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시위는 아이작이 출판사에게 편지를 보냄으로서 차차 식어가기 시작했다.
편지의 내용은 한 페이지를 꽉 채울 정도로 매우 길었지만, 대충 요약하자면 이런 식이었다.
[너무 시끄러워서 정말 불안하다. 이러다가 나까지 다치면 어쩌려고? 압박이나 협박 같은 건 받지 않았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 그리고 나는 매우 건강하고 글을 취미로 쓰고 있으며 할 일이 많아서 잠깐 휴재하는 것 뿐이다. 그러니 괜한 오해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달라. 사랑해요. 독자 여러분들.]
한 페이지를 빼곡하게 채운 진심어린 부탁에 시위대도 물러가기는... 무슨 처음에는 거짓말 치지 말라고 반박했다.
그 편지가 정말로 아이작이 쓴 게 맞냐고, 화산이 폭발할 것 같으니까 상황을 어떻게든 무마하기 위해 거짓 편지를 쓴 게 아니냐고 외쳤다.
확실히 맞는 말이라 출판사는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줬다. 바로 제논 일대기 1권의 원본이다.
문화계에 큰 족적을 남기기 시작한 걸작이며 현재 만인의 사랑을 받는 제논 일대기의 시작.
심지어 출판사에서 초고를 받아 쓴 필사본이 아니라, 아이작이 직접 펜으로 쓴 것이다. 당연하게도 대중은 깜짝 놀라다 못해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이다! 우리가 어떻게 믿으라는 거냐!"
"필사가 아니라 진짜 원본이라는 증거를 대!"
"저게 진짜라는 걸 증명해라!"
물론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시위대 입장에서는 편지도 그렇고 출판사가 초고라 발표했던 원고지가 진짜라는 걸 쉽게 믿지 못 할 수밖에 없다.
시위를 나온 사람들은 남녀노소 두루 섞여있었지만 그중 세상 경험 많은 사람도 상당히 속해있다. 다시 말해 윗쪽 세상이 얼마나 더럽고 치졸한 곳인지 잘 안다는 의미다.
이런 이유 탓에 출판사가 초고라고 애처롭게 말해도 신뢰를 받지 못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이 반전됐다.
"지, 진짜 초고인 거 같은데? 필사본이라 아니라 원본이 맞아."
"그거 진짜입니까?"
"무슨 이유에서죠? 원고지가 낡아서 그런가?"
"아니. 원고지가 낡은 건 이유조차 안 돼. 낡은 원고지에 썼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잉크는 아니야. 잉크의 색이 변색될 정도면 꽤 오래 전에 썼다는 의미지. 무엇보다 여기 무수히 찍혀있는 점이 보이나? 이건 고민의 흔적이라네. 작가들은 첫 도입부 부분에 많은 고민을 거치는 법이지."
소식을 듣고 온 수집가 겸 전문가가 초고를 확인함으로서 증명이 되었다.
평범한 수집가라면 모를까, 미네르바 제국 내에서도 알아주는 수집가들 중 한 명이었기에 신뢰도가 대폭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을 사용한 흔적 없습니까? 혹시 모르잖아요."
"이보게. 마법은 무궁무진한 능력이지만 시간만큼은 어쩌할 도리가 없지. 하지만 이 원고지에는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네. 그러니 이건 진품이라 믿을 수밖에 없어."
"저, 정말로...!"
아예 못까지 박는 증거가 나오자 출판사 대변인은 당장이라도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은 마음이었다. 허나 아직 사태가 완전히 종결된 것이 아니니 그 감정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뒤이어 대변인은 수집가에게서 원본을 재빨리 가로챈 뒤, 자신에게 집중된 군중들을 향해 외쳤다. 출판사에서 목소리가 큰 사람을 따로 뽑았던거라 쩌렁쩌렁 울리는 듯한 크기였다.
"이제 증명은 충분했을 거라고 믿습니다! 여기 이 원본과 편지의 필체는 완벽히 일치하는 바! 그러니 이 편지에 담긴 내용은 제논 작가님이 여러분들께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이런데도 시위를 하고 싶으십니까! 만에 하나, 이 시위가 더욱 격해져서 몸을 숨기고 계시는 작가님에게 피해가 가신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우리가 더이상 뭐라 할 말이 있겠어?"
"작가님이 그러시다면 가야겠지."
"돌아가자. 2년은 길지만 어쩔 수 없겠어? 작가님이 쉬고 싶으시다는데 우리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에잉... 2년동안 일만 해야겠네."
