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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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겪는 매운맛 마리 버전에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저택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팔짱을 끼고 있는지라 얼굴의 화끈거림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최대한 태연한 척을 해도 마리의 말마따나 얼굴에 다 드러나서 큰 의미가 없었다.
"꾹. 꾹."
"하지 마."
"싫어. 더 할 거야."
마리는 그런 내 얼굴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연신 장난을 쳤다. 내가 하지 말라고 해도 그녀는 상큼하게 웃으며 무시했다.
이유를 물으니 붉은 물이 나오는지 궁금하데나 뭐래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다.
결국 반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딱히 기분 나쁜 것도 아니고 마리만의 애정 표현이니 가만히 놔둘 생각이다.
우연히 누군가 지나가다가 우리 둘을 보더라도 상관없다. 마리라면 그 사람에게도 당당하게 연인 사이라며 공표할테니.
남자친구가 된 입장에서 조금 부끄럽긴 해도 자신감 넘치는 그녀가 좋다. 가끔씩 나보다 더 남자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리하여 마리가 나에게 장난을 치면서 저택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어서 오십시오, 마리 아가씨. 가문으로 돌아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택 앞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한 노인이 예법에 따라 정중하게 인사하며 반겨줬다. 나는 허리를 꾸벅 숙이며 공손하게 인사한 노인을 바라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전통적인 집사복이었다.
희끗희끗한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겼으며 콧수염은 한치의 흐뜨러짐 없이 말끔하게 정돈했다. 또한 집사복으로도 감추지 못 하는 듬직한 체구로 하여금 재련된 검을 방불케 했다.
그간 단련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강인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세바스찬 집사장 님. 오랜만이네요. 그간 평안하셨어요?"
"저야 늘 똑같습니다. 그런데 옆의 붉은 머리의 신사분은 누구이신지요? 어디서 본 듯한 모습인데..."
마리의 인사를 받은 노인이 숙였던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나를 바라봤다. 허리를 숙였을 때는 몰랐는데 혀를 펴고나니 그의 키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아버지의 키가 190cm에 달하는데 앞의 집사장은 그와 비슷했다. 나이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등을 반듯하게 펴는 걸 보면 실력자가 분명하다.
'보통 집사 캐릭터가 강하다고 들었는데...'
판타지 세계 답다고 해야겠지. 나는 예리하게 빛나는 집사장의 눈빛에도 전혀 물러서지 않으며 대답했다.
"안녕하십니까. 마이샬 가문의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흠. 역시 마이샬 가문이었군요. 어쩐지 붉은머리가 익숙하다 했습니다."
마리가 세바스찬이라 부른 집사장도 내 아버지의 명성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나는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무튼 간에 레킬리스 가문의 저택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굳이 두 분의 관계를 여쭈어 볼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세바스찬이 나긋나긋하지만 능청스럽게 이야기했다. 하기야 아직까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있으니 눈치를 못 채면 그 사람이 이상한 거겠지.
그에 나는 쓴웃음을, 마리는 더욱 진하게 웃으며 우리의 관계를 과시하듯이 어깨에 기대었다. 세바스찬은 우리의 달달한 관계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세바스찬. 지금 안에 누가 있어요?"
"두 분 모두 안에 계십니다. 특히 주인님께서는 아가씨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일을 하루만에 처리했다고 들었습니다."
벌써부터 딸바보의 냄새가 스멀스멀 풍기는 것 같다. 솔직히 마리 같은 딸이 있다면 누구라도 딸바보가 되는 것이 정상이다.
물론 남자친구인 나로서는 거대한 장벽이 떡하니 세워진 거나 마찬가지지만. 순탄치 않은 길이 예상된다.
그런 내 심정도 모르는지 마리는 그저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아빠도 참. 못 말린다니까."
"우선 두 분 모두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영식께서는 잠깐 손님방에 머물러야 할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전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성심성의껏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세바스찬이 저택 쪽으로 손을 내밀자 우리 둘도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세바스찬도 앞서 나가며 안내해주기 시작했다.
이윽고 저택의 문 앞에 도달할 수 있었는데, 정문부터 크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목재로 구성된 정문에는 레킬리스 가문을 상징하는 독수리가 조각돼 있었으며 당장이라도 하늘 위로 비상할 듯한 위엄을 풍겼다.
드워프가 심혈을 기울여서 설계했다는 마리의 말처럼 공을 들인 게 눈에 보였다.
끼이익-
내가 정문을 감상하는 도중에 세바스찬이 문을 대신 열어줬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라는 듯이 안쪽을 향해 손으로 가리켰다.
