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69화 (70/763)

< 69화 >

권력(權力)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무형의 힘이며 '사람'에게 있어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힘'이었으니 당연한 이야기다. 역사적으로도 언제나 힘을 갖고 있는 쪽이 권력도 강했으며, 반대로 힘이 약한 쪽은 고개를 숙이거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권력을 얻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주 간단한 방법은 상대방보다 힘이 강하면 된다.

힘이 강하다면 상대방 쪽에서 아무리 덤벼도 의미가 없으며 오히려 역으로 당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강한 자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자의던 타의던 따르게 되기 마련이다.

미네르바 제국의 1황녀, 리나도 그런 케이스다. 그녀는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권력이 막강한 편에 속했다.

감히 그 누가 최강대국의 공주를 건드릴 배짱이 있을까. 자살을 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없을거라 단언할 수 있다.

"... ..."

리나는 모든 일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멍하니 누워있었다. 불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침실인데도 불구하고 황금빛 머리카락이 빛을 대신했다.

평소였다면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겠으나 오늘은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리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최근 사흘동안 발생했던 사건들을 상기했다.

제논 일대기 10권에서 휴재 공지가 나온 이후, 미네르바 제국은 큰 혼란에 빠졌다. 전국 각지에서 해명을 요구하는 시위가 빗발쳤으며 수습을 하기 위해 윗쪽 사람들이 발빠르게 움직였다.

사실 시위 자체는 미네르바 제국 뿐만 아니라 국가를 가리지 않고 나타났으나 미네르바 제국 쪽이 더 심했다.

다른 나라들은 출판사가 미네르바 제국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국에게 책임을 돌렸으며, 평소 문화를 침탈하는 악명이 자자한 제국이었기에 비난은 더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어떻게든 진정시키기 위해서 리나가 나선 것이다. 정말로 아이작이 휴재를 한 이유가 자신과 레오르트 때문이라면, 사과를 해야만 사태를 무마시킬 수 있을테니까.

그 과정에서 아이작이 무슨 제안을 하던 간에 받아들일 심산이었다. 자그마치 제국의 황녀가 자존심을 모두 굽히면서까지 고개를 숙이는데 이상한 제안이 나와도 모두 받아들이려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단지 말을 놓자는, 리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제안을 내걸었다. 하다못해 엎드려 절을 하라는 제안이었다면 이해라도 할 수 있다.

'이해할 수 없어.'

리나는 태어나면서 황녀에 걸맞는 권력과 권위를 갖고 태어났다. 10대 초반이라는 어린 나이부터 정치계에 입문했으며 또래 중에는 누구보다 정치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권력의 맛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맛 본 사람은 없다. 거기다 한 번 권력을 맛 본 사람은 더 큰 권력을 가지기 위해 안달이다.

황궁에서 지낼 때도 그런 사람은 수도 없이 봐왔다. 어떻게든 자신에게 떨어지는 콩고물을 얻기 위해 알랑방귀를 뀌는 사람들로 넘쳐났으며, 은근슬쩍 권력을 깎아내리려 시도했다.

그런 사람들은 리나가 직접 처리했다. 옛날부터 어머니에게서 받았던 교육이 빛을 발휘한데다가 리나만의 뛰어난 관찰력으로 미리미리 감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성장 환경 때문에 '가면'을 쓸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마리와 큰 갈등을 빚게 되었다.

그때 마리도 다른 사람처럼 권력을 탐하기 위해 접근한 거라 착각했지만, 마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친구가 되기 위해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그녀의 기대를 배신했다.

'아이작 그 애는... 신기해.'

리나는 붉은 머리가 특징적인 소년, 아이작을 떠올렸다. 붉은 사자로 명성을 떨쳤던 호크의 아들이면서 제논 일대기의 작가라는, 아주 독특한 특징을 가진 소년을.

언듯 보면 무뚝뚝하거나 과묵해 보일 법한 표정이 인상적이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관찰력이 뛰어난 리나는 그가 다채로운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아이작은 이상하리만큼 권력을 껄그러워하는 중이다. 지난 번에 모임에서도 자신의 곁에만 있다면 위치를 공고히 알릴 수 있는데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평범하게 모임을 즐기고 싶다며, 그 부분(정치)과는 얽히기 싫다며 단호하게 의사를 피력했다. 부담스럽기보다는 정말로 평범하게 모임을 즐기고 싶어했다.

