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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77화 (78/763)

< 77화 >

'공작'의 작위는 황제 또는 왕 다음 가는 권력을 지녔으며 수도 못지 않은 드넓은 영토, 막대한 부, 그리고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것으로 묘사된다.

게다가 공작은 보통 혈통상 왕족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런 연관성으로 왕이 일찍 죽는다면 다음 후계자가 성장할 때까지 섭정이 되거나 직접 왕의 자리에 앉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나라가 흔들리는 건 변함이 없다. 후자의 경우는 당연히 암중모략을 펼쳤다는 의미고 전자는 어린 후계자를 바지사장 삼아 폭정을 저지르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탓에 많은 매체에서 공작의 지위를 지닌 사람들은 대부분 왕의 숙적으로 표현되는 편이다. 허나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상식이 똑바로 박혀있는 국왕이라면 공작에게 많은 사병과 거대한 부를 축적하게 가만히 놔둘 리가 있나?

설령 어찌어찌 힘을 쌓는다 하더라도 주변 세력에게 견제를 받을 게 뻔하다.

그건 미네르바 제국의 개국공신, 레킬리스 공작가도 마찬가지다. 레킬리스 가문은 개국 당시 광활한 영토와 막대한 자금, 그리고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 수록 주변에서 가해지는 압박이 심해지고, 더이상 존속이 위태로워질 듯하자 레킬리스 가문은 황제에게 모든 영토와 군사력을 반납했다.

당시에는 모두가 경악할만한 판단이었으나 시간이 흐르고 그 선택은 옳았다. 공작을 견제하던 세력들은 붕 떠버렸고 이내 분열되었으며 자연스레 없던 일이 되었다.

황실 또한 눈엣가시였던 공작이 모든 힘을 포기하여 큰 이득을 보았으나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황제는 더욱 강력한 집권을 위해 레킬리스 가문을 자기 옆에 붙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간다면 대통령 옆을 보좌하는 국무총리로 임명했다고 보면 편하다. 황제가 특정 명령을 내리면 레킬리스 공작가는 '행적적인' 분야를 모두 도맡아 처리하는 식이다.

사실상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그야말로 윈윈 전략이었다. 황제는 왕권을 강화할 수 있으니 이득이었고 레킬리스 가문은 힘이 없을지언정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레킬리스 가문이 반납한 영토는 현재 둘로 나뉘어 백작급 귀족 둘이서 통치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 저택이 수도에 있는거야. 근무 때문에 황궁에 자주 방문해야 되거든."

"그렇구나."

레킬리스 가문의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 안.

나는 맞은편에 앉은 마리에게서 레킬리스 가문의 역사를 듣고 있었다. 역사에 빠삭한 나로서는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조용히 들었다.

여자친구가 자랑스럽게 자신의 가문에 대해 설명하는데 초를 칠 수 없는 법이다.

어쨌거나 위의 설명처럼 레킬리스 가문은 영지가 없고 수도에 있는 대저택만 소유하고 있다.

후작급 인사는 보통 야전 사령관을 맡고 있으니 대부분 국경지대에 포진돼 있다. 이런 기묘한 구조로 인해 실세라 할만한 귀족은 대부분 백작들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레킬리스 가문에게 힘이 없다는 건 아니다. 황실과 일종의 공생 관계를 맺고 있으니 황제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공작가의 힘도 자연스레 강해진다.

게다가 레킬리스 공작가는 제국민들에게 평판이 압도적으로 좋다. 만약 레킬리스 가문이 견제를 받아 위험해진다면 제국민이 먼저 발벗고 나설 가능성이 높다.

'둘이서 합심하고 폭정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은데 신기하네.'

고인물은 썩게 되기 마련이지만, 신기하게도 그런 징조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이를보아 두 곳 모두 인성 교육은 확실하다는 걸 얼추 예상할 수 있다.

특히 레킬리스 가문은 인성을 더욱 중요시 여기는 편인데 전에도 말했지만 망나니가 나오면 가차없이 추방시켜버린다.

