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문학, 예술, 언어, 기술, 놀이, 종교, 관습, 생활상, 건축 등등.
이렇듯 문화(文化)에는 다양한 종류가 존재하며 문화가 지닌 힘은 이루어 말할 수 없을만큼 강력하다.
좋은 문화를 가졌다면 사람으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효과가 발생한다. 깨끗한 물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처럼, 문화가 가진 힘은 겉이 아닌 속에서부터 천천히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세뇌나 교육을 통해 얄팍하게 박힌 관념이 아니라 그 문화를 접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따르는 것이니 효과가 뛰어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중세 시대에 가까운 이 세상에서, 영향력이 제일 큰 문화는 단연코 '예술'이다.
예술에는 전에 설명했다시피 음악, 그림, 조각, 공예 등이 속해있으며 각 분야에서 최고라 칭송받는 거장들은 세계에서 내노라 할 정도로 막강한 위상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예술계에는 인간 뿐만 아니라 문명의 시초를 닦았던 엘프, 장인의 종족이라 불리는 드워프도 섞여있다.
수인은 전투 종족이라 예술에 큰 관심이 없었고, 마족은 예술보다는 인권 운동(?)에 집중하여 이렇다 할 자랑거리는 없었다.
문화의 나라, 테르스 왕국은 문화가 지닌 힘을 일찍감치 깨달아 문화력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으며 그 결과 미네르바 제국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미네르바 제국이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앞세워 테르스 왕국을 압박할 수도 없는 것이, 이미 테르스 왕국에서 발생한 문화가 제국의 뿌리까지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강압적으로 정복 전쟁을 펼치고 싶지만 문화가 너무 강력하여 다른 나라는 물론 제국민조차 꺼려하고 있다. 이탓에 외부에서 압박하는 것보다 테르스 왕국의 문화를 침탈하여 균형을 유지하는 걸로 노선을 바꾸었다.
만약 미네르바 제국의 문화력이 테르스 왕국과 비슷해진다면 문화 강국이라는 타이틀조차 무색해지니 기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테르스 왕국도 이 부분을 유념하고 있어서 제국과 피 말리는 문화 전쟁을 펼치는 중이다.
"그건 알겠는데 어째서 수도도 아니고 우리 영지에서 전시회를 개최하는 거냐고. 그것도 헤일로 아카데미의 개학을 늦추면서까지."
나는 약간의 불만과 황당을 담아 맞은편에 앉아있는 여인을 향해 따졌다. 솔직히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도통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그에 맞은편에 앉아있는 황금빛 머리카락의 여인, 리나는 전보다 더 고생한 듯한 얼굴로 쓰게 웃었다. 본인도 따로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알 건 알아야 적어도 이해는 할 수 있다. 리나도 그 점을 알고 있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우리도 제국에서 전시회를 개최할 생각은 없었어. 네가 아직 제국에 종속되지 않은데다가 명망있는 예술가들은 전부 테르스 왕국에 있으니까. 어디까지나 우리 제국이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것만 보여주려고 한 거야."
"그런데 테르스 왕국에서 갑자기 제국에게 전시회 개최를 넘겼다?"
"그런 거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리나는 그리 대답하고 본인도 현재 상황이 답답했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얼탱이가 없었지만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 우리 둘이 있는 곳은 마이샬 가문의 저택 응접실. 우리 영지에서 전시회의 개최가 결정나자마자 리나가 직접 찾아왔다.
사실 리나 뿐만 아니라 레오르트도 찾아왔는데 그는 우리 아버지를 먼저 찾아갔다. 아마 지금쯤 나와 리나가 있는 응접실이 아니라 다른 응접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터.
'어머니에게 듣기로는 단순한 전시회가 아니던데...'
나는 하녀가 가져다 준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어머니가 알려준 정보를 상기했다.
어머니에게 듣기 전까지만 해도 단순히 '팬아트'에 가까운 개념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팬아트의 수준을 한참 웃돌았다.
