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다른 이유도 아니고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니.
내가 당황과 황당이 골고루 섞인 반응을 보이자 아버지는 쓰게 웃으셨다.
"네가 죽고 나면 네가 쓴 작품들은 자연히 가치가 상승하겠지. 그리고 제국은 이를 놓치지 않을거야. 침략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초고를 일부러 테르스 왕국에게 빼앗기게 만든다던가, 최악의 경우 전부 불태우고 누명을 씌울 수도 있단다."
"... ..."
"지금도 황실에서 초고 도난 사건의 범인을 찾는다면 3대를 멸할 거라 벼르고 있는데 초고가 전부 사라지면? 당장 전쟁이 나도 이상하지 않아. 그만큼 네가 가진 문화적 가치가 어마어마하다는 걸 반증해주지."
여기서 나는 이 세상이 중세 시대라는 걸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전생의 상식은 거의 통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뒤떨어진 세상.
예를 들어 전생에서 어떤 나라가 J.K 롤링의 대표작, 해리포터 시리즈를 모욕하다 못해 초고를 싹 불태웠다고 치자. 영국인을 포함한 수많은 세계인들이 길길이 날뛰겠지만 각 나라의 정부들은 비난 성명만 내고 끝낼 가능성이 높다.
만약 이것조차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아주 훌륭한 모범 답안(?)으로 중국이 있겠다. 중국이 아무리 개지랄을 떨어도 피해를 입은 나라는 비판 성명만 낼 수 있지 직접적인 전쟁 선포는 하지 않는다.
물론 이건 중국의 힘이 너무 강력한 것도 있지만 그 미국조차 함부로 무력을 사용하지 못 했다는 걸 상기하면 된다. 중국 또한 마찬가지로 정당한 사유가 없는 이상 무력을 사용할 수가 없다.
이처럼 고도로 발달한 사회 문명에서는 검을 빼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다.
'...참 중세 시대 답네.'
허나 이곳은 중세 시대가 배경인 판타지.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며 지구인이 본다면 실로 야만적이라 생각할 수 있는 상식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곳.
사소한 명분으로 전쟁을 터뜨려도 이상하지 않다.
만약 내 초고가 어떤 나라에 의해 전부 불태워지는 순간 몰매를 맞다 못해 전쟁 선포를 받게 될 것이다. 그 이후로는 당연히 멸망하는 거고.
아버지의 설명처럼 내가 버젓이 살아있는 이상 전쟁이 터지진 않겠지만 문제는 내가 죽고 나서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나의 작품을 이용해 미친 짓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다.
이 세상에 환생한지 17년이 흘렀지만 상식은 여전히 받아들이기 난해했다.
"...알겠어요. 아버지의 말씀을 들어보니 문제점이 많네요."
"아이작. 너무 실망하지 않아도 된단다. 네 아빠의 말은 어디까지나 예측이지 확실한 건 아니니까. 언젠가 네가 원하는 때가 올 수도 있어."
내가 의기소침해지자 어머니는 나를 위로해주셨다. 상냥한 그녀의 위로를 듣고 그나마 괜찮아졌으나 그래도 아쉬운 건 여전했다.
드물게 의욕을 갖고 밝힌 계획인데 자칫하다가 나비효과가 될 수 있다는 말이 무섭게 다가왔다. 괜히 아버지가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는 말을 한 게 아니다.
아버지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시더니 조곤조곤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원래 가시적인 결과가 나타나면 너처럼 욕심이 나는 건 당연한 일이야. 정상적인 반응이지. 하지만 지금은 약간 성급한 감이 없지 않아 있구나."
"...그렇죠."
"그렇다고 아예 하지 말라는 건 아니야. 나는 어디까지나 충고를 해준 것 뿐이지, 선택을 강요하는 건 아니야. 네가 책임질 자신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지원해줄 거란다.
하나 같이 맞는 말씀만 하시는 내 아버지다. 전선에서 활동하던 군인이셨으니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계실 터.
무엇보다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태어나 자라신 분이다. 전생의 상식이 뿌리깊게 박혀있는 나와 생각이 여러 방면에서 다를 수밖에 없다.
'당장 시대가 발전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어떻게 하면 내 작품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걸 막을 수 있을까. 지금 당장은 내가 살아있으니 문제는 없겠지만 그 이후가 문제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자기 자식에게 끔찍한 미래를 안겨주고 싶은 부모는 절대 없다. 나도 언젠가 결혼하고 아이도 낳을텐데 그런 미래를 물려줄 수는 없는 법이다.
하물며 그 미래의 원인이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면? 상상만 해도 참혹하다.
'아직 시간은 많아. 천천히 생각하는 게 좋겠어.'
하마터면 욕심에 눈이 멀 뻔했다. 전생의 상식을 이 세상에 대입해서는 안 되는데 가장 기본적인 부분조차 간과하고 있었다.
나는 우리 영지를 문화 도시로 발전시키는 건 나중으로 보류해야겠다 판단하며 부모님을 바라봤다. 두 분 모두 내 입이 떨어지기까지 잠자코 기다리시는 중이었다.