그리하여 길고 길었던 시위대는 점차 해산되었다. 해산되는 와중에도 아쉬운 눈길로 출판사를 바라보는 이들이 간혹 있긴 했지만 그들도 머지 않아 발걸음을 돌렸다.
다만 끝까지 안 가고 버티는 이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초고에 시선이 향하는 중이다.
'제논 일대기 1권의 초고...'
'저거 얼마나 할까?'
'저것만 있으면...'
자그마치 국보로 지정해야할 정도로 가치가 높은 물건이 눈 앞에 있는데 욕심이 들기 마련. 직원도 무언가 이상해진 분위기에 소름이 돋아 서둘러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복도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이리저리 왔다 갔다하는 사장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장은 포고를 한 직원이 초고를 들고 돌아오자 서둘러 다급히 그에게 물었다.
"어, 어떻게 됐나? 시위대는? 저 놈들은 다 물러갔나?"
"물론이죠. 남아있는 사람들도 곧 있으면 돌아갈 겁니다."
"후우... 한시름 놓았군. 잘했네. 정말 잘했어."
직원의 대답에 사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수고했다는 듯이 그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직원은 겉으로 웃음을 띄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은근 기대하고 있었다. 평소 출판사 사장은 실적이 좋을 때 어마어마한 보상금을 지급하는 편이었으니.
직장 생활이 힘들어도 꾹 인내하고 버틸 수 있던 이유가 바로 사장의 후한 인심 덕분이다.
"정말 고생 많았어. 포상금을 두둑히 지급할테니 지금은 퇴근부터 해."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내가 다 고맙지. 허허허."
사장이 너털웃음을 흘리자 직원도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보통 직장 생활은 상사 때문에 꼬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그렇지 않다.
일개 출판사가 덩치를 부풀릴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는 제논 일대기가 맞지만, 쏟아져나오는 업무를 헤쳐나올 수 있던 이유가 바로 사장 덕분이다.
문제는 그래봤자 상사라는 거지만. 그래도 직원은 두둑한 포상금과 더불어 퇴근할 생각에 싱글벙글했다.
"아. 그리고 초고는 어서 이리 주게나. 빨리 후딱 처리해야할테니."
"알겠습니다. 이건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십니까?"
"다 생각이 있네. 어서 주게."
직원은 사장의 재촉에 아무런 의심없이 그에게 초고를 전달했다. 사장은 제논 일대기의 초고가 맞는지 여러번 확인하고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을 기점으로 폭풍이 잦아들 기미가 보인다. 사장 입장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귀족들을 상대할 일이 더이상 없을 거라는 의미다.
최근들어 풍성했던 머리카락이 스트레스로 다 빠져나갔는데 천만다행이었다. 사장은 직원에게 어서 가라고 일러둔 후에 사장실로 돌아갔다.
"오셨습니까."
사장실로 돌아가니 사장이 신뢰하는 비서, 매튜가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와서 대기하라고 일러뒀기에 여기 있는 것이다.
이에 사장은 그의 얼굴을 한 번 마주보고는 책상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푹신한 가죽 느낌이 등을 타고 전해졌다.
"후우..."
"일은 원만하게 끝났습니까?"
"그래. 이제 더이상 저 시위대 놈들이 소리지르는 일도, 귀족년놈들이 찾아올 일도 없을거야."
"다행입니다."
"다행이고 말고. 하마터면 우리 소중한 회사가 불탈 뻔했는데."
그냥 불타버리지. 매튜는 반쯤 진심으로 아까워했다.
직장인의 꿈 중 하나가 자신이 다니는 회사가 불타는 일이다. 하물며 매튜는 사장의 노예나 다름없는 신세라 더더욱 그런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마음 속으로만 그 생각을 하고 있지, 입 밖으로 꺼낸 적은 한 번도 없다. 이 좆 같은 직장 생활을 유지하는 이유가 바로 월급을 많이 주기 때문이다.
"아. 그러고보니 오늘 당직을 서는 직원이 누구였지?"
"엘리스입니다."
"그럼 오늘은 자네도 같이 서."
"...네?"
매튜는 눈을 깜빡거렸다. 갑작스러운 사장의 명령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사장은 초고를 매튜에게 보여주면서 제대로 된 설명을 꺼내기 시작했다.
"자네도 알겠지만 심부름꾼이 올 때까지 이 초고를 지켜야한다네. 늦어도 사흘 안에 온다고 했으니 그때까지 잘 지켜야해. 이게 없어지면 우리 회사는 끝장이야."