전생으로 따지자면 리루스 악단 같은 경우는 베토벤이 작곡 및 연주하는 격이며, 화가 이마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본인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연극단은 할리우드급이라 볼 수 있다.
내가 손으로 쓴 작품, 제논 일대기 하나 때문에 전세계의 별들이 모이고 모여 은하수를 이룬 것이다.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문화라...'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문화 또한 수면 위로 등장하고 있다.
본래 이 세상의 예술은 중세 시대답게 매우 심오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제논 일대기가 등장하고나서 패러다임이 바뀌기 시작했다.
해석이 반드시 필요하여 일정 수준 이상의 교양이 필요한 문화가 아니라, 누구나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문화로.
전생의 용어를 빌리자면 '스낵 컬처'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군데군데 다른 부분들이 많다.
문학 스낵 컬처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생긴 문화이며 이건 하나의 작품이 세계적인 히트를 친 것이기에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지 아무도 모른다.
나는 제논 일대기가 끼치는 영향력을 곰곰히 생각하다가 찻잔을 조심히 내려놓았다. 달그락- 거리는 소음과 함께 리나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일단 테르스 왕국은 넘어가고, 왜 하필이면 우리 영지야? 제논 일대기의 작가가 여기에 살고 있다는 걸 대놓고 알려주기라도 하는 거야?"
내 날카로운 질문에 리나가 화들딱 놀라며 두 손을 내저었다. 평소 가면을 쓰며 나를 대하던 때와 달라도 너무 다른 반응이다.
그만큼 나를 동등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며 지난 날의 잘못을 반성하고 있다는 거겠지. 내가 그리 생각하는 동안 리나가 다급히 해명했다.
"그, 그건 절대 아니야. 개최 장소가 마이샬 영지로 결정된 건 순전히 우연이야. 너에게 이런 말을 하기에는 미안하지만 마이샬 영지는 배분된지 얼마 되지 않은 영지라 특색이 거의 없거든. 하지만 국경을 지킨 영웅에게 하사한 영지이니 발전 가능성이 매우 높아."
"그러고 보니 3년 후부터 영지의 개발이 시작된다고 들었는데..."
나는 리나의 해명을 듣고 기억을 천천히 되새겼다.
아카데미로 향하는 마차의 마부에게서 듣던 이야기였나. 아무튼 분명 어디서 들은 이야기다.
"맞아. 발전 가능성도 높고 수도와 거리도 멀지 않겠다, 자연스레 마이샬 영지가 채택된 거야. 더구나 호크 경도 정치에 관심이 없으니 힘을 실어줘도 상관없을테고."
"아버지 머리에 흰 머리가 늘어나실 거 같은데? 서로 합의는 했어?"
"지금 오라버니가 설득하고 계실거야. 물론 호크 경은 네 의견을 우선적으로 여기시겠지만..."
리나는 내 눈치를 보면서 말 끝을 흐렸다. 만약 전이었다면 빙긋 웃으며 할 수 있지? 라고 압박했을텐데 지금은 정중하게 부탁하고 있다.
나는 묘하게 역전된 듯한 관계 속에서 골똘히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곧바로 허락하고 싶다.
그러나 전시회의 규모를 고려하자면 쉽게 받아들이기에도 애매하다. 리나가 말했듯이 우리 영지에는 잠재력만 있을 뿐 특색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영지처럼 특산물이 있다던가, 아니면 먹거리가 다양하다던가, 그것도 아니면 귀중한 광물이 발견되었다던가 등등. 이런 특징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영주로서 내 아버지의 능력이 볼품없는 것도 아니다. 남작의 작위를 받은 건 불과 5년 전이고, 영지를 정식으로 하사 받은 건 2년 전이다.
저택 자체는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영지를 받은 건 아버지가 은퇴하시고 난 후다.
"음..."
나는 머릿속으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냐, 아니면 거장들의 작품을 보는 것이냐.
내가 허락해도 아버지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이고, 아버지가 된다고 하셔도 내가 싫다고 하면 안 된다.
마지막에는 아버지와 상의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나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중인 리나를 바라보며 내 생각을 꺼냈다.