그리고 레오르트와 리나 남매도 나를 압박했을지언정 나름 신사적으로(?) 대우했다고 봐야 한다. 인성파탄자였다면 내 의사 따위는 가볍게 씹어버리고 강제로 무릎 꿇렸겠지.

덕분에 미네르바 제국은 5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단 한 번의 반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영원한 라이벌이자 문화강국인 테르스 왕국에서는 반란을 넘어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물론 미네르바 제국의 귀족이 순한맛이라면 혁명 전의 테르스 왕국의 귀족은 매운맛을 넘어선 수준인 것도 감안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테르스 왕국은 반란이 아니라 '혁명'이 발발했다.

다행히 혁명이 발발하고나서 입헌군주제와 비슷한 통치 방식을 취했다지만 불협화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아참. 아이작."

"응?"

"혹시 우리 저택에서 하룻밤 머물고 갈 생각은 없어?"

내가 머릿속으로 미네르바 제국의 역사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마리의 질문이 귀에 들어왔다. 그에 나는 상념에서 벗어나와 그녀와 마주했다.

기대감으로 한가득 채워져 있는 푸른색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직시하는 중이다. 미소도 지은 걸 보면 내가 저택에서 하룻밤 자고 가기를 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말 그대로 방문 차에 들리는 것 뿐이다. 마리네 저택에서 자는 건 내 계획에 없었다.

"아니. 오늘은 말 그대로 방문만 할 생각이었어. 이미 우리 가족에게도 말해 놓은 참이야."

"아... 그래? 아쉽다."

마리가 진심으로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만 곧바로 포기하는 반응을 보아 내가 거절할 걸 알면서도 권유한 것 같다.

그에 나는 못 말린다는 듯이 작게 웃었다. 본래 이성의 집에서 하룻밤 머문다는 건 약혼을 한 사이에나 허용되는 일이다.

비록 내가 마리의 남자친구이지만 정식적으로 약혼한 사이가 아니니 하룻밤 머물렀다간 어떤 시선을 받게 될지 뻔하다. 마리네 부모님은 나를 무례하다고 생각하겠지.

'그나저나 약혼이라...'

이 세상의 결혼적령기는 평균적으로 20대 초반이다. 중세 시대를 표방하고 있어서 10대 중후반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귀족은 의무적으로 아카데미를 졸업해야 되기에 늦는 편이다.

물론 그 전부터 약혼을 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특히 마리 같이 계급이 높은 귀족이라면 10대 초반부터 온갖 혼담이 오고 갔을 터.

내 여자친구에게 혼담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까. 나는 불안 반 궁금함 반의 심정으로 마리에게 질문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결례일 수도 있는 질문이지만 마리여서 물어볼 수 있다.

"마리. 궁금해서 그런데 혹시 옛날에 혼담 이야기가 오고 가진 않았어?"

"응? 그건 왜?"

"그냥 궁금해서."

"음... 많이 있었지? 아무래도 나는 공작가 출신이니까. 옛날에는 몇 명 만나본 적이 있어. 그중 레오르트 님도 있었고."

"...그래?"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입 안이 쓴 건 어쩔 수 없었다. 마리의 출신을 고려하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 내 씁쓸한 표정을 봤는지 마리가 약간 다급한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전부 다 거절했어. 지금 연락 오는 사람도 거의 없고 레오르트 님도 인맥만 맺고 끝냈거든."

"전부 거절했다고? 어째서?"

"겉과 속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나를 정치적 도구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거든.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사람의 심리를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어."

독심술 같은 건가. 전생에서도 유독 사람의 심리를 잘 읽는 사람이 있는데 마리도 부류인 듯했다.

내가 그 생각을 하는 동안 마리는 빙긋 웃더니 나에게 말했다. 애교를 담은 건 덤이다.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도 이때문이야. 너는 가식은커녕 거짓말도 잘 못 하잖아? 난 그런 솔직한 점이 너무 좋아."