끝장났으면 좋겠다. 그래도 오늘은 목요일이니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매튜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속마음도 모르는지 사장은 진중한 얼굴로 초고를 들여다봤다. 오늘부로 이 초고가 진품이라는 소식이 각지에 퍼져나갈테니 서둘러 처리하는 게 급선무다.
다른 물건도 아니고 무려 제논 일대기 1권의 초고다.
국보로 지정되어야하는 물품인지라 출판사 따위로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다. 어쩌면 당장 내일 소식을 들은 고위 귀족이 찾아와 상상조차 못할 거금을 대가로 초고를 넘겨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에도 말했다시피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작가는 일종의 증거품으로 초고를 제시한거지 소유권을 완전히 넘기지 않았다.
다시 말해 초고를 마음대로 하는 순간 인생이 끝난다. 사장은 초고를 소중히 쓸어담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건 금고에 넣어야겠군.'
사장실에 있는 금고의 비밀번호는 사장만 알고 있다. 어차피 오늘 당직을 서는 매튜는 사장실에 위치한 금고만 지킬 예정이다.
도난당할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매튜는 그런 짓을 할 깜냥이 되지 못 할 뿐더러 비밀번호조차 모른다.
사장은 그나마 안심이 되는 기분에 콧김을 길게 내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누누이 당부하지만 금고는 반드시 지켜야하네. 이게 사라지면 나 뿐만이 아니라 우리 출판사 모가지가 날라간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
"알고 있습니다. 근데 어째서 회사 금고에 넣는 겁니까? 사장님이 직접 관리하지 않고."
"우리 집에는 마땅히 넣을 곳이 없어서 그렇다네. 무엇보다 회사 금고만큼 안전한 것도 없지. 저걸 봐."
사장이 한 쪽을 가리키며 매튜의 시선도 따라 움직였다. 벽과 일체로 이루어진 금고의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본래는 사장이 직접 관리하는 장부를 관리하는 곳이다. 겸사겸사 탈세와 뇌물을 통해 얻은 현금을 보관하는 곳이기도하고.
그러니 보안성 하나만큼은 믿을 수 있다. 비밀번호도 비밀번호지만 저런 걸 통째로 뜯어낼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매튜는 금고의 모습을 보자마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거라면 확실히 믿을 수 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희 둘만 있어도 될까요? 만약에 대비해서 모험가를 고용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걱정말게. 어차피 오늘 실행할 간 큰 놈은 없을테니까. 적어도 소식이 퍼지려면 최소 사흘은 있어야겠지. 그때라면 심부름꾼에게 초고를 넘겨줬을 시간이고."
"그렇군요."
"뭐, 이틀부터는 자네의 말대로 모험가를 고용하는 게 좋겠지. 오늘은 엘리스에게도 졸지 않도록 강조하게나."
그거야 문제없다. 매튜는 흔쾌히 사장의 지시를 받아들였다.
사장은 상황은 일단락된 듯하자 의자에 등을 기대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최근 며칠동안 한숨도 자지 못 하고 회사에서만 생활했더니 진이 다 빠져버렸다.
오늘만큼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가 편히 쉬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이제 끝이구나...'
그래. 오늘이 정말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사장님! 큰일났습니다!"
"뭐? 갑자기 또 왜? 귀족이라도 찾아왔나?"
"아닙니다! 오늘 출근하니 매튜와 엘리스가 쓰러져 있고 무엇보다...!"
-금고를 도난 당했습니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사장은 직원의 외침에 대략 5초동안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건가 싶어서.
그러나 이내 상황을 완전히 받아들인 뒤에는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더니 허겁지겁 사장실로 달려갔다. 사장실로 다급히 뛰어가는 도중에 당직을 서던 매튜와 한 직원이 실려나가는 걸 볼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으나 상황이 급박하다보니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사장은 자신의 사무실로 달려가는 중에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거쳤다.
'금고를 도난당했다고? 비밀번호를 뚫은 게 아니라?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이지?'
초고를 넣은 금고는 들고 가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무거운 편이며 애시당초 벽과 일체형이다.
하물며 비싼값을 치루고 마법 처리까지 한 금고여서 파괴하는 것조차 어렵다. 설사 파괴를 했더라도 소음이 커서 눈치채지 못할리가 없다.
그러할진데...
"...허."
털썩-
사장은 벽을 통째로 뜯어낸 듯한 금고의 모습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난 끝났다.'
또다른 폭풍이 몰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