"일단 아버지와 얘기할게. 내가 괜찮아도 현실적으로 힘든 부분이 많거든."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전시회까지 남은 시간은 앞으로 보름. 그 시간 동안 수도와 황궁에서 지원해줄 수 있어. 때마침 마이샬 영지와 수도 사이의 거리도 가까우니 사흘만에 해결할 수 있을 거야."
드물게 의욕을 활활 불태우는 리나다. 절대로 쉽게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푸른색 눈동자에 똑똑히 새겨져 있다.
하긴 전생으로 따지자면 올림픽에 버금가는 이벤트일텐데 포기하면 돈과 명성을 허공에 뿌리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 기회는 자연스레 테르스 왕국으로 넘어가겠지.
어쩌면 테르스 왕국에서도 이 점을 노린 것일 수도 있다. 우리들은 이런데 너희는 뭐 하고 있냐? 라는 식으로.
겉으로는 제논 일대기의 팬을 위한 전시회지,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저 국제적인 축제에 지나지 않지만 정치인들에게는 복잡하디 복잡한 축제.
'나도 만일에 대비해야겠다.'
만에 하나 정체를 들키기라도 하는 순간 상황이 복잡해질 것이다.
물론 나에게는 희대의 사기 스킬, '연재 중단', 혹은 '절필'이 있기에 상대적으로 안전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넓고 미친놈은 많다고, 초고 도난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웬 미친놈이 나를 노릴 수도 있다.
여태까지 그 부분이 염려되어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던 건데 초고 도난 사건부터 확신을 갖게 됐다.
나는 속으로 생각을 거치다가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라 리나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만약 안 된다고 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어쩔 수 없이 수도에서 개최해야지. 수도는 현재 포화 상태라 정상적인 개최는 힘들겠지만 무리를 한다면 가능해."
"우리 영지에서 개최하는 이유가 그때문이구나? 텅 비어있어서 만들기도 쉬울테니까."
"정확해."
"그럼 누가 오는지는 알고 있어?"
이런 대규모 이벤트에는 반드시 귀빈이 참석하기 마련이다.
미네르바 제국과 테르스 왕국의 관계를 고려하자면 각 나라의 통치자가 직접 오진 않고 대리인을 내세울터.
아니나 다를까. 리나의 입에서 나온 이름들은 내게 아주 익숙했다.
"우선 너도 예상하고 있다시피 나와 오라버니는 물론이고 레킬리스 공작가도 참여할 거야. 헬리움에서는 세실리가 찾아올 수도 있지. 테르스 왕국에서는 빅토르 문화대신이 방문할거고."
문화대신이라 하니 조금 웃기게 들리겠지만 테르스 왕국의 특성을 고려하자면 매우 높은 직급일 것이다. 아마 레킬리스 공작와 비견되는 위치겠지.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나로서는 어질어질한 라인업이다. 그래도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철저히 준비만 한다면 적어도 망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거 말고 다른 나라는?"
"세이비어 교국에서는 주교가 찾아올 수도 있겠지. 벨루스 왕국은 잘 모르겠네. 벨루스 왕국은 정치적인 목적이 아니라 자기들이 오고 싶어서 올테니까."
나는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는 듯하자 머릿속으로 계획을 구상했다. 황실 측에서 모두 해주겠으나 적어도 얼굴 담당은 하는 게 좋을 듯하다.
우리 아버지에게 명성이 없는 것도 아니고 도리어 붉은 사자의 칭호를 가지고 있으니 무시 당할 염려도 없다. 정 안 되면 관람하면 그만이고.
'치안을 좀 더 신경 써야겠네.'
우리 영지는 개발을 시작하지도 않은 영지라 범죄가 드물지만 혹시 모른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걱정하고 있는 건 따로 있다. 수도도 아니고 우리 영지에 전시회를 개최할테니 분명 의심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터.
2권부터 10권까지의 초고 모두 내 개인 책상 서랍에 있다. 자물쇠로 단단히 봉인했지만 초고 도난 사건을 상기하면 대비하는 것이 현명하다.