"...나도 거짓말 잘 하거든?"

"그래봤자 얼굴에 다 드러나는데 뭘. 그나저나 아이작은..."

"손님.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마리가 질문을 채 끝내기도 전에 마부가 저택에 도착했다고 알려줬다.

이에 마리는 마부가 앉아있는 쪽으로 돌아봤다가 다시 나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이건 나중에 물어볼게. 일단 내리자."

"응."

끼익-

내가 먼저 문을 열고 하차하자 안에 있던 마리가 당연하다는 듯이 손을 뻗었다. 나는 빙긋 웃어주며 그녀의 손을 잡아 아래로 부드럽게 이끌었다.

이윽고 마리가 하차하자 손을 떼려고 힘을 풀었을 때였다. 마리는 내가 손을 떼려고 하자 어림도 없다는 듯이 확- 잡아챘다.

"어딜 은근슬쩍 빠지려고? 에스코트를 할 거면 끝까지 해야지?"

"하하."

귀여운 그녀의 장난에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나는 못 말린다는 듯이 웃음을 흘리고는 목적지인 저택을 바라봤다.

"우와..."

그리고 저택이 내뿜는 위용을 보자마자 탄성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하늘 높이 뻗어있는 대문은 고개를 끝까지 들어야만 끝을 볼 수 정도로 높았고, 그 뒤에 펼쳐진 풍경 또한 만만치 않았다.

대문에서부터 저택까지 이어져 있는 길과 양옆에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정원들. 길 끝에는 건축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설계한 듯한 대저택이 당당하게 세워져 있다.

한 시대를 앞서 간 듯한 장엄함과 웅장함을 선보이고 있다 해야 할까. 우리 가문의 저택도 나름 큰 편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리네 저택은 원근감을 무시할 정도로 방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어때? 정말 대단하지? 우리 가문이 영토는 없지만 저택만큼은 아름답다고 정평이 나있어. 드워프 장인에게 설계를 맡겼지."

옆에서 마리가 우쭐거리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나는 대문 너머에 위치한 저택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궁금한 점이 떠올라 그녀에게 물었다.

"여기서 몇 명이 사는거야?"

"한 100명 정도 살고 있을 걸? 정원사만 해도 5명이야."

다시 한 번 감탄이 나왔다. 지금 대문 뒤로 보이는 정원의 크기도 어마어마한데 그 안은 훨씬 넓은 모양이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안녕히 가세요~"

그사이 마부가 예의바르게 인사하며 떠나가자 마리는 활기찬 목소리로 배웅해줬다. 나 또한 떠나가는 마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뒤이어 마차가 점점 멀어졌을 때 쯤, 마리가 나에게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얼굴에 상큼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이제 들어갈까?"

"응."

당연하지만 손은 다정하게 붙잡은 상태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이 힘을 꽉 준 것이 포인트.

나도 이에 질새라 손에 힘을 강하게 주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우리가 연인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응?"

이윽고 대문 앞에 거의 다 도착했을 쯤, 나는 대문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다.

제복이 아니라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었으며 허리춤에는 검이 걸려 있다. 겉으로 보이는 무장 상태만 보아도 단순한 경비병 수준이 아니다.

전에 말했듯이 레킬리스 가문은 황실에게 모든 영지와 사병을 반납했다. 그런데 지금 대문 앞에는 단단히 무장을 한 병사가 엄숙한 표정으로 대기하는 중이다.

"정지! 신원을 밝히...!"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도 우리를 발견했는지 소리치려는 찰나였다. 병사는 마리를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의문을 드러냈다.

"시... 응? 마리 공녀님?"

"앗. 릭스 아저씨. 오랜만이네요."

마리도 경비병을 알아본 모양이다. 아무래도 두 사람은 서로 구면인 것으로 보였다.