이에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마리가 도통 풀지 않았던 팔짱을 풀었다. 절대 풀지 않을 것처럼 끼고 있었던지라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집에서는 예의를 차려야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의문에 찬 얼굴로 마리를 바라보니 그녀가 빙글거리며 말했다. 맞는 말이긴 해도 조금 아쉬웠다.
그런 내 마음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마리가 내 볼을 살짝 꼬집었다. 조금만 참아달라는 부탁은 덤이고.
"그럼 손님 방부터 가도록 하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막간을 틈타 마리가 나에게 장난을 치고 있는 동안 세바스찬이 안내를 해주기 시작했다. 나는 듬직한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뒤를 졸졸 따라갔다.
저택 내부는 화려함과 거리가 멀었으나 외부의 모습처럼 웅장함이 감돌았다. 단조로우면서도 서로 어울리는 색상들로 조화를 이루었고 내부 구조물 또한 필요한 것만 배치돼 있어 눈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특히 그중 가장 압권인 건 바로 천장이다. 전에 마리가 말해주길 레킬리스 가문은 역사를 중요시 여긴다고 들었는데 천장에는 500년 전 '종족전쟁' 당시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엘프와 수인 연합, 그리고 인간이 서로 충돌하는 그림이었으며 드워프는 연합이라기보다는 인간을 지원해주는 세력이라 멀리서 무기를 공수하는 중이다.
역사에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들도 단번에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묘사가 잘 되어있었다.
'종족전쟁이 끝나고 미네르바 제국이 탄생했으니 천장에 그릴만도 하지.'
아무튼 화려함이 없다는 말은 취소다. '하늘'이나 마찬가지인 천장에 저런 그림을 그렸다는 건 그만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의미다.
"미네르바 제국은 종족전쟁 당시 평범한 왕국에 지나지 않았죠. 하지만 초대 황제의 뛰어난 능력과 레킬리스의 정치력을 바탕으로 제국으로 다시 건국되었습니다. 종족전쟁 이후 있는 냉전 시기를 무사히 거쳐왔고 지금에 이를 수 있었죠."
내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 보고 있을 때 세바스찬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고개를 아래로 내리니 세바스찬이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가 천장을 가리키며 그에 물었다.
"저거 종족전쟁을 묘사한 거 맞죠?"
"네. 그렇습니다."
"마족이 없는 게 좀 아쉽네요. 마족도 두 분파로 나뉘어 참전했는데."
종족전쟁 당시에 마족은 두 부류로 나뉘어서 각 연합에 참전했다. 인간을 증오하는 마족과, 그렇지 않은 자들.
하지만 지금 천장의 그림에는 마족의 모습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마족은 시대 특정상 차별 때문에 큰 공로를 세우진 못 해도 나름 역할이 큰 편이었다.
세바스찬도 내가 그 부분을 지적하자 본인도 잘 알고 있는지 약간 곤란하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건 저도 안타깝습니다. 당시 저 그림을 그린 작가가 마족에게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 들었거든요. 아마 그때문에 마족을 넣지 않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흐음..."
"그래도 지금은 다시 작업 중이라 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역사를 덕목으로 여기는 레킬리스여서 약간 의아하긴 해도 다시 작업 중이라니 쉽게 넘겼다. 뒤이어 세바스찬이 재차 안내를 해주기 시작하자 나와 마리는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이윽고 손님방으로 따라가는 중, 길게 이어진 복도의 벽에 설치된 초상화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초상화 밑에는 이 세상에서 사용되는 연도와 더불어 간략한 설명이 덧붙여진 상태다.
'연도별 레킬리스 가주인 모양이네.'
가끔씩 마리처럼 머리가 흰색인 사람의 초상화도 있는 걸 보면 확실하다. 내가 초상화를 보면서 천천히 걸어가자 안내를 하던 세바스찬도 내 걸음걸이에 맞춰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옆에 있는 마리 또한 내가 구경을 다 할 때까지 가만히 있어줬다. 그녀에게는 질리도록 본 초상화여서 볼멘소리를 할 줄 알았는데 나를 배려해줬다.
"...음?"
초상화 하나 하나를 관찰하면서 지나가다가 문득 특이한 초상화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설명이 붙여진 팻말은 보통 흰색이었는데 이건 검은색 바탕이다.
이에 의문을 지니며 설명란에 붙여진 설명을 바라보니 이내 납득할 수 있었다.
[레킬리스 가문 역사상 최악의 악인.]
[공작위에 오르기 위해 형제를 암살.]
[미네르바 제국의 부흥을 위해서라며 사병을 모집. 그리고 주변 귀족과 결탁.]
[이밖에도 평소 문란한 생활을 했으며 마음에 안든다는 이유로 고용인을 겁박.]
[이로인해 태어난 사생아들은 전부 추방시킴.]