'정말로 권력을 싫어하는 걸까?'

지난 번 아이작과 니콜을 따로 부른 이유도 공생 또는 협력을 위해서다. 탈세까지 들먹이면서 압박을 한 건 잘못이지만 그걸 빌미로 아이작 또한 무기를 쥔 셈이었으니.

비록 정체를 밝히지 않아도 아이작은 문화계에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가졌고, 자신은 신분상으로 압도적인 권위를 가진 상태다.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룬다면 그야말로 무엇이던지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작은 그러지 않았다. 권위를 갖고 있어도 권력만큼은 행사하기 싫었는지 자기가 계획한대로 휴재를 때려버렸다. 덕분에 리나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아이작은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구나. 그에게 괜히 덤벼들었다간 오히려 자기자신이 큰일나겠구나.

작가의 말에서 휴재 공지를 알렸을 뿐인데 세계가 들썩거리 못해 광분했다. 리나는 권력이 아닌 권위로도 어떻게 하지 못할 대사건에 처음으로 당황했고, 그 다음으로 아이작이 꺼낸 본심에 두 번째로 당황했다.

'목적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글을 쓴다라...'

아이작은 제논 일대기를 그저 취미 생활로 집필한다고 스스로 말했다. 그건 분명히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그래서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만한 권력과 권위를 가진 사람이 목적없이 그저 취미 생활로 제논 일대기를...

'...아냐. 그래서 그런 권위를 가질 수 있던 거겠지.'

리나는 피식 웃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아이작을 이해하는 건 지금으로서는 힘들다.

애초에 권위의식과 동떨어진 마리조차 이해할 수 없는데 아이작이라고 다를 게 있을까. 둘이 서로 좋아 죽어하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이해하고 싶었다. 어째서 아이작이 권력을 껄그러워하는지. 그리고 자신과 말을 놓는다는 제안을 한 것인지.

스스로 뽐내지 않았음에도 전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사람. 리나는 아이작이라는 사람이 점점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접근한 거지만 오늘로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아이작의 능력과 배경이 아니라 사람 자체에 대해 알아보자고.

'사람을 보고 다가가는 건 처음인데... 가능하려나?'

여태까지 리나가 누군가에게 다가간 경우는 그 사람의 능력이나 잠재력을 보기 위해서다. 첫 강의 당시 아이작의 발표 이후 선듯 다가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고.

그러나 사람 자체를 보면서 접근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할 수 있어.'

비록 옆에 마리가 떡하니 버티고 있지만,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어 접근해야한다.

어쩌면 마리와 사이가 가까워져서 그때 일을 용서받을지도 모르지. 리나는 과거에 저질렀던 실수를 떠올리자 우울한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곧바로 다짐했다.

'아이작에게 접근할 때만큼은 권력을 내려놓자.'

권력을 싫어하니 자신도 내려놓아야하지 않을까. 하물며 말까지 놓았으니 서로 간의 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우선은...'

현재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중인 시위가 끝나야겠지.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이작은 황궁에서 대변인을 내세우면 여러모로 문제가 많을테니 자기가 직접 출판사에 편지를 부치겠다고 말했다. 중립을 원하는 아이작이었기에 시간은 걸리겠지만 확실한 방법이었다.

'잘 끝나겠지?'

리나는 부디 아이작이 잘 해결하기를 바라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아이작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미안하니까 나중에 선물이라도 하나 줘야겠다.'

*****

제논 일대기 10권이 발매된지 어언 보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던 시위는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날이 가면 갈수록 과격해졌다.

출판사 앞에 몰려든 인파가 더 늘어난 건 물론이고, 하루하루 찾아오는 귀족들이 어떻게 해달라며 애원하는 경우도 빈번해졌다.

이런 일은 비단 출판사 뿐만이 아니다. 대도시의 광장이라던지, 아니면 사람들이 자주 지나가는 길목이라던지 등등.

시위를 할 수 있는 곳이라면 팻말을 든 채 해명을 촉구하고 있다. 지도자들은 시위를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골머리를 앓았으나 제이로스 혁명 같은 사태가 다시 한 번 발발할까봐 선듯 나서질 못 하고 있다.