이어서 마리가 릭스라고 부른 병사는 뒤늦게 무언가 깨달았는지 아, 하며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부터 방학 기간이라고 하셨죠? 공작님에게 언질을 받았습니다."

"네. 이번 달은 골든 이글 기사단이 근무하는 모양이네요?"

"그렇죠. 그런데 옆의 분은..."

마리와 정답게 대화하던 병사의 시선을 나에게로 옮겼다. 이에 내가 당황하며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와락!

"제 남자친구에요!"

마리는 손을 잡는 것을 넘어서 팔짱을 끼며 힘차게 대답했다. 내가 당황하던 말던 그녀는 내 어깨에 기대며 싱글거리기 바빴다.

릭스도 그녀의 돌발행동에 살짝 당황했으나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남자친구 분이셨습니까? 이거 참. 제가 눈치가 없었군요."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알겠습니다. 지크. 이제 문 열어도 돼."

"네."

릭스가 같이 근무를 서던 병사에게 명령을 하자 그 병사는 대문 중앙으로 걸어갔다. 이어서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눌렀다.

끼이이익-

그러자 거대한 대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평소 관리를 말끔하게 해 놓았는지 문이 열릴 때를 제외하면 그 어떤 소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대문이 완전히 개방되고, 릭스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우리를 진심으로 환영해줬다.

"레킬리스 가문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두 분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길."

"감사합니다. 릭스 아저씨도 수고하세요."

"고, 고생 많으십니다."

살갑게 인사한 마리와 달리 나는 다소 떨떠름하다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릭스는 그런 우리 둘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줬다.

"청춘이구나."

"... ..."

대문을 통과하는 도중에 릭스의 말이 귀를 파고들었다.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끼이이익-

뒤이어 완전히 개방되었던 대문이 도로 닫히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는 대문 앞에서 근무 중인 병사들을 바라봤다가 고개를 앞으로 옮겼다.

입구 밖에서도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하던 저택이었는데 안으로 들어오니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단순한 저택이 아니라 거의 궁전 못지 않은 아름다움과 위압감을 자랑했다.

역시 공작은 공작이라 해야 하나.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감탄만 나오는 외양이다.

"어서 가자. 우리 저택을 소개하는 건 나중에 해줄게."

"...응. 그런데 아까 그 분들은 뭐야? 공작가는 사병이 없다 하지 않았어?"

"사병은 없어서 황실에서 파견을 보내. 권위를 지켜주기 위한 장치인 셈이지."

"그렇구나."

나는 마리와 팔짱을 낀 상태 그대로 저택으로 나아갔다. 저택은 길 끝에 있는지라 도달하는 시간만 해도 오래 걸릴 것으로 예상됐다.

저벅- 저벅-

"... ..."

그 시간 동안 우리 사이에서 오고 가는 말은 없었다. 대화가 단절되니 자연스레 기묘한 분위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때문일까. 마리는 팔짱을 끼는 것을 넘어 내 어깨에 기대었고, 나는 처음에 주위를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꾸욱-

하지만 이내 마리가 팔짱을 더 강하게 끼면서 다시 그녀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아까는 인식하지 못 했지만 팔짱을 끼게 되니 말랑말랑한 가슴의 감촉이 교복 너머로 전달되었다.

비록 전생에서 연애를 해본 적이 있어도 이런 부분에서는 면역이 거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면역력이 다 떨어졌다고 봐야 옳겠지.

아무튼 간에 이런 상황은 나에게 너무 자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세실리도 그렇고 여자의 가슴은 남자의 마음을 들끓게 하기에 너무 효과적이었다.

더군다나 어느 순간부터 걸음걸이까지 느려져 기묘한 분위기까지 풍겼다. 만약 낮이 아니라 밤이었다면 이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겠지.

스윽-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우선 그녀의 머리에 내 뺨을 갖다 대었다. 내 키가 작은 편이지만 이정도는 할 수 있다.

"으으응..."

마리도 내가 얼굴을 슬며시 갖다 대자 기분 좋은 소리를 내었다.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것처럼 우리 둘은 한동안 서로 머리를 맞대었다.

