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마족, 인간, 수인 이 세 종족은 20대 초중반 쯤 '신체적으로' 모든 성장이 끝나지만, 엘프는 그보다 훨씬 더 긴 30대가 되어서야 신체적 성장이 끝난다.
30대에 이르러서 신체적인 성장이 끝난다는 의미는 청소년기가 매우 길다는 말과 같으며, 종족을 불문하고 청소년기에는 다른 나이대에 비해서 무언가를 배우는 게 빠르다.
하물며 엘프와 마족 같은 장수종은 기억력이 출중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두 가지 장점이 합쳐져서 엘프가 성인이 된다면 걸어다니는 도서관 수준으로 폭넓은 지식을 소유하게 된다.
하지만 엘프의 30대는 신체적으로 성인임을 인정받는 나이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나이대는 평균적으로 50세 전후다.
그동안 본인이 가고 싶은 길을 찾고 그 길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특정 능력에 통달해야만 어엿한 성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엘프는 태생적으로 폭넓은 지식을 얻기에 유리하나 인간의 습득력에 비해서는 다소 빛바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대신 그들은 적어도 인간처럼 지식을 잊어버리는 경우는 없어서 유리한 건 똑같다.
"저 잘했죠? 헤헤."
"... ..."
엘프치고는 지극히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100년간 알븐하임을 다스린 엘프 여왕, 아르웬은 레인이 해맑게 웃어도 입도 벙긋하지 못 했다. 도통 이게 무슨 일인지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그녀는 10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동안 다사다난한 사건사고를 겪었다.
어린애라며 자신을 깔보던 원로원에게 대항하기 위해 적지 않는 노력을 쏟아부었고, 가끔 주변 나라와 마찰을 빚을 때도 재능을 살려 슬기롭게 넘길 수 있었다.
최근에는 제논 일대기 때문에 원로원이 지랄을 했으나 이제는 쉬이 넘겨버릴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풋내기 여왕으로 시작했던 시절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 수준.
'...좆됐다.'
하지만 아르웬은 100년이 넘는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를 느꼈다. 단순히 국가 재난 정도로 큰일 난 거라면 어찌 어찌 대비할 수 있을테지만 그 정도를 한참 넘어섰다.
그 이유는 눈 앞의 다크 엘프 소녀, 레인 한 명 때문이다. 정작 본인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 하고 있는 모습이다.
'아이고. 얘야...'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는 그녀이나 머리가 지끈거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레인의 어깨를 붙잡고 한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현재 레인은 이제 막 10살을 넘긴 매우 어린 나이이며, 보모 역할을 하는 중인 아르웬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중요하다. 자칫하다간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줄지도 모른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여기서 크게 혼냈다간 겉잡을 수 없이 폭발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지금은 조곤조곤 타이르고 나중에 따로 불러 따끔하게 혼내는 게 좋다.
아르웬은 새하얗게 변하기 직전인 머릿속을 간신히 떨쳐내며 진정했다.
지금 당장은 레인에게 상황 설명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레인? 지금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 알고 있니?"
"네?"
"지금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른지 알고 있냐고 물었단다."
사근사근한 말투로 물은 아르웬이나 그 속에는 깊은 빡침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어리디 어린 레인은 눈치채지 못 했다.
오로지 아르웬이 무슨 의도로 질문했는지 파악하기 위해 눈만 깜빡거리고 있을 뿐.
"하아..."
결국 아르웬은 참아왔던 한숨을 밖으로 꺼낼 수밖에 없었다. 악의라고는 하나도 없는 저 얼굴을 보자니 답답함이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순전히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이 초고를 들고 온 것이다. 의도만 보면 칭찬할만하나 그 결과가 최악으로 다가왔다.
"...여왕님?"
레인도 아르웬의 반응을 보고 나서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는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올망졸망한 푸른색 눈동자에 염려와 걱정이 담겨있다.
이에 아르웬은 이를 꽉 깨물었다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레인. 아무리 나를 기쁘게 하고 싶었다지만 이건 잘못된 행동이란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건 결코 옳은 일이 아니니까. 만약 네가 다른 사람에게 소중한 물건을 도둑맞는다면 어떻겠니?"
"음... 저도 똑같이 할 거예요. 아니면 아예 싹 다 털어버리거나? 선생님들께 그렇게 배웠어요."
다크 엘프 특유의 사고 방식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대답이다.
그들은 상대방이 먼저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보다 더한 걸로 복수하며, 반대로 은혜를 입었다면 어떻게든 배로 갚기 위해 노력한다.
그나마 다행인 부분은 적어도 도둑질이 나쁘다는 건 알고 있는 모양이다. 복수를 한다는 건 나쁜 짓을 당했다는 걸 인지한 것이니까.
허나 알고도 나쁜 짓을 저질렀다 점이 아르웬에게 뼈아프게 다가왔다.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그녀로서는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다.
"...혹시나 해서 묻는다만, 이 종이가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니?"