호부견자라고, 호랑이 밑에 언제나 호랑이가 태어나는 법은 아니다. 이처럼 인품이 출중한 인재를 배출하는 레킬리스 가문이라 할지어도 악인은 존재하는 법이다.
아무래도 유독 눈에 띄게 만든 걸 보면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의미인 것으로 추측된다. 원래 사람은 좋지 못한 역사에서 더 큰 깨달음을 얻는 법이니까.
"헤이즐 하우젠 레킬리스. 능력은 좋지만 그 능력을 좋지 못한 곳에 사용한데다가 인품마저 좋지 않았죠. 다행히 그의 아들이 반면교사 삼아 레킬리스 가문이 위험에 처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아까처럼 내가 초상화를 유심히 관찰하자 세바스찬이 부가 설명을 해줬다.
나는 턱을 매만지며 초상을 바라보다가 그의 설명을 듣고 궁금한 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주변 귀족과 결탁했다면 이거 반란의 징조가 아니었나요? 레킬리스 가문은 황실의 측근일텐데..."
"다행히 황실이 눈치채기 전에 다음 대 가주께서 막으셨습니다. 당연히 헤이즐 공작은 폐위되었고 그의 아들이 작위를 이어받았죠. 그 사람이 바로 인디스 하우젠 레킬리스이며 현 공작님의 조부님이십니다."
"음..."
역시 재미있다. 나에게 역사만큼 흥미를 이끄는 건 없다.
조금 더 둘러보고 싶었으나 이대로 시간을 지체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 발을 떼었다. 역사에 대한 건 나중에 차차 알아가면 그만이다.
"영식께서는 역사를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재밌잖아요."
"허허허. 레킬리스 가문에 잘 어울리시는군요."
세바스찬은 그리 말하면서 마리를 힐끔 바라봤다. 마리는 그의 시선에 담긴 뜻을 눈치챘는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였다.
릭스 때와 달리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이 정말 귀엽기 짝이 없었다. 하마터면 무심코 손을 잡아버릴 뻔했다.
"이곳이 손님방입니다. 곧 있으면 간단한 다과를 들고 올 겁니다. 혹시 하룻밤 머물고 갈 생각인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아뇨. 아뇨. 그냥 방문 목적으로 온 겁니다. 곧 있으면 갈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아! 저쪽에 책이 있으니 심심하시다면 읽으셔도 상관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편안한 시간 보내시길."
끼익-
나는 세바스찬이 직접 문을 열어주자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마리와 눈을 마주치는 건 잊지 않았다.
그녀는 짧은 시간이어도 나와 떨어지는 게 싫었는지 뾰루퉁한 표정을 짓기 있었다. 그에 나는 빙긋 웃어주며 입모양으로 속삭였다.
'기다릴게.'
내가 입모양으로 그리 알려주자마자 마리가 해맑게 웃어줬다. 뒤이어 그녀가 손을 흔들어주자 나 또한 손을 흔들어줬다.
덜컥-
세바스찬이 문을 닫아주자 손님방에는 정적이 가라앉았다. 비록 나 혼자 있다지만 순식간에 분위기가 고요해지니 기분이 묘해졌다.
우선 세바스찬이 말하길 나중에 간단한 다과를 들고 온다 했으니 자리에 앉아있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등을 빙글 돌려 손님방의 풍경을 바라봤다.
"...허."
이제는 감탄도 나오지 않는다. 손님방이라 해놓고 거의 작은 집 하나 수준으로 넓었다.
이게 바로 진정한 재벌집 내부의 풍경이라는 걸까. 중앙에는 손님 응대용 테이블이 길게 설치돼 있었으며 바깥에는 테라스도 존재했다.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건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해 있는 책장들이다. 분명 손님방일텐데 서재 수준으로 책장이 반듯하게 세워져 있었다.
나는 다른 걸 다 제쳐두고 책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과연 책장에는 무슨 책이 있을까 싶어서. 가능하면 내가 읽지 않은 책이 있었으면 한다.
"어디 보자... 이건 읽었고, 이것도 읽었고, 이것도 읽었네."
뭐야. 다 읽은 거잖아.
레킬리스 가문 아니랄까봐 역사 관련 서적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으나 집에서 다 읽은 것들이다. 굳이 역사책이 아니더라도 집에서 한 번쯤은 봤던 책이다.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방이라서 그런지 대중적으로 유명한 책들을 골라 넣은 듯했다. 나는 아쉬움에 책장에서 발을 돌리려고 했다.
[제논 일대기]
"... ..."
새로이 설치됐는지 텅텅 비어있는 책장에 내 책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것도 1권부터 최근에 나온 10권까지 반듯하게.
다른 곳도 아니고 공작가 손님방에 제논 일대기가 있으니 뭐라고 해야 할까. 고등학생 시절 학교 도서관에 판타지 소설이 실려있는 듯한 기분이다.