"...아이작."

"응."

"아까 내가 묻다가 만 거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물어봐."

나의 무뚝뚝한 허락이 떨어지자 마리는 내 어깨에서 머리를 뗀 뒤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나 또한 자세를 풀고 그녀와 마주했다.

하얀 눈 같았던 그녀의 뺨은 노을처럼 붉게 물들었고, 푸른 바다처럼 청량한 눈동자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있다. 여전히 팔짱을 끼고 있어 서로 간의 얼굴이 가까웠기에 더욱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아름다우면서도 풋풋한 마리의 얼굴에 미소가 절로 흘러나왔을 때, 그녀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나에게 질문했다.

"아이작은 옛날에 혼담 같은 거 없었어?"

"음... 없었던 걸로 알고 있어."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 없었다.

아버지는 평민에서 귀족으로 승급한 케이스라 인맥이 다소 좁은 편이셨고, 어머니도 아버지가 기사 시절 때 만나신 분이다.

거기다 혼담이 오고 간다는 건 본질적으로 정략결혼에 가깝다. 아버지가 과거, 붉은 사자라 명성을 떨쳤다고한들 그건 기사 시절이지 정치력은 입증되지 않은 상태다.

하물며 우리 부모님은 정략결혼보다 연애 결혼을 원하신다. 혼담이 왔을지라도 나도 모르는 사이 부모님 선에서 해결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다행이네."

마리는 내 대답이 진실이라는 걸 독심술로 파악했는지 안심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 내가 의아한 마음을 지녔을 때 마리가 훅 치고 들어왔다.

"그러면 혼담은 내가 처음일 수도 있겠네?"

"...뭐?"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갑작스러운 돌직구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르는지 마리는 베시시 웃으며 장난스럽게 굴었다.

본인도 부끄러운 건 마찬가지인지 실시간으로 얼굴이 빨갛게 익어가는 중이다.

"왜 그리 당황했어? 우리 나이에 혼담이 이루어지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니잖아?"

"그..."

이게 중세 시대라는 건가. 전생이 기억이 박혀있기에 매우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고등학생이랑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가는 셈이니 나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정작 그 고등학생이랑 연애를 하고 있지만 결혼은 빨라도 너무 빠르다. 시대 차이 때문에 발생한 괴리감이었다.

"혹시 우리 부모님이 거절하실까봐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 부모님은 그리 모진 분들이 아니시거든. 가문을 이어받을 우리 오빠만 결혼을 잘 하면 끝이라 나는 딱히 상관없어."

마리는 내가 다른 의미로 당황하여 말을 꺼내지 못 하는 중이라고 착각했는지 살살 달래줬다.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속으로 고민하다가 숨을 길게 내쉬며 작게 대답했다.

"...그래도 당황스럽네.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야?"

"그냥 네가 좋기도 하고, 나중에 책을 쓸 때 도움이 될까 싶어서."

"책? 제논 일대기?"

"응. 상상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법이잖아? 그리고 원래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경험하는 게 훨씬 효과가 좋아. 그러니까..."

뒤이어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얼굴을 가까이 대더니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조금 도와줄 수 있어."

"... ..."

세실리 못지 않게 야릇하면서 앙큼한, 남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기 만들기에 충분한 목소리.

나는 그 목소리를 듣고나서 한 손으로 얼굴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얼굴에 열이 얼마나 올랐는지 손이 다 뜨거웠다.

달달하디 달달했던 마리의 매운맛 버전을 몸소 겪으니 당장이라도 정신이 나갈 것 같다.

'...제논 일대기가 전체 이용가라서 다행이다.'

야설을 적었다면 어떤 추궁을 받게 되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것 봐. 얼굴에 다 드러나잖아?"

"...시끄러."

"어라? 우리 아이작 화났어요? 뽀뽀라도 해줄까?"

"... ..."

애가 점점 매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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