"...그래도 욕심을 버리기가 어렵네요."
민망하다는 듯이 웃으며 하는 내 말에 아버지도 동감하셨는지 피식 웃으셨다.
"남자로 태어났다면 그정도 욕심은 갖고 태어나야지. 명예라는 건 돈으로도 매길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니까 말이야. 물론 그 명예보다 소중한 걸 발견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 이이도 참."
아버지가 은근슬쩍 어머니의 손을 만지며 능글맞게 대하셨다. 어머니도 부끄러워하면서도 아버지의 듬직한 어깨에 머리를 기대셨다.
저 모습은 10년이 넘도록 지켜봤지만 역시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지금도 활화산마냥 불타고 계셨으며 도통 꺼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군인 생활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어머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은퇴하신 건가?'
나는 두 분의 연애사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어쨋거나 욕심이 가득 들어간 내 계획은 보류되었으나 전시회 준비는 아무런 차질없이 진행되었다. 황실에서 지원이란 지원은 모두 해준 덕분에 하루가 멀다 하고 영지가 실시간으로 변화했다.
그렇다고 우리 가문의 생활이 바뀌는 건 없었다. 나는 출판사에게 편지를 보내고, 부모님은 밀려오는 결재 서류를 처리하느라 진땀을 빼셨다.
물론 변화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안녕! 우리 귀염둥이!"
"어? 아델 누나? 누나도 전시회에 가려고?"
"물론이지! 이런 일은 어떻게 참아?"
방학동안 아카데미에 있을 것으로 예상되던 니콜이 아델리아와 함께 저택으로 들어왔다.
니콜은 가족이니까 그렇다 쳐도 아델리아까지 저택으로 초대할 줄은 생각치도 못 했다.
"사실 우리 귀염둥이 보려고 온 것도 있..."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네가 머물 방부터 보여줄게."
"아아~ 왜~ 난 우리 아이작이랑 좀 더 얘기하고 싶단 말이야."
"여자친구도 있는 애한테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하는 거야? 잔말 말고 따라와."
그렇게 아델리아는 니콜에게 질질 끌려갔다. 끌려가면서도 나중에 보자며 해맑게 인사하는 걸 보면 여전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확실히 누나랑 많이 친한가보네.'
니콜은 지금까지 누구를 집에 초대한 적이 없다. 무학 조교로 일하면서 바쁜 것도 있겠지만 우리 영지가 볼품없는 것도 있겠지.
하지만 전시회가 개최되는 지금, 아델리아도 호기심에 찾아온 모양이다. 그리고 니콜에게 초대해달라고 부탁했겠지. 눈으로 직접 보진 않았지만 아델리아다 보니 상상이 간다.
'어떤 손님이 찾아올까?'
원래 세계 각국에서 누가 누가 참석했다는 소식은 있었지만 내가 한 마디 하는 순간부터 모두 사라졌다. 그래서 누가 참석하는지 자세히 모르고 있다.
'뭐, 몇 명은 알 것 같지만.'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아이작~"
전시회가 시작되기 하루 전, 마리가 우리 저택을 찾아왔다. 기습적으로 찾아온 게 아니라 편지를 보냈기에 그녀의 방문을 환영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레킬리스 공작가의 안주인, 사라 하우젠 레킬리스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레킬리스 공작가의 장남 케이 하우젠 레킬리스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리고 마리 뿐만 아니라 그녀의 어머니와 오빠도 함께 방문했다. 오빠는 지난 번에 한 번 본 적이 있었으나 사라는 처음이다.
사라는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동자를 가진 미녀였는데, 마리의 외모가 어디서 나왔는지 단번에 알 수 있을만큼 똑 빼닮으셨다. 우리 어머니처럼 단아하면서 수수한 분위기를 풍겨 품위가 느껴졌다.
'...근데 전시회는 내일 열리는데?'
나는 예법대로 인사하면서 그런 의문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시간을 착각한 게 아니라면...
"미안해. 아이작. 내가 날짜를 '착각'해서 하루 일찍 왔어."
"... ..."
"오늘 하루만 신세져도 될까?"
방실방실 웃는 마리를 바라보다가 뒷쪽을 쳐다봤다.
그녀의 어머니, 사라는 마리처럼 방실거리는 미소를 짓는 중이었고 케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얘가 점점 요망해지구나.'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나는 마지못해 수락한다는 것처럼 쓰게 웃었다.
"알았어."
전시회가 코 앞까지 다가왔다.
*****
한편 비슷한 시간 알븐하임에서는...
"알았지, 레인? 이번에는 절대 사고치면 안 된다."
"알겠어요. 여왕님. 사고 안 칠 게요."
"그래. 어서 가자구나. 원로원에게 들키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엘프 두 명이 텔레포트를 통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고.
"대체 뭘 입어야 하지? 이건 지난 번에 보여줬으니 다른 걸로 입어야 하는데... 이걸로 할까?"
"이것보다는 이게..."
"이거 말고 다른 거 없어?"
헬리움에서는 세실리가 드레스를 고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뭘 입어야 그 분의 관심을 받을 수 있을까?'
마음 속으로는 아이작을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