권력을 갖고 있다지만, 지금 함부로 사용하는 순간 깡그리 박살나버릴 수도 있다. 이탓에 조심스럽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 ..."

출판사 사장은 의자에 기대어 앉은 채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두 눈에는 초점이 사라져 있었으며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표정이 일품이다.

그동안 엄청 고생했는지 토실토실했던 볼살도 초췌해진 상태였다.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빨리 말하라고!]

[편지라도 보내주면 안 되냐?! 너희들이 작가님을 숨기고 있는거지! 어?! 말해!!]

사장의 귓가에 거친 항의 소리가 스멀스멀 흘러들어왔다. 출판사 입구 앞에서 진을 진 채 시위하고 있는 시위대의 목소리다.

시위대는 지치지도 않는지 보름동안 고래고래 소리까지 지르고 있다. 사장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만 이제는 그럴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위대가 아니라 그보다 더 꼬장이 심한 귀족들을 상대해야했으니. 다행히 그들도 일을 해야하는지라 당장은 물러갔다만 내일 또 상대해야할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 사장은 진저리가 나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그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신문을 힐긋 바라봤다.

[시민들의 목소리. 과연 작가에게 닿을 것인가?]

[출판사와 지도자들은 묵묵부답. 침묵만이 옳은 길이 아니다.]

[정말로 제논에게 이상이 발생한 건 아닐까 걱정이 한가득... 직접 찾아뵙겠다며 나섰다가 몰매를 맞아...]

[제이로스 혁명 같은 사태는 막아야... 미네르바 제국도 본인은 모르는 일이라 애원.]

개개인이 권력과 대항하기는 힘들지만 하나로 뭉쳐서 결집한다면 아무리 제국이라도 두손두발 들 수밖에 없었다. 사장은 제논 일대기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다행히 제이로스 혁명 같은 사태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것도 조만간일 것이다. 이때문에 곳곳에서 군대를 주둔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그리고 정말로 혁명이 발생한다면... 출판사는 끝장이다. 당장 바깥에 있는 시위대가 우르르 몰려들텐데 용병을 고용한다고한들 의미가 없다.

"아으으... 진짜..."

사장은 머리를 감싸며 괴로워했다. 편지를 보낸지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도 돌아오는 답장은 없었다.

정말로 이대로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자취를 감추는 건가 싶어 두려웠다. 마음 같아서는 짐을 꾸리고 야간 도주를 하고 싶었으나 이때까지 쌓아올린 회사가 아까워서 그러기도 어렵다.

'참자. 조금만 참으면 복이 올 거야.'

사장은 루미너스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이 상황이 어서 빨리 종결되기를. 그래야만 자신이 살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간절한 기도가 정말로 루미너스에게 닿기라도 한 것일까.

벌컥!

"사장님! 작가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뭐, 뭐?!"

비서이자 신뢰하고 있는 직원, 매튜가 노크도 없이 문을 다급히 열어젖히며 희소식을 전달했다.

평소였다면 크게 혼냈겠지만 상황이 상황인데다 그가 전해준 소식은 마른 하늘에 소나기나 다름없었다.

이에 사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매튜에게 외쳤다.

"저, 정말인가? 정말 제논이 맞아?"

"네! 심부름꾼이 전달했으니 분명 맞습니다!"

"어서 빨리 주게나!"

사장이 손을 뻗으며 재촉하자 매튜는 지체없이 그에게 전달했다. 뒤이어 사장은 편지 봉투를 대충 확인하고 서둘러 내용물부터 꺼냈다.

그리고 편지에 써져있는 내용을 확인했다. 필체를 보아하니 진짜로 제논 일대기의 저자가 맞다.

[안녕하세요.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제논 일대기의 저자, 제논이라고 합니다. 요즘 세상이 많이 시끄럽네요. 솔직히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좋았어!"

다 필요없다. 첫 문장 하나면 사태를 진정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다. 과연 시민들이 이 편지를 믿어줄까? 상황이 상황인만큼 거짓말이라 치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약 필체를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초고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아! 그리고 혹시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대비해서 작가님이 초고까지 보내주셨습니다! 1권의 초고입니다!"

"...으흐흑!"

사장은 진심으로 감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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