"어떤 물건이던 간에 처음 나온 물건이 가치가 뛰어나잖아요. 그래서 갖고 온 거예요. 여왕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도움이 되기는커녕 시한폭탄 그 자체다. 아르웬은 한숨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억누르며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럼 이 종이가 인간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도?"
"당연히 알고 있죠. 그러니 이것만 잘 이용하면 우위에 서지 않겠어요? 설령 인간들이 뭐라고 소리쳐도 우리에게 덤빌 수는 없을 거예요. 우리는 강하니까요."
하나만 알고 열은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만방자한 생각이다.
엘프건 다크 엘프건 저 오만함은 종족 특징인 게 분명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나이, 그리고 종족 특유의 오만함이 한데 어우려져 이런 결과가 도출되었다.
'...미쳐버리겠네.'
아르웬은 울고 싶은 마음에 마른세수를 하며 속으로 웅얼거렸다.
가능하다면 원래 있던 자리에 되돌리는 게 제일 좋겠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다. 레인이 출판사로 돌아가기까지 시간이 걸리는데다가 설령 돌려놓아도 초고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의심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지금 출판사는 미네르바 제국의 황실에서 조사단을 파견한 상황이다. 제아무리 레인의 은신술이 뛰어나도 만에 하나, 들키는 순간 정치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모두 끝장이다.
알븐하임을 다스리는 아르웬으로서는 최악만큼은 무조건 피해야하기에 차라리 차악을 택하는 편이 낫다. 그러니 초고는 당분간 놔두는 게 이롭다.
"알았다. 일단 내가 갖고 있으마. 다만 지금은 생각할 거리가 있으니 잠깐 쉬고 있으렴."
"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따끔하게 혼날 준비도 하고. 징계 처분과 더불어 장로님에게도 이 사실을 말씀드려야겠구나."
"네... 에?"
상황이 좋게 좋게 흘러갈줄만 알았던 걸까. 레인은 아르웬의 서늘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에 아르웬은 눈쌀을 살짝 찌푸리며 레인을 노려봤다. 아무리 제 식구라 해도 혼내야하는 건 혼내야하는거다.
"잘못을 저질렀으니까 혼이 나는 건 당연한 거잖니? 나는 네 후견인이지만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단다. 잘못을 했으면 단호하게 혼을 내야지. 그리고 지금 네가 저지른 행동은 알븐하임에 큰 위기를 부를 수도 있어."
"저, 정말이에요? 어째서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인간은 훨씬 강하기 때문이란다. 우리보다 부족한 게 많지만 결코 무시해서는 안 돼. 그리고 인간 뿐만 아니라 마족도 난리를 칠 거야."
"마, 마족까지? 그, 그래도 저희는..."
레인이 우물쭈물하며 반박하려하자 아르웬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레인은 지금쯤 이리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신에게 선택받은 종족인 우리가 어째서 고개를 숙여야 하냐고. 종족 전쟁 당시에는 삽질을 했으나 지금은 다를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뭐든지 간에 적당한 게 좋은 법. 레인은 현재 자부심이 아니라 '자만심'을 품고 있다. 안 그래도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청소년기에 진입했으니 그 자만심은 더더욱 커질 터.
[인간은 자기보다 아래인데 굳이 동급으로 취급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잘못을 저질러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아마 그릇된 짓임을 알고도 초고를 훔친 이유가 이때문일 확률이 높다.
아르웬 본인도 한때 그런 적이 있지만, 100년이 넘는 기간동안 몇 가지 깨달은 바가 있다.
아무리 신의 선택을 받은 종족이라 해도 결국 희노애락이 존재하는 필멸자에 불과하며 자만심을 가지게 되는 순간 눈을 가리게 된다.
예전에 뭣도 모르고 호기롭게 나섰다가 인간 국가에게 외교적으로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 그때부터 인간은 절대 만만하게 보아서 안 되는 종족이라 마음을 바꿀 수 있었다.
그러니 저 자만심부터 어떻게 고쳐야지 않을까. 아르웬은 훗날 레인을 제대로 교육시키겠다 다짐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네 생각대로 우리는 신의 선택을 받았지. 하지만 그렇다고 잘못은 변하지 않는단다. 용서받지 못할 짓은 용서할 수 없어."
"그래도 저는..."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니? 마음 같아서는 호통 치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는거야. 지금은 머리가 아프니 잠깐 물러가 주겠니?"
아르웬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느꼈는지 레인의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평소 나쁜 짓을 해도 아르웬이 크게 혼낸 적이 없었으나 오늘은 아닌 모양이다.
"...알겠어요. 모라가 그대에게 안식을 내려주시길."
레인은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다크 엘프 특유의 인삿말을 남기며 사라졌다. 주변 환경과 하나로 동화되는 완벽한 은신술이다.
아르웬은 레인의 모습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자 곧바로 탐지 마법을 펼쳤다. 레인의 기척은 물론이고 알현실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후우..."
딱!