"리나. 하나 부탁할 게 있는데..."
"치안 유지에 신경 써달라고? 그건 걱정하지 마. 황궁에서 기사단을 파견시켜줄게."
내 주변 사람들은 어찌 된 게 내 생각을 이토록 잘 읽는 걸까. 신기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황궁에서 친히 기사단까지 파견해준다고 하니 감사히 받아야겠지.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 솔직히 말해서 나도 전시회를 보고 싶었거든. 전시회가 아무 탈없이 진행되면 꼭 보답할게."
"아냐. 이건 보답할 이유가 없는 문제야. 오히려 우리가 더 노력해야 제국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는 거거든. 너는 그냥 예술가들이 선보이는 작품들만 감상하면 돼."
"시간이 엄청 촉박할텐데 고생이 많네. 정말 보름 내로 준비를 끝낼 수 있겠어?"
올림픽보다는 규모가 훨씬 적고 어디까지나 팬심에 비롯하여 발생한 이벤트에 지나지 않지만, 리나 같은 지도자 계급에게 정말 중요한 일이다.
무엇보다 당장 눈 앞에 원작자인 내가 있으니 심리적으로 더욱 부담감을 느끼고 있을 터.
리나는 내가 걱정해주자 쓰게 웃더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못 해도 해야지. 우리 제국에게 넘쳐나는 건 돈이니까. 급조한 티가 나더라도 못 만들지는 않을거야."
뒤이어 그녀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하기도 하고."
"흠."
아무래도 우리 영지가 채택된 이유에는 여러 복잡한 사정이 있는 듯했다.
나는 어두운 표정의 리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위로의 말을 전했다.
"힘내."
난 준비만 하고 팝콘이나 뜯고 있어야지.
*****
이후로 세계 각 국의 주요 인사들이 전시회에 참석할 거라는 소식이 연달아 터져나올 쯤이었다.
전시회가 전시회처럼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우려가 점점 흘러나왔으며, 너무 많은 귀족들이 모이자 평민들도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전시회의 예술가들도 보는 눈이 너무 많아지자 차츰 부담감을 느꼈다. 본인들은 제논 일대기를 향한 존경과 팬심(?)으로 전시회를 개최한 것인데 바깥에서는 난리도 아니었으니.
이대로 가다간 본래의 목적이었던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의 의미가 퇴색될 가능성이 높았다.
전시회가 개최되기 일주일 전, 아이작이 남긴 말만 아니었다면.
[모두 펜을 잠깐 내려놓고 즐거운 마음으로 즐겨주세요. 모두에게 행복한 추억이 될 수 있도록.]
저 말이 나오자마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나라에서 누가 참석한다는 소식이 모두 사라졌으며 오직 전시회가 준비 중이라는 말만 나왔다.
덕분에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전시회가 아닌, 축제의 의미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예술가들도 더이상 부담을 느끼지 않아 본격적으로 힘을 쏟을 수 있다.
제논 일대기를 사랑하는 모두가 축제의 분위기에 행복한 미소를 띌 때 쯤, 혼자 웃지 못 하는 이가 있었으니...
"아. 씨발. 원로원 개새끼들. 타이밍 놓쳤어."
원로원과 드잡이질을 하느라 참석 타이밍을 놓쳐버린 알븐하임의 여왕, 아르웬이었다.
그녀는 레인이 전달해준 신문을 들여다 보다가 눈쌀을 찌푸렸다.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참석한다고 공식적으로 성명을 내면 그야말로 초를 치는 격이다.
원래는 사심도 채우고, 겸사겸사 작가의 정보를 찾기 위해 전시회에 참석하려 했으나 원로원이 거세게 반발했다.
고작 그런 곳에 자기들이 찾아갈 필요가 있냐고. 오히려 그들 쪽에서 알븐하임에 찾아와야 한다고 말이다.
아르웬은 신문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시선을 떼며 작게 중얼거렸다.
"...안 되겠어. 하루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