'근데 제논 일대기는 한 명당 한 권밖에 구매하지 못 한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속으로 의문을 품으면서 제논 일대기 1권을 책장에서 꺼냈다. 꾸준히 관리했는지 먼지 하나 묻어있지 않았고 책 표지도 말끔했다.
심지어 책 특유의 눅눅함과 퀴퀴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최근에 구매했거나 습기마저 철저하게 관리한 거겠지.
샤락-
나는 책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책 표지를 넘겼다. 종이가 약간 변색되었으나 1권이 발매된 시기를 고려하면 오히려 잘 관리한 수준이다.
'이건 다시 넣자. 다른 책이나 봐야지.'
내가 쓴 책이라 그런지 크게 흥미가 없었다. 나는 제논 일대기를 도로 책장에 넣고 다른 책이 있는지 확인했다.
"어? 이건 못 봤던 거네?"
책장 아래에 있어서 미처 발견하지 못 했던 책이 하나 있었다. 나는 기대를 담으며 그 책을 뽑았다.
정말 운이 좋게도 역사와 관련된 서적이었다. 심지어 그 복잡하다던 '종족전쟁'에 대한 탐구서여서 나에게 안성맞춤이다.
이에 희희낙락하며 테이블 쪽으로 걸어간 뒤 손님용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마리가 돌아올 때까지 이 책을 보면서 진득하게 시간을 보내면 될 듯했다.
'횡재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 페이지를 넘겼다. 아래쪽에 꽂혀있던 책이라해도 열심히 관리한 흔적이 드문드문 눈에 들어왔다.
뒤이어 집중력을 발휘해 책이 전달해 주는 지식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책이었던지라 더욱 재밌게 감상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종족전쟁이 발발한 근본적인 원인을 다른 시선으로 보고 있구나. 이것도 흥미롭네.'
책이란 본래 사람이 쓰는 지식의 양성소. 당연하지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 책에서 전달되는 지식 또한 다를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종족전쟁이 터진 이유를 엘프와 인간 사이의 이념 차이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이 책은 다르다. 인간이 엘프에게 도전장을 내밀기 위해서 일종의 조작 사건을 일으켰다고 말하는 중이다.
실제로 종족전쟁 같은 대전쟁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명분'이 반드시 필요하다. 명분도 없이 주변 국가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순간 몰매를 맞을 것이 뻔하며 최악의 경우 세계 2차 대전의 나치 독일처럼 될 수 있다.
물론, 국민이 전쟁을 반대할 수도 있으나 나치는 자국민을 세뇌시켜 눈과 귀를 가렸다. 그때는 인터넷도 보급되지 않았으니 세뇌하기는 더욱 쉬웠을 것이리라.
'그러고 보니 종족전쟁 당시 인간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싸웠을까? 궁금해지네.'
하나 하나 차근차근 역사를 되짚으면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지는 법이다.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하지 않는 이상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어도 공감은 절대 못 하는 법이니.
나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책 속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가끔씩 누군가 내 앞을 왔다 갔다하는 기척이 느껴져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 번 몰입하면 극한의 집중력이 발휘되는 나만의 특성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흠."
"... ..."
"으흠!"
그러다 누군가 헛기침을 토하는 소리가 귓가에 박혀들었다. 동시에 단단했던 내 집중력이 한순간에 깨졌으며 지식의 바다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다.
나는 집중력이 깨져 불쾌해진 것도 잠시, 이곳이 내 집이 아니라 레킬리스 저택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에 서둘러 고개를 들어올리며 헛기침을 한 주인을 바라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푸른빛이 감도는 흰색 머리카락이었다. 세바스찬처럼 나이가 들어 성성해진 머리카락이 아니라 원래부터 새하얀 머리카락.
얼굴 또한 엄격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매우 특이한 인상이었나 온화함이 깃든 푸른색 눈동자로 하여금 자비로움이 느껴졌다.
옷차림 또한 단촐하면서도 위엄이 느껴지는 흰색 양복이다. 나는 눈을 깜빡이면서 전조도 없이 내 앞에 등장한 남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윽고 남자의 시선과 내 시선이 서로 교차했을 때 쯤, 남자가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젊은 친구가 역사에 관심이 많군?"
"... ..."
그 말이 나오자마자 다급하게 그의 양옆을 둘러봤다. 속으로는 아니길 빌었다.
하지만 세상 일은 쉽지 않다고. 내 불길함대로 남자의 양옆에는 세바스찬과 마리가 나란히 서 있었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책에 집중하다가 그들이 돌아온 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큰일났다.'
여자친구의 아버지에게 예의를 밥 말아먹은 놈으로 찍히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