뒤이어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가 혹시 몰라 손가락을 튕겨 또다른 마법을 발현했다. 마법을 발현하자마자 그녀의 주위로 동그란 막 같은 것이 생겨났다.
이 마법의 정체는 다름아닌...
"끼아아아아아!!"
방음 마법이었다. 그녀는 은회색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으며 흡사 와이번 같은 비명 소리를 내질렀다.
원래라면 알현실 바깥까지 들릴 정도로 큰 비명이었지만, 방음 마법을 설치했기에 소리가 새어나가는 일은 없었다.
"루미너스시여!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나이까! 아아아악!"
쌓이고 쌓였던 스트레스가 한계에 달해 기어코 터져버렸다. 아르웬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강하게 억눌렀다.
현재 사태는 최악이라 단언할 수 있다. 들키게 되면 최악 중의 최악이고, 설령 들키지 않아도 최악이다.
더군다나 원로원도 아니고 믿었던 사람에게 이런 외통수를 맞게 되니 그녀의 심정은 오죽할까. 마음 같아서는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었다.
"후우... 후우... 후우..."
한동안 히스테리를 부리던 그녀는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겨우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속에 있던 울분을 모두 토해내니 그나마 나아졌다.
하지만 산발이 된 머리카락과 독기에 찬 은회색 눈동자로 하여금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가 차곡차곡 적립된 상황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최악의 위기를 맞이해버리니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작가를 어떻게든 찾아야 해.'
국가 차원에서 나서지 않고 엄연히 '개인적으로' 만나야한다. 만나서 어떻게 하느냐?
'일단 대가리부터 박고 시작하자.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
여왕의 권위고 나발이고 머리부터 박을 생각이다. 레인을 막지 못한 자신의 잘못도 있거니와 작가의 비위를 어떻게든 맞춰야 알븐하임이 박살나지 않는다.
빈말이 아니라 제논 일대기의 영향력을 고려하자면 이 초고는 대량살상마법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자그마치 국보로 지정해야할 물건인데 선전포고를 받아도 할 말이 없다.
게다가 알븐하임은 현재 초고 도난 사태에 대한 성명문을 낸 상태다. 뻔뻔하게 뒷공작을 벌여놓고 발뺌했다며 어마어마한 비난 세례를 맞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또 찾다가 휴재라도 한다면? 이러면 또 책이 늦게 나올 수도 있잖아. 시위까지 벌어졌다는데 어떡하지?'
아르웬은 불안감에 버릇적으로 엄지 손톱을 깨물었다.
아무런 탈없이 초고를 돌려주기 위해서는 작가와 개인적으로 만나야한다. 헌데 지금 작가는 어떤 사유에서인지 신변을 숨기는 중이고, 본인을 드러내는 걸 극도로 꺼려하고 있다.
이때까지 원로원의 문제도 있고 다양한 이유 때문에 작가를 찾진 않았지만 오늘 상황이 달라졌다. 작가를 찾아서 어떻게든 사과하고 초고를 넘겨야만 자신과 알븐하임이 후폭풍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
"으으으으..."
딜레마도 이런 딜레마가 따로 없다. 최악을 면하기 위해서는 작가를 만나야하는데 작가를 찾게 되는 순간 절필의 위험성이 따른다.
아르웬은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지혜롭게 타파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순간적으로 원로원에게 뒤집어 씌울까? 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원로원이 반격을 가하게 되면 자신은 끝장난다. 그들은 영악한 뱀들이니 역으로 이용할 능력은 충분하다.
'일단 다크 엘프 장로부터 만나야 해. 위험성이 따르더라도 작가를 찾을 수밖에 없어.'
확실히 최악보다는 차악이 훨씬 낫다. 아르웬은 굳게 다짐하면서도 초고를 힐끔거렸다.
문화계에 있어서 대량살상마법보다 더한 영향력을 지닌 초고가 자신의 손에 쥐어져있다.
'잠깐만. 이걸 역으로 이용한다면...?'
시간이 지나 '우연히' 초고가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고 하면 과연 믿어줄까? 많은 사람들의 의심을 사겠지만 이미 도난당했던 물건이었으니 뻔뻔하게 굴면 문제는 없다.
확실한 증거도 없을 뿐더러 알븐하임은 최강대국 중 하나다. 본래 외교에서는 말보다 국력이 앞서는 법이니 미네르바 제국조차 뭐라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머지않아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냐. 원로원이 또 지랄하겠지.'
어딜 가나 원로원이 문제다. 아르웬은 헛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이마의 은빛 서클렛을 매만졌다. 중앙에 푸른색 보석이 영롱하게 박혀있었으며 왕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이어서 아르웬은 이마에서 서클렛을 탈착한 후, 쓴웃음을 지으며 서클렛을 내려다봤다.
이 서클렛을 100년동안 착용하고 있었지만, 오늘만큼 무겁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정말이지, 못 해먹을 짓이야."
폭풍은 완전히 물러갔지만, 그 여파는 참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